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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348년 1월 30일[1] (음력 1347년, 충목왕 3년 12월 22일) | ||
| 고려 경상도 진주 | |||
| 사망 | 1416년 12월 3일[2] (향년 68세) (음력 태종 16년 11월 6일) | ||
| 함길도 정평군 | |||
| 묘소 |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중간길 7 | ||
| 재임기간 | 제8대 영의정부사 | ||
| 1408년 3월 17일[3] ~ 1409년 9월 27일[4] (음력 태종 8년 2월 11일 ~ 태종 9년 8월 10일) | |||
| 제10대 영의정부사 | |||
| 1409년 11월 26일[5] ~ 1412년 10월 5일[6] (음력 태종 9년 10월 11일 ~ 태종 12년 8월 21일) | |||
| 제12대 영의정부사 | |||
| 1414년 5월 15일[7] ~ 1415년 7월 2일[8] (음력 태종 14년 4월 17일 ~ 태종 15년 5월 17일)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c00d45><colcolor=#fff> 봉호 |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 |
| 시호 | 문충(文忠) | ||
| 본관 | 진주 하씨[9] | ||
| 자 | 대림(大臨) | ||
| 호 | 호정(浩亭) | ||
| 학력 | 문과 급제 (1365년) | ||
| 부모 | 부친 - 하윤린(河允潾, 1321 ~ 1394) 모친 - 진주 강씨 강승유(姜承裕)의 딸(晋州 姜氏, ? ~ 1380) | ||
| 부인 |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성주 이씨 - 이인미(李仁美)[10]의 딸 | ||
| 자녀 | 슬하 1남 2녀 장남 - 하구(河久, 1380 ~ 1417) 장녀 - 남양 홍씨 홍섭(洪涉, ? ~ 1422)의 처 차녀 - 전의 이씨 이승간(李承幹)의 처 | }}}}}}}}} | |
1. 개요
하륜(河崙)[11]은 여말선초의 관료, 조선의 정승이다.다소 결과론적이지만 인간지사 새옹지마, 끝까지 버틴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는 말의 표본인 인생을 살았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분수를 알아 공신으로서 편안히 와석종신하고 주군의 묘정에 배향되는 등 수와 복을 누린 인물이다.
2. 생애
2.1. 고려 말, 기복이 심했던 관직 변천사
1347년(충목왕 3) 순흥부사를 지낸 아버지 하윤린(河允潾)과 어머니 진주 강씨[12] 사이의 아들로 태어나, 정도전, 정몽주 등 신진사대부들처럼 이색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360년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공민왕 14) 윤10월 흥안부원군 이인복, 첨서일직사사 이색이 주관한 을사방(乙巳榜)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하였다. 당시 윤소종이 장원 급제하고 하륜, 박상진(박상충의 동생), 맹희도(맹사성의 아버지) 등이 급제했다. 이후 여러 내직을 지내며 승승장구했지만 신돈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그 후에 하륜은 보문각 직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의 요직을 거치다가 최영의 요동 정벌에 반대하면서 양주로 추방되었고 위화도 회군 직후에는 이색 계열로 몰려 이성계 일파의 눈 밖에 나서 추방당했다가 복직되기도 했다
고려사 간신 열전 이인임 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388년 우왕 14년에 임견미, 염흥방 등을 처형하고 이인임을 경산부(京山府)에 안치(安置)하였으며 이인임의 아우 전 평리 이인민(仁敏)은 계림(鷄林)으로 추방하여 봉졸(烽卒)로 만들었다(이인민은 태종 대 정승 이직(조선)의 아버지이다. 또한 우현보와 함께 이방원의 좌주로서, 1383뇬 이방원이 과거 급제한 시험을 주관하였다)
여담으로, 맏형 이인복은 동생인 이인임과 이인민의 품성에 대해서 앞날을 걱정하고 우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인임의 서자인 대호군 이헌과, 이인임의 서사위 지신사 권집경(權執經), 이인임의 조카이자 이인민의 아들인 우대언 이직(李稷), 인척인 첨서 밀직 하륜(河崙), 이인임의 6촌 형제 이숭인(李崇仁), 밀직부사 박가흥(朴可興)은 곤장 치고 귀양 보냈으며 종손(從孫)인 삼사우사 이존성(存性; 이인임의 형 이인복의 손자)은 처형하였다고 한다. 당시 하륜은 이인임의 동생 이인미의 사위인 관계로 이인임과 인척 간이라 곤장을 맞은 셈이다.
실제 온건 개혁파이기도 했고 본인부터가 이인임의 조카사위[13]로서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14] 그래서 관직 변천사가 제법 파란만장하다. 이성계 세력과 정몽주 세력이 고려 조정에서 대립하던 공양왕 시절에는 전라도 순찰사로 나가 있었으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2.2. 조선 초기, 태종의 사이드킥
태조가 개경에서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기 시작하자 하륜은 풍수학설을 근거로 계룡산 천도를 무산시킨 후 지금의 서대문구 천연동, 홍제동, 대현동 근교인 무악 일대를 새 도읍지로 밀었으나 다른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하륜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술수하는 자들의 말 따위는 믿을 수 없다"라며 하륜의 주장을 대차게 거절했다.[15] 오늘날의 경복궁 일대로 조정의 대세가 모아져도 끝까지 무악을 고집했으나 결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6] 재주도 있고 출세욕과 성취욕도 강했던 하륜이었지만 당시에는 태조 정권에서 태조의 측근들인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이 태조의 비호 아래에서 권력을 지닌 상태였었고 사적으로도 한양 천도를 둘러싸고 벌였던 논쟁에서 정도전에게 거의 모욕을 당하다시피해서인지 기록으로는 알 수 없지만 정도전에 대해 원망을 품게 되었던 것 같다. 별거 아닌 말 같지만 '술수하는 자'라는 말은 유학자에게는 엄청난 모욕이다. 음양술수 같은 괴력난신이나 논하는 소인배라는 사이비와 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정도전과 하륜은 이색 휘하에서 같이 배운 동문이지만 나중에 스승 이색의 비문을 쓰다가 불충 시비로 경을 칠 뻔한 하륜과 달리 정도전은 조선 개국 이후 스승과 동문들을 가혹하게 대우했으니 하륜 입장에서는 정도전을 좋게 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태조 정권에서는 하륜이 스스로의 능력을 펼칠 기회도 없었고 조준, 남은, 정도전 등처럼 중앙에서 나라를 좌우하는 위치로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륜은 태조의 5남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와 친구였는데 민제를 통해서 이방원과 친교를 맺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방원의 사람이 되어 1차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끌어 종국에는 태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하륜이 이 과정에서 한 일은 또 다른 인재인 이숙번을 태종에게 추천하기도 했고 사병이 혁파되는 상황에서 이숙번의 병력을 1차 왕자의 난 때 동원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당시 이숙번은 지안산군사(안산 군수)였는데 정릉(오늘날 정동)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어 사역군을 이끌고 상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숙번의 사역군이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기동 호위 병력이 될 수 있었다. 민담집에 의하면 하륜과 이방원을 떼어 놓기 위해 정도전이 하륜을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보냈다. 이방원이 하륜을 불러 송별연을 가졌는데 하륜은 취한 척하고 이방원의 옷에 술을 쏟았다. 화가 난 이방원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하륜은 사과한다는 핑계를 대고 이방원을 쫓아가 독대하게 되었고 자리에서 이방원에게 결정적인 책략을 진언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하륜이 올린 것으로 보이는 진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륜이 일찍이 임금(태종 이방원)의 잠저[17]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묻자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쳐서 이 무리를 없애는 것 뿐입니다."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륜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태조 이성계)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쩌겠습니까?"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년) 11월 6일 하륜의 졸기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년) 11월 6일 하륜의 졸기
하륜이 이숙번을 추천하면서 그 병사를 동원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하여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있던 움직임을 피해 반란을 성공시킬 수 있었고 이후로도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정종이 즉위했을 때 정사공신 1등으로 진산군에 봉해졌고 마침내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야말로 태종의 킹메이커이자 사이드킥.
2.3. 조선의 불도저 재상
태종 즉위 후 그토록 바라던 재상의 반열에 오른 하륜은 왕권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제 아래 태종의 개혁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데 앞장섰다. 6조 직계제의 도입이나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는 정치ㆍ관제 개혁에 직접 관여했고 태종이 실시했던 군제 개혁, 호패법 시행, 조세 제도 정비 등에서도 계획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신문고 설치에도 일익을 담당했는데 신문고를 함부로 칠 우려가 있다는 반대 주장이나 실효성이 있냐는 비판이 제기되자 "이 제도는 백성이 신문고를 직접 치느냐 마느냐 하는 것보다 백성의 송사를 결단하는 관리들이 스스로 신중을 기하도록 하는 상징성에 더 의미가 있다"는 요지의 말로 비판들을 반박했다. 이외에도 저화(화폐)를 유통시키고자 태종에게 건의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지만 당시 상품 화폐 경제의 미발달로 실패로 끝났다.[18]조선 초기의 법률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이 있었지만, 정도전의 조선 경국전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저작물에 불과해서 공식 법전으로 사용되지는 못했고, 태조 6년 조준의 지휘로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을 새로 편찬하게 된다. 이를 속칭하여 처음 만들어졌다고 해서 '원육전' 또는 중심 인물인 조준의 이름을 따서 '조준육전'이라고도 한다. 태종 7년 이두 혼용이었던 이 원육전을 하륜이 주도해 순한문화하며 논란이 되던 부분들을 다듬었는데 같은 맥락에서 '속육전' 또는 '하륜육전'이라고 부른다. 속육전은 세종 시기에 이직과 황희에 의해 다시 수정되었고 경국대전의 바탕으로서 조선시대 법률 체계의 원형으로 자리잡는다. 태종의 뜻에 따라 <고려사>와 <동국사략> 등의 역사서 편찬도 감독했으며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의 편찬 주임이기도 했다. 다른 신하들은 왕자의 난 등 관련자가 살아 있는 사람이 많아서 이르다고 반박했지만 오히려 하륜은 "노성한 신하가 살아있을 때 마땅히 기록해야 되는 거 아니냐"며 얼굴을 붉혀가면서까지 실록 편찬을 실행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이듯이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정치 스타일은 전형적인 불도저 타입으로 일 처리가 빠르고 거침없었다고 한다. 일 처리 방식은 태종의 장인이자 친구인 민제까지 화나게 하여 민제가 "저러다가 정도전 꼴나지"라고 디스하게 된다. 이에 하륜은 이렇게 받아쳤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오. 옛사람들도 바른 도리를 가지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행이 죽음을 면한 사람도 있소. 후인들이 스스로 공론이 있을 것이니, 내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이후 민씨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하륜은 천수를 누렸다. 태종을 섬기며 정승 반열에도 올랐고 능력과 이상을 마음껏 펼쳤다. 태조 때 이루지 못한 무악 천도까지 재추진했으나 이것만은 결국 이루지 못했다. 여론도 무악이 나쁘지 않다는 분위기고 태종이 무악을 재답사하는 단계까지는 갔으나, 답사 며칠 후 태종은 "한양·개성·무악 셋을 놓고 점을 쳐서 결정하자"라고 하며 종묘에 들어가 돈으로 점을 쳐 봤는데 무악이 한양보다 더 낮게 나오고 만 것이다.2번이나 운하 건설을 주장한 적이 있다.[19] 본래 삼남[20]에서 세금으로 걷혀 올라오는 곡식을 실은 조운선은 당시에는 섬이 아니었던 안면곶 앞바다를 지나 태안 반도를 돌아 올라가는 항로를 거쳐갔는데 안면곶과 태안 안흥항 앞바다, 강화도 일대의 물살이 거셌기 때문에 배 수십 척이 한꺼번에 침몰하면서 손실되거나 바닷물에 젖어 못 쓰게 되는 곡식들의 피해량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때문에 고려 시대 때부터 태안 반도의 좁은 지협을 굴착해 만과 만 사이로 항로를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나 도중에 중지된 것을 하륜이 이때 완공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1412년 충청도 안흥량에 운하를 팔 것을 건의했는데 태종이 사람을 보내 주변을 확인하자 다녀온 이들은 운하를 파는 것이 어렵겠다고 보고했다. 하륜은 5,000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운하 건설을 강행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고 1413년 한강과 면해 있는 용산 포구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파자고 또 주장했지만 1412년 운하 건설 시도가 발린 것을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태종이 나서서 의견을 기각했다.[21]
서얼금고법 제정에 크게 기여했는데, 하륜은 이자춘의 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하지 말자고 주장했고 재혼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참고로 하륜과 함께 무인정사에 가담하여 태종을 왕으로 만든 이숙번도 재가녀의 아들이고 태종을 지지한 의안대군 이화, 완산부원군 이천우, 완원부원군 이양우도 첩의 자손인데 쿠데타 동지들에게 불이익을 주자는 저런 주장을 당당하게 한 것이다. 무모하다고 봐야 할지 아니면 용기가 가상하다고 봐야 할지. 당연히 의안대군, 완산부원군, 완원부원군이 하륜에게 눈총을 주었으나 태종이 비호해 주었다. 다만 그래도 태종은 왕족에게는 적용대상으로 보는 게 언짢았는지 결국 왕족에게는 예외적으로 서출이라 해도 왕족 취급과 계승권은 주어졌다.
2.4. 탐욕스러운 호정대감
태종 휘하에서 신생 국가 조선의 확립을 주도했던 인물이고 행정을 처리하거나 정책을 입안하거나 정치적 판세를 짜는 부문에서는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큰 단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권문세족 시절의 버릇을 못 고쳤는지 물욕이 강한 인물이었다는 것. 일례로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도성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불편하다는 이유로 능 100보까지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태종이 이를 받아들였는데 하륜은 사위들까지 동원해서 가장 먼저 노른자위 땅들을 날름 집어삼켰다.[22] 물론 하륜은 소유욕이 강했어도 어그로는 끌지 않을 각을 보는 능력은 탁월해서 고려 시절 몸담았던 권문세족 파당이 일삼던 소작민 수탈이나 사유지 강탈 같은 것은 태종이 추구하던 중앙집권에 정면으로 반하는 지라 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금품 수수와 부동산 개발로 재산을 모았다.예를 들면 친인척들과 함께 백성을 부역 명목으로 동원하여 국유지를 개간해 전답을 조성한 후 그냥 꿀꺽했다가 들켜서 탄핵당하기도 했고 고려 시절 이인임 일파가 하던 뇌물에도 손을 댔는지 노비들에게까지 벼슬을 팔아먹는다는 욕도 먹었다.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을 받자 일도 제대로 모르는 관리들을 추천했다가 태종에게 질책당하기도 했다. 대간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지만, 그때마다 태종이 극구 하륜을 비호해 줘서 무사히 넘어갔다.
한편 사상적 측면에선 하륜 본인이 이토록 탐욕스러웠음에도 이(理)와 인간의 본성을 하나라고 보았으며 인간의 본성은 선량하다고 생각했다. 저서 <호정집>에서 인간의 본성은 인의예지신이라고 했는데 하륜의 주장은 후대의 이기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2.5. 말년
이처럼 여러모로 머리가 비상하고 처세술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말년에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판단력이 떨어지고 말실수를 자주 하여 태종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로 정치력이 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처리할 때는 가볍게 벌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그건 옳지 못하다"는 태종의 지적에 기겁했던 적이 있고 이후에도 정신을 못 차려 "세자도 아니고 겨우 왕자를 죽이려 한거니까 죄가 크지 않다"고 했다가 태종이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말고 생각없이 말하지 마라”고 하자,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꼬리를 내린 적도 있는데 정말 하륜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목이 날아갔을 대역죄다(1398년 정안군 이방원이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주살할 때 내세운 가장 큰 죄목이 바로 '종친 모해 시도죄'였다) 선위 파동 때는 민제를 찾아가 "전하의 뜻이 정 그렇다면 선위하시라 합시다"라고 했다가 들킨 적도 있다. 스승인 이색의 비문을 지을 때 조선의 건국 과정을 부정적으로 쓴 것[23]이 들통이 나서 이번에도 목이 달아날 뻔했지만, 태종은 끝내 하륜을 지켜 주었다. 이숭인은 이방원의 국자시(과거 본시험 이전의 예비 시험 단계)에 급제할 당시 시험관을 맡았던 좌주이기도 하다. 영의정을 지냈던 이직이 안치되는 일이 있자, 하륜이 대놓고 태종의 면전에서 말 그대로 피식 웃었다. 이직이 외방에 보내질 죄가 어딨느냐고 디스를 하자, 태종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24]이러한 추문에도 친구 민제의 자식들이나 이숙번, 이거이 등과는 달리 공신으로서 부귀영화와 천수를 모두 누렸다. 고금의 예를 보면 보통 개국공신은 장자방처럼 아예 정치와 부귀영화에서 손을 떼지 않는 이상은 토사구팽 되는 숙명을 피하기 어려운 법인데 하륜은 토사구팽을 피함을 물론, 부귀영화까지 누렸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모사 라이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1416년쯤 되면 앞서 말한 대로 늙어서 정치 감각도 떨어지고 몸도 안 좋아서 냉큼 은퇴하여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부원군 작위를 받고 함길도에 있는 조선 왕가 시조들의 무덤을 살피러 다닌다. 그러다가 거기서 향년 70세로 죽었다. 하륜의 부고를 들은 태종은 몹시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하지 않고 7일 동안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으며, 직접 애절한 조사를 지어 애도했다. 묘는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에 있는데 하륜의 묘 뿐만 아니라 하륜의 부친과 조부의 묘도 있다. 이 묘들을 '오방리 팔각형 고분군'이라 하는데 특이하게도 봉분이 8각형으로 되어 있는 형태라서 여말선초의 장례나 묘지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묘들이다.
변방의 무장에서 '화가위국'하여 일국의 군주가 된 이성계- 참모 정도전, 조준과의 관계처럼, 세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낮았던 다섯째 왕자 이방원-하륜, 이숙번은 서로 잘 대칭되는 한 쌍이다. 하지만 정도전과 이숙번은 분수를 지키지 못했는지,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인지 실각하고... 이숙번은 그나마 명예 회복조차 안 되었다(정도전은 구한말 흥선대원군 집권기 '문헌'이라는 시호를 받으며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상당히 재평가, 재조명됨) 조준(조준이 하륜보다 1살 많음)과 하륜은 무사하게 와석종신하여 천수를 누리고 모두 각기 주군의 묘정에 배향된 점까지 똑같다.
3. 평가
<조선왕조실록>은 하륜에 대해 "천성적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며 말수가 적어 평생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서는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해서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태종의 후계자인 세종은 하륜을 그렇게 좋게 보지 않았다.[25] 세종은 하륜에 대해 이렇게 평을 내리고 있다. 요약하자면 '아버지가 단수가 높으셔서 하륜을 데리고 일하셨지 나였으면 진작에 박살 냈다' 정도의 의미다.[26][27]"하륜은 학문이 해박하고 정사에 재주가 있어 재상으로서의 체모는 있지만, 청렴결백하지 못하고 일을 아뢸 때도 여염의 청탁까지 시간을 끌며 두루 말하곤 했다. 내 생각으로는 보전하기 어려울 것인데도 태종께서는 능히 보전하시었다."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년) 12월 7일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년) 12월 7일
임용한은 저서 <조선국왕 이야기>에서 하륜은 선을 지키면서 욕심을 부렸다고 평가했다. 물론 하륜이 절제력이 뛰어나서 그런 건 아니고 당시 관료에게 용인되는 수준이었거나 더 욕심을 부리면 목이 달아날 수준까지는 넘지 않을 정도까지만 해먹었다는 의미다. 하륜은 살면서 온갖 스캔들에 휘말렸지만, 주로 재물을 해쳐먹은 일과 늙어서 태종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실언 하는 일을 제외하면, 혈연으로 연결되어 관련성을 피할 길이 없었던 민씨 형제나, 세자와 어울리고 뇌물을 바친 구종수 형제에게 얽히고 양녕대군 면전에서 태종의 정책을 비판한 이숙번과 달리 태종이 극도로 혐오하던 외척 짓거리, 귀족 짓거리와는 끝까지 담을 쌓았다. 비록 실언은 했어도 태종이 숙청한 외척과 공신들의 주 레퍼토리이던 '네가 누구 덕에 보위에 올랐느냐?' 같은 발언을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다른 공신들과 달리 오래도록 태종의 정치적 실무를 주도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펼쳤다. 말년에 몇 번 태종의 심기를 건드리기는 했지만, 역린을 자극하는 것은 끝까지 피하는 데 성공했다. 태종이 핀잔을 주는 선에서 끝냈던 이유도 상술한 대로 탐욕은 많아도 왕권에 위협은 가하지 않았고 태조-정종-태종 3대를 보필하며 세운 공훈이 많은 원로대신인 데다 태종보다 나이가 20살이나 더 많아서 세자가 왕위에 오를 때쯤이면 이미 죽거나 은퇴했을 테니, 굳이 일부러 숙청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륜은 일흔이 넘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함경도에서 조선 왕조 시조들의 무덤 살피는 일을 하다가 그 해에 사망했다.
4. 창작물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1부 추동궁마마에서는 배우 신충식[28]이 연기했다. '꾀주머니'라는 평이 맞도록 탐욕스럽고 온갖 음모를 꾸미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된 정도전의 이미지를 모두 하륜에게 옮긴 냄새가 난다.
이성계 즉위 이전 시점, 고려 말.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타치기 얼마 전 시점에서 이방원(이정길 배우 역)과 처음 만나며, 방원에게 자중자애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임혁[29]이 연기했다. 고려 말 여러 문신들 가운데 1명으로 극에서 등장하며 여러 정쟁에 휘말려 귀양지에서 돌아온 후에 정몽주와 함께 이색을 찾아뵙고 절한다.[30] 그 자리에서 하륜은 민심은 이미 고려를 떠났다고 하며 자신은 이제부터 순리에 따르겠다고 말한다. 이후 친한 사이인 민제의 집을 찾아 포부를 밝히고 이성계의 생년일시를 민제에게 물어본 후 사주를 점치는데 천하가 이성계의 손에 달렸다고 이야기한다. 어느 시점부터 이성계를 돕는 역할로 슬슬 갈아타기 시작했다.[31] 이성계가 명나라로 떠날 세자 왕석을 배웅하기 위해 해주 방면으로 떠나갈때, 몸 성히 잘 다녀오시라고 개인적으로 인사를 드리기도 한다.
1392년 7월 밤 중에 수창궁에서 행해진 이성계 즉위식에 배극렴, 이지란, 정도전, 남은, 류만수, 조준, 여러 왕실 지친 등과 함께 정복을 갖추어 입고 참셕한다. 이방원의 장인 어른인 민제와 각별한 관계로, 임지인 경기도로 떠나가기 전에 정안군 이방원을 만나 큰 절을 올리며 장차 보위에 오르실 분이라고 하며 '전하'라고 부른다. 이 자리에는 이방원,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함께 있었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부인 민씨(후일의 원경왕후)는 더욱 정치적 야망을 불태운다. 조선 초기 도읍을 옮기는 과정에서의 토론, 의견 교환 등의 이야기에서 무학 대사와 함께 등장하며, 이후 개경 내직으로 들어온 후 이방원을 보좌하여 왕위에 올리는 지략가의 이미지가 매우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신덕왕후 강씨를 일컬어 '연화부수'형이라고 하여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그리 오래 가시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 이후, 정도전 측이 밀어붙이는 진법 훈련은 더욱 가열되고 이에 대한 불만도 커진다. 하륜은 이방원에게 '아직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십시오. 저들이 저 스스로 조바심이 나서 먼저 칼을 빼들때 그때가 기회이옵니다. 그때 일망타진하소서' 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가 풍을 맞아 앓아누울 무렵 이방원이 생살부를 만들어 하륜에게 보여준다. 당연히 정도전, 남은, 심효생, 류만수, 박위 등의 이름이 있었고.. 하륜은 거기에 세자 방석과 추가하여 방번, 이제까지 주살해야 한다고 극력 주장한다. 마침내 그들의 이름까지 포함된 생살부가 이숙번에게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하륜도 한편으로는 악연이자 정적 관계인 정도전을 한편으로는 존경하는 것으로 그려진다.[32] 드라마에서 정도전이 한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데에 공을 세운 참모라면 하륜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똘똘하고 충직한 참모 정도의 이미지가 강하다.[33]
그 외에도 풍수지리와 역학에 능하고 천기를 읽을 줄 알아 이성계와 이방원이 왕이 될 것을 읽어내었고 여흥 민씨 가문의 몰락과 자신이 죽을 날도 미리 알고 있었다. 킹메이커이자 지략가의 포스를 뿜어내지만 실제 하륜이 가지고 있었던 탐욕스럽거나 경솔한 면모는 나타나지 않는데 오히려 강직하고 호탕한 인물로 묘사된다.[34]
25년 정도 후에 같은 채널, 같은 시간 대에 방송된 태종 이방원(드라마)에서는 하륜이 민제와 처음에는 당연히 절친하다가, 태종의 민무구 형제 숙청 무렵에는 태종의 입장을 반영하여 앞장서는 것으로 묘사된 것과 전혀 다르게, '용의 눈물' 드라마에서 하륜은 시종일관 민제를 존경하고 서로 친하게 지내며 의리를 지킨다(민제는 하륜보다 8살 연상임) 태종 집권기 초 태종이 한양으로 재천도 후, 병으로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집에서 병구완만 하는 민제를 찾아가 위문하며, 특히 민무구-민무질 형제 국문 당시 하륜은 조정에서 배제되고 강경파인 이화(태종의 이복 숙부)가 영의정부사를 맡았다. 민무구 형제가 투옥에 이어 귀양가자 하륜은 자신이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해 송구하다고 민제를 찾아 위로한다.
후일 다시 영의정부사로 복귀하지만... 민무구 형제의 운명을 바꾸기는 역부족이었다. 이숙번이 찾아와, 민무구 형제의 월권과 전횡을 경계했을 뿐 그들의 파멸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고 변명 비슷한 말을 하자, 이숙번에게 '조금도 괴로워하지 말게, 곧 자네에게도 일어날 일이니 말일세' 라고 촌철살인의 매서운 충고를 해 준다. 결국 1410년 삼정승인 하륜, 성석린, 조영무가 소환되어 태종 어전 앞에 이르고 그 자리에서 태종은 인사 개편안을 이야기한 다음 민무구 형제에게 자진할 것을 명하겠다고 선언한다. 하륜은 어떻게든 말려보려는 듯이 절박한 어투로 '하오나~ 상감마마!' 라고 외치지만 태종은, 하륜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다 안다는 듯 손을 들어 막고 하륜이 계속 말하는 것을 제지한다.드라마 상에서 이방원이 책사인 하륜이 하려는 말을 듣지 않는 모습은 거의 이 장면이 유일하다. 결국 제주도에서 민무구 형제는 자결한다.
그 후 태종 임금이, 계모 신덕왕후 릉 주변의 돌 건조물들을 허물어 청계천 돌다리로 쓰라고 하자 경악하며 반대하지만 태종은 밀어붙인다. 이 일에는 상왕 정종과 정안왕후 내외도 크게 놀라 경악했다. 또한 태종이 자신의 재위기에 태조 실록을 꼭 완성하라고 밀어붙이자 하륜은 다소 당혹스러워 한다. 나중에 하륜이 이숙번과 함께 사저 사랑방에 있을 때, 세자 제(후일의 양녕대군)가 갑자기 찾아와서... 하륜이, 자신의 이해 관계가 걸려있고 자신이 참여한 사건들이 많이 기록된 태조 실록 편찬을 맡았으며 언급하며 은근히 추궁하자, 그래도 누군가는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고 담담히 말한다. 세자는 이숙번과 하륜에게, 나중에 자신이 만약에라도 보위에 오르면(드라마 상에서 양녕은 자신이 폐세자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제일 먼저 두 분의 목부터 칠지 모른다고 반농담조로 이야기한다.
세상을 떠날 때에도 '역사는 이 하륜이를 어찌 평가하겠는가'하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다가 '인생무상, 제행무상'이라는 글을 남기고 걸어나가다가 그대로 쓰러져 사망하는데 이때의 모습도 폭풍간지. 변계량이 마지막에 하륜과 함께 있다가 먼저 퇴청하는데 이상한 예감에 다시 들어와 보니 하륜이 쓰러져 있어서 급히 부축하고 어의를 부르지만... 동일 회차인 147회에서 이숙번은 태종에 의해 온건히 숙청되고, 하륜 본인도 사망하면서(이강식 성우가 해설하는 하륜의 일대기에 대한 설명-졸기-도 나옴) 태종의 양쪽 날개 같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퇴장하는 것이 백미.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배우 최종원[35]이 연기했다. 처음 등장시에는 조그마한 떡을 먹고 다른 대신들에게도 권하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얼마 안 가 자신을 찍어내려고 작정한 박은을 연거푸 엿먹이며[36] 노회한 정객의 포스를 드러낸다. 오래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태종의 어전에서 나와 물러나는 23회의 퇴청 씬은 호평이 많았다. <용의 눈물>의 하륜과 실제 역사의 하륜을 섞어놓은듯한 모습으로 태종을 위해 셀프 탄핵을 시전한 하륜에게 던지는 "그렇게 충심이 깊은 놈이 비리를 그 따위로 저질렀냐?"는 태종의 질문이 이를 아주 잘 나타낸다. 이에 대한 하륜의 대답은 "전하를 왕위에 올려놓은 대가로 그 정도는 챙겨도 된다고 생각했나봅니다." 셀프 탄핵 후 궁을 나설 때까지도 "토끼를 사냥(하륜의 제거)하면 남은 것은 사냥개를 삶는 것(박은의 숙청)"이라며 비꼰다.[37] 그리고 태종은 하륜이 예견한 대로 의정부서사제를 혁파한 뒤 육조직계제를 실시하면서 이조판서였던 박은을 좌의정으로 승진시킨다. 물론 말이 승진이지 실권 없는 명예직에 불과한지라 박은은 당연히 경악한다.[38]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배우 이광기가 연기했다. 정도전[39]과는 애증 관계의 사형-사제 관계로 나온다. 정몽주가 죽고 본격적으로 이방원을 점찍기 전까지 이성계를 제대로 돕는 면이 없다. 실제 역사에 부합하게 묘사된 하륜이 "소생 하륜입니다"라는 대사로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륜(정도전) 문서 참조.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조희봉[40]이 연기했다. 22회에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책략으로 이성계와 정도전을 견제하며 첫 등장한다. 이인겸이 죽었다는 소식이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정도전과 그의 일파들의 관심을 죽은 이인겸에게 쏠리도록 만들고 이인겸의 이름을 이용해 창왕을 옹립하는 데 성공한다. 재밌는 것은 훗날 하륜의 도움을 받아 왕자의 난으로 끝내 왕의 자리에 오르는 이방원이 첫 대면에서는 하륜에게 제대로 농락을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인데 이방원과 하륜의 첫 만남은 악연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22회에서 보여줬던 지략이 무색하게 24회에서 이방원에게 털리고 정도전에게 털린다. 역대 하륜 중 개그 캐릭터적인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하륜(용비어천가 시리즈) 문서 참조.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남성진[41]이 연기했다. 하륜(태종 이방원) 문서 참조.
5. 여담
- 고려 말에는 권문세족, 조선 초에는 공신으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태종 즉위에 큰 공이 있어 2번 공신에 올랐다. 일흔살까지 천수를 누리며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신하로서 충목왕 대부터 태종 대까지 아홉 왕의 시대를 살았으며 공민왕부터 태종까지 7명의 왕을 섬긴 인물이다. 정몽주보다는 10살, 정도전보다는 5살 어리나 이방원보다는 20살 많다.
-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하륜은 죽기 직전에 꿈에서 태조가 몹시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나서 병이 나 죽었다고 한다. 사실 태조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자기 조상의 묘를 돌아보러 왔으니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 기본적으로 유학자였지만 천문이나 의술, 풍수, 지리 등의 잡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런 부분에도 전문가 수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며 특히 사람의 관상도 볼 줄 알았다고 한다. 용의 눈물에서 묘사된 하륜은 이런 면모를 강조하여 묘사된 셈이다.
- 용재총화에 의하면 조선시대판 인생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 승경도 놀이를 고안한 사람이 바로 하륜이라고 한다. 후대 사람들에게 인생과 처세술에 통달한 인물로 여겨진 하륜이 인생게임을 만들었다는 건 굉장히 절묘한 부분이다.[42]
- 왕족이던 태종의 종친 이백온[43]이 하륜의 첩실을 탐내 하륜이 죽은 지 얼마 안 돼 부하를 보내 보쌈하려다가 걸리자 그동안 이백온의 온갖 더러운 짓을 눈감아주던[44] 태종도 더는 봐주지 않고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유배보냈다.#
-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바로는 태종의 목숨을 두 차례나 구한 은인이다. 태종이 아버지를 달래서 함흥에서부터 오게끔 하였는데 하륜은 아직 태조의 앙금이 다 가라앉지 않은 것을 간파하여 태종에게 그에 대해 대비할 것을 일러주었고 그것이 적중하여 태종의 목숨을 구원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 때문인지 그간 여러 매체에서 하륜이 조사의의 난 당시 태종 옆에서 그를 돕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실록에 따르면 사실 하륜은 당시 명나라에서 영락제가 즉위하여 이를 축하하기 위한 사신으로 조사의의 난이 발생하기 전인 태종 2년 10월 15일에 출발해서 태종 3년 3월 17일에 조선에 돌아왔다고 한다. #1, #2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니, 태종이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설치하였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었다. 양전이 서로 만나자, 태조가 바라보고 노한 얼굴빛으로 동궁에 백우전을 힘껏 당겨서 쏘았다. 태종이 급히 차일 기둥 뒤에 몸을 가려 화살이 기둥에 맞았다. 태조가 웃으면서 노기를 풀고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고 옥새를 주면서 이르기를 "네가 갖고 싶어하는 것이 이것이니 이제 가지고 가라." 하였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마침내 잔치를 열고 태종이 잔을 받들어 헌수하려 할 때 하륜 등이 몰래 아뢰기를 "친히 하지 말고 내시에게 주어 드리시오." 하므로 태종이 또 그 말대로 하여 내시가 잔을 올렸다. 태조가 다 마시고 웃으면서 소매 속에서 쇠방망이를 꺼내 놓으면서 이르기를 "모두가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였다.<연려실기술> 1권 <태조조 고사본말>, 축수편
- 하륜과 비슷한 행보를 걸었던 인물로는 황희나 한명회 등이 있다. 모두 능력과 행정은 뛰어났지만 탐욕이 있었고 실질적 2인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45][46][47]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에 위치한 명승지 하조대는 과거에 하륜과 조준이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만화가 마사토끼는 하륜의 기묘한 행적을 베이스로 한 단편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
- 진주 하씨 문충공파의 시조이다. 진주 하씨 11대손[48]이며 고려 현종 때의 문신 및 무장이자 여요전쟁에서 활약했던 하공진[49]의 자손이다. 할아버지는 식목녹사에 추증된 하시원, 할머니는 정균의 딸 증 정경부인 진주 정씨이고 아버지는 순흥부사 증 진양부원군 하윤린, 어머니는 증 진한국대부인 진주 강씨이다. 하륜은 이인임의 조카사위로, 이인미의 딸 진한국대부인 성주 이씨와 결혼했다. 아들 1명, 딸 2명을 얻었는데 장남은 좌군도총제 하구이고 첫째 사위는 홍섭, 둘째 사위는 이승간이다. 이직과도 사촌동서지간이며 이직이 민무휼의 장인으로 친구인 민제의 집안과도 인척으로 엮어지며 민무휼이 심온의 사돈으로 심온과도 간접적으로 인척으로 엮어진다.
- 심지어 정적 가운데 한 명인 심효생과도 인척 관계가 있다. 심효생의 부인 정경 옹주 전주 류씨는 류습(柳濕)의 딸이다. 류습의 아들들 가운데 류극서(柳克恕 ; ?-1388)이, 하윤린(하륜의 아버지)의 사위이다. 정리하면 하륜의 매부의 매부가 심효생이다.
6. 관련 문서
7. 하륜 묘지명
하륜과 같은 시기에 과거 시험 장원 급제한 윤소종의 아들 윤회(조선)(尹淮)가 지은 하륜 묘지명이 전한다.동문선 제129권 / 묘지명(墓誌銘)
유명조선국 분충장의 동덕정사 좌명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진산부원군 수문전대제학 영경연 춘추관서 운관사 세자사 시문충 하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晉山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經筵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諡文忠河公墓誌銘 幷序)
하씨(河氏)의 조상은 진주(晉州)에서 나와 한 고을의 명망 있는 집안이 되었다. 좌사낭중(左司郞中) 휘 공진(拱辰)으로부터 고려에 벼슬하여 현왕조(顯王朝)에 공을 세워 오랑캐를 평화롭게 하고 적을 물리쳐 일대의 명신이 되었다. 그 뒤에 탁회(卓回)라는 분은 고왕조(高王朝)에 벼슬하여 사문박사(四門博士)가 되었고, 박사로부터 사대(四代)가 잇달아 과거에 올라 대대로 명망 있는 사람이 있어 경사를 심고 선행을 쌓아서 공에 이르러 가문이 더욱 번창하였다.
공의 휘는 륜(崙)이요, 자는 대림(大臨)이다. 증조는 휘 식(湜)이니, 박사의 5대손으로, 징사랑 선관서승(徵仕郞膳官署丞) 증 순충보조공신 보국숭록대부 판사평부사 진강군(贈純忠輔祚功臣輔國崇祿大夫判司平府事晉康君)이요, 조부 휘 시원(恃源)은 식목녹사(式目錄事) 증 순충적덕병의 보조공신(贈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정승 판병조사 진강부원군(判兵曺事晉康府院君)이요, 아버지 윤린(允潾)은 봉익대부 순흥원사(順興院使) 증 충근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진양부원군(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賛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이고, 어머니 강씨(姜氏)는 증 진한국대부인(贈辰韓國大夫人)이니, 검교예빈경 증 숭록대부 의정부찬성사 판호조사 휘 승우(承祐)의 딸이며 모두 공의 귀함으로 증직을 얻었던 것이었다. 지정(至正) 정해년(1347년) 봄에 강씨가 길몽을 꾸고 태기가 있어 그 해 12월 기축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우뚝이 보통 아이와 같지 않고 10세에 배우기 시작하여 전수받으면 대번에 외웠다. 나이 14세에 경자년 국자감 고시에 합격하였으니, 행촌(杏村) 이 대부(李大夫)가 바로 그때 시관이었고, 19세에 을사년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초은(樵隱) 이문충공(李文忠公)과 목은(牧隱) 이문정공이 그 좌주였다. 문충공이 한 번 보고는 큰 그릇으로 여겨 곧 그 아우 예의판서(禮儀判書) 인미(仁美)의 딸로서 아내를 삼았다. 그 때 두 공이 사문(斯文)의 종주가 되어 학사(學士) 대부(大夫)가 모두 그 문하에서 나오게 되었다. 공이 사우(師友) 사이에 주선하면서 강론을 연마하여 학문이 날로 전진되었다.
정미년에 춘추관에 뽑혀서 겸열(檢閱)과 공봉(供奉)이 되었다. 홍무(洪武) 원년 무신에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고시하고, 기유년에 수사(收司)가 양전한 것을 조사하면서 신돈(辛旽)의 문객으로 수사 부사(收司副使)로 있는 자를 탄핵하였다가 신돈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신해년에 신돈이 처형된 뒤에 지영주안렴사(知榮州按廉使)로 기용되자 김주(金湊)가 그 정사와 행실이 제일이라고 아뢰었다. 임자년에 고공좌랑(考功佐郞)으로 불러 제수하고, 계축년에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써 교주 강릉도 찰방(交州江陵道察訪)이 되었고, 갑인년에 제릉서령(諸陵署令)이 되고, 을묘년에 사헌부 지평과 전리 정랑(典理正郞)이 되었다. 병진년에 전교부령 지제교에 올랐다가, 전의부령(典儀府令)으로 옮겼고, 정사년에 전법총랑 보문각 직제학에 올랐으나, 전례대로 지제교를 맡았다. 이로부터 제직(除職)이 되었으나, 모두 관직(館職)을 띄었고, 또 판도총랑으로 교주도안렴(交州道按廉)이 되었다. 무오년 전리총랑이 되고 기미년에 전교령 성균대사성에 오르고, 경신년 9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신유년에 기복(起復)되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으나, 상을 끝낼 수 있도록 청하니, 허락하였다.
임술년에 삼복이 끝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계해년에 우대언(右代言)에 옮기고 얼마 안 되어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고, 갑자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을축년에 첨서(僉書)에 오르고, 그 가을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국자전부(國子典簿) 주탁(周倬) 등을 보내니, 공이 서북면(西北面)에 영접하였으며, 돌아갈때에 공이 사표(謝表)를 받들고 함께 가니, 주탁 등이 매우 예우하였다.
정묘년에 동지(同知)에 오르고, 무진년 봄에 무신 최영(崔塋)이 군대를 일으켜 요양(遼陽)을 범하려 할 때, 공이 힘껏 불가함을 진술하였더니, 최영이 노하여 양주(襄州)로 추방하였다. 여름에 최영이 패하자, 공이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을사년 봄에 다시 동지(同知)가 되었고, 가을에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이란 자가 일본에서 오니 공이 인척(姻戚)으로 평소에 왕환의 얼굴을 알았기에 그가 왕환이 아님을 말하였다가 광주(光州)에 귀양갔다. 경오년 봄에 울주(蔚州)에 옮겼다가 여름에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모든 귀양살이하던 사람을 청주에 모아 둘 적에 공이 사면되어 진주로 돌아왔다. 신미년 여름에 전라도 도관찰사에 기용되었고, 임신년 여름에 돌아오니 우리 태조가 이미 임금이 되었다. 계유년 가을에 다시 공을 기용하여 경기좌도 관찰사가 되었었다. 공이 비로소 민호(民戶)의 농토 개간의 정도 여부에 따라 부역을 정하니 토호들은 싫어하였으나, 백성들은 그 공평함에 복종하였다. 여러 도가 모두 본받아 드디어 제도로 정해지게 되었다.
그 때에 태조가 계룡산으로 서울을 옮기려고 이미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공이 힘껏 간언하였기 때문에 따랐다. 갑술년 3월에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가 되었고, 을해년 4월에 중추사(中樞使)에 옮기고, 7월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고, 병자년 4월에 기복되어 예문춘추관 학사가 되어 사퇴를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고황제가 사표(謝表)한 글이 불공하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 그 문장을 주관한 자인 정도전을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또 우우(牛牛) 등을 보내어 독촉을 하니,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는데, 태조가 은밀히 조신들에게 보내는 문제를 물었다. 모두들 관망만하고 굳이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나, 공만이 보내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여 정도전이 크게 감정을 품었다. 7월에 태조가 이지(李至)를 보내어 일을 주달하려 하였을 때, 사신이 아뢰기를, “오직 하관반(河館伴)이라야 사명을 다 할 것입니다.” 하고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명나라 조정에 이르러 상세하고 분명하게 아뢰어 일이 풀리게 되었다. 정축년 정월에 정도전이 군대를 일으켜 국경을 나갈 것을 의논하려 하면서, 공을 꺼려 계림부윤으로 내보냈더니, 그 해 봄에 왜추(倭酋) 몇 명이 무리를 거느리고 경상도에 와서 항복할 것을 청하므로 4월에 공이 관찰(觀察)ㆍ절제(節制) 제공과 더불어 이 일을 처리할 것을 의논하였더니, 의논을 주장한 자가 실책하여 왜추가 도망갔다. 6월에 공 등을 체포하여 순군(巡軍)에 치대(置對)하였고, 7월에 수원부에 안치되었고, 10월에 풀려 나고, 무인년 7월에 충청도 도관찰사가 되었다.
9월에 상왕(上王)이 왕위를 계승하자, 불러 정당문학이 되고, 10월에 정사공(定社功)을 책정하여 공이 1등으로 진산군(晉山君)의 봉작을 받고 들어가서 건문황제(建文皇帝)의 등극을 축하하였고, 기묘년 12월 참찬문하부사가 되었다. 경진년 4월에 찬성사에 오르고, 5월에 판의흥삼군부사 겸 판상서사사(判義興三軍府事兼判尙瑞司事)가 되고, 9월에 문하우정승 판병조사(門下右政丞判兵曹事)에서 관작이 승진하여 백(伯)이 되고, 11월에 금상이 즉위하였고, 신사년 정월에 좌명공(佐命功)을 녹하매 공이 또 1등에 있었고, 윤 3월에 병으로 사퇴하니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고, 4월에 지공거가 되어 지금 지신사(知申事) 조말생(趙末生) 등 33명을 뽑았고, 7월에 관제(官制)가 고쳐지매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平府事兼判戶曹事)가 되어 비로소 국내에 통행하는 저폐(楮幣)를 만들어서 나라의 용도를 풍부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임오년 6월에 명나라 조정에 가서 명명(明命) 악장(樂章) 두 편을 받을 때에 교서를 내려 권장하였다.
10월에 의정부 좌정승 판이조사(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로 지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할 적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첨(李詹)이 부사(副使)가 되었다. 공이 명나라 서울에 도착하자 이공(李公)과 더불어 예부(禮部)에 글을 올리기를, “새 천자께서 등극하여 천하가 더불어 새롭게 되었으니, 우리 임금의 벼슬도 고쳐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황제가 아름답게 여겼다. 영락(永樂) 원년 계미 4월에 명나라 사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과 함께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어 오니, 임금이 더욱 귀하게 여겨 하사한 물건이 실로 후하였다. 갑신년 6월에 가뭄으로 면직할 것을 빌었고, 을유년 정월에 좌정승에 복직되어 세자사(世子師)를 더하였고, 병술년에는 공이 각 종파의 절 주지(主持)들이 전토와 노비를 많이 점유하여 돈놀이를 하고, 여색에 빠져 재물을 좀먹고 대중을 미혹시킨다고 건의하여 각도의 주(州)와 군(郡)에 한두 절만 남기고 모두 철거하였으며, 그 전토와 노비는 나라에 귀속시키게 하니 임금이 이 의견을 따르자 식자들이 통쾌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정해년 4월에 문사들이 중시(重試)를 치룰 때, 공에게 명하여 시권을 읽도록 하여 지금 예문관 제학 변계량(卞季良) 등 10명을 뽑고, 7월에는 가뭄으로 임금의 처소를 옮기기를 청하였었다. 무자년 2월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고, 신묘년 3월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지금 평양판관 권극중(權克中) 등 33명을 뽑았고, 임진년 8월에 좌정승에 복직되었으니, 공이 이 때에 네 차례나 국권을 잡았다.
갑오년 4월에 국가에서 주관(周官)을 모방하여 정부의 모든 사무를 나누어 육조(六曺)에 귀속시키고 공을 영의정부사로 삼았으며, 을미년 10월에 또 좌의정이 되었다. 병신년 봄에 공의 나이가 70이 되었으므로 옛 일에 의거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수차례 여쭈니, 임금이 특별히 우대하여 조회에는 참여하지 않게 하더니, 4월에 이르러 허락하고는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사제(私第)로 나아가도록 하였는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자문을 하였다.
그 해 10월에 임금이 함길도(咸吉道)에 사신을 보내어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두루 살피려 하자 공이 스스로 갈 것을 청하였더니, 임금이 늙었다고 민망히 여겼으나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친히 교외에 나가서 전송을 하였다. 공이 이미 일을 끝내고 돌아오려 할 때, 병이 나자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내주(內廚)에서 반찬을 제공하니 문병하는 중관(中官)이 길에 잇달았다. 11월 6일 계사에 정평(定平) 관사에서 졸하였다.
부고가 이르자 임금이 심히 애도하여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찬(素饌)을 하고, 예관을 보내어 교서를 가지고 가서 치제하였다. 또 유사에게 명하여 호상(護喪)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하여 본제에 빈소를 차리고는 임금과 세자가 친림하여 조문과 제전을 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관아에서 장례식을 맡고 특별히 하였으니, 공에 대한 사후의 영예가 참으로 유감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명년 정유 3월 11일 정유에 사자(嗣子) 도총제공(都摠制公)이 관을 모시고 진주(晉州) 동방등(桐房洞) 감산(坎山) 언덕에 있는 선영 동쪽에 부장(附葬)하였으니, 공의 유언을 따른 것이었다.
공은 천품이 중후하고 식견이 밝고 도량이 넓으며, 조용하고도 간소하여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얼굴빛이 없었으나, 단정히 묘당(廟堂)에 있다가 의심나는 것을 판결하고 계책을 정할 때에는 그 기운이 씩씩하여 조금이라도 훼방과 찬양으로써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었다. 정승이 되었을 때는 대체(大體)만을 힘쓰고 까다롭게 살피지 않았으며, 아름다운 정책과 은밀한 의견으로 임금에게 도움이 컸으며, 물러나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을 한 일이 없었다. 자기 몸가짐이나 사람들을 만날 때에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되 거짓이 없고, 종족에는 어질고, 벗에는 믿음 있고,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은혜에 감복하고, 인재를 추천함에 늘 부족하게 여기고, 지극히 작은 착함도 반드시 취하되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 거처할 때는 살림살이를 다스리지 않고 사치를 좋아하지 않으며, 잔치 놀이를 즐겨하지 않았다. 성품이 글읽기를 좋아하여 손에는 책을 놓지 않고 여유있게 휘파람과 시를 읊으면서 침식을 잊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음양(陰陽)ㆍ의술(醫術)ㆍ성경(星經)ㆍ지리(地理) 등에 이르기까지도 극히 정밀하였으며, 예악과 여러 제도는 모두 공이 상정(詳定)한 것이었다.
후생을 권면하고 의리를 토론함에 매우 부지런히 하였으며, 국정을 담당한 이래로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서 외교의 사명(辭命)과 문사(文士)의 작품이라도 반드시 공의 윤색(潤色)과 인가(印可)를 거친 뒤에 정하였다. 일찍이 어명을 받아 《태조실록(太祖實錄)》 15권을 수찬해서 올리었다. 스스로 호를 호정(浩亭)이라 하였는데 문집 약간 권이 있다. 미리 유서(遺書)를 써서 상자 속에 간직하여 자손에게 교훈을 하였으되 자세하여 빠진 것이 없었고, 또 상장(喪葬)에는 한결같이《주자가례》에 의거하고 불교 의식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 집에서 유서가 발견되어 모두 그 말을 따랐다.
부인 이씨(李氏)는 지금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작을 받았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구(久)이며 중군도총제부총제(中軍都摠制府摠制)이다. 딸 둘이 있는데 맏딸은 한성부윤 홍섭(洪涉)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경상좌도 도절제사 이승간(李承幹)에게 시집 갔다. 손자 복생(福生)은 어리고, 외손, 다섯은 모두 도절제사의 아들인데 첨전(忝全)은 전(前) 공정고 부사(供正庫副使)요, 신전(愼全)은 사재직장(司宰直長)이요, 다음은 성전(誠全)ㆍ안전(安全)ㆍ항전(恒全)이다. 서자 셋이 있는데 장(長)과 연(延)은 모두 어리고, 영의(永義)는 흥시위사대호군(興侍衛司大護軍)이다. 서녀(庶女) 셋이 있는데 맏딸은 곡산부사(谷山府使) 김질(金秩)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중군사직(中軍司直) 장희걸(張希傑)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진산은 푸르고 / 晉山蒼蒼
진수는 넘실넘실 / 晉水泱泱
아, 아름다운 땅의 신령스러움 / 猗歟地靈
호정을 낳았구나 / 生我浩亭
선생의 자질 / 先生之質
옥처럼 윤택있고 엄준하네 / 玉潤而栗
시원스러운 흉금은 / 洒落胷中
개인 달과 맑은 바람이라 / 霽月光風
하늘이 동방을 도우시어 / 天眷東方
우리 임금을 돕게 하시네 / 俾輔我王
여러 말과 계책을 들어 주시니 / 言聽計從
천년에 한번 나는 기회로다 / 千載一逢
공을 정승으로 삼아 / 爰立作相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니 / 百僚是長
공로가 종묘사직에 있고 / 功在廟社
은택은 어려운 백성에 미쳤다오 / 澤被鰥寡
이단을 배격하여 / 觝排異端
도학을 밝히시니 / 唱鳴道學
공이 이 때에 / 公於是時
당나라의 한유가 되고 / 唐之昌黎
두 조정에 계책을 정하여 / 定策兩朝
친히 국사를 도왔으니 / 親扶日轂
공이 이 때에 / 公扵是時
송나라 치규라네 / 宋之稚圭
미연에 밝게 알아 / 明炳幾先
계책이 헛됨이 없었으니 / 筭無遺策
누구와 비슷한가 / 誰其似之
장막 속의 장자방이라오 / 帷幄子房
충의와 정성이 / 忠義精誠
위로 흰 해를 꿰었으니 / 上貫白日
누구와 같은가 / 誰其似之
한 평생 분양이라오 / 終始汾陽
사업이 넓고 덕이 높아 / 業廣德崇
나라의 원로이네 / 宜國黃耇
칠순에 마치시니 / 七旬而終
어찌 장수라 이르리오 / 孰云其壽
팔 다리가 없어진 듯 / 股肱之虧
임금께서 슬퍼하고 / 元首傷悲
철인이 돌아가시니 / 哲人之萎
길가는 나그네도 눈물지었다 / 行路涕洟
아, 선생이시여 / 嗚呼先生
이제 돌아가시다니 / 今也卽亡
이름을 솥에 남기고 / 名留鼎彞
신은 고향으로 돌아갔오 / 神返故鄕
울창한 선영에 / 有欝先塋
길이길이 간직하고 / 其永于藏
돌 다듬어 글을 새겨 / 鑱石銘辭
먼 장래에 보이리 / 用示攸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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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평대군, 고명대신 | 정난공신 (수양대군) | 훈구파 (한명회, 신숙주 등) | |||||||
| 성종 | 연산군 | 중종 | |||||||
| 대신 vs. 대간 | 대신 | 궁중파 (임사홍, 신수근) | 반정공신 (3훈) | 사림파 (조광조) | 反김안로계 (남곤, 심정, 이행, 이항 등) | 김안로계 (김안로) | 윤임 vs 윤원형 | ||
| 인종 | 명종 | 선조 | |||||||
| 대윤 (윤임) | 소윤 (윤원형) | 윤원형 vs. 이량 | 사림파 | 동인 vs. 서인 | 서인 (이이, 성혼, 정철) | 범 동인 (류성룡, 이산해) | |||
| 선조 | 광해군 | 인조 | |||||||
| 연립 (서인, 남인) (윤두수, 류성룡 등) | 북인 (이산해 등) | 탁소북 (류영경) | 청소북, 대북 (3창) | 대북 (이이첨) | 반정공신 (이귀, 김류) | 공서 (김류, 최명길 등) | 낙당, 원당 (김자점, 원두표) | ||
| 효종 | 현종 | 숙종 | |||||||
| 산당 (송시열, 송준길) | 서인 vs. 남인 | 범 남인 (허적, 윤휴) | 일부 서인 (김석주) | 산당 (송시열) | 남인 (민암, 장희재 등) | ||||
| 숙종 | 경종 | 영조 | |||||||
| 소론 (남구만 등) | 노론 (노론 4대신) | 소론 (소론 5대신) | 노론 (정호, 민진원 등) | 온건 소론 (이광좌) | 노론 (김재로 등) | ||||
| 영조 | 정조 | 순조 | |||||||
| 완론 탕평 (탕평당, 청명당) | 청명당 vs. 홍인한과 정후겸 | 홍인한과 정후겸 | 외척 (홍국영) | 소론 (서명선 등) | 준론 탕평 (벽파, 시파) | 벽파 (심환지 등) | 시파 (김조순, 남공철, 심상규) | 안동 김씨 | |
| 순조 | 헌종 | 철종 | |||||||
| 세도가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 | |||||||||
| 고종 | |||||||||
| 흥선대원군 (+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남인, 소론, 북인) | 여흥 민씨 (+ 개화파) | 흥선대원군 | 여흥 민씨 (+ 온건 개화파) | ||||||
| 고종 | 순종 | ||||||||
| 급진 개화파 | 여흥 민씨 | 김홍집 (+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 근왕파 | 친일반민족행위자 | |||||
| 고명3대신: 영의정부사 - 황보인, 좌의정 - 남지 -> 김종서, 우의정 - 정분 | |||||||||
[1] 율리우스력 1월 22일[2] 율리우스력 11월 24일[3] 율리우스력 3월 8일[4] 율리우스력 9월 18일[5] 율리우스력 11월 17일[6] 율리우스력 9월 26일[7] 율리우스력 5월 6일[8] 율리우스력 6월 23일[9] 11세손.(족보)[10] 이인임의 아우이다.[11] 1990년대 이전에 나온 역사책에는 간혹 '하윤'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현행 맞춤법에 따르면 하륜과 하윤 둘 다 맞다. 원칙적으로 이름(성씨 제외)의 첫 글자는 두음 법칙에 따라 두음으로 적게 돼 있지만, 외자인 경우 원음대로 적는 것도 허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이면 본인의 의사를 물어서 바라는 표기대로 적으면 되는데, 두 표기가 혼용되고 있다. 다만 현재는 하륜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듯하다.[12] 강승우(姜承祐)의 딸이다.[13] 이인임의 동생인 이인미의 딸과 결혼.[14] 이색 이전에 학문을 배웠던 스승이 이인임의 형인 이인복이어서 이러한 인연으로 조카사위가 되었다.[15] 하륜을 일부러 저격했다고 하기는 좀 그런 게 사실 정도전이 태조가 주도하는 한양 천도를 지지하는 데 있어 진짜 난적은 하륜이 아니라 똘똘 뭉쳐 부소명당(송악)에 남자고 빼액대는 서운관 관리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양으로 천도하려는 태조의 명령을 따르던 정도전 이외에는 저마다 음양풍수를 가지고 논했으니 하륜도 싸잡아 까인 건 맞다.[16] 정도전은 무악 일대가 너무 좁다고 반대했다.[17] 즉위하기 전의 왕이 있던 집을 의미한다.[18] 이는 태종의 후계자인 세종도 이루지 못했으며 뒷날에도 다른 왕들과 재상들이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조선의 화폐 유통은 먼 훗날 숙종 때에야 정착(상평통보)된다.[19] 하륜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편이었다.[20]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21] 이후 태안 쪽은 조선 인조 때까지 시도를 했지만, 중간 지점에 자리한 화강암반 때문에 실패하고 인조 말 충청도 관찰사에 부임했던 김육이 대안으로 판 곳이 지금의 안면도이다. 강화도 쪽 역시 마찬가지로 훗날 경인 아라뱃길이 생길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22] 중국의 대표적인 킹메이커이자 명재상이었던 소하도 고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물욕이 있는 척 비리를 저지른 적이 있는데 하륜은 진짜 물욕이 있었다는 게 차이점이다.[23] 공양왕 당시 이색을 귀양 보낸 '당시의 권력자들'을 비판한 사건이어서 당시 권력자들이 누군지에 대해 태조가 자유롭기는 불가능 했다. 하지만 태종이 하륜을 살려주려던 의지가 강하여 이숭인 장살을 끌어들인 다음 '태조의 아름다운 본 뜻을 무시하고 장살을 주도한 당대 권력자=정도전' 논리를 관철시켜서 빠져나갔고 정도전이 이 죄를 다 뒤집어쓰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된다.#[24] 이직과, 하륜의 부인 성주 이씨가 사촌지간이다. 하륜의 장인 어른인 이인미와, 이직의 아버지 이인민이 서로 형제 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 이들과 형제 간인 이인립의 아들이 바로 태조 이성계의 부마 이제(조선) - 경순공주의 남편이다.[25]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세종이 본 하륜은 전성기 시절이 아니라 말년에 실책하던 모습이기 때문이다. 세종과 하륜은 서로 50살이나 차이가 난다. 하륜은 황희보다 16살 나이가 많은데 당시 기준으로는 황희의 아버지 뻘 나이이다. 이들과 같은 시대를 산 세자 이방석는 세는나이 17세에 첫 아들 원손을 두었다. 이방원이 아직 왕자 시절 세는나이 31세에 아들 도(후일의 세종)를 둔 것은 당시 기준으로는 늦게 자식을 둔 편이다. 하물며 성녕대군은 완전 늦둥이이다.[26] 그런데 세종은 자기 집이 시끄럽다고 서대문까지 틀어막은 이숙번에 대해서는 뜻밖에 하륜보다 좋게 평가했다.[27] 다만 세종의 이 말은 자기 부정이기도 했는데 세종 본인 또한 황희같은 총신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온 힘을 다해 비호하면서 일노예로 부려 먹은 전력이 아주 화려한 왕이라서 까놓고 말해 능력만 있으면 관리들의 인성적 결함은 끝까지 실드쳐준 건 세종이나 태종이나 부전자전이다. 다만 하륜은 세종이 집권했을 땐 이미 사망했고, 황희는 하륜보다 훨씬 장수하여 세종에게서 본인의 능력을 충분히 입증할 기회가 있었다.[28] 1985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5부 임진왜란에서는 원균 역,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11부 대원군에서는 미우라 고로 역,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석총 역.[29] 1983년 KBS 드라마 <개국>에서는 공민왕 역, 199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성삼문 역.[30] 이색은 하륜의 좌주이다.[31] 이를테면 정몽주가 이성계를 죽이려고 할 때 "이성계를 꼭 살려야 한다"는 등 이성계를 위한다.[32] 정도전이 죽기 직전에 "편히 뫼셔 드리게나"라고 이방원의 집사에게 부탁할 정도. 실제 이색 문하에서 같이 동문수학한 사이.[33] 이제 갓 출사한 이숙번에게 "도량이 좁아서 남의 집 모사꾼 노릇이나 할 만하지 재상감은 아닌 양반"이라는 평을 들은 바 있다.[34] 경기 관찰사 시절 이방원이 하륜에게 "신수가 훤한데 혹시 가렴주구하시는 게 아니오?", "많이 해 먹었냐? 기방도 많이 섭렵했지?"라고 묻는 장면이 두어 번 스치듯 나오기는 한다.[35]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한명회 역.[36] "나 하륜이야! 하륜!"이라고 박은에게 호통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37] 박은의 아버지인 박상충은 하륜과 이색 문하에서 공부한 사형-사제 지간이다. 애초에 아버지뻘하고의 싸움이니 짬밥 자체가 다르다.[38] 정승이 실권을 휘두르던 의정부서사제와는 달리 육조직계제에서는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의 권한이 제일 막강하였다. 실제로 박은이 좌상에 임명되기 전까지는 '이제 박은의 세상'이라고 한탄할 정도.[39] 둘은 각각 이인임의 당여와 이성계의 혁명파 소속으로 정적 관계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조선 개국 전까지 둘 사이의 접점은 같은 사대부이자 스승 목은 이색의 제자이자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했다는 것 이외에는 그다지 없었다.[40]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한명회 역.[41]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공양왕 역.[42] 다만 승경도의 목적은 과거에 급제한 유생들과 관리들이 관직을 외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43] ? ~ 1419년, 태종의 사촌(이성계의 이복형제인 이원계의 아들) 중 하나로 왕자의 난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태가 불량하고 주색을 너무 밝혀 왕조 초기부터 저런 왕족이 있으면 백성의 민심을 잃는다는 공신들의 권고를 자주 들었음에도 태종은 눈감아주었다. 하지만 죄도 없는 머슴들을 잔혹하게 학대하다가 죽이고 여색을 탐하는 게 심해져서 결국 하륜의 첩실까지 탐내어 그가 죽은 직후 보쌈하다가 걸리자 모든 특혜를 박탈당하고 유배당하여 초라한 신세를 한탄하다가 오래못가 죽었다. 참고로 이 작자의 이야기는 고우영의 '수레바퀴'에도 실려있다.[44] 다 눈감은 건 아니다. 1405년 이백온이 죄도 없는 여종의 남편을 잔혹하게 꼬챙이로 찔러죽이자, 대사헌 이래(李來) 등 대신들이 아무리 신분이 낮다고 해도 죄도 없는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는 악귀 같은 왕족은 왕조에 이로울 게 없다고 끈질기게 탄원해 곤장 20대를 치고 멀리 3년 동안 유배를 보낸 바 있다. 한데 지평(持平) 이흡(李洽)이 이백온을 묶어 호송하자 이걸 본 태종은 분노해 이흡을 하옥시켰다. 그러자 이래는 "이흡은 맡은 일을 다한 것뿐이온데 왜 처벌하십니까?"라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태종도 분노해 "경(卿)은 이씨 나라의 신하가 아닌가? 어찌하여 종친(宗親)을 이와 같이 대우하는가!”라고 화냈으나 이래는 굽히지 않고 “신은 종친을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하의 덕을 보필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물러서지 않았다. 이래는 1400년에 이방간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태종으로부터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2등에 올랐고 나중에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계림군(鷄林君) 칭호. 즉 준왕족급 칭호를 받은 1등 공신이니 태종으로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기에 결국 이릅을 풀어 줘야 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먹을 거 잘 먹고 그렇게 이백온은 고생하지 않았다. 이래는 1416년 하륜보다 같은 해에 몇 달 먼저 세상을 떠나서 이백온의 처벌을 다시 주장하지 못했다.[45] 재미있게도 SBS 용비어천가 드라마 시리즈인 <육룡이 나르샤>의 하륜, <뿌리깊은 나무>의 한명회 둘 다 배우 조희봉이 연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배우 최종원도 왕과 비에선 한명회를, 대왕 세종에선 하륜을 연기했다.[46] 하지만 전 왕조(=고려)의 문과를 급제한 하륜과 끝내 문과를 통과하지 못 한 한명회 두 명 사이에는 일정 시점 임관한 관료들과 동등한 학문 수준을 국가 시험을 통해 본인이 증명한 후 본인이 가진 정략에 대한 식견을 결합하여 입신 출세에 성공한 사례인 전자와 입신 출세의 시작점이 '정략' 하나 뿐이었던 후자라는 차이가 존재한다. 또한, 황희도 행정 능력은 뛰어나지만 하륜처럼 권력 쟁탈은 하지 않은 만큼 어찌보면 황희의 행정 능력에 한명회의 야심을 모두 가진 게 하륜이라고 할 수 있다.[47] 진나라 왕전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면서 시황제에게 끊임없이 하사품을 요구했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좋은 땅과 보물을 약속해 주기를 바랐다. 덕분에 1년 동안의 장기전에도 모반의심은 꾸준하게 받았지만 경질되지 않으며 진나라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현대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과거에는 왕권에 대한 도전은 용서받을 수 없었지만 큰 능력에 비해 뇌물이나 탐욕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나(신하)는 너(왕)의 권력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눈앞의 코묻은 돈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라는 것은 그 시대의 신하된 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다. 신하는 왕보다 인망(인기)을 갖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 지금의 도덕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조광조나 이순신처럼 신하가 왕보다 뛰어난 인재들의 말로를 보면 알 수 있다.[48] 4대손은 오류이다. 시조(하공진공)께서 1011년에 순국하셨으니 그로 336년이 지난 점을 보면 알 수 있다[49] 강조의 정변에 참여한 인물로 2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이 고려를 침범하자 적진에 들어가 현종의 친조와 자신의 볼모를 조건으로 거란군의 철수 교섭에 성공하였다. 이후 거란에서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친국을 당하고 회유를 받았으나 끝내 거절하여 살해되었으며 고려에서 상서공부시랑을 추증하였다. 후일 '하공진 놀이'라 하여 하공진의 충절을 기리는 잡극(일종의 연극)이 예종 때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