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08 19:59:41

서얼금고법

庶孼禁錮法
1. 개요2. 내용3. 폐지 노력4. 영향5. 바깥고리

1. 개요

조선 태종 15년인 1415년에 태종의 명으로 처음 실시되어 법의 세부내용이 경국대전에 실리고 이후 영조의 재위기간까지 지속된 적서차별제도. 영조는 자신이 서자 출신임과 동시에 무수리의 아들이기도 하였기에 정통성에 대한 지적을 많이 받았던 왕이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같은 처지의 서자들에 연민을 느껴 서자들을 우대하기 시작하였다. 아무튼 3세기 동안 차별을 한 것도 대단.

2. 내용

1415년에 태종 이방원이 반포한 서얼차대정책으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로 공식 시행된 적서 신분차별제도이다. 원래 이전에도 서얼은 적자보다 한단계 밑이라는 인식은 있었지만 일단 제도적으로는 고려때까지 크게 차별받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관직 등용, 사회 진출 등 실제 생활에 제도적으로 제약이 걸리게 된다.

태종이 이러한 차별제도를 시행하게 한 이유는 자신의 주 정적이었던 정도전, 왕위 경쟁 상대였던 이방석 두 사람 모두 서자[1]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태종은 이 두사람에 대한 악감정을 전국의 서얼들에게로 확대하게 된다.

이후 서얼금고법의 세부내용이 경국대전에 실리고 1894년까지 차별 정책이 지속된다.

과거 응시자격의 박탈에 대한 규정의 제정 시기는 기록상 확실하지 않다. 단지, 같은 제재의 대상인 재가실행 부녀의 자손에 대한 차별의 논의가 1477년(성종 8년)에 있었으므로 대개 이 전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2]

참고로 이 서얼금고법에도 예외가 있었는데, 국성전주 이씨, 즉 왕족과 그 후손은 예외였다. 왕의 서얼은 군호를 받고 적자에 비해 차별받긴 했지만 왕족 대우 자체는 해 주었고 왕위 계승권도 있었다. 그 후손들 또한 일반 사대부로 취급을 받았다.

3. 폐지 노력

서얼금고법은 조선시대 당대에도 악법 중 하나로 여겼기 때문에 이를 폐지하려는 후대 왕들의 노력이 있었다.

최초로 이를 해결하려 한 사람은 선조로 1567년에 서얼 1600여명이 도성에서 당시 막 즉위한 임금 선조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자 이들을 딱하게 여기고 서얼들을 해바라기[3]에 비유하며 차별을 그만둘 것을 주변에 명한 것이 최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선조 16년인 1583년에 율곡 이이가 조정 내의 경연에서 공식적으로 서얼의 과거 응시 허통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5년인 1613년에 칠서지옥(七庶之獄) 사건이 터지면서 이때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칠서사건 이후 광해군은 선조가 추진했던 서얼허통 운동을 되돌리고 서얼차별을 강화시켜 나갔다.

실제로 어느 정도 결실을 본 것은 조선 후기로 숙종은 1695년에 영남지방 서얼들이 상소를 올리며 차별을 철폐해줄 것을 호소하고 송시열, 박세당, 김수항 등이 서얼허통운동을 벌이자 이에 동의하여 허통을 명하였다. 다다음대 왕인 영조는 무수리 출신 어머니를 둔 왕으로서 이에 깊이 공감, 서얼을 청요직에도 서용한다는 통청윤음(通淸綸音)을 내리고 서얼을 위한 직책을 신설하였다. 또한 서얼도 아버지를 아버지로, 형을 형으로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법률로 다스리도록 한다는 조치를 내리고 선전관 등 최고 청요직에 서얼들을 임명했으며 기타 여러 서얼차별을 혁파했다.

정조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두어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의 서얼들을 대거 등용하고 서얼들이 부사와 향임직에 자유롭게 오를 수 있게 하였으며,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을 전국에 반포하여 신분차별을 타파하려 했다. 이후에도 순조, 헌종, 철종 등의 왕들이 서얼허통소(庶孼許通疏), 계미소통절목(癸未疏通節目), 신해허통 등을 통해 사헌부, 승정원 등의 관직에 서얼이 진출할 수 있게 하거나 종2품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하는 등 지속적으로 차별정책을 완화해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철폐 운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전대 주요 왕이었던 태종이 남긴 유명을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었고 어디까지나 차별을 완화하는데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제도는 어떻게 조금씩 건드려볼 수 있었으나 태종 때부터 시작되어 수백여년간 지속된 사람들의 차별의식과 통념을 없애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얼금고법은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에서야 폐지된다.

4. 영향

허균(1569~1618)이 홍길동전에서 이를 강하게 비판하고 소설을 통해 계급제도의 모순을 여과없이 묘사할 정도로 이미 조선 중기 때부터 천하의 악법 중에 악법으로 보았다. 서얼금고법의 시행 후 전국의 수많은 서얼들이 큰 차별을 겪으면서 사회가 모순되고 서로 간에 끝없는 분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일어난 역모나 난 등을 보면 서얼 출신 인물들이 꼭 한자리씩 끼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홍경래의 난 같은 걸 보아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우군칙 같은 사람들이 모두 서자였다.

또한 그 위치와 대우가 대폭 하락했다. 자신의 자식이 저런 차별을 받게 되는데 어머니의 신분 또한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게 당연지사. 중국의 첩과 비교해보면 그 대우가 엄청나게 다르다.[4]

후대왕들의 필사적인 개혁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나라가 멸망하는 날까지 이 서얼금고법에서 시작된 적서차별을 끝내 타파하지 못했다.

5. 바깥고리



[1] 단, 이방석은 신덕왕후의 소생이라 사실 적자이긴 하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서자로 보아도 틀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이성계신의왕후와 혼인한 상황에서 신덕왕후와 불법적으로 중혼을 했다는 상황이 얽혀 있다. 서얼 문서에 들어가면 적자도 맞고 서자도 맞는 이 복잡한 상황을 알 수 있다.[2] 서얼 출신인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서얼에게 아예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은 경국대전 편찬 후라고 지적하였다. 어숙권이 살던 시대에 만들어진 경국대전주해에도 그러한 강화된 차별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3] 철종대에 편찬되는 책 규사의 유래가 된다.[4] 과거엔 끗발이 좀 약해도 나름 귀족출신 첩이나 못해도 양민 이상의 첩이 많았다면 첩의 위치나 대우가 하락함에 따라 천인출신+얼녀출신 첩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물론 중인출신 첩이 없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중인출신 첩은 양첩이라 대우가 나쁘진 않은 편. 참고로 고려시대에는 일부일처제 원칙이 강했기 때문에, 첩에 대한 인식이 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