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상세3. 한국 역대 왕조의 국성4. 중국 역대 왕조의 국성5. 베트남 역대 왕조의 국성6. 일본의 국성7. 류큐 왕국의 국성8. 한자문화권 이외의 국성
1. 개요
국성(國姓)은 나라의 성씨, 즉 예전 동아시아의 왕조 시절 왕가의 성씨(姓)를 의미한다.다른 일반적인 성씨와는 달리 일반 백성이 함부로 이 성을 부르지 못하던 시대도 있고, 기본적으로 욕설에 섞어서 사용하면 불경죄에 걸려서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함부로 사용되지 않았다.
2. 상세
국성을 가졌다고 해서 다 왕족이나 황족 취급을 해주는 것은 아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군주와 부계 혈연으로 이어져있어야 하며, 이를 확인코자 족보도 세심하게 관리한다. 따라서 일반인이 국성을 멋대로 자신의 성씨로 사용하면 불경죄 등으로 처벌받는다.이런 이유로 인해 시대에 따라서는 왕이 큰 공을 세웠거나 자신이 신임하는 신하에게 이 성을 내림으로써 그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도 쓰인다. 군주가 자기 입으로 이 신하를 혈연처럼 대우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니 신하에게 주어질 최상급의 대우라 할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이건 신하에게도 영광이므로 충성심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해당 성씨를 받은 사람을 국성야(國姓爺) 등으로 불러서 국성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삼간다. 국성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명나라의 국성야이자 대만 동녕 왕국의 1대 왕 정성공으로, 네덜란드인들은 그를 국성야의 중국어 방언 발음인 콕싱가(Koxinga)로 불렀고, 지금도 서구에서는 그냥 그를 콕싱가로 불린다.[1] 한국사에서는 왕건이 김순식에게 왕씨 성을 하사해 왕순식이 된 예 등이 있다. 이렇게 국성을 하사하는 것도 일종의 사성정책에 속한다.
재미있는 것은 반역의 마음을 품은 사람도 국성을 정식으로 하사받기를 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충성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국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후 찬탈을 하더라도 역성혁명이 아니라 선위 및 양위 같은, 왕조 내부에서의 왕위 교체정도로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일단 행위는 동일하지만 왕위 교체 수준이라면 근왕병같은 저항세력도 덜 생기고, 차후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기도 쉬워진다.
같은 맥락에서 국경 외부의 야만족이 멋대로 국성을 차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자신의 부족 내부에서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 첫째 목적이고, 일이 잘 돼서 해당 국가의 영토를 잠식하면 자신이 침략자가 아니라 빼앗긴 권리를 되찾는 자 수준으로 사실을 왜곡하기 위함이었다. 이 경우로 흉노족 어부라의 아들 유표와 손자 유연이 한나라의 국성 유씨를 자칭한 것이 있다.
특이하게도 일본의 경우에는 국성이 없다.[2] 일본 황실은 인간이 아니라 신의 후손이라 주장하기 때문에 성씨가 없다. 그러나 실질적 지배자였던 막부의 경우 과거 조정의 권위를 바탕으로 지배했던 옛 가문의 성씨를 자칭이든 물려받든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얻어내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가마쿠라 막부를 처음 세운 미나모토(源)/겐지나 타이라(平)/헤이지 등이 있다. 이를 외교 문서에서도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덕천가강)를 원가강(源家康)이라고 부르는 등의 사례가 있다.
그리고 높으신 분들에게 직접 성과 이름을 하사받는 것 자체는 일본에서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상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그 하사받는 이름의 글자가 높으신 분의 이름에도 있던 글자라면 더욱 의미있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야사 중엔 이항복&이덕형 콤비가 이걸로 위기를 넘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이덕형이 명나라 장수 이여송[3]을 응접하는데,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라는 걸 안 어떤 장수가 '같은 이씨와 혼인하다니, 짐승만도 못한 작자'라고 크게 화를 냈다. 조선에선 본관이 다르면 성이 같아도 다른 가문으로 여기지만 중국에선 본관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서[4] 이런 오해를 한 것. 그러자 이항복이 기지를 발휘해서 '이덕형은 본래 김씨인데 큰 공을 세워서 국성인 이씨를 받은 인물'이라고 거짓말했고, 명나라 장수는 '국성을 받을 정도의 거물을 몰라보고 실례했다'며 바로 우쭈쭈쭈해줬다고.
서양에도 국성이 있다. 러시아의 로마노프, 영국의 윈저, 프랑스의 카페와 보나파르트 등이 있다. 다만 동아시아와 유럽 지역의 성씨에 대한 인식이나 왕위 계승 법칙 등은 상당히 다르므로 이 국성의 개념도 당연히 다르다. 여담이지만 프랑스 왕국은 위그 카페가 개창한 카페 왕조 이후 등장하는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오를레앙 왕조 모두 부계로 이어져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개념으론 모두 한 가문인 셈이다.[5]
3. 한국 역대 왕조의 국성
4. 중국 역대 왕조의 국성
- 상: 자(子)
- 주: 희(姬)
- 금: 완안(完顏)
- 명: 주(朱)
5. 베트남 역대 왕조의 국성
베트남도 한자문화권에 속하지만,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들과 달리 국성이 바뀐 이후에도 같은 국호를 유지한 경우가 많다.- 고대 베트남[36]
- 다이비엣(大越/대월, 1054 ~ 1804)
6. 일본의 국성
- 일본 황실은 국성이 없다. 일본은 천황을 전통적으로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라는 현인신으로 숭배해와 황실에는 성씨 자체를 두지 않았다.[43] 그래도 일본 황족들은 정 성씨 개념이 필요할 때에는 어칭호를 성씨 대용으로 쓰기도 한다.
7. 류큐 왕국의 국성
- 쇼(尚) 씨[44]
- 제1 쇼씨 왕통: 1406~1469
- 제2 쇼씨 왕통: 1469~1879
8. 한자문화권 이외의 국성
한자문화권에서는 한 나라에 오직 하나의 국성이 있는 게 원칙이라서 국성이 바뀌면 국호도 교체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다른 문화권에서는 국성이 바뀐 이후에도 계속 같은 국호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또한 시조의 이름[45]이나 출신지에서 명칭이 유래한 왕조는 국성이 따로 없는 게 대부분이었다.
8.1. 유럽의 국성
8.1.1. 남유럽의 국성
8.1.1.1. 로마의 국성
11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콤니노스 가문 출신의 이사키오스 1세가 즉위하기 이전까지 로마의 왕조 중에서 상당수는 여러 가문의 결합으로 하나의 왕조를 형성하거나[46], 시조의 이름[47] 또는 출신지[48]를 따서 편의상 '~왕조'라고 부를 뿐 특정한 국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8.1.1.2. 중세 이후 이탈리아의 국성
동고트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 등 중세 초기의 게르만 왕국들은 왕위 계승이 불안정해서 국성이 없었고, 중세 이탈리아 왕국은 신성 로마 황제가 왕을 겸하는 나라였는데 신성 로마 황제는 선출직이라서 국성이 없었다.- 통일 이전
- 북부 이탈리아 및 사르데냐
- 사보이아 백국, 사보이아 공국, 사르데냐 왕국: 사보이아
- 몬페라토 변경백국: 알레라미치, 팔레올로고[55], 곤차가
- 만토바 변경백국, 만토바 공국: 곤차가
- 토스카나 대공국: 메디치, 합스부르크
- 이탈리아 왕국(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합스부르크
- 남부 이탈리아
-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아
8.1.1.3. 남슬라브 국가의 국성
8.1.1.4. 이베리아 반도의 국성
8.1.1.5. 프랑코크라티아의 국성
8.1.1.6. 기타
8.1.2. 서유럽의 국성
8.1.2.1. 프랑스의 국성
8.1.2.2. 영국의 국성
- 통일 이전
- 통일 이후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스튜어트, 하노버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하노버, 색스코버그고타, 윈저[62]
- 영국 및 영연방 왕국(현재): 윈저
8.1.2.3. 기타
8.1.3. 중부유럽의 국성
8.1.3.1. 독일어권의 국성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선거를 통해 황제를 뽑아서 국성이 따로 없었고, 15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점하는 경향이 강해지긴 했지만 18세기에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제위가 넘어간 적도 있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 작센 선제후국[63], 작센 왕국: 베틴
- 팔츠 선제후국, 바이에른 선제후국, 바이에른 왕국: 비텔스바흐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호엔촐레른
- 바덴 대공국: 체링겐(Zähringen)
- 안할트 공국: 아스카니아(Askania)
- 리히텐슈타인: 리히텐슈타인[65]
8.1.3.2. 폴란드의 국성
8.1.4. 북유럽의 국성
8.1.5. 동유럽의 국성
8.2. 동남아시아의 국성
- 짜끄리 왕조: 라마
8.3. 남아시아의 국성
- 마이소르 왕국: 워디야르
8.4. 북아시아의 국성
- 사하 연맹: 다르한
8.5. 중동의 국성
8.6. 아메리카의 국성
아즈텍, 잉카 등 원주민 국가들은 성씨 자체를 안 써서 국성이 없었고, 캐나다를 비롯한 영연방 왕국의 국성은 영국과 동일하므로 여기선 생략한다.[1] 동아시아인을 공식적으로 서양 언어로 부르는 흔치 않은 경우이다.[2] 막부를 국가로 판단한다면 달라진다.[3] 참고로 고려(조선)계 7세(…)이다.[4] 정확히는 본관 개념 자체는 후한~위진남북조시대 문벌귀족(중국)에서 유래했고 동시대 한국은 삼국시대 초중기라 본관 개념이 없었으며 훨씬 뒤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시점의 중국(명나라 말기)에서는 문벌귀족이 잘 나가던 시대가 이미 한참 전에 지나서 오히려 본관 개념의 원조인데도 거의 유명무실해졌다[5] 그래서 루이 16세는 처형당할 때, 루이 부르봉이 아니라 루이 카페로 칭해졌다.[6] 위만의 찬탈 이전 준왕 계통 왕조의 성씨. 삼국지에서 위략을 인용한 부분에서 나타난다.[7] 위만조선. 단 위만의 衛가 성씨인지 아닌지 이설이 존재한다. 한국에는 기록 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전해지는 위만의 후손은 없다. 한국에 있는 衛씨와 魏씨 모두 위만을 선조로 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위만의 증손자이자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의 동생 "막(邈)"은 살아남아 후손을 유지하다가 그 후손인 태고(太高)가 610년 경 일본 월국 판명정(現 후쿠이현)으로 이주하여 후데(筆, 필)씨를 개창하여 현재에 이어져오고 있다고 한다. 이 筆씨 성은 도일하자마자 받은 것은 아니고, 728년 태고의 후손인 광족(廣足)이 붓 만드는 일을 하였는데 그 솜씨가 일품이라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은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일본에 약 140명 정도가 있는 소수 성씨이다. 출처[8] 현재 학계의 중론은 고구려의 고(高)씨가 해씨에서 분화한 것이라기보다 서로 기본적으로 같은 성이며 순우리말(해)과 한자화(高) 한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고 추정한다. 해씨 고구려설 문서 참조. 해(解)씨는 2015년 기준으로 한국에 9명이 있는데, 부여의 국성이 이어져왔다기보다는 비교적 최근의 후대에 붙여진 성씨일 가능성이 크다. 실질적인 해씨의 후손은 각각 고구려와 백제의 국성(횡성 고씨, 부여 서씨, 의령 여씨)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9] 현왕 대부터 부여씨가 성씨로 쓰이게 된다.[10] 오늘날 남아있는 그들의 후손은 횡성 고씨가 된다.[11] 초기 왕들이 해씨(解)였고 태조대왕이 이후까지 이어지는 고구려의 실질적인 첫 임금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다만 이에 대한 현재 학계의 중론은 고구려의 고(高)씨가 해씨에서 분화하거나 역성(易姓)한 것이라기보다 서로 기본적으로 같은 성이며 순우리말(해)과 한자화(高) 한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고 추정한다. 해씨 고구려설 문서 참조.[12] 오늘날 남아있는 그들의 후손은 부여융의 후손인 부여 서씨, 부여풍의 후손인 의령 여(余)씨가 된다. 이천 서씨는 부여 서씨의 대종인만큼 마찬가지로 부여융 혹은 다른 부여씨 왕자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대구 서씨나 달성 서씨, 그리고 복흥 서씨 같은 나머지 서씨들은 부여 서씨와 마찬가지로 대종인 이천 서씨에서 분적하였다.[13] 일본서기에서 위덕왕이 고구려장수에게 일기토를 신청했을 때 고구려와 성이 같다 말했는데 이는 엄격한 성씨적용을 할 경우 백제와 고구려는 성이 같고 씨가 갈라진 한가문이 된다.[14] 엄격한 성씨 개념을 적용할 경우 박, 석, 김 세 씨는 혁거세를 시조로 한 같은 성에 다른 씨족이라 주장하는 설도 있다.[15] 한자가 같은 신라의 김씨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신라의 김씨는 김알지가 시조이고 가야의 김씨는 김수로왕이 시조이다.[16] 가야의 국성에는 고령가야의 국성인 함창 김씨, 소가야의 국성인 고성 김씨 등이 있으나, 대체로 김해 김씨가 6가야 전승에서 가장 맏이로 나타내어지고 가장 대표성 있게 여겨지므로, 김해 김씨에서 분적된 성씨로 보고 가야의 제례 등은 김해 김씨가 주관한다. 여담으로 이러한 6가야 성씨 분적을 이유로 동성동본 금혼 폐지 이전까지는 서로 결혼도 못하는 일도 있었다.[17] 제주 고씨, 한자가 같은 고구려의 고씨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전기 탐라의 국왕을 맡았으며, 후기 탐라의 서쪽을 성주로서 500년 이상을 통치했다.[18] 제주 양씨 및 남원 양씨, 초기에는 良자였으나 이후 고쳤다. 탐라의 성주 및 왕자로서 통치했지만, 십수년의 짧은 통치기간이기에 많은 기록이 유실되었다.[19] 제주 부씨, 시조는 제주도 탐라국 건국설화의 부을나(夫乙那)이다.[20] 남평 문씨, 탐라의 왕자(후일 조선의 우도지관), 후기 탐라의 동쪽을 왕자로서 약 300년간 통치했다. 기록상으로 전기 탐라시기 제주 고씨의 부마로 시작하여, 후기에 이르러 독자적으로 동부지역 통치를 시작했다.[21] 제주 고씨의 오기리는 설이 있다. 약 20년 동안 일시적 탐라의 성주로 서쪽을 통치했다. 가(加)씨의 실존을 가정하더라도, 현재 해당 성씨를 쓰는 남아있는 후손은 없다.[22] 오늘날 남아있는 그들의 후손은 밀양 대씨와 후에 태(太)씨로 개명한 협계 태씨와 영순 태씨가 된다.[23] 기록상 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불길한 징조가 있어 죽이라고 명했지만 유모가 빼돌리는 과정에서 실수로 아기 눈을 찔러 애꾸가 됐다는 이야기는 유명.[24] 현존하는 후손은 광산 이씨와 순천 김씨가 있다고는 하지만, 궁예의 자식들은 모두 궁예가 죽였기 때문에 어떻게 후손이 남아있냐는 비판이 있다.[25] 단명한 왕조라서 인지도는 낮지만 의외로 지금까지도 멀쩡히 존속하는 성씨이다. 유명인으로 견미리가 있다. 참고로 견훤을 진훤이라 불러야 한다는 설이 있는데, 견훤 문서의 해당 단락 참조. 만약 견 자를 진으로 읽어야 한다면 현대 한국의 견씨 성을 지닌 사람들이 전부 진씨로 바꿔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제서야 독음을 바꾸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듯. 거기다 아이덴티티가 확실한데다 이제까지 잘 쓰던 거를 흔해빠진 것으로 바꾸라고 하면 당연히 반발할 테고[26] 영(嬴)성 조(趙)씨. 춘추 전국시대는 성과 씨가 다른 개념이었고, 한나라 이후 점차 성과 씨가 구분이 옅어져 성씨로 통합되었다.[27] 한을 계승했다. 실제로도 촉한의 시조 역시 한 황실의 후손인 유비이다. 유비의 항렬은 유굉과 동일해 둘은 형제급이다.[28] 한나라의 창업군주 유방의 동생인 초원왕 유교의 후손이 세운 왕조로서, 유송은 한의 계승자 대접을 받게 된다.[29] 한삼걸 중 하나의 소하의 후손이 세운 왕조. 제와 양은 둘 다 소하의 직계 후손들이 세운 왕조이다.[30] 북위 효문제의 한화정책으로 탁발씨에서 원씨로 바꿨다.[31] 당나라의 계승을 주장했다. 둘 중 후당은 당나라에서 사성받았던 성씨고 남당은 당나라 황족 이각의 후손을 주장했다.[32] 후한과 북한은 사타족 출신으로 한나라 황실과는 연관이 없다. 북한은 후한 고조 유지원(劉知遠)의 동생 유숭(劉崇)이 창건한 왕조이므로 북한과 후한은 사실상 서로 같은 왕조이다.[33] 후당과 마찬가지로 당나라에서 사성받았던 성씨이다.[34] 패아지근[35] 애신각라[36]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에서는 국성이 따로 없었다.[37] 남아있는 후손은 국내의 화산 이씨와 정선 이씨가 남아있다. 놀랍게도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에 이들 후손이 남아있는 이유는 당시 베트남에서 고려로 망명하여 살아남은 후손이 몇몇 있기 때문으로 리 왕조의 제 4대 황제 인종(仁宗)셋째 아들 이양혼(李陽焜, Lý Dương Côn)이 리 왕조가 멸망하기 훨씬 이전,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 북송으로 망명했다가 북송마저 금나라에 멸망하고, 남송이 세워진 후에 이웃 국가인 고려로 망명해 정착하여 그 후손이 정선 이씨가 되었고, 또한 쩐씨가 왕위를 찬탈하고 리 왕조가 멸망 할 때 멸족을 두려워한 혜종의 숙부 이용상(李龍祥, Lý Long Tường)이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일족이 몰살당하기 전에 고려로 망명, 귀화하면서 고려에 정착, 그의 후손이 화산 이씨가 되었다. 1996년에 베트남에서는 770년만에 리 왕조의 후예들이 왔다고 화제가 된 적도 있다. 베트남 정부에서 화산 이씨와 정선 이씨를 리 왕조의 후예로 공식 인정했으며, 베트남에서 살 경우 출입국관리, 세금, 사업권 등에서 베트남인과 동일한 특혜를 주고, 리 왕조가 출범한 음력 3월 15일이면 공식 행사까지 연다고 한다.[38] 국호를 다이응우(대우)로 변경했다.[39] 다이비엣으로 국호를 되돌렸고, 후대 왕조들도 해당 국호를 계속 사용했다.[40] 원래 성은 후(胡, 호)씨로 아래의 응우옌 왕조를 세운 '꽝남 응우옌씨(광남 완씨)'와는 별개의 가문인데, 애초에 베트남에선 무려 전체 인구의 40%가 응우옌이라서(...)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41] 베트남이라는 국호가 처음으로 사용된 시기[42] 1804년부터 1839년까지는 베트남(월남), 1839년부터 1945년까지는 다이남(대남), 1945년에는 베트남 제국이라 칭했다.[43] 물론 이 현인신이니 신의 후손이니 하는 소리는 현대 일본에서는 극우들이나 떠들고 다니는 전체주의와 국가신토의 잔재로 인식되고 있어 현대 일본 국민들은 아무도 천황을 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망언 제조기로 유명한 모리 요시로가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의 나라"라고 했다가 비웃음만 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44] 두 왕조의 성씨가 같지만 사실 혈통 자체가 다른 별개의 가문이다. 이렇게된 이유는 제2왕통의 시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같은 성씨로 개명했고, 명나라에 세자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보고를 올려 책봉받았기 때문이다.[45] 동슬라브 국가의 류리크 왕조, 폴란드의 피아스트 왕조 등[46]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등[47] 콘스탄티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등[48] 이사브리아 왕조, 아모리아 왕조 등[A] 1204년 4차 십자군 이후에 수립된 동로마의 잔존국으로, 오늘날에는 정통성 있는 로마 제국으로 인정받지 못한다.[50]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재위 기간 한정[51] 크림 반도에 위치했던 트라페준타 제국의 제후국[A] [53] 부계 혈통상으로는 앙겔로스 왕조의 후예였지만, 더 오랫동안 제위를 차지해서 정통성이 강했고 친인척으로 엮여 있던 콤니노스와 두카스를 결합한 성씨를 사용했다. 다만, 뿌리가 앙겔로스라서 '앙겔로스 두카스'라고 불리기도 했다.[54] 1261년에 재건된 동로마 제국이 14세기에 황족을 분봉하여 수립한 제후국[55]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분가[56] 보르본 왕조의 분가[57] 호세 1세 시대 한정[58] 아마데오 1세 시대 한정[59] 카페 왕조의 분가이며, 아비스 왕조, 브라간사 왕조 등은 모두 보르고냐의 분가라서, 압스부르고 왕조를 제외한 포르투갈 왕들은 모두 보르고냐 가문 출신이다.[60] 카페 왕조의 분가[61] 사실 프랑스의 왕조인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는 전부 카페 왕조에서 갈라져 나온 왕가기 때문에 실제로 프랑스 왕들의 본성은 카페이다. 참고로 루이 16세도 처형당하기 직전에 루이 카페로 불리었다.[62] 색스코버그고타와 같은 가문이지만 1차 대전 도중 국성의 이름을 가진 고타 G.IV 폭격기가 런던을 폭격하자 윈저로 개명했다.[63] 명목상이긴 하지만 세속 선제후 중에선 최선임으로 인정받았다.[64] 베틴 가문의 분가[65] 나라 이름 자체가 이 가문의 이름을 따왔으며, 현재 중부유럽에서 유일하게 군주 지위를 세습하고 있는 가문이다.[66] 해당 가문이 단절된 이후부터 폴란드 분할로 나라가 망할 때까지는 신성 로마 제국처럼 선거를 통해 왕을 뽑아서 국성이 없었다.[67] 올덴부르크의 분가[68] 로마노프 이전에 러시아를 비롯한 동슬라브계 국가들을 다스린 류리크 왕조는 어디까지나 시조가 류리크라서 관례상 그렇게 불리는 것 뿐, 성씨가 류리크였던 건 아니다.[69] 통일 조지아 왕국은 물론이고, 분열 이후의 이메레티 왕국, 카르틀리 왕국, 카헤티 왕국도 해당 가문이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