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왕에 대한 내용은 칼 7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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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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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비텔스바흐 왕조 제2대 황제 카를 7세 Karl VII | |||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이름 | 카를 알브레히트 (Karl Albrecht) | ||
출생 | 1697년 8월 6일 | ||
스페인령 네덜란드 브뤼셀 | |||
사망 | 1745년 1월 20일 (향년 47세) | ||
바이에른 선제후국 뮌헨 | |||
재위기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마왕 | ||
1742년 1월 24일 ~ 1745년 1월 20일 | |||
보헤미아 국왕 | |||
1741년 12월 19일 ~ 1743년 5월 12일 | |||
바이에른 선제후 | |||
1726년 2월 26일 ~ 1745년 1월 20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1] (1722년 결혼) | |
자녀 | 막시밀리아네 마리아, 마리아 안토니아[2], 테레제 베네딕타,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요제프 루트비히, 마리아 안나, 마리아 요제파[3] | ||
아버지 |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 ||
어머니 |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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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바이에른 선제후이며 후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등극한 야심가.2. 생애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딸이었으므로 그에게는 일단은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 상속권을 주장할 혈연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카를 알브레히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딸과 결혼시켰다. 본래 아버지의 전처인 마리아 안토니아(1669년 ~ 1692년)가 낳은 장남 요제프 페르디난트(1692년 ~ 1699년)가 바이에른을 물려받고, 한때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후계자가 될뻔 했으나 불과 7살에 사망하여 카를 알브레히트가 바이에른을 상속받았다.막바지에 접어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고, 1726년 부친이 죽은 뒤 바이에른 선제후로 즉위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카를 6세의 요구를 받아들여 살리카법과 요제프 1세의 딸들이 지닌 계승권의 우위를 부정하는 오스트리아의 국사조칙을 승인했다.[4] 카를 알브레히트의 아내 마리아 아말리아는 요제프 1세의 차녀로 본래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계승 서열이 높았지만 국사조칙에 의해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여동생 마리아 안나의 뒤로 계승 서열이 밀려났다.
1740년, 카를 6세가 죽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한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령을 승계하자 그의 마음 속에 있던 야심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카를 6세의 말년 오스트리아가 대외전쟁에서 보여준 모습은 실로 무능했기에 그는 여건만 되면 바로 들고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고, 프로이센과 그 국왕인 희대의 먼치킨이 먼저 국사조칙을 거부하며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이에 자극받았다.
그는 국사조칙 승인을 번복하고 1741년 합스부르크 영지의 상속권을 요구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바이에른의 법률가들은 국사조칙의 허점을 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주장하기 위해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조약을 발굴해냈다. 1546년 바이에른 공국의 알브레히트 5세가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의 실질적 장녀였던 안나 여대공과 결혼할 때 있었던 계약인데,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자 후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경우 페르디난트 1세의 장녀의 후손인 비텔스바흐 가문이 오스트리아의 상속권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한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계는 끊기지 않았으므로 실질적으로 사문화된 조약이었지만 이것으로 우기기를 통해 국사조칙과는 관계 없이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물론 200년 전 조약 없이도 카를 7세에게는 본래 상속권이 있었다. 요제프 1세의 차녀이자 국사조칙을 통한 여성 후손의 계승 서열 뒤바꾸기가 없었더라면 계승 서열 2위였을 마리아 아말리아를 통해서였다. 카를 7세는 본래 계승 서열 1위였던 요제프 1세의 장녀 마리아 요제파와 결혼한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국왕 아우구스트 3세와 협의하여 오스트리아 영토 중 절반은 카를 7세가, 나머지 절반은 아우구스트 3세가 분할하기로 합의를 했다. 물론 프랑스가 먹기로 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5], 프로이센이 영유권을 주장한 슐레지엔을 제외하고서였다.
전쟁 선포 직후 오스트리아와 적대하던 프로이센, 프랑스, 스페인[6]으로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 권리를 인정받았다. 당시 유럽의 군주들로서는 강력한 오스트리아가 바이에른에 흡수되리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고, 이 기회에 바이에른을 내세워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어느정도 뜯어내 힘을 빼고 나서 오스트리아보다는 만만하고 약한 바이에른을 조종해 단물을 빼먹을 작정이었다. 그는 프랑스와 동맹군을 이뤄서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다.
초반에는 선전했다. 1741년에는 그동안 합스부르크 지배에 신물이 난 체코 귀족들이 합세해 보헤미아 왕위[7]를 갖다 바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배신을 때리고 여계 승계에 부정적인 오스트리아의 일부 독일인 귀족들도 카를에게 줄을 서면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지위는 위태로워보였다. 1742년에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친동생 쾰른 선제후와 자신의 두 표(바이에른 선제후와 보헤미아 왕), 친인척인 팔츠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와 아내의 언니와 결혼한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를 이용해 당선되었고[8] 대관식까지 열었지만 그 시각 자신의 영지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에 탈탈 털렸다. 큰 원인은 프로이센만 믿고 대관식을 위해 자신의 병력들을 멀리 프랑크푸르트까지 데려와서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수세에 몰린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 영유권을 인정하겠다고 거짓말을 쳤고[9] 서로 비밀리에 강화하고 일단 급한 불은 끈 후 화력을 바이에른 및 프랑스군에 집중해 연전연승을 올렸다. 결국 바이에른-프랑스 연합군은 괜히 보헤미아 지방까지 침공했다가 역관광당해 오히려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을 오스트리아에게 점령당하고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처지에까지 몰렸다. 프랑스군의 도움으로 1744년 다시 바이에른을 일시 탈환하나[10] 이미 통풍이 심해서 몸은 만신창이 신세였고 후계자 막시밀리안 요제프는 오스트리아와의 강화를 원했다.
결국 그는 대관식 후 단 하루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의 권위와 권력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통치할 영토를 잃었다. 프랑스 지원군에 의존해 제위를 유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다가 1745년에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후계자인 막시말리안 요제프는 오스트리아와 타협했고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왕 역시 슐레지엔을 얻고 강화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얻은 것 없이 돈만 쓰고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작센의 선제후비 마리아 안토니아 (Maria Antonia, Electress of Saxony) | 1724년 7월 18일 | 1780년 4월 23일 |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11] 슬하 5남 2녀[12] |
2녀 | 바이에른의 테레사 베네딕타 (Teresa Benedicta of Bavaria) | 1725년 12월 6일 | 1743년 3월 29일 | |
1남 |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Maximilian III Joseph) | 1727년 3월 28일 | 1777년 12월 30일 | 작센의 마리아 아나 조피[13] |
2남 | 바이에른의 요제프 루트비히 레오 (Joseph Ludwig Leo of Bavaria) | 1728년 8월 25일 | 1733년 12월 2일 | |
3녀 | 바덴바덴의 변경백비 마리아 안나 요제파 (Maria Anna Josepha, Margravine of Baden-Baden) | 1734년 8월 7일 | 1776년 5월 7일 | 바덴바덴의 변경백 루트비히 게오르크 |
4녀 |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Holy Roman Empress) | 1739년 3월 30일 | 1767년 5월 28일 | 요제프 2세[14] |
그의 딸 중 한 명인 마리아 요제파는 친척이자 원수이기도 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인 요제프 2세의 두 번째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요제프 2세는 마리아 요제파를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싫어했고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2남 5녀를 두었는데 유일하게 성인으로 자란 아들이자 후계자 막시밀리안 요제프는 자손을 남기지 못 해 1777년 사망,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은 단절되었고 루트비히 4세때 갈라졌던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테오도어가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 이 때문에 1777년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1]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차녀.[2]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과 결혼.[3]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와 결혼.[4] 국사조칙은 신성 로마 제국 제위와 상관이 없다. 여자는 아예 피선거권이 없기 때문에. 선제후나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항목에서도 예전에는 이것을 매우 헷갈려서 잘못 서술한 적이 있을 정도. 애초에 번역을 오스트리아 왕위(대공위) 계승이라고 하지 신성 로마 황제 계승 전쟁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자.[5] 현재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이다.[6] 부르봉 왕조로 교체된 스페인은 프랑스와 동맹이었다.[7] 30년 전쟁 때도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기를 들고 신교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에게 체코인 귀족들이 알아서 보헤미아 왕위(황제 투표 권한인 선제후이기도 하다)를 바친 전력도 있고, 중심지 프라하는 빈에 이어 합스부르크 영지 중 2번째로 큰 도시였지만 헝가리보다 못한 대우와 자치 수준이라 세금만 받아먹는 합스부르크에 반감이 컸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말기 시절에 이르러 더 심해진다.[8] 프리드리히 대왕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서 진작에 카를 7세에게 투표했다. 영국 국왕이지만 하노버 선제후이기도 한 조지 2세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이라 불참했고, 친오스트리아 세력이었던 마인츠와 트리어 선제후는 끝까지 투표하지 않고 침묵했다.[9] 이후 7년전쟁의 행적을 보면 오스트리아는 절대 슐레지엔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되찾지는 못했다.[10] 1743년 조지 2세가 군대를 이끌고 대륙에 상륙하자 프리드리히 2세가 다시 비밀강화를 깨고 바이에른-프랑스 편으로 참전한 여파도 있다.[11] 마리아 안토니아의 이모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의 장남으로 이종사촌 간이다.[12]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안톤 등[13] 위에 나온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의 여동생으로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와는 이종사촌 지간이자 겹사돈이다.[14] 마리아 요제파의 어머니 마리아 아말리아와 요제프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친사촌이라서 육촌 지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