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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 || 신성 로마 제국 비텔스바흐 왕조 초대 황제 루트비히 4세 Ludwig IV | |||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 루트비히 4세 (Ludwig IV) | ||
출생 | 1282년 4월 1일 | ||
신성 로마 제국 바이에른 공국 뮌헨 | |||
사망 | 1347년 10월 11일 (향년 65세) | ||
신성 로마 제국 바이에른 공국 퓌르스텐펠트부르크 | |||
재위기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
1328년 ~ 1347년 10월 11일 | |||
바이에른 공작 | |||
1301년 ~ 1347년 10월 11일 | |||
라인 궁정백 | |||
1294년 2월 2일 ~ 1329년 8월 4일 | |||
독일왕 | |||
1314년 10월 20일 ~ 1347년 10월 11일 | |||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 |||
1320년 ~ 1323년 | |||
이탈리아 국왕 | |||
1327년 5월 31일 ~ 1347년 10월 11일 | |||
홀란트, 젤란트, 에노 백작 | |||
1345년 9월 26일 ~ 1347년 10월 1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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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 여백작 마르그리트 2세 (1324년 결혼) | |||
자녀 | 루트비히 5세, 스테판 2세, 루트비히 6세, 빌헬름 1세, 알브레히트 1세, 베아트릭스, 오토 5세 | ||
아버지 | 라인 궁정백 겸 오버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2세 | ||
어머니 | 합스부르크의 마틸다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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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텔스바흐 가문 최초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2. 언어별 표기
독일어 | Ludwig IV.(루트비히 4세) |
이탈리아어 | Ludovico IV (루도비코 4세) |
네덜란드어 | Lodewijk de Beier (바이에른의 로데베이크) |
라틴어 | Ludovicus IV (루도비쿠스 4세) |
3. 초기 생애
라인 궁정백이자 오버바이에른 공작이었던 루트비히 2세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자 독일왕 루돌프 1세의 딸인 메히틸트의 차남으로 이미 성년이었던 형 루돌프가 있었기에 계승권이 없었다. 1294년 부친의 사망후 모친과 형의 보호를 받았으나 독일왕 선출에 위한 정치 암투에 휘말렸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는 나사우의 아돌프였으나 전 독일왕이였던 루돌프 1세의 아들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와 대립하는 중이었다.당시 라인 궁정백이자 오버바이에른의 공작이었던 형 루돌프는 나사우의 아돌프의 딸 마틸데와 결혼한 계기로 아돌프 편을 들었고 어머니였던 메히틸트는 자신의 동생인 알브레히트를 지지했다. 그녀는 차남이었던 루트비히를 뮌헨에서 멀리 떨어진 오스트리아 공국 빈에 자리잡은 동생의 궁전으로 보냈다. 루트비히는 외삼촌의 궁전에서 외사촌인 프리드리히·레오폴트와 함께 자라났다. 훗날 그가 황제로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친인척들의 영향을 배제하기는 하지만 그의 어릴 적 성장환경은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1298년 7월 2일 괼하임 전투에서 알브레히트가 나사우의 아돌프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신성 로마 제국 정계에서 그의 형 루돌프의 영향력이 감소하자 루트비히는 법적으로 자신의 것이지만 그동안 형의 방해로 갖지 못했던 정부 내의 직책을 얻었다. 이후 1308년 외삼촌 알브레히트 1세가 영지 문제로 조카인 슈바벤의 요한에게 암살당하면서 형 루돌프와 다시 충돌하였으나 1년 뒤 영토를 분할하여여 잠시나마 화해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니더바이에른의 사촌들에 대한 후견인 자격을 내세워 분할 협상을 유리하게 타결지을 수 있었으나 니더바이에른이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와 반목적인 관계였기에 외가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분쟁이 일어났다. 1313년 6월 다시 한번 형 루돌프와 타협을 해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해 8월 룩셈부르크 가문의 황제 하인리히 7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같은 해인 11월 9일에 가멜스도르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패퇴시켰다.
그뒤 그는 하인리히 7세의 사망 후 공위가 된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에 관심을 돌렸다. 그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왕위나 제위는 독일왕이나 황제가 붕어한다면 백작 이상급의 영주들이 후보로 나서 유력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실제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나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 또한 백작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비록 대공위시대 이전까지 몇몇 유력 가문들이 거의 독점적으로 제위를 차지하였으나 가계가 단절될 시에 다시 제후들에 위해 선출되었다. 일단 루트비히 당시에는 백작급 영주들은 더이상 후보 자격에 들지 못했으며 대신 합스부르크 가문과 룩셈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두고 다투고 있는 실정이었다.
허나 1314년 루트비히는 형인 루돌프와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이자 보헤미아 왕국 국왕이던 얀 루쳄부르스키를 제치고 후보가 되어 외사촌인 프리드리히와 경쟁했다. 1313년에 있던 니더바이에른에서의 분쟁에서 패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루트비히에게 큰 원한을 가져기에 거센 반대를 받았다. 그해 10월 루트비히는 외조부의 난적이었던 마인츠 대주교 페터 폰 아스펠트의 선동 덕택에 아스펠트, 트리어 대주교 발두인[1], 합법적인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얀 루쳄부르스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발데마르, 작센의 선거권을 두고 경쟁하던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요한 2세 등을 포섭해 황제선거에서 5개의 표를 얻었다.
경쟁자인 프리드리히 또한 이미 폐위당한 전 보헤미아 국왕이었던 케른텐 공작 하인리히, 쾰른 대주교 하인리히 2세, 루트비히의 형인 라인 궁정백 루돌프, 작센비텐베르크 공작 루돌프 1세 등에게서 총 4개 표를 얻었으나 근소한 차이에 낙선하고 말았다.
하나 문제는 거기에서 발생했다. 루트비히는 페터 폰 아스펠트의 도움으로 재빨리 아헨에서 독일왕으로 대관식을 치렀으나 프리드리히 또한 하인리히 2세의 도움으로 쾰른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사실상 대립왕이 되었다. 두 왕은 장장 7년 동안의 분쟁을 치렀다.
4. 합스부르크 가문 및 교황과의 대립, 그리고 가문 통합
1317년 루트비히는 3년 전 경쟁자이자 외사촌인 프리드리히에게 표를 던진 형 루돌프에게 정치적인 보복으로 오버바이에른과 라인강변의 팔츠 지방의 지배권을 몰수했다. 이에 다시 한번 두 형제간에 분쟁이 일어나 1319년 루돌프와 1323년 형수인 나사우의 메히틸트, 1327년 조카이자 루돌프의 장남 아돌프가 사망하기까지 계속되었다.1320년 뒤늦게 자신에게 표를 던져준 보헤미아의 국왕 얀에게 오버라우지츠를 내주었다. 하나 이듬해(1321) 얀은 자기 가문의 여자를 루트비히의 사촌인 니더바이에른 공작 대 하인리히와 결혼시키고 방계 친척을 통해 에거란트를 얻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결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프랑스 영향력 아래에 있던 아비뇽의 교황조차 점차 루트비히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1322년 9월 22일 루트비히는 뮐도르프 전투에서 승리, 대립왕인 미남왕 프리드리히를 포로로 붙잡아 가장 긴박했던 문제인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분쟁을 대거 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하나 당시의 교황이였던 요한 22세는 교황으로서 이 분쟁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황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려 루트비히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1년 후인 1323년 4월 4년 전에 아스카니아 가문[2]의 마지막 변경백 발데마르가 후계없이 죽어 그동안 미결정 상태로 놔둔 브란덴부르크를 아직 미성년자였던 큰 아들 루트비히에게 과감하게 넘겨주었고 그외에도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토를 넓히려는 욕심으로 마이센과 튀링겐을 통치하던 베틴 가문과 세습 동맹을 맺으면서 점차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고 했다.
1324년 2월 에노의 마르그리트 2세와 재혼했다.
5. 제국의 특권
루트비히 4세는 튜튼 기사단의 보호자였다. 1337년 그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와 루스를 정복할 특권이 있는 튜튼 칙령을 수여했다. 그러나 칙령은 3곳의 작은 영토에서만 청원되었다. 다음에 루트비히는 외국 군주들이 영토 분쟁으로 외국 법정에서 재판을 하기 전에 칙령을 금했다.또 루트비히는 제국 도시들의 경제 개발에 힘을 집중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그가 인정한 특권 때문에 많은 도시 연대기에서 찾을 수 있다. 1330년에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뤼베크가 한자동맹의 가장 강력한 구성원이 되는 것을 허용했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과 뤼베크는 제국에서 굴덴 금화의 화폐 주조와 화폐 발행의 특권을 가진 첫 도시들이 되었다.
1342년에 그는 티롤을 획득했다. 티롤의 마르가레테와 요한 하인리히의 첫 결혼을 공허하게 만들고 마르가레테를 자신의 아들인 루트비히 5세와 결혼하게 하여 룩셈부르크 가문을 훨씬 더 소외시키기 위해서였다. 1345년에 루트비히 4세는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와 프리슬란트를 아내인 에노의 마르가레테에게 주었다. 이것은 제후들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마르가레테의 자매들이 가진 세습 군주국들은 잉글랜드 왕국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에 의해 무시되었다. 룩셈부르크의 위험한 적들 때문에 루트비히는 그의 힘을 무자비하게 증가시켰다.
6. 룩셈부르크 가와의 대립, 죽음
1346년 여름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지원으로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렐이 대립왕으로 선출되었다. 루트비히 4세는 제국 자유도시들의 지원과 기사들을 얻어 카를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다.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은 루트비히에게 계속 충성했다. 크레시 전투에서 카를의 아버지인 얀 루쳄부르스키가 사망하고 카를 역시 전투에 참여했으나 탈출에 성공했다.1347년 10월 루트비히 4세는 뮌헨에서 곰사냥을 하던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뮌헨의 프라우엔키르헤에 매장되었다. 루트비히의 아들들은 카를에 맞서는 대립왕으로 귄터 폰 슈바르츠부르크를 지원했다. 그러나 귄터가 1349년에 사망하고 카를 4세가 단독 독일왕이 되었으며,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토는 루트비히 4세의 아들들과 조카들에게 분할되었다.[3]
7. 여담
움베르토 에코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의 시건배경이 루트비히 4세 재위기이다. 주인공 윌리엄 수사는 루트비히 4세가 신임하는 신하로 황제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소설 속 사건과 맞닥뜨린다.[1] 하인리히 7세의 동생이자 얀 루쳄부르스키의 숙부.[2] 안할트의 통치가문으로 당시에는 브란덴부르크와 작센도 통치했다.[3] 조카들이 라인 궁정백령을 가져가 팔츠 선제후가 되었고, 아들들이 분할상속한 바이에른은 160여년 뒤 바이에른뮌헨 공작 알브레히트 4세에 의해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