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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 || 신성 로마 제국 잘리어 왕조 제4대 황제 하인리히 5세 Heinrich V | |||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 하인리히 5세 (Heinrich V) | ||
출생 | 1086년 8월 11일 작센 공국 고슬라어 | ||
사망 | 1125년 5월 23일 (향년 38세) 로트링겐 공국 위트레흐트 | ||
재위기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
1111년 4월 13일 ~ 1125년 5월 23일 | |||
이탈리아 국왕 | |||
1098년 ~ 1125년 5월 23일 | |||
로마왕 | |||
1099년 ~ 1125년 5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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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하인리히 4세 | ||
어머니 | 사보이아의 베르타[1] | ||
형제 | 아그네스, 콘라트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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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어: Heinrich V. (하인리히 5세)이탈리아어: Enrico V (엔리코 5세)
라틴어: Henricus V (헨리쿠스 5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잘리어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게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감금하여 강제 퇴위시킨 후 제위에 올랐다.
아버지를 이어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 및 제국내 반란으로 고군 분투했으나 아버지에 비해 현명하지 못한 판단력과 근시안적인 안목, 그리고 소심한 성격 탓에 결국 교황의 의도대로 놀아나며 사실상 서임권 투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보름스 협약이 맺어짐에 따라 서임권 투쟁이 잠정 종식되었으며, 이로 인해 황권이 약화되었다.
2. 생애
2.1. 반란과 즉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사보이아의 베르타 사이에서 다섯번째 자녀로 태어났으며, 유년기에 살아남은 아들 중에서 차남이었다. 살아남은 형제 중 장남인 콘라트[2]가 후계자로서 제국을 물려받을 예정이었지만 섣부른 콘라트는 아버지에게 반역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콘라트에게 실망한 하인리히 4세는 차남인 하인리히에게 제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했다.하인리히 4세는 1099년 1월 6일 아헨에서 하인리히 5세를 독일왕으로 즉위시켰다. 하인리히 4세는 아들에게 자신의 치세 동안 제국의 일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5세는 변덕스러운 아버지가 자신에게 확실히 제위를 물려줄지 의심을 품고 있었다. 이때 하인리히 4세의 적들이 그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특히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 투쟁을 벌이던 교황 파스칼 2세가 지원을 보장하면서 하인리히 5세를 교묘히 부추겼다. 결국 하인리히 5세는 황제인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를 감금하여 강제 퇴위시킨 후 정권을 잡았다. 하인리히 4세는 아들에 의해 유폐당했으나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그는 탈출에 성공하여 로트링겐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제위를 거의 되찾을 뻔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가 급사하는 바람에 상황은 정리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질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쾰른 시민들은 벌금형을 받았다. 그리고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트 2세에 대항한 원정은 이 반역자들을 그의 무릎 앞에 꿇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