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10:01:24

루도비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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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 제3대 국왕
카롤루스 제국 제2대 황제
루도비쿠스 1세
Ludovicus I
파일:640px-Ludwik_I_Pobożny.jpg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Hludowicus Imperator Augustus
루도비쿠스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
이름 Ludovicus 또는 Hludowicus Pius(루도비쿠스, 라틴어)
Louis le Pieux 또는 Louis le Débonnaire(루이, 프랑스어)
Ludwig der Fromme(루트비히, 독일어)
출생 778년 4월 16일
프랑크 왕국 카시노길룸[1]
사망 840년 6월 20일 (향년 62세)
프랑크 왕국 잉겔하임
재위기간 프랑크인의 왕
814년 1월 ~ 840년 8월 28일 (36년)
아키텐 국왕
781년 ~ 814년
서로마 제국 황제 (명목상)
813년 ~ 8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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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조부 피핀 3세
부왕 카롤루스 대제
모후 빈츠가우의 힐데가르트
형제 곱사등이 피핀, 피핀 카를로만, 청년왕 샤를, 로타르, 아델라이드, 베르타
배우자 에르망가르트 폰 헤스펭가우
바이에른의 유디트
자녀 로타리우스 1세, 피핀, 아델라이드, 로트루드, 힐데가르트, 루트비히 2세, 기젤라, 샤를 2세, 아르눌프(사생아), 알파이스(사생아)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치세 초기2.3. 파국의 길
2.3.1. 제1차 내전(830년)2.3.2. 제2차 내전(833년)2.3.3. 제3차 내전(834년)2.3.4. 제4차 내전(839년~840년)
2.4. 죽음
3. 가족관계

[clearfix]

1. 개요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왕조 제3대 국왕이자, 카롤루스 제국(카롤링거 제국)의 제2대 황제였으며, 교황 레오 3세가 부활시킨 서로마 제국(명목상)의 제2대 황제였다.[2] 일명 경건왕 루도비쿠스[3]라고 한다.

프랑스 왕국의 역대 국왕 중에 루이 16세, 루이 15세, 루이 14세를 거슬러가도 루이 1세를 찾기 힘들 수 있는데 프랑스의 루이 1세는 이 사람이고, 독일에서도 루트비히 1세로 통칭된다.[4]

2. 생애

2.1. 초기 생애

778년 4월 16일 프랑크 왕국의 카시노길룸에서 카롤루스 대제와 두 번째 왕비 빈츠가우의 힐데가르트 사이에서 쌍둥이 아들로 태어났다. 루도비쿠스 1세가 태어날 당시 이복형으로 '곱사등이' 피핀이 있었으며, 친형으로는 피핀 카를로만과 '청년왕' 샤를이 있었다. 그리고 누이로는 아델라이드와 베르타가 있었다. 함께 태어난 쌍둥이 형제인 로타르는 779년에 요절했다.

781년 4월 15일,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루도비쿠스를 아키텐의 부왕으로 기름부었으며, 형인 피핀 카를로만은 이탈리아의 부왕으로 기름부었다. 이후 루도비쿠스는 아키텐으로 보내져서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가 보낸 가신들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794년 헤스펭가우(에스베 또는 에스바이) 백작 잉글램의 딸인 에르망가르트 폰 헤스펭가우와 결혼하여 로타리우스 1세, 피핀, 루트비히 2세, 로트루드, 힐데가르트를 낳았다.

801년 또는 803년에 카롤루스 대제와 후우마이야 왕조 사이의 전쟁에 참가해 아키텐의 기욤과 그의 아들 베라와 함께 무어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던 바르셀로나를 탈취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812~813년 바스크인들의 반 프랑크 봉기를 진압했고, 813년에서의 총회에서는 게르만족의 주신인 오딘의 축제를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로 대체하기로 결의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806년 디덴호펜에서 사후를 대비한 <제국 분할안>을 작성했는데, 이에 따르면 루도비쿠스 1세는 셉티마니아, 프로방스, 부르고뉴를 분할받고, 피핀 카를로만은 바이에른과 이탈리아, 알레마니아 남부, 라에티아를 받으며, 청년왕 샤를은 아우스트리아 및 알레마니아를 수여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피핀 카를로만과 청년왕 샤를이 각각 810년과 811년에 예기치 않게 사망하는 바람에, 루도비쿠스 1세가 졸지에 카롤루스 대제의 유일한 합법적인 아들이자 상속인이 되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와 여러 신하들은 루도비쿠스 1세가 단독으로 대제국을 통치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고, 812년 죽은 피핀 카를로만의 아들이었던 베른하르트를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세웠다.

813년 9월 11일, 루도비쿠스 1세는 아헨에서 소집된 제국의회에서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루도비쿠스 1세의 전기 작가였던 트리어의 테간(Thegan of Trier)은 루도비쿠스 1세 본인이 왕관을 썼다고 기술했지만, 학자들은 대체로 카롤루스 대제가 아들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는 《제국 연대기》를 더 믿을 만하다고 본다. 이후 아키텐으로 돌아와 부왕으로서 통치를 이어가던 루도비쿠스 1세는 814년 1월 28일 카롤루스 대제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아헨으로 이동하여 제국 전체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816년경 교황 스테파노 4세의 주관하에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다시 기름 부음을 받으며 면류관을 썼다. 이후 프랑스 왕국의 역대 국왕들은 이를 본받아 대대로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2.2. 치세 초기

루도비쿠스 1세는 권력을 온전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키텐에서 함께 하던 신하들을 그대로 데려와서 제국의 국정을 맡겼으며, 결혼하지 않은 누이들을 황궁에서 내보내고, 선제 카롤루스의 사생아들을 강제로 교회에 보냈다. 조카이자 이탈리아 국왕이었던 베른하르트와는 초기에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루도비쿠스 1세는 816년 11월의 공식 문서에서 조카 베른하르트를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dilectus filius noster")
이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817년 아헨 제국의회에서 제국의 승계를 규정하기 위해 반포한 <제국 상속령> 문제로 인해 양자간의 사이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루도비쿠스 1세는 이 조항에서 자신이 대관식을 치른 만큼 다른 형제들의 자손들보다 우월하다고 강조했으며, 장남 로타리우스 1세를 명목상 제국 전체의 지배자로 삼고 영토의 중앙 지역을 물려주었다. 그라고 차남 피핀에게는 아키텐, 툴루즈, 셉티마니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권한을 주고 왕의 칭호를 하사했으며, 3남 루트비히 2세에게는 바이에른, 카린티아, 보헤미아 등지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권한을 주고, 역시 왕의 칭호를 하사했다. 그러나 조카인 이탈리아 왕 베른하르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에 관해서는 다른 제국의 영토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황제가 적절한 인물을 앉힐 것이라고만 밝혔다.

베른하르트는 숙부인 루도비쿠스 1세가 자신을 배제하려 한다고 여긴 후 밀라노 주교 안셀름 1세, 오를레앙의 주교 테오둘포, 시종장 라니에리, 에지디오 백작 등과 함께 반란을 계획했다. 그는 알프스산맥의 서쪽 주요 고개를 봉쇄해 제국군의 총공세를 막아보려고 했다. 베로나 주교 라톨도와 브레시아 백작에 의해 이 정보를 전해들은 루도비쿠스 1세는 왕국의 모든 지역에서 군대를 차출해 살롱에 집결시켰다. 베른하르트는 루도비쿠스 1세에게 수많은 병력이 모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의를 급격히 상실한 채 충실한 추종자들과 함께 숙부를 만나기 위해 샬롱으로 가서 평화협상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루도비쿠스 1세는 곧바로 베른하르트와 추종자들을 체포한 뒤 818년 봄 아헨에서 재판에 회부했다. 성직자들은 직분을 박탈당하고 추방되거나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베른하르트와 다른 평신도 공범자들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루도비쿠스 1세는 짐짓 자비를 베풀어주겠다며 사형을 실명형으로 감면했다. 베른하르트는 시뻘겋게 달군 단검으로 안구가 짓눌러져 실명된 후 2일 동안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818년 4월 17일에 사망했다. 그 후 이탈리아 왕국은 루도비쿠스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장남인 로타리우스 1세에게 분배되었다.

베른하르트와 그 지지파들을 숙청한 뒤, 루도비쿠스 1세는 개혁에 힘을 기울였다. 수많은 칙서를 발표했고, 감찰관들을 각지에 보내 영주들의 부정행위를 감시 및 단속하게 했으며, 교회법을 다양한 분야에 걸쳐 개편했다. 가령 프랑크 왕국에 살고 있는 모든 승려와 수녀에게 베네딕토회 규칙을 적용하게 했으며, 성직자로서 조금이라도 품행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자들을 수도원에서 내쫓도록 했다. 또한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시련을 받는 관행 일부를 금지하고, 증인 및 증거를 엄격히 따져서 유무죄를 판단하게 하는 등 절차법도 개정되었다.

2.3. 파국의 길

821년, 루도비쿠스 1세의 핵심 조언가로서 개혁을 진두지휘하던 아니안(Aniane) 수도원의 베네딕트가 사망했다. 그후 교회 개혁 운동은 쇠퇴했고, 황제가 파견한 감찰단에게 시달린 영주들의 불만이 점점 증폭되었으며, 성직자들은 루도비쿠스 1세가 재위 초기에 친족에게 저지른 범죄를 비난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루도비쿠스 1세는 822년 아팅기 수도원에서 조카인 베른하르트를 처참하게 죽인 것을 참회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복형제와 자손들을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한 후, 그때까지 투옥 중이던 베른하르트의 추종자들을 석방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베른하르트의 일로 자신을 비판하는 성직자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824년 프랑크 제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국내 노예 무역을 관장할 권한을 포함한 몇 가지 특권을 부여했다. 이때 여러 그리스도인이 후우마이야 왕조가 지배하는 코르도바로 판매되었다. 이에 리옹 대주교 아고바르드가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유대인들로부터 자금 융통을 받고 있었던 루도비쿠스 1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일로 교회와 황제와의 사이가 틀어졌다.

한편, 루도비쿠스 1세는 가정사에서도 문제를 드러냈다. 818년 에르망가르트 황후가 사망하자, 819년 바이에른 공작 벨프 1세의 딸이었던 유디트와 재혼했다. 823년 유디트와의 사이에서 아들 샤를 2세가 태어나자, 루도비쿠스 1세는 제국 분배 계획을 대폭 수정하기로 했다. 829년 장남이자 공동 황제였던 로타리우스 1세를 이탈리아로 보내고, 일부 봉토를 샤를 2세에게 넘겨주려 했다. 이에 로타리우스 1세와 피핀, 루트비히 2세 형제들은 강한 불만을 품고 아버지에게 대항하려 했다.

2.3.1. 제1차 내전(830년)

830년, 루도비쿠스 1세는 제국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로 하고 브르타뉴인을 향한 원정을 벌였다. 그러나 원정 준비가 한창이던 830년 4월 궁정에서 반란이 일어나 루도비쿠스 1세는 감옥에 갇혔고, 유디트 황후는 셉티마니아 공작 베른하르트와 간통한 혐의로 푸아티에 인근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로타리우스 1세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제국을 이끌었다. 그러나 로타리우스 1세의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이 서로 권력 쟁탈전을 일삼기만 해 민심을 잃었고, 830년 10월 네이메헨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루도비쿠스 1세의 복귀가 결의되었다. 이리하여 제위에 복귀한 루도비쿠스 1세는 주모자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추방했고, 유디트 황후를 아헨으로 복귀시켰으며, 로타리우스 1세를 이탈리아로 돌아가도록 했다. 한편 피핀과 루트비히 2세는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832년 아버지에게 충성을 재차 서약했다.

2.3.2. 제2차 내전(833년)

그러나 세 아들들은 이복동생인 샤를 2세가 아버지의 총애를 듬뿍 받으며, 자신들의 영지를 갉아먹는 것에 강한 적의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고, 결국 833년 동맹을 맺은 후 아버지를 상대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833년 6월 말, 루도비쿠스 1세가 이끄는 진압군과 세 아들의 반란군이 콜마르 인근의 로펠트에서 대면했다. 이때 사전에 회유된 진압군이 반란군에 모조리 투항해버리면서, 루도비쿠스 1세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후 황제는 수아송 인근의 생메다르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황제복을 벗은 후 참회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유디트 황후는 또다시 이탈리아의 토르토냐로 추방되었고, 샤를 2세는 푸룸 수도원에 감금되어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2.3.3. 제3차 내전(834년)

834년 초 이번에는 피핀과 루트비히 2세가 맏형인 로타리우스 1세를 상대로 내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프랑크 제국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지면서 감시가 소홀해지자, 루도비쿠스 1세는 생메다르 수도원을 탈출하여 추종자들을 끌어모은 뒤 생드니 수도원에서 무기와 왕관을 확보하고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다시 인정받았다. 이후 유디트 황후를 아헨으로 불러들였다.

2.3.4. 제4차 내전(839년~840년)

838년 6월 루트비히 2세가 네이메헌에서 소집된 제국의회에서 부왕 루도비쿠스 1세와 다투었다. 838년 9월 루도비쿠스 1세는 루트비히 2세의 몫을 샤를 2세에게 넘긴다는 선언을 했고, 루트비히 2세는 이에 반발했다. 838년 12월 차남인 아키텐 왕 피핀 1세가 갑작스럽게 승하한 후, 839년 5월 3일 로타리우스 1세가 프랑크 제국의 동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과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내정되었다. 그리고 프랑크 제국의 동부 지역은 루트비히 2세가 관장하기로 결정되었으며, 샤를 2세는 프리슬란트 및 마스 강과 센 강 사이의 지역을 물려받기로 했다. 839년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의 상속권을 박탈한데 대해, 루도비쿠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루트비히 2세는 군사를 이끌고 동생 샤를 2세의 알레만니아 영지에 침입했다. 루도비쿠스 1세는 신속하게 반응했고, 루트비히 2세는 판노니아로 퇴각했다. 839년 봄, 루트비히 2세는 루도비쿠스 1세가 샤를 2세를 아키텐 왕으로 임명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루아르에서 거병하여 피핀 2세를 지원했다. 이때 장남 로타리우스 1세가 부왕 루도비쿠스 1세의 편에 서서 이들과 싸웠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전해에 죽은 피핀 1세의 아들인 피핀 2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결국 루도비쿠스 1세는 샤를 2세에게 아키텐을 주려는 결정을 취소하게 되었다.

839년 프리슬란트와 덴마크에 있었던 바이킹이 제국 동부를 침략하여 약탈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루도비쿠스 1세는 이를 막지 못했고, 바이킹은 수시로 동북부의 프로이센 지방을 약탈했다. 839년 말 루트비히 2세는 5월 30일에 있었던 보름스 제국의회의 결정에 반발하여, 군대를 이끌고 부왕에게 마지막으로 반기를 들었다가 또다시 보름스에서 격퇴당했다. 루도비쿠스 1세는 그 해 프랑크푸르트에서 평화선언을 했다. 840년 초 루트비히 2세는 알레만니아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루도비쿠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군이 파견되자 싸움없이 신속하게 후퇴했다. 그러나 840년 3월 루도비쿠스 1세는 다시 루트비히 2세를 치려고 특별 군대를 조직했다가, 3월 말 프랑크푸르트에서 군대를 해산시키고 돌려보냈다.

2.4. 죽음

840년 6월 20일, 루도비쿠스 1세는 아들인 루트비히 2세와 한판 붙기 위해 잉겔하임의 라인 강 부근 한 섬에 이동했다가 도중에 붕어했다. 그는 생전에 코르넬리뮌스터(Kornelimünster)의 뮌스터 수도원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루도비쿠스 1세의 이복형이자 메츠의 주교였던 드로고는 황제의 시신을 어머니 힐데가르트와 다른 카롤루스 황실 인사들이 함께 묻힌 메츠의 성 아르눌프 수도원에 안장했다. 루도비쿠스 1세의 무덤은 1793년 프랑스 혁명 당시 폭도들에게 파괴되었고, 유해는 흩어졌다. 루도비쿠스 1세의 사후 프랑크 제국은 장남 로타리우스 1세, 루트비히 2세, 그리고 샤를 2세 사이의 내전에 시달리다가 843년 로타리우스 1세가 중앙부를 갖고, 샤를 2세는 서반부를 가지며, 루트비히 2세는 동반부를 가지는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면서 삼분할되었다.

3. 가족관계

  • 에르망가르트 폰 헤스펭가우(778 ~ 818): 헤스펭가우(에스베) 백작 잉그램의 딸.
  • 바이에른의 유디트(795 ~ 843): 알트도르프 백작 벨프 1세의 딸.
  • 사생아
    • 아르눌프(794 ~ 814 이후): 생스 백작.
    • 알파이스(794 ~ 852 이후): 랭스의 성 피에르 수녀원의 수녀.


[1]누벨아키텐 비엔(Vienne)의 샤스뇌이뒤푸아투(Chasseneuil-du-Poitou) 지역. 푸아티에 북쪽에 있다.[2] 800년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 때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 대제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어 주었고, 명목상으로 서로마 제국의 황통을 부활시켰다.[3] 라틴어: Hludowicus Pius[4]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샤를 왕을 샤를 9세, 8세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샤를 1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샤를 1세는 보통 샤를마뉴 즉 카롤루스 대제를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