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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왕조 Dynastie carolingienne Carolingian dynasty | ||
751년 11월 ~ 843년 8월[1] | ||
~ 987년[2] | ||
존속기간 | 751년 11월 ~ 843년 8월 | |
국가 |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제국, 서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등 | |
위치 | 중서부유럽 | |
수도 | 파리(~ 768년)[3] 아헨(768년 ~ 843년) | |
정치체제 | 군주제 | |
국가원수 | 왕 → 황제 / 왕 | |
주요 군주 | 피핀 3세 카롤루스 대제 루도비쿠스 1세 | |
언어 | 고대 프랑크어, 라틴어 | |
종교 | 가톨릭 | |
종족 | 프랑크족, 로마인 | |
주요사건 | 751년 11월 피핀 3세 즉위로 카롤루스 왕조 출범 800년 12월 카롤루스 대제 황제 대관으로 카롤루스 제국 출범 843년 8월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 3분할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 단절 987년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 단절 | |
성립 이전 | 메로베우스 왕조 | |
분할 이후 |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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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루스 왕조 혹은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는 메로빙거 왕조를 대체한 프랑크 왕국의 두 번째 왕조이다.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왕국이 3분할되며 통일 프랑크 왕국은 해체되었지만, 이후 분할된 서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등에서 각기 카롤루스 왕조가 지속되었다. 919년 동프랑크 왕국에서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었으며, 987년 서프랑크 왕국에서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었다.
2. 역사
2.1. 시조 피핀 1세
카롤루스 가문의 시조에 대해서는 자료가 적어 깊이 알 수 없다. 다만, 브라반트 지방의 영주였던 카를로만의 아들[4] 란덴의 피핀 1세(Pépin Ier de Landen) (580년 ~ 640년)가 그 시조라고 보고 있다.한편, 비슷한 시기 활동한 메츠의 성 아르눌(Arnoul de Metz)도 있는데, 이 사람은 클로비스 1세 시절 라인란트 프랑크족의 군주였다가 클로비스 1세에게 숙청당한 지고베르트 왕의 후손이다. 지고베르트가 클로비스에게 숙청당한 이후 그의 손자인 문데리크가 테우데리크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켜 왕위 탈환을 시도했다가 실패해 처형당한 이후 아우스트라시아에서 메로빙거 왕조를 섬겨 왔다. [5] 왕위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킨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겐 화가 미치진 않았는지, 문데리크의 장남은 아우스트라시아 궁정에서 머무르며 왕실의 측근으로 활동하다 말년에 교회에 투신해 주교가 되었고, 차남인 보도기젤은 프로방스 지방의 공작(dux)을 역임했다. 아르눌의 할아버지인 뮈몰린(Mummolin)은 킬페리크 1세 밑에서 궁재를 지냈으며 수아송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아르눌 역시 명문가에서 태어난 만큼 초년에는 선조들처럼 아우스트라시아 궁정에서 일하며 왕실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매우 유능한 관료이자 왕의 고위 가신(leaudes)이었다고 한다. 이후 갈로-로마인 혈통으로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로마 원로원 의원 가문 출신인 메츠 주교 아르놀트(Arnoald)[6] (560년 ~ 611년)의 딸 도데(Dode)와 결혼했고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이후 성직에 마음이 이끌려 성직에 투신했고, 정치적으로는 주군이던 테우데베르 2세가 사실상 할머니 브룬힐트에게 휘둘리자 이에 반감을 품고 피핀 1세와 손잡고 네우스트리아의 클로타르 2세를 끌어들였고, 그가 프랑크를 통일하는 것에 공헌한다. 이러한 클로타르 2세에 대한 헌신으로, 피핀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 아르눌은 클로타르 2세의 교회 통제책의 일환으로 메츠의 주교로 임명된다. 이 두 사람은 동맹을 맺고, 각자의 아들과 딸을 결혼시킨 후 아르눌의 형인 바보(babo) 공작과 피핀의 누이인 발드라데를 결혼시켜 겹사돈을 맺는 것으로 그것을 강화한다.
2.2. 피핀 가문의 퇴보
피핀 가문의 2대는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피핀 1세의 아들 그리모알드 1세는 궁재 직위를 물려받은 후[7] 아들 킬데베르를 앞세워 쿠데타를 시도하지만, 타 귀족들에게 원성을 사, 아들과 함께 암살당한다. 그리모알드 1세의 외조카이자 피핀 1세의 외손자인 피핀 2세는 쾰른 지방 귀족의 딸 플렉트루드와 결혼을 해 유럽 대륙의 요충지이자 풍요로운 지방인 쾰른을 획득하고, 그리모알드 1세가 살해당한 지 15년 뒤에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를 역임하는 데 성공한다. 687년 테르트리 전투에서 승리해,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분국의 궁재가 되어, 3개 분국을 모두 한 손에 넣는다. 하나의 개인이 3개 분국의 궁재가 되는 것은 유례없는 사건으로, 피핀 2세는 프랑크의 공작(Duke of the Franks)이란 칭호를 얻는다.피핀 2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프리슬란트[8]를 점령하는데, 이것이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를 빌미로 일으킨 정복 전쟁이었다. 지금까지 프랑크 왕국은 대체적으로 기독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정교분리가 잘 되어 있었다. 또 처음으로 강압선교가 시행되어, 지금까지 잘 받아주었던 선교자들도 정복국의 앞잡이로 보아, 후일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계기가 된다. 피핀 2세는 몇 차례 정복 전쟁 이후 유례없는 생전에 궁재로서[9] 세습을 준비한다. 하지만, 후계자로 지목하였던 두 아들들[10]이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714년 피핀 2세 서거시에 궁재직은 12세의 어린 아들 테오드발트에게로 돌아간다.
2.3. 카롤루스 마르텔
하지만, 피핀 2세에게는 성인인 서자가 있었으니, 바로 카롤루스 마르텔이었다. 플렉트루드 왕비는 테오드발트의 어머니로서 섭정을 시작하고, 카롤루스 마르텔을 감금했다. 하지만 궁재가 어려 권력이 약해진 틈을 타, 프리슬란트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의 반란, 아우스트라시아의 귀족들의 불복종이란716년 카롤루스 마르텔은 도피했다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717년 네우스트리아 분국 귀족들을 완전히 종속시켰으며, 719년 프리슬란트 반란을 진압하고, 섭정 플렉트루드를 상대로 승리했다. 724년에는 프랑크 왕국의 왕 테우데리크 4세를 앞세워 궁재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갖게 된 카롤루스 마르텔은 귀족들의 분란을 잠재우고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군을 격퇴하면서 군사적 권위를 얻었다. 또, 카롤루스 마르텔은 처음으로 유럽 문명을 이슬람에 대치시키고, 자신을 기독교의 수호자로서 자리매김해 종교적/군사적 권위로 자신의 정통성을 변호했다.
서자라는 약점을 군공으로 극복하면서 가문을 이어받은 카롤루스 마르텔은 내란으로 잠시 공석이 되었던 왕위를 대신하여 메로빙거 왕조를 통치하기도 했지만 감히 왕위까지는 넘보지 않았다.
2.4. 피핀 3세의 카롤루스 왕조 건국
카롤루스 마르텔은 피핀 3세(Pépin le Bref)와 카를로만, 두 아들을 후계자로 두었으나 카를로만이 750년 수도자로 귀의하면서 피핀 3세가 권력을 독점했다. 751년 피핀 3세는 결국 교황 자카리아의 지원을 등에 업고 메로베우스 왕조의 킬데리크 3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피핀 3세는 적극적으로 교황에게 군사적 도움을 주었다. 754년 랑고바르드 왕국을 격파하고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라벤나 일대의 토지를 기증하여[11] 교황령의 시초를 만들었다. 또한 정복을 계속해 759년 나르본과 알안달루스 지역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또 우마이야 왕조에 적대적인 아바스 가문과 군사적 동맹을 맺어 (767년) 우마이야 왕조를 견제했다.2.5. 카롤루스 대제
피핀 3세의 아들이 카롤루스 대제이며, 800년 교황 레오 3세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의 대관을 받았다. 황제 제위에 오른 후부터를 일반적으로 카롤루스 제국으로 지칭한다.카롤루스 대제 사후 그의 유일한 아들 경건왕(자비왕) 루도비쿠스 1세(루이 1세)가 뒤를 이었다.
2.5.1. 카롤링거 르네상스
영어: Carolingian Renaissance프랑스어: Renaissance carolingienne
카롤루스 대제는 문화적 부흥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정작 본인은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메로베우스 왕조의 마지막 왕들은 글을 읽고 쓸 줄 알아 공식 문서에 서명을 남기기도 했으나, 카롤루스 대제는 글을 쓸 줄 몰랐다. 허나 교육과는 별개로, 그가 교양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학과 수학에도 관심을 보였고[12], 프랑크 언어와 더불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을 청해(聽解)할 줄 알았다. 왕국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카롤루스 대제는 점차 문화적 부흥을 자신의 재위의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2.5.1.1. 팔라틴 아카데미(Académie palatine)
780년부터, 카롤루스 대제는 유럽의 방방곡곡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로마의 지식인들이 잔류하던 이탈리아에서 언어학자들과 사학자들을 모집했고, 서고트에서 영입한 신학자 테오둘프(Théodulf (d'Orleans))를 오를레앙의 주교로 삼았다. 또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당대의 다빈치라 일컬을 만한 다재다능한 알퀸을 부사제로 임명, 자신의 고문관으로 두어, 신학, 법학, 천문학, 논리학 등을 가르치게 했다. 이 지식인들은 가히 학회라 부를 만한 소모임을 이루었고, 이 "학회"를 팔라틴 아카데미라 명명한다. 대부분 외래 지식인들로 구성된 초대 팔라틴[13] 아카데미는 2대에 이르러서, 아인하르트 등 토착 프랑크 왕족의 지식인을 배출하는 데 성공한다.2.5.1.2. 학교
카롤루스 대제는 789년 칙령(admonitio generalis)으로 학교를 설립하는 데도 힘쓴다. 이런 학교들은 교양 있는 성직자들을 길러내는 데 전념하였다.당시 학교에서 가르치던 문학 세 과목과 과학 네 과목으로 다음과 같다.이 일곱 과목은 13세기까지 중세 대학의 교과과정의 초석을 이룬다. 그 외에, 카롤루스 르네상스 시대의 발달로는 오늘날 알파벳 소문자의 기초가 되는 속기술 발명, 첫 음표의 발명 등을 꼽을 수 있다.
2.5.1.3. 속기술과 출판 문화의 발달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지식인들은 엄청난 필사작업에 착수한다. 이 작업의 목적은 이중적인 것이었는데: 우선 "틀린 라틴어"로 쓰인 메로빙거 왕조 시절의 문서들을 올바른 라틴어로 고치는 것이었고, 고대 로마의 걸작이라 판단되는 작품들과 성경 주해등 종교적 문서들을 복제해 판본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시절에 필경사들이 질이 낮다고 판단한 문서들은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베껴쓴 책들은 수도원들에 소장되는데, 수도원의 규모에 따라 수십 권에서 수백 권 정도 보관되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절 주목할 만한 점은 괄목할 만한 문서 공유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인쇄술의 발명 전이라, 아무리 많은 판본을 필사한다 해도 한계가 있었고, 그 한계를 수도원들 사이에서 책을 빌려주는 시스템으로 메꾸었다. 이런 "책 공유망"은 굉장히 활발했고, 프랑크 왕국 내부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수도원에게도 빌려주는 등 국제적 차원에서도 공유가 이루어졌다.2.5.1.4. 성공 여부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문화적 여파는 분명 실재했고,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가 기대하던 만큼 발전했는지, 또 근세의 "르네상스"에 비교해 그 이름이 과연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16]우선, 속기술과 출판 기술의 발달로 과거에 이미 간행되었던 책 판본의 권수는 확실히 증가했다. 현존하는 판본의 90%가 바로 이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필사본이다. 하지만 메로빙거 왕조에 비해 새로운 출판물의 수는 정체 내지 줄어들었다. 둘째, 카롤루스 대제가 학교라는 개념의 창시자라는 것은 잘못된 학설이다. 메로빙거 왕조에도 학교는 있었지만, 카롤루스 대제는 학교 수를 증가시켰을 뿐이다. 또한 전국 곳곳에 학교를 만들어 지식을 보편화시켰다는 설 또한 증빙이 부족하다. 로마 시대 때도 그랬지만, 교육은 어디까지나 권력자들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고, 규모나 시설도 근세적인 학교에 비해 너무 협소하고 조악했다. 팔라틴 아카데미 또한 고작 몇십 명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사교 모임에 가까웠고, 중세 중기(12세기 즈음)에 발달되는 대형 고등 교육기관들인 "대학"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또 역설적으로 올바른 라틴어를 가르침과 동시에 라틴어를 구사하는 인구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방의 라틴어는 메로빙거조와 카롤링거조를 거치면서 각자 독자적인 로망스어파들로 분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성직자들이 일반인이 구사하기에는 어려운 로마 제국 시절의 라틴어를 구사하자, 점차 일반인이 사용하는 언어와 성직자 내지 지식인이 구사하는 언어가 괴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인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점점 변형돼 원시 프랑스어로 변모하기에 이른다.
2.6. 분열
프랑크 왕국의 분열 및 영토 변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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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됭 조약 | <colbgcolor=#0000CD> | |||||||
프륌 조약 | ||||||||
메르센 조약 | ||||||||
리베몽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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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ordercolor=#000><tablewidth=100%><-9> 카롤루스
대제
—
카롤루스 제국 초대 황제
카롤루스 1세 ||
대제
—
카롤루스 제국 초대 황제
카롤루스 1세 ||
서프랑크 | 중프랑크 | 동프랑크 | ||||||
루도비쿠스 1세 경건왕 — 카롤루스 제국 2대 황제 루도비쿠스 1세 | 카를 2세[17] | |||||||
피핀 1세 — 아키텐 | 샤를 2세 대머리 왕 — 네우스트라시아 — 서프랑크 — 카롤루스 제국 5대 황제 카롤루스 2세 | 로타리우스 1세 — 이탈리아 — 카롤루스 제국 3대 황제 로타리우스1세 | 루트비히 2세 독일인 왕 — 바이에른 — 동프랑크 | |||||
피핀 2세 — 아키텐 | 루이 2세 말더듬이 왕 — | 프로방스의 카롤루스 — 프로방스 | 루도비코 2세 이탈리아인 왕 — 이탈리아 — 카롤루스 제국 4대 황제 루도비쿠스 2세 | 로타리우스 2세 | 카를 3세[20] 뚱보 왕 — 슈바벤 — 알레만시아 — 카롤루스 제국 6대 황제 카롤루스 3세 | 카를로만 — 바이에른 — 동프랑크[21][22] | 흘로도비쿠스 | |
프랑크 왕국의 분열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국토에서 비롯된 행정적인 어려움, 민족적 다양함, 지방 귀족들의 강력함과 성직자들과 세속적 귀족들의 라이벌 구도 등 여러 방면에서 내분이 일어나기 좋은 환경을 조성했다.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루도비코(이), 루이(프), 루트비히(독) 1세}는 장남 로타리우스 1세를 815년 공동 황제로 선포하고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 이후 이탈리아 왕으로 삼는다. 둘째 피핀에게 서프랑크의 남부인 아키텐, 가스코뉴 등의 지역을, 셋째인 루트비히 2세 독일인 왕에게 바이에른, 슈바벤 등 동프랑크 지역을 나눠주기로 한다. 후처에게서 샤를 2세대머리 왕을 얻자 영지를 조정하여 샤를에게도 영지를 나눠주려 했으나[23], 829년에 세 아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 내전은 왕국의 권력을 심각히 약화시켰다. 이후 아키텐의 지배권을 두고 피핀 1세와 샤를 2세 대머리왕이 싸우던 도중 838년 피핀 1세가 죽자 루도비쿠스 1세는 다시 한번 아키텐을 샤를 2세 대머리왕에게 넘겨주려 했으나 아키텐 지역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피핀 1세의 아들인 피핀 2세가 상속받는다.
840년 루도비쿠스 1세가 죽자, 장남 로타리우스 1세는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려 하였다. 이에 루트비히 2세 독일인왕과 샤를 2세 대머리왕과 스트라스부르 서약으로 힘을 합쳐 퐁트누아 전투에서 로타리우스 1세에게 대항하였고 아키텐의 피핀 2세는 삼촌인 로타리우스 1세편을 든다. 결국 세 형제는 843년 프랑스 북부의 베르됭에서 만나 프랑크 왕국을 삼분하는 베르됭 조약을 맺는다. 조약에 의해 샤를 2세 대머리왕은 자신의 영역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받았고 피핀 2세는 아키텐을 노리던 대머리 샤를을 주군으로 섬기게 되었다. 피핀 2세는 반발을 했으나 결국 아키텐마저 잃게 된다. 최종적으로 카롤루스 제국은 3개(서프랑크·중프랑크·동프랑크) 지역으로 분할된다. 로타리우스 1세는 제국의 중앙 부분인 로타링기아, 알자스, 부르군트,이탈리아 왕국을 가졌으며, 루트비히 2세는 제국의 동쪽 부분인 라인강 동쪽에서 이탈리아 북동쪽에 이르는 지역을 가졌다. 그리고 샤를 2세는 제국의 서쪽 지역인 네우스트라시아(테두리 위쪽)와 피핀 2세에게서 빼앗은 아키텐(테두리 지역) 지역 등을 가졌다.
로타리우스 1세 사후, 중프랑크 또한 세 아들이 물려받았는데, 855년 프륌 조약으로 영토를 셋으로 분할하여 장남 루도비코 2세(이탈리아인 루도비코, 루도비쿠스 2세, 독일인 루트비히의 조카)가 제위와 이탈리아를, 로타르 2세가 로타링기아{로트링겐(독), 로렌(프)}로 불리는 중북부를, 프로방스의 샤를이 중남부의 부르군트를 가졌다.
로타르 2세는 자신의 영지를 정부에게서 난 아들 사생아 위고에게 물려주기 위해 사생아라는 법적 지위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채 869년 죽게 된다. # 로타르 2세의 삼촌들인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와 샤를 2세(대머리 샤를)는 조카손자 위고가 법적 권리가 없는 사생아라고 선포한 뒤 870년 메르센 조약을 맺어 로타링기아를 나눠가졌다. 프로방스의 샤를은 869년 이른 나이에 죽었고, 그의 영지는 루도비코 2세(이탈리아인 루도비코)가 차지했다가 샤를 2세(대머리 샤를)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 메르센 조약은 중세 유럽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조약이다.
이후 880년 2월 바이에른과 이탈리아의 왕 카를만이 병으로 상속권을 두 동생에게 분배할 때, 청년 루트비히 3세와 비만왕 카를 3세, 서프랑크의 루이 3세와 샤를로망 3세 간에 리베몽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조약으로, 이 조약에서는 870년 8월 8일 메르센 조약에 의해 분할되었던 로타링기아(로렌)를 동프랑크의 청년 루트비히 3세가 차지한다고 결정하였다. 당시 서프랑크는 대머리 카를 2세와 루이 2세 말더듬이왕의 연이은 죽음으로 서프랑크 왕국이 내분에 빠진 틈을 타 결정된 것이었다.
이렇게 베르됭, 프륌, 메르센, 리베몽 조약으로 분열된 프랑크 왕국은 887년 카를 3세에 의해 일시적으로 재통일되었으나 이후 다시 분열되었다.
2.6.1. 서프랑크 왕국
자세한 내용은 서프랑크 왕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아키텐: 차남 피핀 1세의 영토. 하지만 피핀 1세는 839년 사망했기 때문에 형제들의 상속 전쟁에 끼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 루도비쿠스 1세는 아키텐을 샤를 2세에게 넘겨주려 했지만, 아키텐의 귀족들은 집단으로 반발했다. 이에 아키텐의 귀족들은 피핀 1세의 아들 피핀 2세을 지지하여 루도비쿠스 1세는 결국 피핀 2세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855년에 대머리 샤를 2세는 피핀 2세를 사로잡고 축출시켰으며, 피핀 2세의 동생 샤를은 수도자로 만들어 아키텐을 강제로 뺏어버렸다.
2.6.2. 중프랑크 왕국
자세한 내용은 중프랑크 왕국 문서 참고하십시오.2.6.3. 동프랑크 왕국
자세한 내용은 동프랑크 왕국 문서 참고하십시오.2.7. 분할과 그 이후
카롤링거 가문의 몰락에 대한 자세한 전개는 이 글 참조루도비코 2세가 후계자없이 사망하면서 사촌인 루트비히 2세의 장남 카를로만에게 상속을 하였다. 그러나 샤를 2세(대머리 샤를)가 이탈리아로 진격해 황제로 즉위했다. 이를 계기로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간의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형인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가 죽자 샤를 2세(대머리 샤를)는 황제라는 명분으로 동프랑크 지역의 영지들을 노골적으로 탐냈다.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의 둘째 아들인 '작은 루트비히'(홀로도비코스, 루트비히 3세)가 이를 저지하였고 그 와중에 샤를 2세(대머리 샤를)는 병사했다. 샤를 2세(대머리 샤를)의 아들 루이 2세(말더듬이 루이)가 제위를 물려받으려 했으나 이탈리아로 가기를 망설였고, 카를로만은 상속을 명분으로 이탈리아를 차지했으나 교황이 황제 대관을 해주지 않았다.
교착상태에서 둘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다. 카를로만은 동프랑크의 영지들과 이탈리아, 제위를 동생 카를 3세(뚱보 카를)에게 상속시켰다. 아들인 아르눌프가 있었으나 사생아였기 때문에 물려주지 않았고 이에 계속 분쟁이 발생되자 카를 3세는 상속한 영지 중 아르눌프가 다스렸던 바이에른 지역을 넘겨준다. 카를 3세는 형 카를로만이 상속해준 제위와 바이에른을 제외한 동프랑크 지역의 영지들, 부르군트를 제외한 이탈리아와 중프랑크 지역의 영지들, 서프랑크의 샤를 3세(단순왕)[24]가 어린 나이(5세)라는 이유로 서프랑크의 왕을 대리함으로써 제국을 다시 통합하였다. #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1년 만에 다시 최종적으로 분열된다. # 이후 귀도 왕조를 거쳐 아르눌프가 제위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아르눌프를 끝으로 통일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는 끝나게 된다.
915년 카롤루스 왕가의 지배지.
카롤루스 왕가가 완전히 사라지고 백작위도 카페가문의 방계인 위그 베르망두아에게 넘어간 직후인 12세기 초의 영역,
셋 이상으로 분열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영토는 결과적으로 12세기에 프랑스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두 지역으로 대체로 정립되어 중세 전성기로 이어진다.
이후, 카롤루스의 가문은 1124년 베르망두아 여백작 아델레이드[25]의 사망으로 완전히 단절되고 방계만 남는다.
[1] 베르됭 조약으로 인한 삼국 분할.[2] 카페 왕조의 시작 기준.[3] 메로베우스 왕조의 수도(508 ~ 751년 11월).[4] 참고로 어머니는 바이에른 공작 가리발트 1세(Garibald I)의 딸이다[5] 결론적으로 말하면 메로빙거 왕조에 의해 몰락한 가문이 나중에 부계로 이어져 역으로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6] 참고로 이 사람은 모계 쪽으로 클로타르 1세의 외손자이다.[7] 궁재 직위는 이때만 해도 엄연한 관직이어서 세습될 수 없었다. 세습의 시도는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 다른 귀족 가문들 사이에 파문이 일어 척결되었다. 피핀 가문은 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이 분열된 틈을 타 직위를 세습하는 데 성공한다.[8] 현 네덜란드, 독일 북해 인근 지방[9] 왕과 같은 행보에도 불구하고, 피핀 2세가 아직 궁재라는 것을 잊지 말자.[10] 드로곤, 그리모알드 2세[11] 피핀의 기증이라 함.[12] 특히 기하학에 두각을 보였다고 한다. 글을 모르는데 어떻게 기하학을?ㄷㄷ[13] 팔라딘의 어원이 된다.[14] 문법론, 수사학, 논법[15] 산수, 기하학, 천문학, 음악[16] 다만, 현재는 르네상스 자체에 그다지 큰 변화가 아니라는 비판 및 반론이 많다.[17] 부왕인 카롤루스 대제가 공동황제로 임명했으나 단명[18] 대관을 망설였다.[19] 4대손 루이 5세를 끝으로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는 단절되었다.[20] 카롤루스 대제 이후 베르됭 조약, 프륌 조약, 메르센 조약, 리베몽 조약으로 분열된 프랑크 왕국을 일시적으로 재통일했다.[21] 루트비히 2세의 장남으로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 사촌인 루도비코 2세에게 제위를 약속받았으나 삼촌인 샤를 2세 대머리왕이 먼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대관식을 받았다. 단명하여 이탈리아와 제위를 막내 카를 3세에게 상속하였다.[22] 카를로만의 서자 아르눌프가 일시적으로 제위를 얻었으나, 그 아들 유아왕 루트비히 4세를 끝으로 동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는 단절된다.[23] 실제로 대머리였던 것이 아니라 영지가 없는 것을 머리에 쓸 관이 없는 것에 비유해 대머리라는 별명이 붙었다[24] 말더듬이 루이 2세의 아들이자 뚱보 카를 3세의 5촌 조카[25] 카를루스 1세의 차남인 로마왕 피핀의 서자인 베르나르드의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