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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레갈리아. 신성 로마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들로, 중세 레갈리아들 중 유일하게 완벽한 상태로 보존된 레갈리아다.2. 착용 모습
마티아스 | 프란츠 1세 | 요제프 1세 |
요제프 2세 | 프란츠 2세 | 카롤루스 대제[1] |
지기스문트 | 레오폴트 2세 |
3. 목록
3.1. 아헨 레갈리아
3.1.1. 대관식 성경
Krönungsevangeliar.
카롤루스 대제 시절의 8세기 후반 아헨에서 제작된 성경. 원래 카롤루스 대제의 무덤에 묻혀있던 것을 1000년 오토 3세가 꺼냈고, 그 이래로 모든 황제들이 대관식 때마다 오른손 세 손가락을 올려놓고 황제 맹세를 했다.
대관식 성경은 진홍색으로 염색한 236장의 양피지로 만들어졌다. 금빛과 은빛의 잉크로 글씨를 새겼고 한 페이지의 크기는 32.4cm X 24.9cm이며 한 페이지 당 26줄의 텍스트가 적혀있다. 총 4개의 복음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복음서의 시작 부분마다 복음서의 저자를 묘사한 16개의 판과 4개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이 초상화는 비잔틴 예술에서 영향받은 카롤링거 스타일로 그려졌는데, 카롤링거 궁정에서 일하던 동로마 예술가들이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2]
성경은 3가지의 금빛 글씨체로 쓰여있다. 첫 번째 줄은 루스틱 캐피털체로,[3] 두 번째 줄은 쿼드라타 캐피털체로,[4] 마지막 세 번째는 마침표나 띄어쓰기가 없는 언셜체[5]로 썼다. 성경은 라틴어로 적혀있다.
대관식 성경의 표지는 1500년 아헨의 금세공인 한스 폰 리우트링겐이 제작했다. 또렷한 부조로 조각된 순금 표지는 보좌에 앉아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묘사한다. 신의 왼손은 성경 위에 얹혀져 있고, 수태고지의 성모 마리아를 향한 축복의 몸짓으로 오른손을 들고 있다. 표지의 오른쪽에는 수태고지의 천사가 그려져있다. 신은 표지가 제작될 당시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가 착용했던 황제의 예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표지의 네 모서리에는 4개의 복음서의 상징들이 각각 하나씩 새겨져 있다.
3.1.2. 성 스테판의 지갑
앞면 | 뒷면 | 옆면 |
Stephansbursa
9세기경 제작된 각종 보석이 박힌 금제 보물함. 성 스테파노의 피가 흠뻑 젖은 흙이 담겨있다고 한다.
대략 830년 경에 제작되었으며, 높이는 32cm 정도로 그렇게 크지는 않다. 원래 로마의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성당에 보관되어있다가,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 대제에게 선물해줬다고 한다. 이후로 아헨의 팔라틴 예배당에 있는 카롤루스 대제의 대리석 왕좌 아래 만들어진 벽감 아래에 고이 안치됐다.
원래는 나무로 만들고 금박을 씌운 받침대가 있었다고 한다. 진주와 금, 보석으로 장식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사라졌다.
지갑의 앞면에는 수많은 보석들이 빼곡하게 박혀있으며 꼭대기에는 5개의 보석들이 추가적으로 더 세팅되었다. 이런 형태의 장식법을 '크룩스 젬마타'라고 부르며, 초기 기독교에서 십자가나 성물들을 보석 등으로 화려하게 세공하던 전통을 의미한다. 지갑의 옆면은 금박으로 덮였고 사냥꾼, 낚시꾼, 매 사냥꾼, 복수의 여신이 새겨졋다. 지갑의 뒷면도 원래는 옆면과 거의 비슷했지만 19세기 초에 금박을 덮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3.1.3. 카롤루스 대제의 검
Säbel Karls des Großen
카롤루스 대제가 쓰던 것이라고 믿어지던 기병도.
독일인들은 이 검이 카롤루스 대제가 직접 사용하던 기병도라고 믿어 최고의 성물로 숭배했다. 전승에 따르면 오토 3세가 서기 1000년 경 카롤루스의 무덤을 열었을 때 꺼냈으며 그 이래로 황제의 대관보기 중 하나로 쓰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이 검의 연대를 조사해본 결과, 헝가리 양식의 초기형 세이버로 10세기~11세기에 만들어진 것임이 들통났다. 카롤루스 대제가 814년에 죽은 걸 생각해보면 카롤루스 대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
하지만 카롤루스의 것이 아닐지라도 무려 800년 간 신성 로마 황제의 보물들 중 하나로 대접받았기에 여전히 신성한 보물로 여겨졌다. 1794년 프랑스 군대가 아헨으로 진격하자 황제는 아헨의 보물들을 파더보른의 카푸친 수도원으로 옮겼고, 1798년에는 힐데스하임으로, 1801년에는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으로 옮겨갔다. 1938년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뉘른베르크로 가져갔다가, 종전 후 미군이 1946년에 다시 호프부르크에 돌려놓은 이래로 여전히 빈에 소장되어 있다.
이 외에 카롤루스와 관련된 전설에 나오는 주와이외즈라는 검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박물관에 따르면 조사결과 부품들이 10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걸쳐 완성된것이라한다. 이것또한 진품은 아니지만 귀중한 유물인 셈.
3.2. 뉘른베르크 레갈리아
3.2.1.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
자세한 내용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 문서 참고하십시오.3.2.2. 제국십자가
앞면 | 뚜껑을 연 모습 |
Reichscross
성창과 성십자가 유물을 담아놓는 보관함이다. 1024~1025년 경 로타링기아 왕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350년에 카를 4세의 명으로 프라하에서 오래된 프레임을 현재의 화려한 금은 금속 프레임으로 바꾸었다. 그 이래로 황제의 대관보기들 중 하나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보관 중이다.
외부는 금박으로, 내부는 붉은 가죽으로 덧대었으며 프레임은 참나무로 깎았다. 크기는 약 77cm X 70cm 정도다. 십자가의 앞면은 크룩스 젬마타 양식으로 화려한 보석, 진주와 금은으로 장식했고 뒷면은 니엘로 기법으로 장식했다. 십자가 중앙에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새겨져 있으며 십자가의 네 끝에는 12사도와 4개의 복음사가가 새겨졌다.
애초에 목적이 성물을 보관하기 위한 성물함이기 때문에 앞면의 여러 부분을 들어올려 안의 수납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다. 수납공간 내부는 짙은 붉은 가죽으로 안감처리되어 있으며 성창과 성십자가와 딱 들어맞는 사이즈다. 그 외에 약간 작은 직사각형 공간도 하나 더 있는데 이건 아직 용도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제국십자가의 측면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ECCE : CRVCEM : DOMINI : FVGIAT : PARS : HOSTIS : INIQVI : † HINC : CHVONRADI : TIBI : CEDANT : OMNES : INIMICI :
보라! 적대적인 악의 세력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도망가기를 † 그리하여 모든 악한 자들이 콘라트, 당신에게 항복하기를
여기서 나온 '콘라트'는 콘라트 2세를 의미하며 고고학자들은 이 제국십자가가 콘라트 2세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로 십자가를 예수의 고통과 고문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승리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중세 전성기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로마네스크 예술에서 자주 등장한다.보라! 적대적인 악의 세력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도망가기를 † 그리하여 모든 악한 자들이 콘라트, 당신에게 항복하기를
십자가의 밑부분 받침대는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금은으로 만들어졌으며 목재 코어에 4개의 에나멜 문장으로 장식했다. 앞면과 뒷면의 방패문에는 머리 하나인 독수리가 오른쪽을 바라본 채로 새겨져 있으며, 양쪽 측면에는 붉은색 배경에 은빛 보헤미아 사자가 새겨졌다. 받침대의 사이즈는 높이 17.3cm, 밑면 29.2cm X 22cm 정도다.
3.2.2.1. 성창
로마 병사가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전설 상의 롱기누스의 창.
물론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그 창은 아니고, 그보다 800년은 늦게 등장한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전형적인 창날이다. 오스트리아 학자들의 X레이 분석 결과 일러도 8세기, 대략 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하인리히 1세가 926년 부르고뉴 국왕 루돌프 2세에게 구매했다는 기록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6] 당시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성정을 녹여서 이 성창을 장식했다고 믿었다.
하인리히 1세는 전쟁 때마다 이 성창을 늘 가지고 다녔다. 그는 933년 3월에 리아데 전투에서 마자르족과 맞서싸우러 나갈때 이 성창을 갖고 나갔고, 그 결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아들인 오토 1세 역시 939년 비르텐 전투에 이 창을 가지고 나갔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며 동로마에도 롱기누스의 성창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 성창을 대놓고 들고다니기 불편했던 오토 1세는 이 창을 들고 다니지 않거나 창의 소유주가 롱기누스가 아닌 그가 평소 존경하던 성 마우리시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424년 지기스문트는 성창을 프라하에서 뉘른베르크로 옮겼다. 창은 약 300년 동안 뉘른베르크에 안치되어 있다가, 1796년 프랑스 혁명군이 뉘른베르크로 접근하자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빈으로 옮겨졌다. 신성 로마 제국 해체 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뉘른베르크는 성창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당연히 합스부르크 가문은 말끔하게 씹어버렸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이 성창을 다시 뉘른베르크로 옮겨왔다. 우연이겠지만 승리의 상징이었던 이 성창을 미군이 확보한지 채 2시간도 되자 않아 히틀러가 벙커에서 자살했다고 한다.
가장 큰 특징은 창날 허리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금박이다. 1354년 카를 4세가 추가한 것으로 "✝ LANCEA ET CLAVVS DOMINI", "주님의 창과 못"이라는 라틴어 텍스트가 새겨져 있다. 롱기누스의 창과 성정을 이용해 만든 창날이라는 뜻이다. 이 금박 아래에는 1084년 하인리히 4세가 붙여놓은 은박이 하나 더 있는데, 여기에도 라틴어로 "CLAVVS DOMINICVS ✝ HEINRICVS D[EI] GR[ATI]A TERCIVS / ROMANO[RVM] IMPERATOR AVG[VSTVS] HOC ARGEN / TVM IVSSIT / FABRICARl AD CONFIRMATIONE[M] / CLAVI D[OMI]NI ET LANCEE SANCTI MAVRI / CII // SANCTVS MAVRICIVS", "주님의 못 ✝ 로마의 황제이자 아우구스투스인 하인리히 3세의 은총으로 주님의 못과 성 마우리시오의 창을 강화하기 위해 이 은조각을 만들도록 명령하다"가 쓰여있다. 눈여겨볼 점은 1084년에는 이 창이 롱기누스의 것이 아닌 성 마우리시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은근슬쩍 다시 이게 롱기누스의 창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3.2.2.2. 성십자가
3.2.3. 제국보주
제국보주 |
Reichsapfel
신성 로마 제국의 보주. 원래 로마 제국의 주피터에서 유래한 물건으로 세계를 상징하는 구다. 신성 로마 황제들은 이 보주를 왼손에 쥐고 있음으로써 전 세계를 통치한다는 권위를 드러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과 홀과 함께 대관식에서 황제가 직접 들고 있던 물건이었다. 그림 속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레갈리아이기도 하다. 몸체는 레진으로 만들어 그 위에 황금을 입혔다. 높이는 약 21cm, 그 위에 진주와 보석들로 화려하게 장식해놨다. 구의 둘레와 십자가에는 진주를 박아놨고, 십자가의 교차점에는 사파이어를 박았다. 이 사파이어에 메로빙거 왕조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고도 하는데 확실하진 않다.
1014년 2월 14일, 하인리히 2세가 교황 베네딕토 8세에게 대관을 받기 위해서 로마에 도착했을 무렵, 교황이 직접 하인리히 2세에게 황금으로 만든 보주를 선물로 내어줬다고 한다. 현재 빈에서 볼 수 있는 보주는 12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보주다. 1191년에 하인리히 4세의 대관식 당시 그가 사용한 보주라고 한다. 원래 이 보주 말고도 다른 보주들도 만들어졌지만 이들은 중간에 유실됐다.
3.2.4. 대관식 망토
Krönungsmantel
1133년 시칠리아에서 제작된 대관식 망토. 당시 시칠리아에 혼재하던 동로마 제국, 이슬람, 노르만 문화가 섞여있는 우아한 작품이다. 바닥까지 닿는 너비 342cm의 반원형의 망토로 외투처럼 양쪽 어깨에 느슨하게 걸쳐 입었다. 연지벌레와 레드우드로 염색한 붉은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금사, 10만 개에 달하는 진주와 에나멜 판으로 장식했다. 워낙 주렁주렁 수놓은 장식 때문에 그 무게만 11kg에 달한다.
망토에는 낙타를 제압하는 사자의 모습이 데칼코마니로 새겨져 있다. 양쪽의 사자들 사이에는 야자나무가 생명수의 의미로 떡하니 수놓아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슬람권에서 온 오리엔탈스러운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작품이다. 사자와 낙타의 의미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노르만인을 상징하는 사자가 무슬림 아랍인을 상징하는 낙타를 잡아먹는 의미라고도 하지만, 이전의 기록에 무슬림들을 낙타에 비유하는 기록이 없기에 확실하진 않다. 악정(惡政)을 상징하는 낙타를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자가 몰아내는 모습이라는 해석도 있다.
망토의 안감은 금사와 은사로 엮은 이탈리아산 다마스크 직물을 덧대서 만들었다. 원래부터 있었던건 아니고 1520년 아헨에서 열릴 카를 5세의 대관식을 준비하기 위해서 일부러 뉘른베르크에서 수선했다. 이 직물 아래에는 기존의 안감이 가려져있다. 원래의 안감은 빛나는 금색 배경에 새, 사람, 황금꽃이 피어있는 녹색 덩굴손, 드래곤 따위가 수놓아져 있다. 이 문양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역시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원래 이 망토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루제루 2세를 위해 만들어진 망토다. 루제루 2세는 자신의 궁정에 동로마, 무슬림, 노르만 예술가들을 모아놓고 막대한 후원을 퍼부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런 걸작이 탄생했던 것. 이 망토는 루제루 2세의 딸 쿠스탄차 1세에게 상속됐고, 쿠스탄차 1세가 1186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와 결혼하며 신성 로마 궁정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하인리히 6세는 망토를 독일의 호엔슈타우펜 성으로 가져왔고, 이후 황제의 보물로 취급받으며 필리프, 프리드리히 2세의 대관식에 사용됐다.
이후 망토는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며 신성하게 보관되다가 1423년부터는 후스 전쟁으로 훼손을 우려해 기존에 보관되어 있던 프라하에서 떠나 뉘른베르크에 영구적으로 정착했다. 1764년에는 요제프 2세가 아버지 프란츠 1세 황제가 지켜보는 앞에서 황태자격에 해당하는 독일왕으로 대관식을 치르며 즉위했고, 이때 이 망토를 복제해서 또다른 망토를 만들기도 했다.[7]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이후, 프랑스가 뉘른베르크를 점령하자 합스부르크 가문은 한 발 앞서 망토와 보물들을 빼돌렸다.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일단 보물들을 레겐스부르크로 옮겼다가, 1800년 비밀리에 빈까지 안전히 옮기는데까지 성공했다. 프란츠 2세 역시 나폴레옹이 혹여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유물들을 악용하는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아헨에 있던 나머지 유물들까지 싸그리 빈으로 빼돌렸다. 훗날 아돌프 히틀러가 잠시 뉘른베르크로 유물들을 되돌려놓았다가,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1946년 미군이 다시 빈으로 되돌렸고 현재까지도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 소장되어 있다.
3.2.5. 속옷
Alba
1181년 시칠리아 국왕 구기에르무 2세를 위해 팔레르모에서 제작된, 속에 받쳐입는 제례 예복이다. 이후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시칠리아 왕국을 상속받으면서 독일로 넘어와 신성 로마 황제들의 대관식 때 대대로 물려주었다.
속옷은 옅은 노란빛을 띄는 타페타로 만들었고 가장자리에는 같은색의 실크로 덧대서 장식했다. 가슴팍, 손목둘레, 팔둘레를 보면 화려한 천이 가장자리에 덧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황금색 배경에 2마리의 사자가 서로 마주보는 모습, 보라색 배경에 2마리의 그리핀이 서로 마주보는 모습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천 가장자리에는 라틴어로 '† OPERATV(M) FELICI VRBE PANORMI XV YEAR D(OMI)NI W(ILHELMI) D(E)I GR(ATI)A REGIS SICILIE DVCAT(V)S APVLIE ET PRINCIPAT(V)S CAPVE FILII REGIS W(ILHELMII) INDICTIONE XIII'이 쓰여있다.
놀랍게도 아랍어 문장이 여기 새겨져 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의 군주, 신에게 힘을 구하고 그의 전능하심에 힘입어 승리를 간청하는 존경받는 왕, 로마 교황의 보호자이자 기독교의 수호자이신 구기에르무 2세가 만들도록 명령한 예복 중 하나. - 우리 주 예수 메시아의 시대 1181년, 예고 14년에 항상 잘 정돈된 작업장에서.'라는 뜻이다. 가톨릭 제국의 황제가 아랍어로 쓰인 예복을 입었다는 것이 다소 생소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속옷이 시칠리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놀라울 것도 없다. 당시 시칠리아는 동로마, 노르만, 무슬림의 전통이 모두 섞여있던 지방이었기 때문.
가장자리는 6줄의 진주로 장식했다. 가슴팍, 손목둘레, 팔둘레에 있는 화려한 장식천은 시칠리아의 공방에서 만들어진 900년 된 진품이다. 또한 소매의 안감 역시 호엔슈타우펜 왕조 때 만들어진 800년 된 것이다. 다만 속옷의 황백색 타페타 천 본체는 1520년 아헨에서 거행될 카를 5세의 즉위식을 위해서 한번 새로 갈아끼운 것이다. 당시 천이 워낙 오래돼서 대관식 때 쓰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삭아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3.2.6. 신발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에서 구기에르무 2세를 위해 제작된 신발.
밝은 붉은색 벨벳으로 만든 신발이다. 보석으로 장식한 넓은 황금 띠가 발끝에서 발 뒤꿈치를 거쳐 발등까지 쭉 이어진다. 측면에도 얇게 황금 띠와 그리핀, 사이렌이 새겨진 메달을 붙였고 그 위의 여백공간에는 보석과 두 줄의 진주로 생명수를 표현했다. 신발의 높이는 10.5cm, 길이는 약 26cm 정도이며 밑창은 소가죽으로 만들었다. 신발에는 사파이어 5개, 자수정 4개, 에메랄드 1개, 자수정색 유리석 등 총 11개의 보석이 박혀있다.
3.2.7. 장갑
3.2.8. 홀
[1] 알브레히트 뒤러의 상상화. 카롤루스 대제는 생전에 이 레갈리아를 입은 적이 없다. 다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일부러 당대 황제 지기스문트와 같은 레갈리아를 입고 있는 카롤루스 대제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2] 대관식 성경의 누가복음 가장 첫 번째 장에는 '데메트리우스 프레스바이터'라는 이름이 금빛 대문자로 적혀있다. 그리스식 이름인 걸 보아 동로마 제국 출신 예술가라고 추정된다.[3] 고대 로마에서 4세기~6세기 경에 사용하던 글씨체. 뒤에 언급된 쿼드라타 캐피털체에 비하여 덜 딱딱한 글씨체로 중근세 유럽에서 본문의 제목을 적는 데에 많이 썼다.[4] 역시 고대 로마에서 사용되었던 글씨체. 현대 영어 대문자의 원형으로, 로마의 판테온에 새겨져 있는 글씨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5] 서기 4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필사본에서 사용되었던 대문자만의 글꼴이다. 언셜체는 그리스어, 라틴어, 고트어 표기에 사용되었다.[6] 부르고뉴의 루돌프 2세는 이 성창을 '삼손 백작'이라는 자에게서 받았다고 하는데, 이 이전의 소유주들은 밝혀지지 않았다.[7] 참고로 이때 망토 뿐만 아니라 황관, 홀, 보주도 모두 복제해서 요제프 2세가 사용했다. 현재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관으로 알려진 황관도 이때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