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3 02:03:10

쿠스탄차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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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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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2106><colcolor=#FFF> 시칠리아 왕국 아우타빌라 왕조 제7대 국왕
쿠스탄차 1세
Custanza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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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쿠스탄차 1세
(Custanza I)
출생 1154년 11월 2일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사망 1198년 11월 27일 (44세)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재위 시칠리아 왕국의 여왕
1194년 ~ 1198년 11월 27일
배우자 하인리히 6세 (1186년 결혼 / 1197년 사망)
자녀 프리드리히 2세
아버지 루제루 2세
어머니 레텔의 베아트리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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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이자 시칠리아 왕국 7대 여왕. 남편 하인리히 6세와 함께 공동 왕이 되었고 남편 사후 아들 프리드리히 2세의 공동 왕 지위까지 섭정했지만 1년만에 사망했다. 시칠리아의 마지막 오트빌 왕조 국왕이다.

2. 생애

1154년 11월 2일 시칠리아 왕국 초대 국왕 루제루 2세와 세번째 왕비 흐뗄의 베아트리체[1]의 딸로 출생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사망했고, 이복 형제인 굴리에모 1세와 조카 굴리에모 2세가 각각 1154년과 1166년에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결혼하면 시칠리아를 파괴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돌았고, 굴리에모 1세는 이를 경계해 그녀를 어릴 때부터 수녀원에 감금하여 독신으로 지내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설을 입증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1183~1184년 겨울, 프리드리히 1세의 사절이 팔레르모에 도착한 뒤 자신의 장남 하인리히 6세와 쿠스탄차를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당시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면 시칠리아 왕국을 회유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발칸 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굴리에모 2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고, 1184년 여름 하인리히 6세와 쿠스탄차의 약혼을 승인했다. 이후 쿠스탄차는 1185년 8월 팔레르모를 떠나 살레르노로 향했고, 그해 8월 28일 리에티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사절을 만난 뒤 독일로 향했다.

1189년 11월 18일, 굴리에모 2세는 팔레르모에서 사망했다. 그는 아내 조안나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죽기 직전에 굴리에모 2세의 고모이자 유일한 혈육인 쿠스탄차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마테오 데 아젤로 등 대다수 노르만 귀족들은 쿠스탄차와 결혼한 하인리히 6세가 이를 빌미 삼아 시칠리아 왕을 자처할 게 뻔하고,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시칠리아에 들어서면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게 뻔하다고 여겨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안드레아 백작 루지에로와 레체의 탕크레드를 놓고 고심한 끝에 1190년 1월 탕크레드를 왕으로 추대했다.

1190년 프리드리히 1세가 동방 원정 중 사망한 뒤 독일왕으로서 제국을 이끌게 된 하인리히 6세는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190년 3월,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와 아풀리아 및 캄파니아 귀족들은 탕크레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탕크레드를 몰아내기 위해 하인리히 6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하인리히 6세는 1190년 5월 칸덴의 하인리히 휘하 제국군을 남부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무슬림 봉기를 진압하느라 바빴던 탕크레드는 아세라 백작 리샤르에게 남부 이탈리아를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 리샤르는 상당한 용병을 모집한 뒤 제국군과 반란군이 합류하기 전에 공세를 개시해 1190년 9월 반란군을 섬멸하고 제국군을 쫓아냈다.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는 토벌군에게 붙잡힌 뒤 처형되었다.

1191년 1월, 하인리히 6세가 이끄는 제국군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롬바르드 연맹과 피사의 지원을 받은 하인리히 6세는 1191년 4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로마에 입성했다.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했던 클레멘스 3세는 제국군이 당도하기 직전에 사망했고, 뒤이어 새 교황이 된 첼레스티노 3세는 제국군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1191년 4월 15일, 하인리히 6세와 쿠스탄차는 새 교황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황후로서 즉위식을 치렀다. 이후 하인리히 6세는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아베르사, 카푸아, 타란토, 몬테 카시노 등 여러 도시가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했고, 살레르노 주민들은 아예 제국군이 접근하기도 전에 하인리히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쿠스탄차에게 자신들의 도시에서 여름을 보내도록 초대했다.

그러나 제국군의 공세는 나폴리 성벽에서 저지되었다. 아크라 백작 리샤르는 제국군에 맞서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지만, 살레르노 대주교 니폴라 데 아겔로가 수비를 이끌어 제국군의 맹공을 막아냈다. 여기에 해상에서는 브린디시의 마르가리트 제독이 지휘하는 시칠리아 함대가 제국군을 지원하던 피사 함대를 격파했다. 이로 인해 나폴리 공성전이 지지부진했고, 설상가상으로 군영에서 전염병이 나돌면서 많은 제국 병사들이 죽어갔다. 결국 하인리히 6세는 1191년 8월 24일 나폴리 포위를 해제하고 독일로 철수했다. 그는 이전에 점령한 도시에 수비대를 배치했고, 쿠스탄차는 살레르노에 남아서 자신과 남편의 시칠리아 왕관에 대한 권리를 고수하기로 했다.

하인리히 6세의 제국군이 독일로 철수하자, 그 때까지 쿠스탄차를 극진히 모시던 살레르노 주민들은 태도를 싹 바꿔 쿠스탄차를 붙잡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살레르노에 찾아온 탕크레드의 조카가 이를 막고 쿠스탄차를 메시나로 이송했다. 메시나에서 쿠스탄차와 대면한 탕크레드는 외국군을 끌여들어 조국을 위태롭게 만든 책임을 물었다. 이에 쿠스탄차는 탕크레드에게 빼앗긴 자신의 통치권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탕크레드는 쿠스탄차를 팔레르모에 유폐시킨 뒤 하인리히 6세가 남겨둔 수비대를 모조리 몰아내고 북부 캄파니아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남부 이탈리아를 탈환했다.

쿠스탄차는 팔레르모에 이송된 뒤 탕크레드의 왕비 시빌라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시빌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식사를 하고 그녀의 침실에서 함께 자야 했으며, 궁궐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팔레르모 시민들이 그런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자, 시빌라는 탕크레드에게 쿠스탄차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탕크레드는 마테오 데 아젤로의 제안에 따라 쿠스탄차를 나폴리로 이송해 엄중한 감시를 받게 했다.

1192년 6월, 첼레스티노 3세가 파견한 교황 특사가 그라비나스에서 탕크레드와 만났다. 하인리히 6세의 강압적인 태도에 반감을 품었던 첼레스티노 3세는 전임 교황 클레멘스 3세와 마찬가지로 탕크레드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했다. 이때 교황 사절은 탕크레드에게 쿠스탄차를 로마로 보내라고 요청했다. 첼레스티노 3세는 하인리히 6세의 황후를 인질로 삼음으로써 하인리히 6세와의 정치 대결에 이용하려 했다. 탕크레드는 이를 받아들여 쿠스탄차를 로마로 보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가 은밀히 파견한 독일 기사단이 로마로 이송중이던 쿠스탄차를 빼돌려 독일로 데려왔다.

그 후 하인리히 6세는 독일에서 벨프 가문과 싸우느라 시칠리아 방면에 신경을 쓰지 못 했다. 그러던 1194년 초, 탕크레드가 사망하고 8살의 굴리에모 3세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인리히 6세는 이를 호기로 여기고, 1194년 8월 제노아, 피사와 연합하여 시칠리아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그해 10월, 제국군은 남부 이탈리아를 석권한 뒤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로 진격했고, 11월 20일 팔레르모의 항복을 받아냈다. 시빌라 왕비는 저항을 포기하고 아들을 대신해 시칠리아 왕권을 포기했다. 하인리히 6세는 1194년 12월 25일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를 임신 중이었던 쿠스탄차는 1194년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남부 이탈리아에서 산후 조리를 하느라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1194년 12월 26일, 쿠스탄차는 안코나에서 아기를 낳은 뒤 12월 28일에 제시 시장 한 가운데 천막을 치고 모든 기혼 여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들에게 젖을 먹였다. 이는 당시 40세가 넘었던 그녀가 아들을 낳을 리 없다는 세간의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엄밀히 따진다면, 쿠스탄차가 시칠리아 왕국의 정당한 상속녀였고 하인리히 6세는 여왕의 남편일 뿐이었다. 그러나 순종적인 성격이었던 그녀는 남편이 시칠리아 왕을 자처하는 것을 받아들였고 왕관도 쓰지 않았다. 한편 하인리히 6세는 탕크레드의 지지자 대부분을 처형하거나 실명형에 처하거나 독일로 추방했고, 독일에서 데려온 남작들로 시칠리아 궁정을 채웠다.

그 후 팔레르모 궁정에서 아들을 양육하며 조용히 지내던 쿠스탄차는 1197년 9월 28일 하인리히 6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비로소 통치를 행사했다. 그녀는 남편의 독일인 동료들을 궁정에서 몰아내고 시칠리아인들로 대체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제관을 지키기 위해 아들 프리드리히를 독일로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단호히 물리쳤다. 1198년 5월에는 이제 갓 세살 된 아들을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얼마 후 중병에 걸려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게 분명해지자, 그녀는 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왕국을 통치하고 후견인이 되어줄 역할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맡겼다. 1198년 11월 27일에 사망했고, 팔레르모 대성당의 반암 석권에 안장되었다.


[1] 프랑스어로는 '레텔의 베아트리스'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