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3 07:58:24

만프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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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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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fredi
가문 호엔슈타우펜 왕조
생몰년도 1232년 ~ 1266년 2월 26일
출생지 시칠리아 왕국 베로사
사망지 시칠리아 왕국 베네벤토
재위
기간
시칠리아 왕국 국왕 1258년 - 1266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
어머니 비앙카 란치아
배우자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체, 엘리니 앙겔리나 두케나
자녀 쿠스탄차 2세, 베아트리체, 엔리코, 아졸리노, 프리드리히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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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칠리아 왕국 12대 국왕. 콘라딘의 섭정을 맡다가 콘라딘이 죽었다는 소문을 믿고 시칠리아 왕이 되었다. 이후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끊어버리려는 교황청의 공세에 단호히 맞섰지만 교황의 사주를 받은 카를루 1세와의 전쟁에서 패사했다.

2. 생애

1232년경 시칠리아 왕국의 베로사에서 시칠리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와 비앙카 란치아의 사생아로 출생했다. 그는 라틴어, 히브리어, 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를 빠르게 익히고 한 번 배운 것을 금세 터득하는 등 지적 역량이 탁월했고 무예와 용기도 탁월해 아버지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1247년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4세의 딸이자 살루초 후작 만프레디 3세의 미망인인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체와 만프레디의 결혼을 주선했다. 또한 그를 합법적인 아들로 공인했으며, 타란토의 공작으로서 콘라트 4세신성 로마 제국을 이끌 때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대리 통치하게 했다.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자, 교황청과 심한 갈등을 벌였던 호엔슈타우펜 왕조에 악감정을 품고있던 인노첸시오 4세는 남부 이탈리아 귀족들을 부추겨 시칠리아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하지만 만프레디는 곧바로 왕실군을 이끌고 토벌에 착수해 나폴리를 제외한 수많은 반란시들을 제압했다. 이후 나폴리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면서 인노첸시오 4세와 화해를 시도했지만, 교황이 응하지 않아 실패했다. 그러던 1252년 남부 이탈리아에 찾아온 콘라트 4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모든 권한을 도로 가져가고 만프레디는 타란토 공국만 다스리게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린 아들 콘라딘을 시칠리아 왕으로 선임하고, 교황에게 콘라딘을 보필해달라고 부탁했으며, 콘라딘의 섭정으로 호엔베르크의 베르톨트 후작을 임명했다.

1254년 5월, 콘라트 4세가 26세의 나이에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만프레디는 인노첸시오 4세에게 시칠리아를 넘겨주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호엔베르크의 베르톨트가 섭정을 맡는 것 역시 거부하고 자신이 섭정을 맡았다. 이에 인노첸시오 4세는 그해 7월 만프레디를 파문했다. 만프레디는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하면서, 교황의 특사가 남부 아틸리아에서 교황을 대신해서 교회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교황 수행원들이 오만하게 굴자 반감을 품고 루체라에 거주하는 아랍인들과 손을 잡고 교황청에 대항했다. 1254년 11월 인노첸시오 4세가 나폴리에 입성하여 전쟁을 선도하자, 그는 포자로 진군해 12월 2일 교황의 조카 굴리에모 피에스키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군을 섬멸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은 큰 충격을 받고 1254년 12월 7일 나폴리에서 선종했다.

이후 만프레디는 투스카니 지방, 특히 시에나의 기벨린(친 황제파) 파벌에 독일 기사단을 지원해, 그들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구엘프(친 교황파) 파벌이 지배하는 피렌체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인노첸시오 4세의 뒤를 이어 새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4세가 만프레디를 또다시 파문하자, 남부 이탈리아 각지에서 친 교황 세력이 준동했다. 하지만 1257년에 모든 반란이 제압되었고, 알렉산데르 4세는 만프레디의 후원을 받은 기벨린 세력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로마에서 비테르보로 피신했다.

1258년 콘라딘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자, 만프레디는 그해 8월 10일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나중에 콘라딘이 파견한 사절들이 콘라딘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전했지만, 만프레디는 강력한 왕이 시칠리아를 다스려야 한다는 민중의 호소를 빌미삼아 퇴위를 거부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아랍인들과 손잡은 만프레디를 적그리스도라고 칭하며 주변 국가들에 십자군을 일으켜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만프레디는 입지를 강화하고자 마침 기벨린 파벌의 지도자 에셀리노 3세 다 로마노가 사망하자 대리자의 자격으로 토스카나, 스폴레토, 마르체, 로마냐, 롬바르디의 시장을 지명했으며, 피렌체 시민들에 의해 토스카나의 수호자이자 로마인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262년에는 자신의 딸 쿠스탄차를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1261년 선종한 알렉산데르 4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우르바노 4세는 만프레디를 세번째로 파문한 뒤 1263년 영국의 헨리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형제인 앙주의 샤를 1세에게 시칠리아 국왕으로 인정해줄 테니 만프레디를 토벌해달라고 청했다. 이중 샤를이 교황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고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만프레디는 로마에 선언서를 보내 자신이 왕국을 통치할 권한이 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권리도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샤를에 맞서기 위해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1265년 하반기에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수많은 기벨린 요새들을 공략한 샤를은 1266년 1월 로마에 입성하여 기벨린파를 몰아낸 뒤 1월 20일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인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1266년 2월 26일, 샤를의 프랑스군과 만프레디의 시칠리아군이 베네벤토에서 격돌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하들은 일단 몸을 피해 후일을 도모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기를 거부하고 적에게 돌진하다가 전사했다. 전투가 끝난 후 그의 유해는 수많은 돌무더기에 파묻혔다가 도로 파헤쳐진 후 나폴리와 교황령의 경계인 가리글리아노(Garigliano) 강둑에 안장되었다.

만프레디는 생전에 2번 결혼했다. 1247년 4월 21일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4세의 딸이자 살루초 후작 만프레디 3세의 미망인인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하고 딸 쿠스탄차를 낳았다. 베아트리체가 1259년 이전에 사망한 뒤, 1259년 6월 2일 이피로스 전제군주국데스포티스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딸 엘레니 앙겔리나 두케나와 재혼해 베아트리체, 엔리코, 아졸리노, 프리드리히를 낳았다. 이중 쿠스탄차는 1262년 훗날의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와 결혼하러 아라곤으로 떠났기에, 계모와 이복 형제들이 겪을 불행을 모면했다. 그녀는 나중에 시칠리아 왕이 된 남편 덕분에 시칠리아 여왕 쿠스탄차 2세가 되었다.

만프레디가 전사한 후 시칠리아 왕위에 오른 샤를은 엘레니와 베아트리체, 엔리코, 아졸리노, 프리드리히를 제포해 노세라 인페리오레(Nocera Inferiore) 성에 가두었다. 엘레니는 1271년 그곳에서 옥사했고, 세 아들은 카스텔 델 몬테(Castel del Monte)에 1299년까지 수감되었다가 나폴리 왕 카를로 2세에 의해 카스텔 델로보(Castel dell'Ovo)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않은 깜깜한 방에 갇혀 있으면서 음식을 겨우 얻어먹는 삶을 이어가야 했다. 아졸리노는 1301년 그 곳에서 사망했고, 엔리코는 1318년에 사망했다. 프리드리히는 감옥을 극적으로 탈출한 뒤 유럽의 여러 법정에서 서기 활동을 하다가 모종의 시기에 이집트로 건너가 1312년에 사망했다.

한편 베아트리체는 형제들과 함께 갇혀 있다가 1284년 나폴리 왕국과 전쟁을 벌이던 아라곤 사령관 라우리아(Lauria)의 루지에로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후 살루초 후작 토마스 1세의 아들 만프레디 4세와 결혼했고, 1296년 토마스 1세가 사망한 후 살루초의 후작 부인이 되었다.

3. 여담

단테 알리기에리신곡에서 만프레디의 영혼이 세 번 파문당한 대가로 30년간 연옥의 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는 이야기를 실었다. 구엘프파였던 단테가 여러 교황에게 파문당한 만프레디를 지옥이 아닌 연옥에 배치한 점은 특이하다 할 수 있는데, 파문을 정치 도구로 악용한 교황청의 행태는 친 교황청 성향인 그로서도 좋게 볼 수 없다고 여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만프레디는 여러 번 파문당한 사람 치고는 의외로 동시대인들에게 "육체적 아름다움과 지적인 성취를 고루 갖추었고 성격은 관대했다"는 호평을 받았으며, 시칠리아 왕국 주민들은 교황이 파문을 잇따라 내리는 걸 신경쓰지 않고 만프레디를 왕으로 받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