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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erick III | ||
가문 | 바르셀로나 왕조 | |
출생 | 1272년 12월 13일 | |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 ||
사망 | 1337년 6월 25일 (향년 64세) | |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 ||
재위 기간 | 시칠리아 왕국 국왕 | 1295년 ~ 1337년 |
아버지 | 페드로 3세 | |
어머니 | 쿠스탄차 2세 | |
형제자매 | 알폰소 3세, 하이메 2세, 이사벨, 비올란테, 페드로 | |
배우자 | 앙주의 엘레오노르 | |
자녀 | 페트루 2세, 루지에로, 만프레디, 쿠스탄차, 엘리자베타, 굴리에모, 조반니, 카타리나, 마르게리타 | |
종교 | 로마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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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칠리아 왕국 제16대 국왕.독일어 이름은 '프리드리히'이고, 시칠리아어 이름은 '피디리쿠(Fidiricu)'이다. 시칠리아 왕국에서 이름이 같은 전왕이 1명이라 시칠리아 왕호는 '피디리쿠 2세'이지만, 본인은 동명인 조상들의 서수를 따라 '프리드리히 3세'를 칭했다. 이로 인해 '2세'로도 불리고 '3세'로도 불리는 혼동이 있다.
2. 생애
1272년 12월 13일 아라곤 왕국의 수도 바르셀로나에서 페드로 3세와 쿠스탄차 2세의 3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본래 이름은 페데리코였다. 형제로 알폰소 3세, 하이메 2세, 아라곤의 이사벨, 비올란테, 페드로가 있었다. 1382년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을 틈타 카를루 1세로부터 시칠리아를 빼앗은 페드로 3세는 1385년 사망하기 전에 장남 알폰소 3세에게 아라곤, 바르셀로나, 발렌시아를 맡기고 차남 하이메 2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다.1291년, 알폰소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하이메 2세에게 아라곤 왕국을 맡기고 페데리코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하이메 2세는 아라곤에 돌아간 뒤 페데리코를 왕이 아닌 시칠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자신이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을 겸임했다. 그 후 시칠리아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페데리코는 유능한 해군 제독이었던 라우리아의 루지에로의 활약에 힘입어 프랑스-나폴리 왕국-교황청의 공세로부터 시칠리아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전쟁이 지속되는 것에 부담을 느낀 하이메 2세는 1295년 6월 12일 아나니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하이메 2세는 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교황의 왕좌로 양도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려줬다. 그러면서 카를로 2세의 아들들을 석방시켰다. 카를로 2세의 딸 블랑슈는 하이메 2세의 동생인 페데리코와 결혼하고,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카를로 2세에게 양도하고 블랑카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주며, 하이메와 페데리코를 파문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카를루 1세의 압제에 맞서 봉기한 바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이제와서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 2세를 왕으로 받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1296년 몇 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페데리코는 증조부 프리드리히 2세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호를 '프리드리히 3세'라고 칭하고 1296년 3월 25일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하이메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해 앙주 가문과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신속하게 공세를 개시해 칼라브리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 내부의 불만 세력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으며,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 파(친 황제파)와 협상했고, 보니파시오 8세의 정적인 콜론나 가문을 지원했다. 하이메 2세는 이런 동생을 응징하기 위해 그동안 시칠리아의 해군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이번에는 하이메 2세를 지지하기로 했던 라우리아의 루지에로에게 함대를 맡겨 시칠리아를 치게 했다. 1299년 7월 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올랜도 곶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격파했다. 또한 카를로 2세의 아들 로베르토와 필리포가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카타니아를 포위했다. 필리포는 트라파니를 포위하기 위해 별동대를 이끌고 진군했지만, 팔코나리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1300년 6월 1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폰자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재차 격파했고, 프리드리히 3세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1302년, 샤를 드 발루아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요청으로 이탈리아로 내려와서 시칠리아에 상륙했지만, 역병이 도는 바람에 군대가 궤멸되다시피하자 시칠리아군에게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의했다. 왕이 사로잡혀 있던 시칠리아군 역시 이에 동의하면서, 8월 19일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카를로 2세 역시 시칠리아의 왕으로 자처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다만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면 시칠리아 왕위는 앙주 가문에 돌아가기로 했다. 1303년 5월, 보니파시오 8세는 프리드리히 3세로부터 공물을 받는 대가로 조약을 비준했다. 여기에 프리드리히 3세와 카를로 2세의 딸 엘레오노르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후 수년간 평화를 누리던 프리드리히 3세는 131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로 남하하자 그와 동맹을 맺고 나폴리 왕국과 재차 전쟁을 벌여 레지오를 공략했다. 그는 나폴리로 남하하려는 황제와 합세하고자 토스카나 지방으로 이동했지만, 하인리히 7세가 1313년 8월 24일 부온콘벤토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시칠리아로 철수했다. 나폴리 국왕 로베르토는 이에 보복하고자 시칠리아를 여러 차례 급습해 많은 피해를 입혔다. 1317년 양자간에 휴전이 맺어진 후, 프리드리히 3세는 북이탈리아 분쟁에 개입해 기벨린파(친 황제파)가 제노아를 공격하는 것을 돕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교회 세입의 일부를 몰수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이를 응징하고자 1321년 프리드리히 3세를 파문하고 시칠리아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1325년, 나폴리 왕 로베르토의 아들 카를로 휘하의 앙주 육군과 함대가 시칠리아로 쳐들어왔지만 조반니 데 키아라몬테가 이끄는 시칠리아군에게 팔레르모 인근에서 패배했다. 1326년과 1327년에 앙주군이 시칠리아를 잇따라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그러다가 루트비히 4세가 이탈리아에 개입하자 나폴리군이 더 이상 시칠리아에 신경쓰지 않으면서, 프리드리히 3세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334년에 선출된 교황 베네딕토 12세는 프리드리히 3세의 권리를 보장할 의사를 표명했지만,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데 실패했다. 그 사이, 조반니 데 키아라몬테가 왕과 사소한 일로 불화를 벌인 끝에 나폴리로 귀순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앙주 가문에 대한 시칠리아인들의 증오를 끌어내 이를 토대로 단합된 국가를 건설하기를 희망했다. 초기에는 시칠리아를 잇따라 침략하는 앙주 가문에 대한 시칠리아인들의 분노가 극렬했기에 그의 의도대로 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앙주 가문의 편을 드는 교황을 견제하고자 기벨린 파(친 황제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자, 구엘프 파(친 교황 파)에 속한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시칠리아에 대한 무역 거래를 크게 줄여버리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많은 시칠리아인들이 무역으로 먹고 살았기 때문에, 무역 거래에 저해되는 정책을 벌이는 왕에 대한 시선이 갈수록 나빠졌다. 게다가 나폴리 국왕 로베르토가 시칠리아 항구들을 끈질기게 봉쇄했기에, 시칠리아의 경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333년 에트나 화산이 폭발하면서 기후가 악화되고 시칠리아에 전염병이 돌면서 많은 이가 목숨을 잃자, 시칠리아인들은 신이 프리드리히 3세가 저지른 죄를 묻기 위해 이런 재앙을 내렸다고 여겼다. 이렇듯 민심이 악화되던 1337년 6월 25일, 프리드리히 3세가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에서 사망했고, 아들 페트루 2세가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이것은 프리드리히 3세 사후 시칠리아 왕위가 앙주 가문에 돌아가기로 했던 칼타벨로타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기에, 나폴리 왕 로베르토는 이를 보복하고자 시칠리아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단행했다.
3. 가족 관계
- 앙주의 엘레오노르(1289 ~ 1341):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의 딸.
- 페트루 2세(1304 ~ 1342): 시칠리아 왕국 17대 국왕.
- 루지에로(1305): 요절.
- 만프레디(1306 ~ 1317): 아테네와 네오파트리아 공작
- 쿠스탄차(1304/1306 ~ 1344): 키프로스의 앙리 2세와 초혼, 아르메니아 왕 레온 4세와 재혼, 뤼지냥의 장과 삼혼.
- 엘리자베타(1310 ~ 1349): 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2세와 결혼.
- 굴리에모(1312 ~ 1338): 아테네 공작
- 조반니(1317 ~ 1348): 란다초 공작, 아테네와 네오파트리아의 공작, 시칠리아의 섭정.
- 카타리나(1320 ~ 1342): 메시나의 산타 키아라 수도원장
- 마르게리타(1331 ~ 1377): 팔츠 공작 루돌프 2세와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