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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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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II
가문 트라스타마라 왕조
출생 1398년 6월 29일
카스티야 왕국 메디나 델 캄포
사망 1479년 1월 20일 (향년 80세)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재위
기간
나바라 왕국 국왕 1425년 ~ 1479년
아라곤 왕국 국왕 1458년 ~ 1479년
시칠리아 왕국 국왕 1458년 ~ 1468년
아버지 페르난도 1세
어머니 알부르케르케의 엘레오노르
형제자매 알리폰소 5세, 엔리케, 레오노르, 마리아, 페드로, 산초
배우자 수리아 1세 (1420년 결혼 / 1441년 사망)
후아나 엔리케스 (1447년 결혼 / 1468년 사망)
자녀 카를로스 4세, 후아나, 수리아 2세, 레오노르, 페란도 2세, 후아나, 알폰소(사생아), 후안(사생아)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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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제19대 국왕, 시칠리아 왕국 제25대 국왕, 나바라 왕국 국왕.

같은 이름이 언어에 따라 변형되기 때문에 왕호는 스페인어로는 '후안 2세(Juan II)', 아라곤어로는 '추안 2세(Chuan II)', 바스크어로는 '호아네스 2세(Joanes II)'이다.

2. 생애

1398년 6월 29일 카스티야 왕국 메디나 델 캄포에서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의 차남 페르난도 왕자와 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의 사생아이자 알부르케르케 백작인 산초 알폰소의 딸인 엘레오노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마리아, 알폰소, 엔리케, 엘레오노르, 페드로, 산초가 있었다. 1412년 아버지가 카스페 협약에 의해 아라곤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14살의 나이에 카스트로의 영주가 되었다. 1414년 2월 아버지가 사라고사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페냐피엘 공작에 선임되었다. 얼마 후 시칠리아 사절들이 찾아와서 왕족 중 한 명을 섬의 새로운 지도자로 지명해달라고 요청하자, 페르난도 1세는 후안을 시칠리아의 총독으로 선임했다.

이 무렵,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오가 사망하고 조반나 2세가 새 여왕으로 등극했다. 페르난도 1세는 조반나 2세와 후안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여왕이 남편보다 먼저 죽으면 나폴리 왕국이 남편에게 넘어간다는 조항이 포함된 결혼 협약에 불신을 품은 조반나 2세가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리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시칠리아에 도착한 후안은 시칠리아의 전임 국왕 마르티누 1세의 미망인인 수리아 1세와 대면하고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에 흠뻑 빠졌다. 하지만 수리아는 곧 시칠리아를 떠나 나바라로 돌아갔다.

1416년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하자, 후안은 아버지가 소유했던 카스티야의 영지와 작위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그는 곧바로 형 알폰소 5세에게 시칠리아를 넘긴 뒤 카스티야로 떠났다. 이후 가문의 영지 관리에 진력하던 그는 1418년 10월 20일 메디나 델 캄포에서 열린 카스티야 왕 후안 2세와 누이 마리아의 결혼식에 참석했으며,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중재를 통해 나바라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인 수리아와 결혼했다. 이때 맺은 협약에 따르면, 수리아 여왕의 권리는 그녀와 후안의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남편보다 먼저 죽으면 후안은 나바라를 떠나야 했다. 결혼식은 1420년 6월 10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결혼식이 있은 지 한 달 후인 1420년 7월 14일, 형제 엔리케가 주동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는 툴레도 대주교로부터 쿠데타가 일어날 거라는 경고를 전해듣고 아내를 나바라에 남겨둔 뒤 페냐피엘로 가서 추종자들을 소집한 뒤 엔리케를 물리치려 했다. 이에 엔리케는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를 산티아고 기사단의 영지로 이송시키려 했다. 그러나 카스티야의 후안 2세가 시종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알바로 데 루나의 도움을 받고 탈출해버리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엔리케는 카스티야의 후안 2세가 숨은 푸에블라 성을 포위했지만 좀처럼 공략하지 못하다가 후안 2세를 구하기 위한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했다.

그 후 후안 2세는 알바로 데 루냐를 오카냐에 군대를 집결시킨 엔리케에게 보냈다. 알바로는 왕이 그를 만나기를 원한다면서, 만약 기사들을 대동하여 왕을 뵈려 한다면 후안 왕자와 톨레도 대주교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이 반역으로 간주하고 토벌하려 들 테니 홀로 오라고 권고했다. 엔리케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때까지는 왕을 만날 수 없다며 뻗댔지만, 부하들이 연이어 이탈하면서 군대를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어쩔 수 없이 1422년 9월 23일에 군대를 해산시키기로 했다. 이에 후안 왕자와 톨레도 대주교가 이끄는 왕실군 역시 해산되었다.

1423년 6월 12일, 마드리드로 향하던 후안 2세는 핀토에서 엔리케와 대면했다. 왕은 그 자리에서 엔리케를 즉각 체포하여 모라 성에 감금시키고 그의 가장 저명한 지지자 3명을 체포한 뒤 반역죄로 기소했다. 엔리케의 아내 카타리나와 나머지 추종자들은 왕실군에 잡히기 전에 아라곤 왕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었다. 후안 2세는 엔리케에게서 빼앗은 영지와 재산을 그의 형제 후안에게 넘겨주고 알바로 데 루냐에게 카스티야의 근위대장 칭호를 하사했다.

아라곤 국왕이자 엔리케의 형인 알리폰소 5세는 엔리케가 모라 성에 구금되고 그의 재산이 몰수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카스티야와의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이에 후안 2세는 알폰소 5세의 동생 후안 왕자를 알폰소 5세에게 보내 협상하도록 했다. 1425년 9월 3일, 양국은 토레 데 아르시엘 조약을 체결했다. 엔리케는 이 조약에 따라 석방되었고 체포 후 압수된 모든 재산과 수입을 돌려받았으며, 산티아고 기사단장으로서의 지위도 회복되었다.

1425년 9월 나바라 왕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고 수리아가 나바라의 여왕이 되었다. 이때 그 역시 나바라 왕국의 공동 국왕이 되었다. 이후 카스티야의 후안 2세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을 포섭한 뒤 알바로 데 루나를 궁정에서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압력을 버티지 못한 후안 2세는 1427년 9월 5일 알바로와 추종자들을 1년 반 동안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후안 2세는 얼마 후 알바로를 도로 불러들였고, 1429년 1월 그라나다의 무슬림 토후국을 공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막대한 공물을 받은 뒤 이를 토대로 군대를 육성한 후 1429년에서 1430년 사이에 아라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 무렵 아라곤으로 돌아온 알폰소 5세는 1429년에서 1430년 사이에 카스티야로 친정해 동생 후안과 합세한 뒤 자드라케(Jadraque)에서 후안 2세와 알바로 공작의 군대와 대적했다. 이때 알폰소 5세의 왕비이자 카스티야 왕 후안 2세의 누이인 마리아가 개입했다. 그녀는 같은 기독교인이고 친척인데 서로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설득했고, 알폰소 5세와 후안 2세는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 휴전을 맺기로 했다. 이후에도 양자간 무력 충돌이 몇차례 벌어졌지만,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1434년 형 알폰소 5세의 나폴리 원정에 두 아우 엔리케, 페드로와 함께 동행해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해 카푸아를 공략한 후 가에타를 포위했다. 그러나 1435년 8월 4일 폰차 해전에서 제노바 함대가 아라곤 함대를 격파했고, 그는 형 알폰소 5세, 엔리케와 함께 생포된 후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에게 넘겨졌다. 하지만 밀라노 공작은 아라곤 왕국과 계속 적대하는 대신에 동맹을 맺기로 하고, 1436년 알폰소 5세와 후안 등 형제들을 석방시켰다. 그 후 아라곤과 발렌시아의 왕실군 부사령관으로 발탁된 그는 형이 나폴리 정복 전쟁에 다시 착수한 동안 아라곤 왕국을 이끌었다.

1439년 3월, 알바로 데 루냐의 권력 독점을 용납할 수 없어 반란을 일으킨 카스티야 귀족들이 바야돌리드를 기습 공략하자,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는 후안에게 반란을 진압하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후안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카스티야 왕국에 들어섰지만, 반란군 지도자들로부터 "우리를 도와준다면 빼앗겼던 영지를 되돌려받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자 이내 그들 편에 서기로 마음먹었다. 1439년 6월, 후안은 두 반대 세력의 지도자들을 토르데시야스에 집결시킨 뒤 4개월간 논의한 끝에 1439년 10월 알바로를 6개월간 추방하고 양자가 화해하며 왕은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평화 협약을 수립했다. 그러나 알바로를 지원했던 귀족들이 그가 소유했던 영지를 되돌려주기를 거부했고, 알바로 데 루냐는 궁정 내에 있던 자신의 파벌을 통해 왕과 계속 접촉하자, 후안은 알바로를 적대시하는 귀족들과 함께 후안 2세에게 경고장을 보냈다.
우리의 조언 외에는 어떤 것도 듣지 말 것이며 어떤 것도 위반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

메시지를 받은 다음날인 1440년 1월 17일, 후안 2세는 아들 엔리케 4세와 알바로 데 루냐 및 지지자들과 함께 아빌라로 탈출했다. 이에 후안은 중재자로서의 태도를 벗어던지고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 편에 섰다. 이후 도시들이 대거 반란군 편에 서면서,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는 점점 고립되었다. 결국 1440년 5월 바야돌리드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 후안 2세는 알바로 데 루냐와 지지자들을 영구적으로 추방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후안 2세의 아들 엔리케 4세와 후안과 수리아 1세의 딸 수리아 2세의 결혼식이 1440년 9월 15일 바야돌리드에서 거행되었다. 하지만 1441년 1월 초, 후안 2세는 엔리케 4세와 함께 또다시 탈출하여 세비야 대주교와 세고비아 주교가 이끄는 알바로 데 루냐의 지지자들을 규합했다. 이후 6개월간 수차례의 전투가 벌어진 끝에, 6월 28일 후안 2세의 근거지인 메디나 데 캄포가 공략되면서 반란 세력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며칠 후, 포로 신세나 다름없던 후안 2세는 반란군의 요구에 따라 알바로 데 루냐를 6년간 추방하기로 했다.

1441년 나바라 여왕 수리아 1세가 사망했다. 이제 나바라는 수리아와 후안의 장남인 카를로스가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후안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수리아가 죽기 전에 카를로스가 아버지의 동의 없이는 왕으로 일컬어져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겼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아들을 나바라의 영주로 삼을 뿐 왕으로 세우지 않았다. 아들 카를로스는 내심 아버지가 자신이 마땅히 취해야 할 왕위를 빼앗았다고 여겨 반감을 품었다.

1443년 7월 9일, 카스티야 제독 파드리케 엔리케스 등이 정변을 일으켜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를 납치한 뒤 라마가 성채에 가두었다. 그들은 알바로 데 루냐가 권좌에 복귀하기 위해 후안 왕자와 엔리케 왕자의 보좌관인 후안 파체코를 체포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며, 이를 막기 위해 예방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후안 왕자의 파벌이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자, 엔리케 4세는 1444년 3월 29일 카스티야 고위 귀족들을 규합한 뒤 아버지를 불법적으로 납치한 후안과 '외국인'들을 몰아내겠다고 선포했다. 여기에 알바로 데 루냐가 엔리케 4세에게 가담하여 엔리케 왕자와 함께 왕을 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카스티야 내전에서, 후안은 초기엔 아티엔자와 토리하를 공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445년 5월 19일 올메도 전투에서 엔리케 4세와 알바로 데 루냐가 이끄는 왕실군에게 참패하고 아라곤 왕국으로 도주했다. 이후 아라곤 왕국은 다시는 카스티야 왕을 상대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 했다.

1447년, 후안은 알바로 데 루나의 정적이었던 파드리케 엔리케스의 딸인 후아나 엔리케스와 재혼했다. 4년 후, 후아나의 꼬드김에 넘어간 그는 현 나바라 총독인 카를로스를 해임하고 후아나를 총독으로 삼기로 했다. 이에 분노한 카를로스는 나바라 귀족들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1451년 10월 23일, 에이바르에서 양측이 맞붙었다. 그 결과 카를로스가 참패하고 포로로 붙잡혔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후아나 엔리케스는 사라고사로 떠났고, 그곳에서 아들 페르난도를 낳았다. 1453년 카를로스는 석방되었지만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왕을 칭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강요당했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석방된 후 맹세를 어기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레린 백작 루이스 데 보몽과 손잡고 아버지에 대항했다. 그러다가 1453년 12월 7일 카스티야 왕비 마리아[1]의 중재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바야돌리드에서 1년간 휴전 협약이 맺어졌을 때, 카를로스 역시 아버지와 휴전하기로 했다. 1년간 휴전이 끝난 후 양자간의 전쟁이 재개되었고, 1455년 3월 27일 보몽 가문의 사병대가 산 후안 데 피에 데 푸에르토를 공략했으며, 1455년 8월 4일에는 토랄바 전투에서 아라곤 왕국군을 격퇴했다. 이에 분노한 후안은 1455년 12월 3일 바르셀로나에서 카를로스와 그를 지원하던 여동생 수리아 2세의 나바라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막내딸 레오노르를 나바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카를로스는 1456년 투델라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한 데다 푸아 백작 가스통 4세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아라곤군의 반격이 거세자 나폴리에 있는 삼촌이자 아라곤-시칠리아-나폴리 국왕 알리폰소 5세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그해 5월에 나바라를 떠나 나폴리로 향했다. 이후에도 보몽 가문을 비롯한 나바라 귀족들은 카를로스를 위해 아라곤군과 격전을 치렀고, 1457년 3월 16일 카를로스를 나바라 국왕으로 선포하고 카스티야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후안 2세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 국왕에 오른 엔리케 4세는 바야돌리드 협약에서 합의된 대로 아라곤 왕국과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기에 나바라 귀족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게다가 1454년에 후안을 아라곤과 카탈루냐의 대리 통치자로 임명했던 알폰소 5세는 조카를 위해 아우와 싸우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 후안과 카를로스의 갈등을 해결해주기 위해 발렌시아 귀족이며 자신의 측근이었던 루이스 데스푸이그를 중재자로 보내 양자를 화해시키게 했다. 카를로스와 후안 모두 이에 동의해, 1458년 3월 6개월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알폰소 5세가 합의안을 제시할 예정이었지만, 그가 1458년 6월에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후안은 후안 2세로서 아라곤, 시칠리아, 샤르데냐, 코르시카의 왕위에 올랐다. 다만 나폴리 만은 알폰소 5세의 사생아인 페르디난도가 물려받았다. 이때 후안 2세의 장남 카를로스는 카탈루냐의 통치자로 선임되었고, 페르난도 왕자는 몽블랑 공작에 선임되었다. 1460년 9월, 후안 2세는 레리다에서 카탈루냐 궁정을 소집하고 아들 카를로스에게 카스티야 공주 이사벨과 결혼하지 말고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공주와 결혼하라고 권고했다.[2] 그러나 카를로스는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의 사절과 비밀리에 만났고, 그의 수행원들은 후안 2세가 페르난도 왕자에게 나바라 왕위를 주기 위해 그를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일을 첩자를 통해 전달받은 후안 2세는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 사실인 게 분명해지자 고뇌했다. 그러다 아내 후아나의 부추김에 따라 1460년 12월 2일 카를로스를 체포해 아라곤의 어느 요새에 가두었다.

그러자 카탈루냐와 아라곤, 나바라 등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봉기의 규모에 경악한 후안 2세는 1461년 카를로스를 석방하고 왕위 상속인으로 인정했지만, 페르난도 역시 계승권이 있다고 못박았다. 그러던 1461년 9월 23일, 카를로스가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카탈루냐인들은 후안 2세가 미워하는 장남을 독살했을 게 분명하다며 그와 후계자 페르난도의 권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여겼다. 후안이 바르셀로나에 가서 그들을 달래려 했지만, 카탈루냐인들은 끝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후안 2세는 아라곤, 발렌시아, 시칠리아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낸 뒤 카탈루냐 정벌에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후안 2세는 외세를 끌여들어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다. 1462년 초, 후안 2세의 사위인 푸아 백작 가스통 4세의 중재 하에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와 후안 2세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후안 2세는 프랑스로부터 나바라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가스통 4세는 그의 후계자로서 나바라를 통치할 권리가 주어졌다. 그해 5월 초, 루이 11세는 가스통 4세에게 프랑스군을 맡겨 카탈루냐 봉기를 진압하게 했다. 후안 2세는 그 대가로 루시용과 세르당을 프랑스에 담보로 넘겼다.

한편, 카탈루냐 반란군은 팔라스 소비라 백작 로제 3세의 지휘하에 후아나 엔리케스 왕비와 페르난도 왕자를 지로나 요새에 몰아넣고 공성전을 벌였다. 하지만 후아나 왕비가 철저히 방어해 공략에 실패했고, 4개월 후 프랑스군이 인근에 당도하자 곧바로 철수했다. 카탈루냐인들은 후안 2세의 조카이자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에게 바르셀로나 백작에 추대할 테니 구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엔리케 4세는 굳이 프랑스와 싸울 이유를 못 느끼고 개입하지 않았다. 1463년, 카탈루냐인들은 코임브라 공작 페드로를 왕으로 추대했다. 페드로는 카탈루냐 대부분과 바르셀로나, 아라곤 일부 지역을 다스리며 후안 2세에 대적했다. 여기에 프랑스 왕국과 대립하던 부르고뉴 공국의 이사벨라가 프랑스군과 맞서는 카탈루냐인들을 지원했다.

1465년 페드로가 그라놀러스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이에 카탈루냐인들은 지난날 나폴리 왕위를 놓고 알폰소 5세와 대적했다가 패배했던 앙주의 르네를 카탈루냐 왕으로 추대했다. 르네는 아들 을 카탈루냐로 보내 자신을 대신해 그곳을 다스리게 했지만, 장은 1470년 12월 16일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이렇듯 카탈루냐인들이 계속 왕을 세우며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후안 2세는 전쟁을 이어갔다. 1472년 거의 실명 상태였던 그는 반란군을 최종적으로 물리치고 바르셀로나에 입성했다. 그는 내전이 또다시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부하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보복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패자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 후 프랑스에게 담보로 넘겼던 루시용과 세르당을 탈환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후안 2세는 1469년 바야돌리드에서 후계자인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왕 후안 2세의 딸이자 왕위 계승자이며 자신의 조카인 이사벨 1세의 결혼식을 주선했다. 페르난도와 이사벨 1세는 6촌이었기에 반드시 교황의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톨레도의 대주교가 교황의 결혼 허가서를 위조했다. 이 사실이 훗날 드러났지만, 교황청은 특별히 문제삼지 않고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결혼을 통해 통합되는 것을 용인했다.

1479년 1월 19일, 후안 2세는 80세의 나이로 바르셀로나에서 노환으로 사망하고 포블렛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페란도 2세가 아라곤의 국왕으로 등극했다. 나바라 왕위는 레오노르가 계승했다.

3. 가족 관계

  • 수리아 1세(1387 ~ 1441): 나바라 여왕.
    • 카를로스 4세(1421 ~ 1461): 본래 나바라 왕이 되어야 했지만 후아나 엔리케스의 꼬드김에 넘어간 아버지의 박대에 시달린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함.
    • 나바라의 후안(1423 ~ 1425): 요절.
    • 수리아 2세(1424 ~ 1464): 훗날의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와 결혼했다가 이혼.
    • 레오노르 1세: 푸아 백작 가스통 4세와 결혼. 나바라 여왕.
  • 후아나 엔리케스(1425 ~ 1468): 카스티야의 대귀족이자 제독 파드리케 엔리케스의 딸.
  • 사생아
    • 알폰소 데 아라곤 이 데 에스코바(1417 ~ 1495): 비야에르모사 공작
    • 후안 데 아라곤(1440 ~ 1475): 사라고사 대주교


[1]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의 딸이자 후안의 여동생이었다.[2] 카를로스의 아내 아그네스는 1448년에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