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30 00:34:57

페트루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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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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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ru II
가문 바르셀로나 왕조
출생 1304년
시칠리아 왕국 알토폰테
사망 1342년 8월 15일 (향년 38세)
시칠리아 왕국 칼라시베타
재위
기간
시칠리아 왕국 국왕 1337년 ~ 1342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
어머니 앙주의 엘레오노르
형제자매 루지에로, 만프레디, 쿠스탄차, 엘리자베타, 굴리에모, 조반니, 카타리나, 마르게리타
배우자 카린시아의 엘리자베타
자녀 쿠스탄차, 엘레오노르, 베아트리체, 에우페미아, 루이지, 프리드리히 4세, 비올란테, 조반니, 블랑슈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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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칠리아 왕국 제17대 국왕.

2. 생애

1304년경 시칠리아 왕국 알토폰테에서 프리드리히 3세와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의 딸 앙주의 엘레오노르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루지에로, 만프레디, 쿠스탄차, 엘리자베타, 굴리에모, 조반니, 카타리나, 마르게리타가 있었다. 1312년 아버지의 대리관이 되었고, 1321년 시칠리아의 공동 왕이 되었다. 1323년 4월 23일 카린시아 변경백이며 교황권에 대항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확고한 지지자였던 오토 3세의 둘째 딸 엘리제베타와 결혼했다. 1328년에는 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4세를 지원하는 시칠리아 함대를 지휘했다.

1337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새 시칠리아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그에게 매우 좋지 않게 흘러갔다. 나폴리 왕국은 프리드리히 3세 사후 시칠리아 왕위가 앙주 가문에 돌아가기로 했던 칼타벨로타 조약을 위반한 책임을 물어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에 속했던 리파니(1339년), 밀라초(1342년)를 공략하는 등 공격을 퍼부었고, 기벨린 파(친 황제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시칠리아 왕국에 반감을 품은 구엘프 파(친 교황 파)에 속한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시칠리아에 대한 무역 거래를 크게 줄여버리면서 시칠리아의 경제가 갈수록 악화되었다. 여기에 시칠리아에 전염병이 돌면서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고, 귀족들은 더 많은 권력을 쟁취하고자 강력한 사병을 거느리고 서로 충돌했다.

당대 기록은 페트루 2세를 나약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조반니 발라니는 <새로운 연대기(Nuova Cronica)>에서 그를 "거의 바보"라고 묘사했으며, 니콜라 스페키알레(Nicola Speciale)는 <시칠리아의 역사(Historia Sicula)>에서 "순수하고 단순한 자"라고 기술하면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아내 엘리자베타가 국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개진하지 못한 채 궁궐 한 구석에 머물렀다. 엘리자베타는 국정 운영을 마테오와 다미아니 팔리지 형제에게 맡겼고, 자연히 권력은 두 사람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러다 1340년 아테네와 네오파트리아의 공작이자 페트루 2세의 동생인 조반니가 두 사람을 몰아내고 권력을 쥐었다. 이후 시칠리아의 정국은 엘리자베타 왕비와 조반니간의 알력다툼으로 점철되었다.

1342년 8월 15일, 칼라시베타 별궁에 지내던 페트루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후 4살 밖에 안 된 아들 루이지가 시칠리아의 왕위에 올랐고, 엘리자베타와 조반니가 섭정을 맡았다.

3. 가족 관계

  • 카린시아의 엘리자베타(1298 ~ 1352): 카린시아 변경백 오토 3세의 딸.
    • 쿠스탄차(1324 ~ 1355): 1352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루이지의 섭정을 맡음. 평생 결혼하지 않음.
    • 엘레오노르(1325 ~ 1375):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와 결혼.
    • 베아트리체(1326 ~ 1365):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2세와 결혼. 독일왕 루프레히트 3세의 어머니.
    • 에우페미아(1330 ~ 1359): 1355년부터 1357년까지 섭정을 맡음. 평생 결혼하지 않음.
    • 비올란테(1334): 요절.
    • 루이지(1338 ~ 1355): 시칠리아 왕국 18대 국왕.
    • 프리드리히 4세(1341 ~ 1377): 시칠리아 왕국 19대 국왕.
    • 조반니(1342 ~ 1353): 요절.
    • 블랑슈(1342 ~ 1373): 엠푸리에스 백작 후안 1세와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