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티야와 레온의 왕 후안 1세에 대한 내용은 후안 1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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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I de Aragón | ||
가문 | 바르셀로나 왕조 | |
출생 | 1350년 12월 27일 | |
아라곤 왕국 페르피냥 | ||
사망 | 1396년 5월 19일 (향년 45세) | |
아라곤 왕국 푸아샤 | ||
재위 기간 | 아라곤 왕국 국왕 | 1387년 ~ 1396년 |
아버지 | 페로 4세 | |
어머니 |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 | |
형제 | 콘스탄사, 후아나, 마리아, 페드로, 마르틴 1세, 레오노르, 알폰소, 알폰소, 페드로, 이사벨 | |
배우자 | 마르트 드 아르마냐크, 욜랑드 드 바르 | |
자녀 | 하이메, 후아나, 후안, 알폰소, 엘레오노르, 하이메, 욜란다, 페르난도, 안토니아, 레오노르, 피에르, 후아나 | |
종교 | 기독교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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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제15대 국왕.왕호는 스페인어로는 '후안 1세(Juan I)', 아라곤어로는 '추안 1세(Chuan I)'이다.
2. 생애
1350년 12월 27일 아라곤 왕국 페르피냥에서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와 시칠리아 국왕 페트루 2세의 딸 엘레오노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콘스탄사, 후아나, 마리아, 페드로, 마르틴, 레오노르, 알폰소, 알폰소, 페드로, 이사벨이 있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딸들만 두었던 페드로 4세는 형제이자 우르헬 백작 하이메 1세를 왕위 후계자로 지명하는 문제를 놓고 심한 갈등을 벌였고 아라곤 연합과 발렌시아 연합의 반란에 직면하여 발렌시아에 억류되기도 하는 등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후안이 무사히 태어나면서, 페드로 4세는 후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후안은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동안 몇 가지 고질병에 시달렸고,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우수한 교양을 갖췄고 미술, 음악, 문학, 점성술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사냥에 열중했기에 '사냥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매사에 공격적이고 권력욕이 강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평화를 추구했고 우유부단했으며, 주변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351년 지노라 공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1352년 왕위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었다. 1363년 왕실군 사령관으로 지명되었다. 1374~1375년 마요르카 국왕 하이메 4세가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지원에 힘입어 6,000명의 용병대를 이끌고 카탈루냐를 침공하자 격퇴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하이메 4세가 피레네 산맥을 넘던 중 중병에 걸려 병사하는 바람에 별다른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1370년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의 딸 마르타와 결혼해 하이메, 후아나, 후안, 알폰소, 레오노르 등 다섯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딸 후아나만 성인으로 성장했고 나머지 자식들은 요절했다. 1378년 아내 마르타가 사망했다. 이에 카탈루냐 출신 시칠리아 귀족들은 시칠리아 여왕 마리아를 후안과 결혼시키자고 주장했다. 아라곤 왕국이 언제 시칠리아에 쳐들어올까 노심초사했던 다른 시칠리아 귀족들도 동의했고, 시칠리아 사절단은 1380년 봄에 아라곤 왕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후안은 같은 바르셀로나 왕가끼리 결혼하는 것은 근친상간이라 여기고 바르 공작의 딸 욜랑드와 재혼했다. 마리아 여왕은 나중에 후안의 동생 마르틴의 아들 마르틴과 결혼했다.
1375년 어머니 엘레오노르가 사망한 후, 페드로 4세는 이전부터 정부로 두었던 포르티아의 시빌라를 새 왕비로 삼았다. 후안은 이에 반감을 품었고, 1385년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엠푸리아의 후안 1세를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를 거부했다. 1387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빌라 왕비를 투옥하고 그녀의 고문 2명을 처형했지만, 페드로 데 루나 추기경의 압력을 받고 그녀를 석방했다. 이후 아버지에게 영지를 빼앗긴 후안 1세에게 엠푸리아를 돌려줬다.
1389~1390년 마요르카를 빼앗으려는 아르마냐크 백작 장 3세 다르마냐크의 공세에 직면하자 동생 마르틴에게 이들을 막게 했다. 침략자들은 1390년 지로나에서 마르틴이 이끄는 아라곤군에게 참패했다. 그러나 사르데냐의 반란 진압에 애를 먹었고, 오스만 술탄국에 의해 아테네 공국과 네오파트라스 공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1391년 반유대주의 열풍이 왕국 전역에 휩싸이면서 지로나,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페르피냥, 마요르카, 레리다 등지에 거주하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박해받았다. 그들은 강제 개종을 강요받았고, 이를 거부한 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후안 1세는 폭동을 진압하고 주모자들을 사형에 처했다.
1396년 5월 19일 푸아샤에서 사냥하던 중 갑작스런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바르셀로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가 산타 마리아 데 포블렛 왕립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이때 후안 1세의 미망인 욜랑드 드 바르가 자신이 태아를 임신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많은 귀족들은 욜랑드가 아들을 낳을 경우를 고려해 당시 시칠리아에 있던 마르틴을 새 왕으로 세우기를 주저했다. 같은 시기에 후안 1세의 딸 후아나는 남편인 마티외 드 푸아카스텔봉을 부추겨 아라곤을 침공해 왕관을 손에 넣으라고 독촉했다. 푸아 백작은 그 말에 따라 아라곤을 침공했지만 아라곤 귀족들에게 패퇴했다.
국내에 남아있던 마르틴의 아내 루나의 마리아는 마르틴에게 아라곤으로 돌아와서 이 불안한 정국을 수습해달라고 요청했다. 마르틴은 시칠리아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전념하고 싶었기에 몇 달간 망설였다. 그 사이에, 마리아가 욜랑드의 건강을 지켜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녀를 한 성채로 옮김으로써 그녀의 지지자들로부터 고립시켰다. 곧, 욜랑드의 임신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나자, 마리아는 군대를 소집해 욜랑드와 마테오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지하감옥에 가두고 영지를 몰수했다. 1397년 비로소 아라곤으로 돌아온 마르틴은 마르틴 1세로서 아라곤 국왕에 즉위했다.
3. 가족 관계
- 마르트 드 아르마냐크(1347 ~ 1378):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의 딸.
- 차이메(1374 6월 24일 ~ 8월 22일)
- 추아나(1375 ~ 1407): 푸아 백작 마티외 드 푸아카스텔봉의 부인. 아버지가 사망한 후 남편을 부추겨 아라곤 왕국에 쳐들어가게 했지만 실패함.
- 추안(1376년 7월 23일 ~ 7월 24일)
- 알리폰소(1377)
- 레오노르(1378)
- 욜랑드 드 바르(1365 ~ 1431): 바르 공작 로베르 1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