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2 00:14:46

카를로 2세(나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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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카를로 2세(나폴리).jpg
Carlo II
가문 앙주 카페 가문
생몰년도 1254년 ~ 1309년 5월 5일
출생지 앙주 백국
사망지 나폴리 왕국 나폴리
재위
기간
나폴리 왕국 국왕 1285년 - 1309년
앙주 백작 1285년 - 1290년
아카이아 공작 1285년 - 1289년
아버지 카를루 1세
어머니 프로방스의 베아트리스
형제자매 블랑슈, 베아트리스, 필리프, 로베르, 엘리자베트
배우자 헝가리의 마리어
자녀 카를로 마르텔, 마르그리트, 툴루즈의 성 루이, 로베르토, 필리포 1세, 블랑슈 등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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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왕국 2대 국왕.

2. 생애

1254년경 앙주 백작 샤를 1세와 프로방스 백작 레몽 베렝가르 4세의 넷째 딸 베아트리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블랑슈(1250~1270)[1], 베아트리스(1252 ~ 1275)[2], 필리프(1256 ~ 1277)[3], 로베르(1258 ~ 1265년 이전), 엘리사베타(1261 ~ 1303)[4]가 있었다. 1267년, 만프레디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카를루 1세가 된 남편을 대신해 앙주, 메인, 프로방스, 포르칼퀴에 등지를 관리하던 어머니 베아트리스가 사망했다. 카를루 1세는 아내의 유산을 유지하기 위해 아들 샤를을 프로방스 백작으로 삼고 어머니가 했던 대로 통치하게 했다.

1269년, 카를루 1세는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5세와 결혼 동맹을 맺기로 했다. 이슈트반의 딸 마리어는 카를루 1세의 아들 샤를과 약혼했고, 샤를의 여동생 엘리사베타는 마리어의 남동생 라슬로 4세와 약혼했고 1270년에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1271년 말 샤를이 중병에 걸리자, 아버지 샤를은 아들이 회복하기를 기원하고자 샤를의 밀랍 조각품을 자신의 영지 곳곳의 교회들에 기증했다. 샤를이 회복한 후, 카를루 1세는 바리에 있는 성 니콜라오 성당을 순례하고 로카마두르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성소에 선물을 보냈다. 그 후 샤를은 1272년 오순절에 형제 필리프, 100명의 이탈리아와 프랑스 귀족들과 함께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아버지로부터 살레르노 공국을 수여받았으며, 1279년 말 프로방스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1282년 3월 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라틴 제국을 보활시킬 야심에 불탄 카를루 1세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과한 막대한 세금에 시달리던 시칠리아 민중이 대거 봉기해 섬내 프랑스인들을 모조리 학살한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이 발발했다. 그 후 사라센과 맞선다는 명목하에 튀니지에 있던 아라곤 왕국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 귀족들의 구원 요청을 받고 시칠리아로 향한 뒤 9월 4일에 시칠리아 국왕에 등극했다. 이에 카를루 1세는 "이단인 정교회를 심판하려는 십자군 원정을 방해한 자들을 처벌하라"는 교황 마르티노 4세의 칙서를 받아낸 뒤 시칠리아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했고, 앙주, 프로방스 일대를 다스리던 샤를 역시 이탈리아-앙주 군대와 30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나폴리로 향했다.

카를루 1세가 칼라브리아 등지의 반란 진압에 애를 먹느라 시칠리아 원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1284년 6월 5일, 아라곤-시칠리아 함대 사령관인 라우리아의 루지에로가 나폴리 항구로 침입했다. 카를루 1세는 자기가 돌아오기 전꺄지 나폴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샤를은 이를 어기고 함대를 이끌고 적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여러 나폴리 귀족들과 함께 생포되었다. 구원군을 이끌고 나폴리 근교 가에타에 도착한 카를루 1세는 아들이 크게 패하고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이 일을 망쳤다며 저주를 퍼부었다.

호엔슈타우펜 추종자들은 콘라딘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샤를을 죽이자고 주장했지만, 아라곤 왕국에서 프랑스의 침공을 저지하는 페드로 3세를 대신해 시칠리아를 통치하던 아라곤 왕비이자 시칠리아 여왕 쿠스탄차 2세는 거부했다. 그 대신, 그녀는 카를루 1세에게 "아들을 돌려받고 싶으면 나의 이복 누이인 베아트리체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카를루 1세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카를루 1세는 아풀리아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던 1285년 1월 7일 포자에서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샤를은 나폴리 왕으로 선임되었지만 감옥에 계속 갇혀 지내야 했고, 카를루 1세의 조카 아르투아의 로베르 2세가 섭정을 맡아 아풀리아의 반란 진압에 성공했다.

1285년 11월 11일 페드로 3세가 사망한 후 시칠리아 국왕이 된 하이메 2세는 마침 앙주 편만 들던 마르티노 4세가 사망하고 새 교황 호노리오 4세가 즉위하자 로마에 사절을 보내 시칠리아를 교황에 봉헌하겠으니 아라곤 왕국 전체에 내린 파문을 취소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교황은 단호히 거부하고 하이메 2세와 시칠리아 군주 즉위식을 주재한 주교들을 파문했다. 여전히 포로로 잡혀있던 카를로 2세는 석방과 평화 조약에 대한 대가로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양보하려 했지만, 교황은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287년 봄, 교황과 앙주, 프랑스 귀족들이 소집한 원정군이 시칠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해 6월 23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 제독이 이끄는 시칠리아 함대가 원정군을 섬멸했고, 많은 프랑스와 프롱방스 귀족들이 체포된 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후 교황 호노리오 4세는 사했고, 새 교황으로 니콜라오 4세가 선출되었다. 1287년 7월, 카를로 2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중재에 힘입어 아라곤 국왕 알폰소 3세와 울모른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라곤과의 전쟁을 지속했다. 그해 10월, 카를로 2세는 막대한 몸값, 아들 3명을 포함한 인질을 제공하고 시칠리아 왕의 칭호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마침내 석방되었다.

나폴리에 돌아온 카를로 2세는 1289년 5월 29일 리에티 대성당에서 교황 니콜라오 4세로부터 시칠리아 국왕에 선임되었다. 교황은 파문당한 자와 약속한 것은 무효라며 석방을 위해 하이메 2세와 맺었던 약속을 준수할 의무를 면제하고 시칠리아를 한시바삐 정벌하라고 독촉했다. 그러면서 남부 이탈리아에서 교황청에 들어오는 세입 중 10분의 1을 그에게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 역시 시칠리아 원정을 단행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교황의 결정에 항의했고, 카를로 2세와 알폰소 3세 사이의 중재를 지속했다.

알폰소 3세는 에드워드 1세의 요청에 따라 인질로 잡았던 카를로 마르텔을 카를로 2세의 다섯번째 아들 레몽 베렝가르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석방했다. 이후 알폰소 3세와 카를로 2세간의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에드워드 1세는 일전에 맺은 평화 협약을 준수하라고 촉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니콜라오 4세는 아라곤과 나폴리 왕국의 화해를 막기 위해 2명의 추기경을 보냈지만, 두 왕은 교황보다는 에드워드 1세 쪽을 따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고 2년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한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아카이아 공국을 직접 통치하기엔 벅차다고 여긴 카를로 2세는 전임 공작 빌라르두앵의 기욤 2세의 딸인 빌하르두앵의 이사벨라를 아버지의 부관이었던 에노의 플로렌스와 결혼시킨 뒤 1289년 9월 아카이아 공작 직위를 그들에게 줬다. 다만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했고, 플로렌스가 아내보다 먼저 죽으면 이사벨라는 자신의 동의없이는 재혼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1290년 5월 19일, 카를로 2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센리스에서 협약을 맺었다. 카를로 2세는 자신의 딸인 마르그리트를 필리프 4세의 동생인 발부아의 샤를과 결혼시켰고, 아라곤에 대한 왕위 계승권을 필리프 4세에게 넘기는 대가로 앙주와 마인의 통치권을 지참금 형식으로 받아냈다. 필리프 4세는 알폰소 3세와 교황청이 화해하는 대로 아라곤과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프랑스, 나폴리 왕국, 아라곤 왕국, 교황의 사절단은 페르피냥에서 잉글래드 대표단의 중재하에 협상을 벌였다.

1290년 7월 10일, 카를로 2세의 처남인 라슬로 4세가 살해되었다. 헝가리 귀족들은 라슬로 4세의 사촌인 언드라시 3세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카를로 2세의 아내 마리어는 자신이야말로 라슬로 4세의 합법적인 후계자라 여겼고, 남편을 설득해 아들 카를로 마르텔이 헝가리 국왕으로 등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했다.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카를로 2세의 언질을 받고, 헝가리가 교황청의 영지이며 헝가리를 마리어의 아들 카를로 마르텔에게 주겠다고 선언했다. 바보니치, 프랑코판, 슈비치 등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의 주요 귀족 가문들이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여 카를로 마르텔을 모시면서 언드라시 3세에 대항했다. 그러나 다른 헝가리 귀족들이 언드라시 3세를 지지한 데다, 시칠리아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급했기에 헝가리 왕위를 아들에게 주기 위해 전쟁을 벌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카를로 마르텔이 1295년경에 요절하자, 더 이상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1291년 2월, 아라곤 왕 알폰소 3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 나폴리 왕 카를로 2세, 그리고 교황 니콜라오 4세는 브리뇽 협약을 맺었다. 프랑스, 아라곤, 나폴리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고, 알폰소 3세와 하이메 2세의 파문은 해제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간의 평화 협약은 정식으로 체결되지 않았고, 아라곤 왕국은 시칠리아에게 더 이상 군사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교황청은 알폰소 3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이끌겠다고 약속하자 조약을 승인했다.

1291년 6월 18일 알폰소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하이메 2세는 즉각 바르셀로나로 이동해 그해 7월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형이 맺었던 조약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페데리코를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일대의 통치자로 세웠다. 또한 일전에 프랑스와 손잡고 페드로 3세에 대항했다가 알폰소 3세에게 축출된 후 앙주에 피난가 있던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발레아레스 제도를 넘긴다고 합의했던 브리뇽 조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아라곤 왕국의 필수적인 영토이니 절대로 넘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니콜라오 4세는 하이메 2세를 재차 파문했고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은 지속되었다.

1292년 4월 4일 교황 니콜라오 4세가 사망한 후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2년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그 사이, 카를로 2세는 1293년 말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중재를 통해 아라곤 궁정에 인질로 잡혀있는 아들들을 보내주면 교황청과 아라곤 왕국간의 평화 협약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1294년 오랜 공백기 끝에 비로소 선출된 교황 첼레스티노 5세는 카를로 2세의 제안을 지지했지만 얼마 안가 사임했고, 뒤이어 선출된 보니파시오 8세는 카를로 2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하이메 2세와의 평화 협약을 지지했다.

그 결과 1295년 6월 12일 아나니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하이메 2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교황의 왕좌로 양도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려줬다. 그러면서 카를로 2세의 아들들을 석방시켰다. 카를로 2세의 딸 블랑카는 하이메 2세의 동생인 페데리코와 결혼하고, 교황은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카를로 2세에게 양도하고 블랑카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주며, 하이메와 페데리코를 파문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를루 1세의 압제에 맞서 봉기한 바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이제와서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 2세를 왕으로 받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1296년 몇 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페데리코는 증조부 프리드리히 2세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호를 프리드리히 3세라고 칭했다. 하이메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해 카를로 2세와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를 공격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신속하게 공세를 개시해 칼라브리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 내부의 불만 세력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으며,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 파(친 황제파)와 협상했고, 보니파시오 8세의 정적인 콜론나 가문을 지원했다. 하이메 2세는 이런 동생을 응징하기 위해 그동안 시칠리아의 해군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이번에는 하이메 2세를 지지하기로 했던 라우리아의 루지에로에게 함대를 맡겨 시칠리아를 치게 했다. 1299년 7월 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올랜도 곶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격파했다. 또한 카를로 2세의 아들 로베르토와 필리포가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카타니아를 포위했다. 필리포는 트라파니를 포위하기 위해 별동대를 이끌고 진군했지만, 팔코나리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1300년 6월 1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폰자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재차 격파했고, 프리드리히 3세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1302년, 샤를 드 발루아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요청으로 이탈리아로 내려와서 시칠리아에 상륙했지만, 역병이 도는 바람에 군대가 궤멸되다시피하자 시칠리아군에게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의했다. 왕이 사로잡혀 있던 시칠리아군 역시 이에 동의하면서, 8월 19일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카를로 2세 역시 시칠리아의 왕으로 자처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다만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면 시칠리아 왕위는 앙주 가문에 돌아가기로 했다. 1303년 5월, 보니파시오 8세는 프리드리히 3세로부터 공물을 받는 대가로 조약을 비준했다. 여기에 프리드리히 3세와 카를로 2세의 딸 엘레오노르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의 만종 전쟁은 막을 내렸다.

카를로 2세는 바르톨로메오 드 카푸아 등 여러 조언자들의 의견에 따라 순수 기독교 왕국 설립을 위해 유대인과 랑고바르드족을 앙주와 메인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남부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켰으며, 레지오에 종교재판소를 설치해 이단적 성향을 보이는 자들을 심판했다. 또한 1300년 지난날 프리드리히 2세가 건설했던 루체라의 무슬림 공동체를 해체하고 많은 무슬림 주민들을 노예로 팔았다.

1309년 5월 나폴리에서 사망했고, 그때까지 살아남은 아들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로베르토가 새 나폴리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

3. 가족 관계

  • 헝가리의 마리어(1257 ~ 1323):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5세의 딸.
    • 카를로 마르텔(1271 ~ 1295): 헝가리 왕위 주장자.
    • 마르그리트(1272 ~ 1299):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동생 샤를 드 발루아와 결혼.
    • 툴루즈의 성 루이(1274 ~ 1298): 툴루즈 주교.
    • 로베르토(1276 ~ 1343): 제3대 나폴리 국왕.
    • 필리포 1세(1278 ~ 1331): 아카이아와 타란토 공작, 루마니아의 데스포티스. 명목상 라틴 제국 황제이자 명목상 알바니아 국왕.
    • 블랑슈(1280 ~ 1310):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와 결혼.
    • 레몽 베렝가르(1281 ~ 1307): 프로방스 백작 겸 피에몬테와 안드리아 공작
    • 장(1283 ~ 1308년 3월 16일 이후): 사제
    • 트리스탄(1284 ~ 1288): 요절
    • 앙주의 엘레오노르(1289 ~ 1341):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3세와 결혼.
    • 마리아(1290 ~ 1346): 마요르카 공작 산초 1세와 초혼, 에제리카 공작 하이메와 재혼.
    • 피에르(1291 ~ 1315): 그라비나 백작
    • 장 드 두라초(1294 ~ 1336): 두라초 공작, 아카이아 공작, 그라비나 백작.
    • 베아트리스(1295 ~ 1321): 페라라 공작 아초 8세 데스테와 초혼, 안드리아 백작 베르트랑 3세와 재혼.


[1] 베누테와 덴데르몽드 백작 로베르와 결혼[2] 라틴 제국의 명목상 황제 필리프 1세 쿠르트네와 결혼[3] 테살로니카의 명목상 군주이자 아카이아 공국의 공작[4]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와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