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22:37:43

조프루아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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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제인
조프루아 길포드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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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Geoffroy V, Comte d'Anjou
이름 조프루아 5세 당주 (Geoffrey V d'anjou)
출생 1113년 8월 24일
사망 1151년 9월 7일 (향년 38세)
배우자 잉글랜드의 마틸다 (1128년 결혼)
자녀 헨리 2세, 조프루아[1], 기욤[2]
아버지 풀크 5세
어머니 아렝뷔르가 드 라 플레슈[3]
친형제 엘리아, 마틸드, 시빌
이복형제 아모리 1세, 보두앵 3세
보유 작위 노르망디 공작, 앙주 백작, 모르탱 백작, 멘 백작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결혼2.3. 앙주 백작위 승계2.4. 사망
3. 자녀

[clearfix]

1. 개요

조프루아 5세는 노르망디 공작이자 앙주, 모르탱, 멘의 백작이며,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아버지이자 플랜태저넷 왕조의 시조이다. 1129년에 앙주 백작, 모르탱 백작, 멘 백작 작위를 세습했고, 1144년 노르망디 공국을 정복하여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헨리 1세의 딸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미망인으로 자신보다 11살 연상이었던 잉글랜드의 마틸다와 결혼하여 헨리 2세, 낭트 백작 조프루아, 푸아투 백작 기욤 10세를 낳았다. 미남 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미남으로 유명했다.

2. 생애

2.1. 유년기

앙주의 풀크 5세와 멘 가문의 아렝뷔르가 드 라 플레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년이 되기 전부터 전장을 누빈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전장에 나설 때 금작화 가지를 투구에 꽂는 버릇 때문에 플랜태저넷 (Plantagenet)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어린 조프루아의 기량과 재능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에게 들려졌고 당시 외동아들 윌리엄을 사고[4]로 잃은 입장에서 유력한 상속자인 딸 마틸다의 남편 하인리히 5세가 1125년 자녀 없이 사망하게 되자 딸이 장차 잉글랜드를 상속하는 데 있어 든든한 지원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당시 프랑스 내 유력 세력인 앙주 백작과 협상을 진행하게 된다. 협상은 곧 합의를 이뤘고, 조프루아는 결혼을 위해 15세가 되는 1128년 6월 10일 루앙에서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게 된다.

2.2. 결혼

1128년 6월 11일, 마틸다와의 결혼은 잉글랜드-노르망디와 앙주 간의 평화 협정 및 동맹의 의미가 강했다. 그러나 신성로마 제국의 황후였으며, 잉글랜드 국왕의 추정 상속인이었던 마틸다의 입장에서 11살 어린 신랑은 결코 만족스러운 상대가 되지 않았고 이러한 불만은 곧 부부 사이의 불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조프루아가 죽는 1151년까지 별거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양측이 서로에게 정치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후계자 생산을 소홀해하지 않았고, 그 결과 훗날의 헨리 2세와 조프루아와 기욤을 비롯한 3명의 아들을 얻게 되었다.

2.3. 앙주 백작위 승계

1128년 풀크 5세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보두앵 2세의 상속녀 멜리장드의 남편으로 추천되었고, 이에 1129년 아들 조프루아에게 앙주 백작 작위를 넘겨주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게 된다.

마르무티에의 존이 서술한 기록에 따르면, 조프루아는 아름다운 외모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쾌활하고 위대한 전사였다고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매력들이 차갑고 천박하며 이기적인 본성을 숨기려 했다는 평[5]도 남아있다.

1135년 장인 헨리 1세가 사망하자 마틸다는 자신의 왕위 계승을 주장하기 위해 노르망디로 갔다. 노르망디 일대의 영주들은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헨리 1세의 조카인 블루아의 스티븐을 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이로 인해 노르망디 일대 역시 스티븐에게 돌아섰다. 이듬해 조프루아는 마틸다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내주었고, 1139년 마틸다는 140명의 기사들과 함께 잉글랜드에 상륙하게 된다. 이후 스티븐을 사로잡은 마틸다는 영국의 여군주가 되었으나 얼마 안 가 마틸다측 지휘관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와의 포로교환으로 풀려난 스티븐에 의해 퇴각하게 된다.

1142년에서 1143년 동안 조프루아는 노르망디 서부와 센 남주지역을 장악했고, 1144년 1월 14일 센을 가로질러 루앙에 입성, 그해 여름에는 노르망디 공작에 올랐고, 1145년 루이 7세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조프루아는 1149년까지 노르망디를 다스리다 장남 헨리[6]에게 작위를 물려줬고 루이 7세는 이듬해 이를 승인하게 된다.

조프루아가 아버지로부터 작위를 물려받은 이후 1129년, 1135년, 1145년 ~ 1151년에 총 3번의 반란이 영지 내 남작들에 의해 발생했으나 모두 진압하였다. 또한 남동생 엘리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다퉜으며 결국 1151년에는 감옥에 가둬버린다. 그러나 영지 내의 소란은 노르망디 정복을 방해하게 되었고 마틸다를 적극 지원하는 것 역시 어렵게 했다. 한편 스티븐의 장남 와스티슈가 사고로 죽게 되자 후계자를 상실한 스티븐은 마틸다와 1153년 윌링포드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스티븐이 잉글랜드 국왕임을 마틸다가 인정하는 대신 조프루아의 장남 헨리의 계승권을 인정받는 결과를 얻게 된다.

2.4. 사망

한편 조프루아는 1151년 9월 7일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마르무티에의 존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 왕실 회의에서 돌아올 때 열병에 걸렸었다고 한다. 그는 샤또 듀 루와에 도착하여 소파에 쓰러진 뒤 헨리가 잉글랜드 국왕이 오르고 나면 앙주 백작령과 멘 백작령은 동생 낭트 백작 조프루아에게 넘기겠다고 맹세하기 전에 자신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라는 명령을 측근들에게 내렸다. 아버지의 작위를 모두 물려받을 생각이었던 헨리는 당연히 동생에게 넘길 것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조프루아의 시신은 한동안 방치되었으나 결국 측근들의 설득에 따라 앙주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게 된다.[7]

3.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헨리 2세
(Henry II, King of England)
1133년 3월 5일 1189년 7월 6일 엘레오노르 다키텐
슬하 4남 3녀[8]
2남 낭트 백작 조프루아
(Geoffrey, Count of Nantes)
1134년 6월 1일 1158년 7월 27일
3남 디에프 자작 기욤
(William, Viscount of Dieppe)
1136년 7월 22일 1164년 1월 30일

[1] 낭트 백작이다.[2] 디에프 자작이자 푸아투 백작으로 기욤 10세라고도 한다.[3] 멘의 아렝뷔르가(Eremburga del Maine)라고도 한다. 멘 백작령의 상속녀였다.[4] 1120년 타고 있던 배가 암초에 걸려 침몰하여 익사하게 된다.[5] 디케토의 랄프의 기록[6] 프랑스 식은 앙리이나 편의상 헨리로 통칭하겠다.[7] 물론 앙주 백작령과 멘 백작령은 헨리 자신이 가져가게 된다.[8]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 존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