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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E0F25><colcolor=#fff> 루앙 백작 롤로 Rollo | ||
이름 | 롤로(Rollo) | |
출생 | 850년대 후반에서 860년대 초반 사이 덴마크 또는 노르웨이 왕국 | |
사망 | 925년에서 927년 사이 또는 932년에서 933년 사이 프랑스 왕국 루앙 백국 루앙 | |
지위 | 루앙 백작 | |
911년 ~ 927년 이전 | ||
아버지 | 라그엔발드 에이스테인슨? | |
어머니 | 힐드 흐롤프스도티르? | |
형제 | 침묵의 토리크? | |
배우자 | 바이외의 포파, 프랑스의 기젤라? | |
자녀 | 기욤 1세, 아델 |
[clearfix]
1. 개요
고대 노르드어 | Hrólfr (흐롤프르) |
노르만어 | Rou (루) |
프랑스어 | Rollon (롤로) |
9세기 ~ 10세기에 활동한 바이킹 출신의 모험가이자 약탈자, 정복자이다. 노르망디 공국의 시조이며 프랑스 센 강 어귀에 정착하여 프랑스화한 노르드계 노르만족의 시조이기도 하다. 또한 노르만 정복으로 유명한 기욤 2세(윌리엄 1세)의 현조(5대조) 할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멀리 보면 현대 영국 왕실의 시조이기도 하다.[1]
2. 생애
2.1. 기원과 초기 생애
롤로(Rollo)는 고대 노르드어 흐롤프르(Hrólfr)의 라틴어식 이름으로, 중세 문헌에서는 Rhou 또는 Rou이라고 일컬어졌다. 1100년에서 1125년 사이에 집필된 <란드나마복>(Landnámabók)[2]은 그에게 'Göngu-Hrólfr'(걷는 자 흐롤프르)라는 별명을 붙였고, 1200년경 노르웨이 왕국에서 집필된 <노르드인의 역사>에서는 그가 키 2m에 몸무게 140kg에 달하는 장대한 신체를 갖춰서 그 어떤 탈것도 그를 지탱할 수 없었기에 항상 걸어갔다며, 'Gongurolfr'(걷는 사람 롤프)라는 별명을 붙였다. 프랑스 파리-소르본 대학의 스칸디나비아 언어, 문학, 문명 교수 레지스 보이어(Régis Boyer, 1932 ~ 2017) 는 이에 대해 롤로가 여러 번 약탈 원정을 떠났기에 '방랑자'를 의미하는 'göngumaðr'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것이 '걷는 자'를 의미하는 'Göngu'로 변형되었다고 추정했다.학자들은 롤로가 850년대 후반에서 860년대 초반 사이에 출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러나 기원은 불확실하다. 가장 오래된 사료는 뒤동 드 생캉탱(Dudon de Saint-Quentin, 960년 또는 970년 ~ 1026)이 롤로의 손자인 리샤르 1세의 의뢰에 따라 집필한 <노르만인의 역사>(Normannorum)다. 이에 따르면, 롤로는 다키아[3] 출신이며 나중에 스칸자(Scandza) 섬으로 이주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덴마크 왕이 롤로의 아버지이며 귀족이었던 사람과 롤로의 형제 구림(Gurim)을 살해하자,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망명했다고 한다.
11세기 연대기 작가 기욤 드 주미에쥬(Guillaume de Jumièges)는 1070년경에 집필한 <노르망디 공작의 역사>(Gesta Normannorum ducum)에서 덴마크 출신이라고 수정했다. 이후 11세기와 12세기 노르망디 수도자이자 역사가 오더릭 바이탈(Orderic Vital, 1075 ~ 1141/1143)과 노르만 시인 웨이스(Wace, 1100년 직후 ~ 1174년에서 1183년 사이), 노르만 또는 투렌 시인 베레닉트 드 생트모르(Benoît de Sainte-Maure) 모두 그를 덴마크인이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덴마크의 중세 수도자이자 역사가 삭소 그라마티쿠스(Saxo Grammaticus, 1150년대 ~ 1206년 또는 1220년)의 <덴마크인의 역사>를 비롯한 덴마크 측 사료는 롤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2세기에 집필된 아이슬란드 사가는 그가 노르웨이인이며, 노르웨이 중서부에 있는 뫼레 족장 라그엔발드 에이스테인슨과 뫼레 출신의 귀족 여성 힐드 흐롤프스도티르의 아들이며, 형제로 뫼레 족장위를 물려받은 침묵의 토리크가 있었다고 밝혔다.[4] <오크네잉가 사가>(Orkneyinga saga)[5]는 그의 성곽은 올레순 남부 교외에 있었으며, 많은 스칸디나비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떠나 바다를 여행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하임스크링글라>(노르웨이 왕의 사가)는 그가 자국에서 약탈 행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노르웨이 국왕 하랄 1세 하르파그리에게 추방되었다고 밝혔다.
이렇듯 기원이 불분명한 그의 초기 행적 역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덴마크인과 노르웨이인이 섞인 바이킹 무리를 이끌고 북해 해안과 영국 해협을 종종 습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뒤동 드 생캉탱은 그가 추방된 후 앵글로색슨족의 왕 알스테무스(Alstelmus)에게 피신했다. 알스테무스는 그에게 소규모의 앵글족 부대를 맡겼고, 그는 앵글로족과 스칸디나비아인으로 구성된 바이킹 부대를 이끌고 라인강과 스켈트강 어귀에 있는 프리슬란트와 오스트라시아 해안을 약탈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사료에는 이 내용이 없기 떄문에 신빙성은 불확실하다. 또한 뒤동은 롤로가 876년에 서프랑크 왕국을 침공해 센강 하구에 정착한 뒤, 네우스트리아 일대를 심각하게 약탈했다고 밝혔다. 876년은 바이킹이 센 강을 통해 프랑스를 대대적으로 침략한 해이기도 했다.
뒤동에 따르면, 롤로는 885년에서 887년 사이에 벌어진 바이킹의 파리 공방전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서프랑크 왕국의 제5대 왕이었던 비만왕 카를 3세[6]는 상당한 금을 주어 물러나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금만 받아 챙긴 후 파리에서 물러나 다른 지역을 약탈했다. 이 파리 약탈로 인해 신망을 잃은 카를 3세는 조카인 아르눌프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파리 공방전에서 바이킹을 막아낸 공을 세운 로베르 가문 출신의 파리 백작 외드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서프랑크의 제6대 왕이 되었다.
뒤동에 따르면, 롤로는 890년 바이외에 상륙하여 카롤루스 왕실의 방계 후손이었던 바이외 백작 베렝가리오 2세를 살해하고, 그의 딸인 포파를 납치해 부인으로 삼았다. 이후 890년경 브르타뉴 왕국을 침공했지만 그곳의 국왕 알란 1세에게 격퇴된 뒤 누아용(Noyon)으로 후퇴해 겨울을 보냈다. 그 후 롤로는 네우스트리아를 떠나 영국에서 수년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98년경 또는 905년에 돌아와서 루앙으로 진군하다가 루앙 대주교와 쥬미에쥬에서 만난 뒤 막대한 공물을 받아내는 대가로 루앙을 약탈하지 않는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루앙에 정착했으며, 911년 샤르트르를 포위했지만, 외드의 동생 로베르 1세가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 푸아티에 백작 르누울 2세의 역습을 받아 참패하고 루앙으로 퇴각했다.
2.2.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
당시 로베르 1세와 권력 투쟁을 벌이던 단순왕 샤를 3세는 롤로가 이대로 로베르 1세에게 무너지면 로베르 1세의 위상이 지나치게 강해질 것을 우려해, 그를 회유해서 로베르 1세를 견제하는 데 써먹기기로 했다. 루앙의 대주교 프랑콘 또는 전임자 기가 그를 찾아가서 협상을 제안했고, 때마침 샤르트르에서의 참패로 입지가 불안해진 롤로도 이에 응하기로 했다. 로베르 1세는 처음에는 롤로와 협상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이내 롤로의 대부가 되는 조건으로 협약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911년 7월 20일, 샤를 3세와 롤로는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뒤동에 따르면,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1. 샤를 3세는 "에델강과 바다" 사이의 지역을 루앙 대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롤로에게 양도한다.[7]
2. 롤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루앙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는다.
3. 롤로는 센 강을 통해 프랑스 깊숙이 침입하는 바이킹과 프랑크군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음으로써 왕국을 지키며, 프랑크 국왕에게 경의를 표한다.
2. 롤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루앙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는다.
3. 롤로는 센 강을 통해 프랑스 깊숙이 침입하는 바이킹과 프랑크군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음으로써 왕국을 지키며, 프랑크 국왕에게 경의를 표한다.
기독교식 세례를 받는 흐롤프르(롤로). |
뒤동에 따르면, 롤로는 경의의 표시로 왕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거부하고, 친척 한 명이 왕의 발에 키스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그 노르만인은 왕의 발을 너무 높이 들어올렸고, 샤를 3세는 그 바람에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고, 롤로와 전사들은 폭소를 터트렸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은 뒤동이 노르만 공작에게 아첨하기 위해 지어낸 일화로 간주한다. 롤로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대부가 되어준 로베르 1세의 이름을 딴 로베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흐롤프르였던 본명은 이때부터 프랑스식 이름인 롤로로 일컬어졌다. 또한 그는 루앙 백작이자 바이킹의 침입으로부터 센 강을 방어하는 사람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렇게 롤로가 센강 하구에 자리를 잡자,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해안 인근과 바스센 등 프랑스 북부 지역에 정착했다. 후에 이 지역을 북부인의 땅이란 뜻에서 노르망디(Normandie)로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프랑크 왕국의 언어와 풍습, 종교를 받아들이고 약탈을 자제했다. 이 프랑스어를 쓰고 기독교를 믿는 금발벽안의 인물들은 노르만족(Normands)으로 일컬어졌다.
2.3. 루앙 백작으로서의 치세
롤로가 이끄는 노르만족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 이후 수년간 정착지를 개척하는 데 힘을 기울일 뿐 별다른 약탈 원정을 단행하지 않았다. 전승에 따르면, 롤로가 루마레 숲의 나무에 금반지를 매달아 두었는데, 3년간 누구도 감히 훔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롤로는 루앙 대주교의 협조를 받으며 수도원 여러 곳을 재건하는 등 기독교 신앙에도 충실했다. 그러던 922년 6월 29일, 프랑스 귀족들이 샤를 3세가 바이킹과 싸우러 나간 틈을 타 로베르 1세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샤를 3세는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로베르 1세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치러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샤를 3세는 로트링겐으로 도주해야 했다.샤를 3세로부터 구원을 요청받은 롤로는 로베르 1세가 장악한 파리 인근 지역을 약탈했다. 이에 로베르 1세가 롤로를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샤를 3세가 이 틈을 타 수아송으로 진격했다. 베르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친히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샤를 3세를 막으려고 했다. 이어진 수아송 전투에서, 로베르 1세가 샤를 3세의 전사들에게 암살당했지만 로베르 1세의 아들인 대(大) 위그의 활약으로 샤를 3세가 참패했다. 그 후 샤를 3세는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에르베르) 2세에게 의탁하러 갔다가 오히려 그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로베르 1세의 사위인 라울이 프랑크 왕위에 올랐다.
롤로는 라울을 왕으로 따르길 거부하고 약탈 원정을 재개하기로 했다. 10세기 연대기 작가 랭스의 플로도아르(Flodoard de Reims, 894 ~ 966)에 따르면, 923년 루아르 강에서 활동하던 바이킹 지도자 라게놀드가 "루앙에 살던 동포들"을 설득해, 그들과 함께 플란드르에서 보베까지 이어지는 약탈 원정을 단행하여 프랑크인 1,000명을 납치했다고 한다. 이에 라울 왕과 헤르베르트가 924년 루앙 백국을 침공했지만, 롤로에게 격파되어 우아즈 강 너머로 퇴각했다. 이후 양자는 평화 협약을 논의한 끝에, 베생과 멘 일대가 롤로에게 넘어가고 롤로는 새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조건으로 협약이 성사되었다.
925년, 롤로는 평화 협약을 깨고 군대를 일으켜 프랑스 왕국의 영토였던 플란데런 백국으로 쳐들어가 보베, 아미앵, 아라스, 누아용 시를 차례로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에 라울 왕과 헤르베르트가 재차 군대를 일으켜 루앙 백국을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롤로의 군대는 이들을 물리쳤지만, 베생 주민들이 그에게 불복해 반란을 일으켰기에 더 이상 라울 왕을 몰아붙이지 못했다. 이후 플란데런 백작 아르눌 1세가 반격을 개시해 브레슬을 점령한 뒤 전 병력을 이끌고 노르만족의 외 요새를 포위했다. 롤로는 1,000명 가량의 병력을 파견해 요새를 지키게 했지만, 아르눌 1세는 끝내 요새를 함락하고 그곳에 있던 주민들과 함께 불태웠다. 이후 롤로는 플란데런 백국에게 빼앗아갔던 영토를 돌려주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3. 사망
루앙 대성당 롤로의 석관 |
롤로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랭스의 수도자 리샤르(Richer de Reims, 941 ~ 998)가 기술한 <네 권의 역사서>(Quatre livres d'histoire)에 따르면, 롤로는 플란데런 백국과의 전쟁이 끝난 직후인 925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927년 그의 아들인 기욤 1세가 노르만족의 지도자로서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한 것을 볼 때,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랭스의 플로도아르는 모호한 구절에서 롤로가 928년에도 여전히 생존했음을 암시했다. 또한 롤로의 일대기에 대한 주요 사료를 제공한 뒤동은 롤로가 아들에게 양위하고 5년을 더 살았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대체로 롤로가 925년에서 927년 사이에 아들에게 양위한 뒤 932년경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영국의 역사가 데이비드 더글러스(David Douglas, 1898 ~ 1982)는 양위는 없었고 925~927년 사이에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프랑스 수도자이자 연대기 작가 아데마르 드 샤반(Adémar de Chabannes, 989 ~ 1034)는 롤로가 죽기 직전에 이교도 신들을 기리기 위해 인간 제물을 바치는 동시에 노르만 교회에 기부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일화의 신빙성이 의심된다고 간주한다. 프랑스 수도자이자 역사가인 피에르 드 기부르(Pierre de Guibours, 1625 ~ 1694)는 롤로가 루앙 대성당에 묻혔다가 10세기 후반에 손자인 리샤르 1세에 의해 페캉의 성 삼위일체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고 밝혔다. 루앙 대성당의 남쪽 보행로에 위치한 롤로의 석관은 19세기에 헨리 2세의 석관을 모델 삼아서 제작된 것으로, 석관 앞에 아래의 비문이 세워졌다.
IN.SINU.TEMPLI.ROLLO.QUIESCIT
A.SE.VASTATAE.CONDITAE.NORMANNIAE.PATER.AC.PRIMUS.DUX
LABORE.QUI.FRACTUS.OCCUBUIT.OCTOGENARIO.MAIOR.AN.CM.XXXIII
이 석관 안에는 롤로가 잠들어 있다.
노르망디의 아버지이자 첫 번째 공작은 그로 인해 황폐화되고 안도했다.
이 일에 지친 그는 933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A.SE.VASTATAE.CONDITAE.NORMANNIAE.PATER.AC.PRIMUS.DUX
LABORE.QUI.FRACTUS.OCCUBUIT.OCTOGENARIO.MAIOR.AN.CM.XXXIII
이 석관 안에는 롤로가 잠들어 있다.
노르망디의 아버지이자 첫 번째 공작은 그로 인해 황폐화되고 안도했다.
이 일에 지친 그는 933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롤로와 그 후계에 의해 완성된 노르망디 공국의 강역 |
4. 가족
- 바이외의 포파(? ~ 910): 뒤동 드 생캉탱에 따르면, 바이외 백작 베렝가리오 2세의 딸로, 890년 롤로가 바이외를 함락하고 베렝가리오 2세를 살해한 뒤 롤로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반면 쥬미에쥬 연대기에 따르면, 포파는 생니스 백작 기의 딸이자 베르나르의 누이라고 한다. 또다른 전승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해 남쪽에 위치한 영국의 군도인 헤브리디즈의 양치기 집안 출신의 첩이라고 한다.
- 기욤 1세(900년경 ~ 942): 루앙 백작.
- 아델(912 ~ 962): 초명은 게일로그(Geirlaug). 푸아티에 백작이자 아키텐 공작 기욤 테트 데투프[8]의 부인. 두 부부 사이의 딸 아키텐의 아델라이드는 카페 왕조의 창시자 위그 카페의 왕비가 되었다.
12세기 노르망디 수도자이자 연대기 작가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롤로는 기독교 세례를 받은 후 단순왕 샤를 3세의 4살된 딸인 기젤라를 정식 아내로 맞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어떤 동시대 사료에도 확인되지 않기에, 학계에서는 기젤라가 허구의 인물이라고 본다.
5. 기타
- 롤로의 직계 후계는 6대 만에 단절되었지만 혼인 관계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의 여러 귀족 가문의 선조가 되었다.
- 17세기의 어떤 연극과 작품들에서는 롤로를 까다로운 성품의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6. 대중문화에서
- 중세 대전략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등장한다. 구현 자체는 게임 발매부터 있었지만 노르망디 가문의 시조로 가계도상에만 구현되었던 것이 유료 DLC <고대의 신> 발매 후 처음 플레이 가능한 인물로 등장했는데, 이때만 해도 바이킹의 시대 시나리오에서 니달로스 족장 로근발드의 영지가 없는 가신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이름은 흐롤프 드 노르망디. 무력 20에 뛰어난 전략가, 강인함, 바이킹, 용감함 트레잇을 가지고 있는 인간흉기로 나오는데 대신 영지가 없어서 철인 모드 플레이는 불가능했다. 그랬던 것이 가장 최신 DLC이자 무료 DLC인 <철의 세기> 이후에는 나이가 20살 정도 어려지면서 전설대로 니달로스 족장 로근발드의 7살 아들로 등장하는걸로 바뀌었다. 즉, 철인 모드 플레이가 가능해진 것이다. 대신 노르망디 가문의 문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건 아쉬운 부분이다.[9]
-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에 롤로라는 이름의 청년이 등장한다. 본명은 흐롤프이며 롤로는 에스트리드 부인이 프랑크어로 지은 애칭이라고 한다. 이후 이 청년은 에스트리드의 요청으로 에이보르와 함께 그녀를 위장납치하고 프랑크 왕국으로 향하는데, 시기와 본명을 보면 이 청년이 훗날 노르망디의 시조가 되는 롤로로 보인다.
6.1. <바이킹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동생[11]으로 각색.[12]작중 무력 순위에서 1, 2위를 다투는 뛰어난 광전사이다. 용맹만 뛰어난게 아니라 지략도 출중하여 후에 프랑크 쪽에서 싸웠을 때는 센 강을 거슬러 오는 바이킹 함대를 쇠사슬로 강폭을 막아 무력화시키기도 했다.그러나 똘끼와 폭력 성향은 더 심한 데다가, 형인 라그나르의 활약에 자기가 묻힌다는 열등감 때문에 라그나르에 대한 애증이 겹치는 민폐 캐릭터이기도 하다. 작중 최고의 트러블 메이커. 시즌 1 내내 라그나르와 자잘한 대립을 이어가다, 시즌 2에서는 보르그의 회유에 넘어가 라그나르와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전투 중 라그나르를 대면하고는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항복한 뒤, 배신에 대한 죄를 묻기 위한 재판에서 입법자가 신들의 뜻이라며 죽음을 면하게 해준다.[13] 이후 자기 반성을 하고 잉글랜드 원정에 자신도 데려가달라며 라그나르에게 부탁하지만 거절당하고 카테가트에 남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잔류가 오히려 라그나르와 그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는데, 카테가트가 보르그의 습격을 받자 그가 라그나르의 가족들을 대피시켜 라그나르의 가족들이 죽거나 인질로 잡히지 않은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다시 신뢰를 얻은 롤로는 파리 습격 후 잔류하기 전까지 라그나르의 충실한 심복으로 일한다. 이후로는 성급한 성격도 많이 죽었는지 라그나르가 가톨릭 신자들과 협력하는 데도 불만이 없었으며 파리 약탈에도 참여해 맹활약했다. 라그나르의 파리 약탈 이후 재약탈을 위한 전초기 지를 맡기로 자원한다. 이때 프랑크 왕은 재침공 방지를 위해 그에게 지금의 노르망디 지역의 영토 하사와 자기 딸과의 결혼을 주선하면서 시즌 3가 끝난다. 아마 결국은 라그나르와 대립하게 될 듯. 역사적으론 이후 잉글랜드를 정복한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직계 조상이며, 라그나르보다 60년 정도 후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결국 롤로의 후손은 라그나르가 못 이룬 잉글랜드 정복을 이룬다.시즌 4에서 기슬라 공주와 결혼하여 프랑크 왕국의 부마이자 루앙의 백작 겸 장군이 되어 으리으리한 곳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다. 다만 마누라가 속을 엄청나게 썩여서 처음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물론 기슬라 공주의 입장에 롤로는 자신의 나라의 수도에 쳐들어와 백성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해간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짐승 떼거리들의 수장이건만 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그와 결혼한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본래의 똘끼가 넘쳐흐르는 바이킹이기를 포기한 그만의 대인배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인데, 기슬라 공주가 결혼 첫날밤에 침실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발악을 하고[14] 침실에선 악을 쓰면서 잠자리를 거부하고 죽여버리겠다고 칼을 들이대는 것까진 어쩔 수 없다쳐도, 기껏 프랑크식 몸치장을 하고 프랑크식 예법으로 인사했더니 대놓고 안어울린다며 깔깔거리며 비웃고, 공식 왕실 연회에서 불경한 언사로 모욕을 주고 면상에 술을 쳐붓고 휙 가버리고 심지어는 로마 교황청까지 동원해 고자라는 누명[15]까지 씌웠음에도 롤로는 한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아예 진짜 프랑크인으로 살기로 작심한 것인지 아니면 기슬라 공주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 프랑크에 빌붙은 롤로를 비난하는 동족들을 프랑크 왕국의 군사들과 더불어 무참히 도륙했으며, 어느새 말까지 배워서 결혼이 무효화되기 직전에 유창한 프랑크-로망어로 "이러시면 안된다. 내 숙명은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고 또한 목숨을 바쳐 이 나라와 백성(파리)을 지키는 것"이라고 호소하여 극적으로 기슬라 공주의 마음을 돌렸으며, 또한 "나는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내 동포들조차도 주저없이 죽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팔찌[16]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당신이 싫다면 기꺼이 버릴 수있다."는 식으로 진심을 고백해 결국 사랑을 이루는데 성공한다.이후 무식하게 닥돌만 하는 광전사 이미지에서 벗어나 바이킹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략을 구상하는 등 나름 머리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17] 라그나르가 계획한 바이킹 대군세의 파리 침공을 센 강에서 지략으로 격퇴하였다. 강에 설치해둔 철쇄로 신나게 달려오던 롱쉽 대함대를 뒤엎더니 화공을 가해서 깔끔하게 박살내버리는 그의 계책은 를르슈 람페르지의 전술능력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결국 롤로가 라그나르를 몰락시켰다고 볼 수 있는데, 라그나르가 입안한 파리 원정이 롤로로 인해 대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라그나르는 바이킹 사이에서 인망이 땅에 떨어졌고, 그후 은거하다가 잉글랜드로 무모한 원정을 떠나 노섬브리아 왕 앨라 2세에게 잡혀 죽기 때문이다.시즌 4 하반기 예고편에서는 이제는 적이 된 비요른과 함께 아랍계 문화권으로 추정되는 도시를 공격하는 모습이 나왔다.[18][19] 아마 후우마이야 왕조의 도시로 추정된다. 그리고 실제로 바이킹으로서 끓어오르는 모험심을 해소하기 위해 영지 통치는 뒤로 하고 비요른을 따라나선 것으로 드러났다.[20] 플로키가 귀환하는 롤로를 보고, 비요른에게 훗날 우리 중 누구보다 뛰어난 명성을 얻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며 죽여버렸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롤로의 후손인 정복왕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것을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잉글랜드 뿐만 아니라 기독교로 개종한 롤로의 후손들은 시칠리아 왕국과 안티오크 공국을 세우고, 제1차 십자군의 주력으로 참전하여 중세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다. 훗날을 돌이켜보면 롤로는 러시아를 세운 류리크와 함께 바이킹으로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후대에 남겼다.
시즌 5 9화에서 직접 등장은 안했지만 비요른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이바르에게 원군을 보낸다. 그 뒤 10화 마지막 장면에서 잠시 등장. 함대를 이끌고 자신의 몫을 찾으러 카테가트로 향하면서 파트1의 대미를 장식한다.
11화에서 자신의 몫이라는 것의 의미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라게르사와 자신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는 비요른을 프랑크 왕국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1] 노르만 왕조의 직계는 윌리엄 1세의 막내 아들이었던 헨리 1세에서 마감되었지만 헨리 1세의 외손자인 헨리 2세가 플랜태저넷 왕조를 창설하면서 이어졌고, 이후에도 몇 차례 왕조의 변화는 있었지만 모계나 방계로 윈저 왕조까지 이어졌다. 즉, 이후 수많은 영국 왕을 낳은 수많은 모후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공식적으로 현재 찰스 3세와 그 가족들에게는 바이킹 수장이었던 흐롤프르, 즉 롤로의 피가 흐른다고 볼 수 있다.[2] 9~10세기 노르드인들이 아이슬란드를 발견하고 정착한 과정을 다룬 12세기 저서.[3] Dacia. 현대 학자들은 로마 제국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정복된 다키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덴마크를 뜻하는 라틴어 Dania 와 스웨덴을 뜻하는 라틴어 Suecia 의 합성어일 거라고 추정한다.[4] 일부 사본에서는 라그엔발드의 외손자라고 기술되었다.[5] 9세기 노르웨이 왕이 오크니 제도를 정복한 때부터 약 1200년까지 오크니 제도의 역사를 다룬 연대기[6]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의 손자로 본디 동프랑크의 국왕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지만 일시적으로 서프랑크의 왕위를 획득했다.[7] 역사가들은 롤로가 양도받은 영토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여러 학자는 루앙, 에브뢰, 리지외 지역을 양도받았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노르만 중세 역사가 피에르 보댕(Pierre Bauduin, 1964 ~ )은 루앙 시와 그 주변 일대만 수여받았을 거라고 추정한다.[8] 푸아티에 백작으로는 기욤 1세, 아키텐 공작으로는 기욤 3세이다.[9] 가문명은 게임 수정 도구로 이용해 바꿀 수 있지만 문장은 고유 문장이라 변경하려면 세이브 파일을 뜯어 고쳐야 된다.[10] 롤로의 일본식 발음[11] <바이킹스> 공식 설정 자료집에 다음과 같이 명시됨. "Ragnar's younger brother Rollo has always lived in Ragnar's shadow." - Michael Hirst(<바이킹스> 제작 / 각본)[12] 물론 실제로는 활동 시기가 60년 정도 차이가 나고, 본거지도 노르웨이와 스웨덴으로, 당시 기준으론 동족도 무엇도 아닌 그냥 먼 타지인들이었다.[13] 사실 판결을 한 입법자는 라그나르의 뇌물로 롤로의 판결을 그렇게 한 것이다. 재판 이전, 라그나르는 잉글랜드에서 털어온 금화 한 냥을 비요른에게 보여주는데 비요른은 금화를 뺏은 뒤 이게 비싼거냐며 묻는다. 입법자가 롤로를 살려주는 것으로 판결을 내리자 라그나르에게 백작의 권리로 처형하라는 동료의 말에 신성한 바위에서 내려진 판결이라며 거절하곤 비요른이 물어봤던 그 금화를 손에 쥔 입법자에게 시선을 맞춘다.[14] 결국 왕의 가신인 롤랑이 짐짝처럼 들쳐메어 침실에 배달했다.[15] 물론 롤로와의 결혼을 무효로 돌리려고 벌인 공작이다.[16] 바이킹의 증표[17] 하지만 이전 시즌에서도 롤로가 지략을 구사하는 장면은 종종 나오긴 했다. 하지만 라그나르가 워낙 지략이 월등했고, 롤로는 무력이 더 돋보였기에 롤로의 지략은 크게 주목받을 일이 없었다.[18] 비요른과의 임시 동맹에 대해 아내가 된 기슬라가 반대하며 따지자 롤로는 "나의 몸속에는 바이킹의 피가 흐르며, 번개가 칠 때 나는 토르가 망치를 휘두르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볼 때 바이킹에 대한 정체성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도 역사적으로 롤로는 끝까지 바이킹 신앙을 유지했다고 한다.[19] 예고 영상에서도 과거 비요른과 다정했던 관계까진 아니지만, 다시 같이 전쟁을 함께하며 그때의 관계가 되살아나는 듯한 서로의 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20] 기슬라가 만류하는 것도 뿌리치고 참가했다 버젓이 돌아와서는 기슬라에게 욕먹으며 두들겨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