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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라울(Raoul de France) |
출생 | 880년 / 890년 |
사망 | 936년 1월 (향년 45/55세) |
재위기간 | 923년 ~ 936년 |
아버지 |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 |
장인 | 로베르 1세 |
1. 개요
프랑스어: Rodolphe (로돌프), Raoul (라울)라틴어: Rodulfus (로둘푸스)
라울(Raoul)은 서프랑크 왕국의 제9대 왕이었다. 880년 또는 890년경에 태어나 936년 1월 14일에 승하했다.
그의 가문은 현대 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카롤루스 왕조의 방계 후손으로, 샤를 마르텔의 사생아인 제롬(히에로니무스) 백작의 후손이며 메츠 백작인 비빈(Bivin)을 시조로 하는 비빈 가문(Bivinids)이다. 라울의 아버지인 리샤르가 부르고뉴 공작으로 임명되고 그의 동생인 보손이 프로방스 왕으로 선출되면서(보손 왕조) 크게 번성하게 된다.
부르고뉴 공작으로 전임 왕인 로베르 1세의 사위였다. 923년 샤를 3세 단순왕과 왕위를 놓고 수아송에서 싸우던 장인 로베르 1세가 암살당하자 함께 싸우던 느스트리(네우스트리아) 일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했다.
로베르 1세와 달리 라울은 카롤루스 왕조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정통성에 약점을 안고 있었으며, 폐위된 샤를 3세 단순왕을 감금한 카롤루스 왕실 출신인 매제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에르베르) 2세의 요구를 일일이 들어줘야했다.
2. 생애
전임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와 오셰르의 여백작 아델라이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921년 아버지가 죽자 부르고뉴 공작위를 이어받았다. 923년 장인 로베르 1세의 암살로 왕위에 올랐고, 동생 위그에게 부르고뉴 공작위를 물려주었다,923년 라울이 즉위한 후에 바이킹이 침략해와 그의 처남인 대 위그[1]의 군대를 격파하고, 루아르 강부터 부르고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약탈하다가 부르고뉴에서 그의 동생인 위그 공작에게 격퇴되어 돌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라울은 이 참사가 벌어지는 동안 딱히 별 조치를 취하지 못했는데, 바이킹이 돌아가기가 무섭게 단순왕 샤를 3세 시절 생클레르쉬레프트 평화조약으로 노르망디에 정착했던 흐롤프(롤로)의 노르만인들이 플랑드르로부터 시작해 지난 시기 바이킹이 약탈했던 영토를 또 공격해 황폐화시키자, 이번에는 동생 위그 공작과 함께 군대를 소집해 노르만군을 공격했지만 대패해 왕 본인이 부상당하고 푸아티에 백작이 전사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노르만군 또한 많이 죽어 약탈을 그만두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후 기마 전사들인 마자르족이 독일과 이탈리아를 넘어 아를 왕국을 약탈하고, 심지어 랭스 지방까지 도달하는 등 서유럽에 대한 전방위적인 약탈을 자행하자 라울은 935년 마자르족이 부르고뉴에 처들어온 것을 노려 대규모 군대를 출정시켰고, 이에 마자르족은 싸우기 전에 도망쳤다. 이 덕분에 서프랑크는 한동안 바이킹과 마자르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한편, 로트링겐, 즉 로렌을 되찾기 위해 오토 왕조[2]의 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와 격돌했다. 하지만 925년 하인리히 1세가 로렌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또 이 와중에 선왕 샤를 3세 단순왕을 감금하고 은근히 왕위를 노리던 매제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에르베르) 2세[3]와 신경전을 벌여야했다.
앞서 샤를 3세와의 내전 도중 그를 배신하고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던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가 샤를 3세를 넘겨주는 대가로 랭스와 랑(Laon)을 요구했다. 그러나 라울이 그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해 불만을 표시하자 급기야 로마 교황에게 랭스와 랑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결국 라울은 헤르베르트 2세에게 랑을 넘겨주고, 헤르베르트의 아들 위그가 랭스 대주교로 취임하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929년에 샤를 3세가 옥사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라울은 헤르베르트 2세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왕권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랭스를 공격해 위그를 쫒아낸 뒤 아르탈드를 대주교로 임명하고는, 동생인 부르고뉴 공작 위그와 연합해 헤르베르트 2세를 공격하여 샤토티에리 요새에 몰아넣었다. 결국 935년에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고, 왕권을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933년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노르망디의 제2대 루앙 백작[4] 기욤 1세에게 채널 제도를 하사했다. 그후 936년 1월에 라울은 갑작스럽게 승하했다. 아들 없이 죽었기에 왕위는 다시 카롤루스 왕조로 넘어가게 되었다. 라울의 동생인 위그 공작이 카롤루스 왕조의 루이 4세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루이 4세가 대 위그에게 반란 토벌을 명령해 결국 진압되었고, 부르고뉴 공국의 반을 대 위그에게 나눠주어야 했다. 그 결과 대 위그의 세력만 더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으니 아이러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