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영연방 왕국의 국왕으로 캐나다 퀘벡주에서 샤를 3세로 불리는 인물에 대한 내용은 찰스 3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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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샤를 3세(Charles III) 단순왕 샤를(Charles III le Simple) |
출생 | 879년 9월 17일 |
사망 | 929년 10월 7일 (향년 50세) |
재위기간 | 898년 ~ 923년 |
아버지 | 말더듬이왕 루이 2세 |
어머니 | 프리울리의 아델라이드 |
1. 개요
프랑스어: Charles III (샤를 3세)라틴어: Karolus III (카롤루스 3세)
'샤를 단순왕'으로도 불리며, 프랑스어로는 '샤를 르 생플'(Charles le Simple)이다. 말더듬이왕 루이 2세의 유복자로, 태어나자마자 모후인 아델라이드가 이복형들인 루이 3세와 샤를로망 2세에 의해 간통죄를 덮어쓰고, 샤를은 계승권을 박탈당했다. 그후 샤를로망 2세가 후사없이 승하했지만 샤를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즉위하지 못했고, 5촌 당숙뻘인 동프랑크 왕국의 비만왕 카를 3세에게 서프랑크의 왕위를 빼앗겼다. 대바이킹 전쟁에서의 실책 때문에 카를 3세가 조카인 아르눌프의 쿠데타로 실각한 뒤에도 파리 공성전의 영웅이었던 파리 백작 외드에게 왕위를 뺏겼지만 이후 장성한 샤를은 외드와 대립하게 되었고, 외드가 후사없이 승하하자 그의 지명으로 마침내 서프랑크의 국왕이 되었다. 이후 대귀족들과 사사건건 대립하다가 그 역시 당숙인 비만왕 카를 3세처럼 쿠데타로 실각했다.
별칭인 '단순왕'(le Simple/the Simple)은 원래 라틴어로 Simplex였는데, 사실 simplex에는 솔직하다라는 뜻이 있어 별칭도 그렇게 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샤를 3세가 간단명료하면서도 솔직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자체는 절대 단순하거나 바보같지 않았고, 오히려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었으나..[1] 번역 과정에서 simplex를 '단순하다/어리석다'라고 받아들이다 보니, 졸지에 '솔직왕'은 '단순왕'으로 이름이 남아 버렸다. 심지어 역사가들에 의해 '미련왕'(Stultus), '멍청왕'(Hebes), '우둔왕'(Insipiens), '미미왕'(Parvus), '열등왕'(Minor) 같은 갖은 바리에이션이 붙어버리게 되었다...
2. 생애
샤를 3세 단순왕은 879년 9월 17일 루이 2세 말더듬이왕과 프리울리의 아델라이드[2]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부왕이었던 루이 2세 말더듬이왕은 샤를이 태어나기 5개월 전인 879년 4월 10일 콩피에뉴에서 급사했다.루이 2세 말더듬이왕에게는 전처 소생의 루이 3세와 샤를로망 2세라는 장성한 두 아들이 있었지만 형제를 낳은 여인의 신분이 한미해 루이 2세와 그녀는 비밀리에 결혼했으며, 이는 결국 샤를 3세의 조부였던 샤를 2세 대머리왕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분노한 샤를 2세 대머리왕의 강압에 의해 루이 2세 말더듬이왕은 이혼했으며, 샤를 3세 단순왕의 모후인 프리울리의 아델라이드와 재혼했다.
하지만 루이 2세 말더듬이왕은 부왕 샤를 2세 대머리왕이 붕어하자마자 이혼했던 전처를 복권시켰으며, 루이 3세와 샤를로망 2세 두 아들의 왕위계승권도 복권시켰다. 그리고 루이 2세 말더듬이왕이 2년 후에 승하하자 서프랑크 왕국의 공동왕이 된 루이 3세와 샤를로망 2세 형제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위해 이복동생이었던 샤를의 모후 프리울리의 아델라이드에게 간통죄를 덮어씌우며, 샤를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했다. 샤를이 루이 2세가 승하한 후에 태어난 유복자라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프리울리의 아델라이드는 무거운 고문을 버티며, 무죄를 주장했고, 결국 루이 3세 형제의 지시를 받아 아델라이드를 형문했던 랭스 대주교는 무죄를 선언했다. 이는 샤를이 이복형 샤를로망 2세가 후사없이 사고로 죽은 후 왕위계승권을 되찾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샤를로망 2세가 승하한 884년, 샤를은 5세에 불과해 서프랑크의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5촌 당숙인 동프랑크의 비만왕 카를 3세에게 왕위를 뺏겼으며, 그가 아르눌프에게 축출된 888년에도 어리다는 이유때문에 로베르 가문 출신의 대귀족이자 대바이킹 전쟁의 영웅이었던 외드에게 왕위를 뺏았겼다.
그러나 889년, 장성한 샤를은 왕위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다. 우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귀도를 찾아가 외드 대신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요구했으며, 서프랑크 남부 아키텐 공작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마침내 샤를은 893년 1월 랭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랭스 대성당에서의 대관식은 카롤루스 대제가 처음 행한 것으로 이는 역대 프랑스 국왕의 전통[3]이었는데 이를 연상시키는 쇼를 함으로써 핏줄의 정통성이 약했던 외드의 약점을 공격한 것이었다. 그리고 893년부터 2년 동안 양측은 내전을 벌였지만 뚜렷한 승세를 점하지 못한 채 휴전 상태가 되었다.
이때 유럽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동프랑크의 국왕 아르눌프가 내전에 개입했다. 샤를 3세의 6촌형에 해당했던 아르눌프는 처음엔 일단 카롤루스 왕가의 샤를 3세를 지지했다. 다만 그 댓가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이 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샤를 3세는 이를 거절했고, 두 사람간에 반목이 시작되었다.
895년 아르눌프는 샤를 3세가 아직 소년인 점을 들어 왕국 통치가 가능한지를 물어보겠다면서 서프랑크 왕 외드와 대립왕 샤를 3세를 보름스로 불렀으나 샤를 3세는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외드는 보름스로 와 자신의 왕위 계승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으며 아르눌프에게 많은 공물을 바쳤다. 이에 샤를 3세에게 분노한 아르눌프는 외드를 유일한 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인정했다. 이같은 아르눌프의 외드 지지는 외드가 승하할 때까지 이어졌다. 또한 외드의 동생이었던 로베르 1세가 서프랑크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으며, 결국 장기간에 걸쳐 프랑스 왕국을 통치하게 될 카페 왕조의 창립을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아르눌프의 분노를 산 이후 내전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샤를 3세는 897년에 왕위 포기 선언을 했지만 898년 1월 외아들 아르눌이 요절한 이후, 자녀가 없었던 외드가 승하하면서 정적이었던 샤를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다만 외드는 자신의 군사력은 당연히 동생인 로베르에게 물려주었다.
왕이 된 샤를 3세는 노르드계 바이킹과 사라센인의 침공에 맞서야했는데 승패를 거듭하며 그럭저럭 방어에 성공했다.[4] 또한 중프랑크 왕국의 멸망 이후 뜨거운 감자였던 로트링겐을 획득하기도 했다. 샤를 3세는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승하하자 같은 카롤루스 집안인 자신의 동프랑크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로트링겐을 침공했는데, 로트링겐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이 땅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직접적인 통치는 하지 못했다.
919년 잉글랜드 남부 웨식스 왕국의 왕 대 에드워드의 딸 에아드기푸와 결혼했다. 에아드기푸는 아들 루이 4세를 낳았다.
로트링겐의 획득 이후, 샤를 3세는 상대적으로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홀대했는데, 대바이킹 전쟁의 영웅이었던 로베르와 친밀했던 이 지역 귀족들이 노르드인과 싸우러 샤를 3세가 나간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로베르 1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샤를 3세는 로트링겐으로 퇴각해야 했고, 922년 로베르가 '로베르 1세'로 서프랑크의 왕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923년 샤를 3세는 로베르 1세와 수아송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정적인 로베르 1세를 암살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로베르 1세의 지지세력인 베르망두아의 백작 헤르베르트(에르베르) 2세에게 사로잡혀, 감금당한 상황에서 7월 결국 폐위되었다.#
샤를 3세는 이후 계속 감금당한 상태에서 929년 10월 옥사했다.
[1] 그래서 샤를 3세를 Charles the Straightforward로 불러주는 곳도 있다.[2] 파리 백작 겸 프리울리 후작이었던 아달하르트의 딸이었다.[3] 백년전쟁 말기 프랑스 왕국의 도팽이었던 샤를 드 발루아는 잉글랜드군에게 랭스를 뺏앗긴 상태라 대관식을 치르지 못하고, 계속 '도팽'에 머물렀다. 결국 동레미의 처녀 잔 다르크가 랭스를 탈환하여 대관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정통성이 보장된 프랑스 왕 샤를 7세가 될 수 있었다.[4] 노르웨이계 바이킹 침략자였던 흐롤프(롤로)가 샤를 3세에게 회유되면서 노르망디 공국의 전신인 루앙 백국이 성립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