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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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앞에 나타난 성모 (일부) 막달라 전설의 대가 作 | ||||||
<colbgcolor=#191917,#191917><colcolor=#e6e2dd,#e6e2dd> 이명 | 퐁텐의 베르나르 (Bernard de Fontaine) | |||||
출생 | 1090년경 | |||||
프랑스 왕국 부르고뉴 공국 퐁텐레디종 | ||||||
사망 | 1153년 8월 20일 (향년 62~63세) | |||||
프랑스 왕국 샹파뉴 백작령 클레르보 | ||||||
직업 | 성직자(수도자), 신학자, 작가 | |||||
종교 | 가톨릭 | |||||
소속 | 시토회, 성전 기사단 | |||||
재임 기간 | 초대 클레르보 수도원장 | |||||
1115년~1153년 | ||||||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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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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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 | 1174년 1월 18일 | ||
교황령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주례 | |||
칭호 | 교회학자(꿀처럼 단 박사)[1], 마지막 교부, 수도원장 | ||
상징물 | 시토회 수도복, 목장, 책 | ||
축일 | 8월 20일 | ||
수호 | 시토회, 성전 기사단, 양봉업자, 양초 제조업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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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Ultimus inter Patres 마지막 교부 |
그는 생전에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글솜씨를 겸비한 인물로 신학을 우주와 음악과 관련짓는 특유의 지적이고 미려한 문체를 사용해 당대 교회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신비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또한 그는 12세기 초 당시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던 봉쇄수도회인 시토회의 기반을 공고히 다져 실질적인 설립자로 인정받았고, 예루살렘의 순례자들을 수호하기 위한 기사단인 성전 기사단의 창단에도 큰 기여를 해 십자군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가톨릭, 성공회, 그리고 루터교회에서는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8월 20일이다.
2. 생애
2.1. 유소년 시절
베르나르도는 1090년경 퐁텐레디종의 성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퐁텐의 테슬랭(Tescelin de Fontaine)[2]은 해당 지역의 영주이자 기사였고, 어머니 몽바르의 알레타(Alèthe de Montbard)[3]는 부르고뉴 공국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에겐 다섯 명의 형제와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베르나르도를 따라 수도자가 되었다.[4]베르나르도는 9살이 되는 해에 샤티용쉬르센이라는 마을에 위치한 생보를 성당의 의전사제들[5]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명석함을 드러냈는데, 특히 문학과 수사학에서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다.
2.2. 수도자의 길
베르나르도는 사제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연스레 신앙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렇게 성실히 학업을 이어 가던 중 1107년 어느 날, 돌연 어머니의 부고를 들은 그는 큰 충격과 함께 세상에 대한 회의감을 가져 이내 속세와 완전히 절연하고자 수도자가 되기를 결심했다. 이윽고 몰렘의 로베르토(Robert de Molesme)를 필두로 새로이 설립된 봉쇄수도회인 시토회에 대한 정보를 접한 그는 청빈한 극기의 신앙 생활을 추구하는 수도회의 정신에 감명을 받아 1113년 자신의 지인들인 서른 명의 부르고뉴 귀족 청년들과 함께 시토 수도원에 입회했다.베르나르도는 얼마 되지 않아 시토회에서 가장 촉망 받는 수도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뛰어난 성서학적·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신학, 특히 성모 마리아에 관한 신비주의 신학에 관한 연구 및 저술 활동을 활발하게 할 뿐더러 봉쇄수도회 특유의 가혹한 규율을 성실히 따르는 것을 모자라 그보다 더한 고행도 자처했을 정도로 모범적인 수도 생활을 실천했다. 그는 또한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는데, 이따금씩 자신의 의지가 서서히 나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때마다 “베르나르도야,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를 왔느냐(Bernarde, ad quid venisti)”라고 자문함으로써 스스로를 독려했다.
2.3. 클레르보의 수도원장
입회한 지 2년이 지난 1115년 사제 서품을 받음으로써 수도사제가 된 베르나르도는 당시 시토 수도원장이었던 스티븐 하딩(Stephen Harding)에 의해 본격적인 시토회 확장을 책임지는 인물로 발탁되었다. 이에 그는 12명의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새로운 수도원 건립을 위한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때마침 이러한 소식을 들은 트루아 백작 위그 1세(Hugues I)와 베르나르도의 귀족 친척은 그에게 당시 발레답생트라고 불리던 큰 언덕과 그 주변 지역을 기증했다. 같은 해 6월 25일 해당 장소에 도착한 그는 그곳을 ‘깨끗한 계곡’이라는 뜻인 클레르보라고 명명했고, 곧바로 수도원 건설 계획을 착수했다. 이후 동료들 간의 별다른 이견 없이 클레르보 수도원의 초대 수장으로 선출된 그는 샬롱쉬르마른 주교 샹포의 기욤(Guillaume de Champeaux)의 승인에 따라 정식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다.베르나르도는 수도원의 수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져누웠다. 그러나 병약한 몸으로도 시토회의 증원에 헌신한 그의 노력 덕분에 입회 인원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들 중에서는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도 있었다. 자신의 계획이 순항하고 있음을 직시한 그는 이 기세를 몰아 새로운 시토회 공동체 창설을 전폭적으로 주도했다. 그렇게 베르나르도가 1118년 트루아퐁텐 수도원과 퐁트네 수도원을, 1121년 푸아니 수도원을, 그리고 1131년 셰를리외 수도원 등을 차례차례 세움으로써 시토회는 교회 내 수도 생활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한편 시토회의 성장으로 자신들의 주도권이 위축되고 있음을 감지한 베네딕도회 산하의 클뤼니 대수도원 수도자들은 이들의 신앙 생활 방식을 신랄히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알게 된 베르나르도는 클뤼니 수도자들의 무분별한 힐난으로부터 시토회를 변호하고자 《생티에리의 기욤에게 보내는 변론(Apologia ad Guillelmum Sancti Theoderici Abbatem)》을 집필한 후, 이를 그의 친구인 베네딕도회 수도자 생티에리의 기욤(Guillaume de Saint-Thierry)[6]에게 클뤼니 대수도원으로 전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리하여 당시 그곳의 수도원장이었던 몽부아시에의 피에르(Pierre de Montboissier)[7]는 베르나르도의 글을 전달받았고, 그 속에 담긴 지적이고 일목요연한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아 앞으로 시토회를 난처하게 만드는 사태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그에게 약속하는 답장을 보냈다.
2.4. 교황의 조언자
베르나르도는 수도원의 일뿐만이 아닌 교황의 조언자로서도 일을 하게 되었다. 38세 때 트로아에서 개최된 성직자 회의에서 성전 기사단의 혁신을 위탁받았음을 시작으로 교리 논쟁 같은 교회의 중대한 문제에 하나하나 개입했다. 1130년 2월 14일 교황 호노리오 2세가 사망하자 교황이 2명으로 분열되었는데, 이 때 베르나르도는 9월의 에탕프 공의회에서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를 비판하고 교황 인노첸시오 2세를 옹호했다. 결국 이듬해 1131년 새로운 교황 선출은 그의 의사대로 잘 진행되었다. 1140년부터는 여러 지역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설교와 강론 활동을 벌였고, 피치 못해 발이 닿지 못하는 곳에는 서한을 무려 500여 통이나 보내기도 했다.시토회 수도자이자 베르나르도의 추종자였던 피사의 베르나르도가 에우제니오 3세[8] 교황으로 선출되자 베르나르도는 그에게 교황이 해야 할 일과 주의해야 할 일을 당부했고, 에우제니오 3세는 1145년 12월 칙서를 통해 베르나르도에게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위한 십자군 모집을 맡겼다. 베르나르도는 각지에서 프랑스의 루이 7세나 콘라트 3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모았지만 그들의 속셈이 너무나 제각각이어서 결론적으로 크게 깨졌다.
3. 대중 매체
-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쓴 신곡 천국편에서 가장 높은 영역의 천국인 지고천에 머무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단테에게 지고천을 안내하면서 이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
- 일본의 비주얼 노벨 괭이갈매기 울 적에에서 등장하는 캐릭터인 클레르 보브 베르나르두스는 그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 캐나다의 게임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주요 세력 중 하나인 템플 기사단의 소속 일원으로 묘사된다.
4. 어록
“베르나르도야,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를 왔느냐.”[9] “Bernarde, ad quid venisti.” |
“영원의 관점에서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10] “Quid hoc ad aeternitatem.” |
“그릇된 즐거움보다 더욱 큰 고통은 없다.” |
5. 관련 문서
[1] 라틴어로는 Doctor Mellifluus.[2] 1070년~1117년.[3] 1070년~1107년. 프랑스어식 이름은 알레트. 현재 가톨릭의 복녀이기도 하다.[4] 그중 세 명이 훗날 가톨릭에서 복자로 시복되며, 그 이름은 바로 베르나르도의 형인 클레르보의 복자 제라르도(Gérard de Clairvaux, ?~1138년), 여동생인 쥐이의 복녀 훔벨리나(Ombeline de Jully, 1092년~1141년), 그리고 남동생인 클레르보의 복자 니바르도(Nivard de Clairvaux, 1100년경~1150년)다.[5] 성당과 가까운 특정 건물에 공동으로 거주하는 사제들이다.[6] 1085년경~1148년.[7] 1092년경~1156년. 가톨릭 내에서는 가경자 베드로(Petrus Venerabilis)라는 칭호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복자로 시복된 상태다.[8] 인노첸시오 2세와 에우제니오 3세 사이에 첼레스티노 2세와 루치오 2세 교황이 있는데, 모두 재위기간이 1년 남짓으로 짧다. 에우제니오 3세는 1878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복자가 되었다.[9] 베르나르도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나 의지와 끈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을 때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다.[10] 베르나르도가 고난과 역경으로 마음이 심란해졌을 때 중얼거렸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