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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자]: 프리드리히 2세의 자매인 마르가레테의 아들 하인리히와 프리드리히 마르가레테의 두 번째 남편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 프리드리히 2세의 조카인 게르트루드의 첫 번째 남편 모라비아 변경백 블라지슬라프 게르트루드의 두 번째 남편 바덴의 헤르만 게르트루드의 세 번째 남편 로만 다닐로비치 게르트루드의 아들 바덴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가 혈연 관계를 근거로 오스트리아 공작위 주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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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1세이자 루트비히 4세의 대립 독일왕. 루트비히 4세와 그의 동시 선출은 선제후 제도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2. 생애
2.1. 오스트리아 공작
합스부르크 가문의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와 케른텐의 엘리자베트(Elisabeth von Görz und Tirol 1262~1313)의 둘째 아들로 빈에서 태어났다.1298년, 형 루돌프 3세와 함께 아버지로부터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받았다. 1307년 형 루돌프 3세가 요절하고 이듬해에는 아버지 알브레히트 1세가 사촌 요한 파리키다에게 암살당하자 어린 동생들의 후견인 겸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루돌프 1세와 아버지 알브레히트 1세가 보유했던 독일왕위는 아버지의 강력한 정적인 마인츠 대주교 페터 폰 아스펠트(Peter von Aspelt 1245~1320)의 선동으로 룩셈부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7세에게 넘어갔다. 결국 힘에서 밀린 그는 독일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였고, 대신 하인리히 7세로부터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에 대한 주권을 확인받았다.
어린 시절 호프부르크에서 함께 자란 외사촌 루트비히 4세와 친구사이였다. 그러나 1313년 바이에른 공국의 지역 귀족들이 루트비히 4세의 친척이자 니더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1세의 어린 아들들의 후견을 프리드리히에게 맡기면서 사촌 간의 정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서로 무력 충돌을 빚었다. 이를 기회로 삼아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려 바이에른을 침공했지만, 1313년 11월 가멜스도르프 전투에서 루트비히 4세에게 완패했고 니더바이에른 공작들에 대한 후견인을 포기했다.
2.2. 1314년 이중 선거
1312년 6월 29일, 독일왕이자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7세는 황제로 대관식을 치렀으나 다음해 사망했다.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인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 대신 새로운 독일왕 후보자로 떠올랐으나 얀 루쳄부르스키는 루트비히 4세를 지지했다. 1314년 프랑크푸르트-작센하우젠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쾰른 대주교 하인리히 2세, 루트비히의 형인 라인 궁정백 루돌프 1세, 폐위된 전 보헤미아 국왕인 케른텐의 하인리히, 작센비텐베르크 공작 루돌프 1세의 4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러나 마인츠 대주교 페터 폰 아스펠트의 주도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룩셈부르크 지지파는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4세를 지지하여 하인리히 7세의 동생인 트리어 대주교 발두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발데마르,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요한 2세,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4표를 얻은 루트비히 4세가 당선되었다. 루트비히 4세는 아헨 대성당에서 페터 폰 아스펠트의 주관으로 대관식을 치렀고 프리드리히는 11월 25일에야 쾰른 대주교 하인리히 2세의 주관으로 본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프리드리히는 아헨이 아닌 본에서 대관식을 치렀다는 점,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 연방에게 모르가르텐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다는 약점이 있었으나 동생 레오폴트 1세의 지지 덕분에 몇 년을 더 버텼다. 그러나 1322년 뮐도르프 전투에서 루트비히 4세에게 완패당했고 프리드리히와 잘츠부르크 대주교후국의 귀족 1,3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2.3. 루트비히 4세와의 화해와 사망
프리드리히는 오버라인의 트라우스니츠 성에서 3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지만 레오폴트 1세의 저항, 얀 루쳄부르스키의 지원 중단, 교황 요한 22세의 파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1325년 3월, 트라우스니츠 조약으로 석방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리드리히는 루트비히 4세를 유일한 독일왕으로 인정하였고, 동생들을 설득하여 루트비히 4세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다시 포로 생활을 하겠다고 맹세했다. 레오폴트 1세는 트라우스니츠 조약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완강하게 버텼고, 결국 뮌헨으로 돌아가 포로 생활을 이어나갔다. 프리드리히의 명예로운 행동에 감명을 받은 루트비히 4세는 사촌간의 우정을 회복하여 그를 풀어주었고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교황과 다른 선제후들이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여 1326년 울름에서 체결된 조약에 따라 프리드리히가 독일 왕국을 통치하고, 루트비히 4세는 로마인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르기로 했다.1326년 동생 레오폴트 1세가 사망하자 독일 왕국에 대한 통치권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통치에만 전념했다. 1330년 1월 13일, 비너발트 산맥의 구텐슈타인 성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1782년 이후 슈테판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