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11:47:50

에노의 필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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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AD3F9><colcolor=#000000> 잉글랜드 왕국 에드워드 3세의 왕비
에노의 필리파
Philippe de Hainaut
파일:Philippa of Hainault.jpg
19세기 상상화
이름 프랑스어 에노의 필리프
(Philippe de Hainaut)
영어 에노의 필리파
(Philippa of Hainault)
출생 1310년 또는 1315년 6월 24일
에노 백국 발랑시엔
사망 1369년 8월 15일 (향년 59세 또는 54세)
잉글랜드 왕국 윈저 성
장례식 1370년 1월 9일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민스터 사원
배우자 에드워드 3세 (1328년 결혼)
자녀 에드워드, 이사벨라, 조앤, 윌리엄, 라이오넬, , 에드먼드, 블랜치, 메리, 마거릿, 윌리엄, 토머스
아버지 에노 백작 기욤 1세
어머니 발루아의 잔
형제 기욤 2세, 장, 마르그리트, 잔, 아녜스, 이자벨, 루이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3.1. 자녀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왕비.

백년전쟁 시기 남편이 프랑스 원정을 떠났을 때 잉글랜드의 섭정을 맡았다.

남편 에드워드 3세를 훌륭히 보좌하고 슬하의 자녀들도 잘 양육하여 잉글랜드 왕실을 번영케 한 현모양처 왕비의 대명사로서 당대 잉글랜드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2. 생애

1310년 또는 1315년 6월 24일, 에노 백국 발랑시엔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신성 로마 제국의 명목상 속국인 에노 백작 기욤 1세였고, 어머니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의 손녀이며 샤를 드 발루아의 딸이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누이인 발루아의 잔이었다. 형제자매로 기욤 2세, 장[1], 마르그리트, 아녜스[2], 잔[3], 이자벨[4]이 있었다.

1320년대 초,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는 장남이자 후계자인 에드워드를 에노 백작 기욤 1세의 딸 중 하나와 결혼시킴으로써 든든한 동맹국을 저지대 국가에 두기를 희망해, 엑서터의 스테이플던 주교를 대사로 파견했다. 주교가 왕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백작의 딸 중 한 명이 아래와 같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후대의 대다수 역사가들은 필리파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것이라고 보지만, 일각에서는 필리파의 언니 마르그리트일 거라고 추정한다.
우리가 본 그 여인은 청록색과 갈색 사이의 보기 흉하지 않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머리는 깔끔한 모양이었고, 이마는 높고 넓으며, 약간 앞으로 서 있습니다. 얼굴은 눈 사이가 좁고, 얼굴의 아래쪽 부분이 좁습니다. 이마보다 여전히 좁고 가늘며, 눈은 흑갈색이고 깊으며, 코는 끝 부분이 다소 넓고 다소 납작한 것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매끄럽고 균일하지만 들창코는 아닙니다. 또한 넓고 입이 상당히 넓으며 입술이 다소 도톰하고 특히 아랫입술이 빠졌으며 다시 자란 치아는 충분히 하얗지만 나머지는 그다지 하얗지 않으며 아랫니가 윗니보다 약간 돌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녀의 귀와 턱은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그녀의 목, 어깨, 그리고 그녀의 몸 전체와 다리는 적당히 모양이 좋으며, 그녀의 모든 팔다리는 건강하고 손상되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없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여자는 온몸이 갈색 피부이고 그 아버지와 매우 흡사하며 우리가 보기에는 모든 면에서 충분히 유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듯이 그 소녀는 다가오는 성 요한의 날에 9세가 될 것입니다. 그녀는 그 나이에 비해 키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그녀는 공정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1326년 여름 잉글랜드의 왕비 프랑스의 이자벨은 권신 휴 디스펜서를 축출하고 남편인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키기 위해 기욤 1세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에노 궁정에 찾아왔다. 기욤 1세는 이자벨의 정변에 필요한 군자금을 지원하는 대가로 자신의 딸 필리파를 잉글랜드 왕비로 삼고 향후 에노가 위협을 받을 때 잉글랜드군이 보호해주기를 희망했다. 이자벨은 이에 동의했고 자신의 장남 에드워드 왕세자와 필리파의 약혼을 주선했다. 에드워드 왕세자와 필리파는 친척이었기 때문에 결혼이 성립되려면 교황 요한 22세의 허락이 필요했다. 이자벨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사절을 교황청에 보냈는데 필리파를 "에노 백작의 딸"이라고만 언급하고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요한 22세는 1327년 9월 두 사람의 결혼을 승인했고, 필리파는 그해 10월 코벤트리 주교의 주례하에 대리로 에드워드와 결혼했다. 이후 필리파 일행은 그해 12월에 숙부인 에노의 장[5]의 호위를 받으며 잉글랜드로 향했고, 12월 23일 런던에 도착한 뒤 민중의 열광적인 환대를 받았다. 1328년 1월 24일 요크 민스터에서 에드워드 2세가 축출된 뒤 새로운 잉글랜드 국왕이 된 에드워드 3세와 필리파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필리파는 에노에서 많은 수행원을 데려왔는데, 그중에는 훗날 백년전쟁에서 맹활약한 월터 매니도 있었다.

필리파의 잉글랜드 왕비로서의 초년기는 순탄치 않았다. 시어머니인 이자벨과 이자벨의 연인이자 권신인 로저 모티머는 권력을 독점하고 왕실 재정을 통제하면서, 어린 왕과 왕비의 지출을 일일이 간섭해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했다. 또한 이자벨은 잉글랜드 'Queen consort(왕비)' 직함을 독점하길 희망해, 필리파의 왕비 대관식을 가능한 한 미뤘다. 필리파의 대관식은 1330년 2월 18일이 되어서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는데, 당시 그녀는 흑태자 에드워드를 임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필리파는 잉글랜드에 온 이래 어떠한 토지도 수여받지 못했고, 독립적인 수입도 얻지 못했으며, 왕실 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1330년 10월, 에드워드 3세는 정변을 일으켜 로저 모티머를 체포해 반역 혐의로 처형하고 어머니 이자벨을 버크햄스테드 성에 보냈다가 1332년까지 윈저 성에 가두었고, 다시 노퍽의 캐슬 라이징으로 보내 수년간 가택 연금했다가 나중에 어머니와 화해하고 특권과 거주 이전의 자유를 부여했다. 그 후 이자벨은 필리파가 낳은 첫 아이인 흑태자 에드워드를 무척 사랑해 종종 궁정에 찾아와서 어린 에드워드와 놀아주곤 했다고 전해진다.

파일:에노의 필리파.gif

필리파는 시어머니 이자벨을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정치에 간섭하지 않고 가정에 충실했다. 그녀는 에드워드 3세와의 사이에서 총 14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유아사망율이 높은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자식들 중에서 성인으로 장성하여 혼인하고 후손을 남긴 아들만 해도 5명이나 되었다. 1342년 11월 남편으로부터 자녀들의 양육권을 부여받은 필리파는 어린 자식들을 정성껏 키웠다. 다섯번째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13살이 될 때까지 자기 궁정에서 양육했으며 큰 딸인 이사벨라도 19살 때까지 그녀와 함께 했다. 그 당시 유럽 사회에서 왕실 혹은 고위 귀족가의 소년들은 7살쯤 되었을 때 다른 집에 보내져서 교육을 받는 게 관례였던 것을 고려하면 필리파의 모성애가 얼마나 극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필리파의 자식들은 어머니의 따뜻한 양육과 우수한 가정교사 및 기사들의 교육을 받으면서 당대 유럽에서 상당한 능력을 갖춘 왕족으로 성장했다.

필리파는 자녀의 배우자에게도 애정과 관심을 자주 보였다. 1359~1360년경 넷째 아들 곤트의 존의 아내인 랭커스터의 블랜치가 첫 임신했을 때 옆에서 정성껏 돌봤으며 다른 며느리들이 임신할 때도 잘 돌봐줬다. 남편 에드워드 3세가 여러 정부를 들이고 나중에는 자신의 시녀였던 앨리스 페러즈를 정부로 삼아 대놓고 총애했지만 필리파는 이에 대해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남편에게 순종했다. 그러면서도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남편에게 중재하기도 했다. 1331년 어머니 발루아의 잔이 잉글랜드에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토너먼트가 개최되었을 때 플랫폼에서 부주의한 작업을 해 자신과 시녀들이 사고를 당하게 한 목수들에게 격분해 심한 형벌을 가하려던 에드워드 3세를 잘 달래서 목수들이 벌금을 내는 것으로 그치게 했다.

그녀는 1335년 이전에 노리치에 작은 플란데런 직공 마을을 세우고, 그 마을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면서 직조 무역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또한 노섬벌랜드의 타인데일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에서 석탄 채굴을 장려했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왕실에 돌렸다. 다만 필리파는 돈을 다루는 데 능숙하지 않았다. 시어머니 이자벨의 억압에 시달렸던 탓인지 그녀는 호화로운 의복과 보석에 막대한 돈을 썼다. 그 결과 1360년에는 재단사, 모피업자, 자수업자 및 보석상에게 6천 파운드에 달하는 빚을 졌다. 그러면서도 자선 단체에 관대하게 기부했다. 런던 탑 인근에 있는 세인트 캐서린 병원을 후원했으며, 1341년 옥스퍼드 대학교에 퀸스 칼리지를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

1337년 남편 에드워드 3세와 외삼촌 필리프 6세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녀는 남편을 충실히 지지했다. 1338년 한 음유시인에게 '파리로 가서 필리프 드 발루아 경의 행동을 비밀리에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1346년에 남편이 프랑스 원정에 착수하여 크레시 전투 등을 치르고 있을 때 잉글랜드의 섭정을 맡았다.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이 해에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을 때, 그녀는 잉글랜드군을 소집한 뒤 네빌스 크로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장병들에게 연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계에서는 '국왕의 사령관'으로서 스코틀랜드 국경지대 방어를 자체적으로 맡고 있던 랄프 네빌헨리 퍼시가 스코틀랜드군을 알아서 격파했고, 필리파는 런던에 그대로 있었다고 본다.

1347년경 1차 칼레 공방전을 치르고 있던 남편 및 자녀들과 함께 있던 그녀는 그해 8월 3일 에드워드 3세가 칼레 시민들의 항복을 받는 행사에 참석했다. 장 르 벨과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이날 여섯 명의 칼레 시민이 마을의 열쇠를 들고 성문에서 나왔다. 그들은 에드워드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저항하려는 다른 도시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사형집행인을 불러 즉시 여섯 시민을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필리파 왕비가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성모님이 아들에게 무궁한 사랑을 베풀었듯이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간청했고, 에드워드는 이에 감동해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그들을 살려줬다고 한다. 현대 학계에서는 에드워드는 단순히 자신의 관용을 극적으로 과시하고자 칼레 시민들과 사전에 협의했을 거라고 보지만, 이 일화는 필리파가 선량하고 자비로운 왕비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히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358년, 필리파는 가터 기사단의 여주인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사냥하던 중 낙마해 어깨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고, 이후 남은 생애 내내 거동조차 힘들 정도로 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1368년 12월, 홀몸이 된 아들 존과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의 딸이자 상속인인 마르그리트 사이의 결혼을 협상하기 위해 플란데런에 사절을 보냈지만, 마르그리트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약혼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1369년 8월 15일 윈저 궁에서 부종으로 사망했고, 1370년 1월 9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흑태자 에드워드
(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 6월 15일 1376년 6월 8일 켄트의 조앤
슬하 2남[6]
1녀 베드포드 백작부인 이사벨라
(Isabella, Countess of Bedford)
1332년 6월 15일 1382년 10월 5일 쿠시 영주 앙게랑 7세
슬하 2녀
2녀 조앤 공주
(Princess Joan)
1333년 12월 19일 또는
1334년 1월 28일
1348년 9월 2일
2남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Lionel of Antwerp, Duke of Clarence)
1338년 11월 29일 1368년 10월 7일 얼스터 여백작 엘리자베스 드 버그
슬하 1녀
비올란테 비스콘티
3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John of Gaunt, Duke of Lancaster)
1340년 3월 6일 1399년 2월 3일 랭커스터의 블랜치
슬하 1남 2녀[7]
카스티야의 콘스탄사
슬하 1녀[8]
캐서린 스윈포드
슬하 3남 1녀[9]
4남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
(Edmund of Langley, Duke of York)
1341년 6월 5일 1402년 8월 1일 카스티야의 이사벨
슬하 2남 1녀[10]
조앤 홀랜드
3녀 브르타뉴 공작부인 마리
(Mary, Duchess of Brittany)
1344년 10월 10일 1361년 9월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4녀 펨브로크 백작부인 마거릿
(Margaret, Countess of Pembroke)
1346년 7월 20일 1361년 10월 1일 또는 12월 25일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
5남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Thomas of Woodstock, Duke of Gloucester)
1355년 1월 7일 1397년 9월 8일 또는 9월 9일 엘리노어 드 보훈
슬하 1남 3녀


[1] ? ~ 1316, 요절[2] ? ~ 1327[3] 1315 ~ 1374, 율리히 백작 빌헬름 5세의 부인[4] 1323 ~ 1361, 나무르 백작 장 1세의 아들인 로베르 드 나무르의 부인[5] 1288 ~ 1356, 보몽의 영주였기 때문에 보몽의 장으로도 일컬어진다.[6] 리처드 2세 등.[7] 포르투갈의 왕비 필리파, 헨리 4세 등.[8] 카스티야의 왕비 카탈리나[9]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 엑서터 공작 토머스 보퍼트[10] 2대 요크 공작 에드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