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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D5B7><colcolor=#000> 잉글랜드 왕국 헨리 8세의 제1계비 앤 불린 Anne Boleyn | |
이름 | 앤 불린 Anne Boleyn[1] |
출생 | 1501년 7월 또는 1507년 |
노퍽 블리클링 홀 | |
사망 | 1536년 5월 19일 (향년 28세 또는 35세) |
런던 런던 탑 | |
장례식 | 1536년 5월 19일 런던 런던 탑 성 피터 애드 빈큘라 성당 |
배우자 | 헨리 8세 (1533년 결혼 / 1536년 무효화) |
자녀 | 엘리자베스 1세 |
아버지 | 제1대 윌트셔 백작 토머스 불린 |
어머니 | 레이디 엘리자베스 하워드 |
형제 | 메리, 조지 |
종교 | 성공회 |
서명 |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의 왕비.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다.굉장히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언급되는 인물이며, 가장 인지도가 높은 잉글랜드 왕비 중 한명이다. 또한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바티칸으로부터 영국 교회의 독립을 선언할 원인을 제공하여 이후 잉글랜드 역사의 변곡점이 된 인물.
2. 생애
2.1. 유년기
아버지 토머스 불린은 외교관이었고 어머니는 명문 하워드 가의 영애 엘리자베스 하워드였다. 자매로는 메리 불린, 형제로는 조지 불린이 있다. 외삼촌이 대귀족이었던 노퍽 공작(Duke of Norfolk) 토머스 하워드였다.불린 가문은 원래 상인 집안이었으나 점차 세가 강해졌고 그녀의 부친에 이르러서는 고위 귀족과 결혼할 수 있을 정도로 가세가 성장했다고 한다. 노퍽 지방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프랑스에서 성장했는데, 이미 7세에 5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이 어학에 대한 특출난 재능은 능력 있는 외교관으로 알려져 있던 아버지인 토머스 불린에게서 물려 받은 것으로 보인다.
15세에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궁정에 들어가 헨리 8세의 첫 왕비였던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시녀가 된다. 아버지 토머스 불린은 앤을 본래 불린 가문과 재산 분쟁이 있던 아일랜드의 버틀러 가문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서 분쟁을 종식시키려고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약혼은 흐지부지된다.
앤은 곧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가문인 노섬벌랜드 공작 가문의 아들 헨리 퍼시와 연애 끝에 약혼(precontract)하려 했으나, 퍼시의 가족과 헨리 8세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반대로 결혼은 무산된다. 후대에는 헨리 8세가 흑심을 품고 있던 앤을 차지하기 위해 토머스 울지 추기경과 짜고 앤과 퍼시를 갈라놓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미드 튜더스에서는 실제로 이 소문이 나오기도 하지만, 학자들 대다수는 "그렇다고 보기에는 시기가 너무 이르기에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앤이 퍼시와 약혼했을 때에는 헨리 8세와의 관계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또한 퍼시의 가문인 노섬벌랜드 공작 가문은 잉글랜드에서 손꼽히는 대귀족 가문이기에 퍼시 역시 그에 걸맞은 지위와 재산을 지닌 가문 출신인 약혼녀 메리 탤벗이 이미 있었으며 귀족 청년이 왕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결혼한다는 것은 왕궁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죄였다.
그러나 앤은 이 사건으로 토머스 울지 추기경에게 앙심을 품고, "할 수 있는 만큼 복수해 주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후에 앤이 왕의 애정을 얻게 되었을 때, 울지 추기경은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헨리 8세 사이의 결혼 무효화 협상을 실패했고, 앤과 헨리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울지 추기경을 몰락시켰다. 왕의 오랜 심복이었던 울지 추기경은 원래 임지인 요크로 쫓겨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2.2. 헨리 8세와의 만남과 잉글랜드 왕비
드라마의 영향으로 세간에는 '유부남이었던 헨리 8세를 사로잡아 평민에서 왕비 자리까지 얻어낸 미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앤의 외삼촌은 방계 왕족 가문들을 제외하면 잉글랜드 내 유일한 非 왕족 출신 공작 가문인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에 불린 가문도 젠트리라서 일반 평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헨리 7세가 보즈워스 전투를 치르고 난 뒤, 귀족 가문은 고작 29개만이 남았으며 튜더 왕조 말기에도 남작 가문을 합쳐도 50여 개에 불과했다. 불린 가문은 젠트리였는데, 잉글랜드의 귀족 제도 특성상 불린 가도 평민이라기보단 양반처럼 사회 지도층에 해당한다. 그리고 시녀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유럽에서 궁중 시녀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앤 불린은 신분 때문에 살아있을 적에도 죽은 후에도 비난에 시달렸다. 조선 왕조 같은 경우 국외혼이 없기 때문에 "왕의 배우자(왕비)가 명문 양반 사대부 집안 출신이기만 하면 자격이 있지만, 유럽 문화권에서는 남녀 불문 "군주는 기본적으로 통치 가문 출신과 결혼해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 밑의 귀족들도 신분에 맞지 않는 배우자를 만나면 자신과 후손의 신분이 격하 되기 때문에 아무리 잉글랜드의 젠트리는 다른 유럽 국가의 귀족과 비슷한 사회적 입지를 차지한 지위이긴 해도, 유럽 기준에서 보면 왕이 신하인 귀족 가문의 여식과 결혼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못한 일로 여겨졌다는 것. 그나마 잉글랜드가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귀천상혼에 많이 관대한 편이라 가능했던 일이긴 하지만, 당대 기준으로 극적인 신분상승의 예로 받아들여질 만한 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울프 홀의 표현을 빌리자면, 왕은 당연히 다른 나라에서 시집 온 공주님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 이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었고, 국내의 사회지도층 가문의 딸은 이 기준으로는 왕비가 되기엔 신분이 낮다고 여겨졌다는 것. 더구나 이전의 왕비였던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아예 엄빠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국왕이라는 점에서 더욱 비교가 됐을 것이다.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이혼을 시도한 건 캐서린이 더 이상 임신을 하지 못하던 1520년대 초반부터였다. 당시 유럽의 왕들은 적법한 결혼에서 낳은 자식이 아니면 후계 자리는 친척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흔해서 후계자를 낳지 못한 본처를 수녀원으로 쫓아내거나 교황청에 로비를 해서 혼인무효를 얻어내는 식으로 새 장가를 갔는데 이는 헨리 8세도 예외는 아니었다.
캐서린과 결혼 생활 중에도 헨리 8세는 숱한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고, 왕에게 아부하여 권력을 노리던 야심가들이 아내나 딸들을 상납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엘리자베스 블런트는 헨리 피츠로이라는 사생아도 낳았다. 헨리 8세는 앤 불린에게도 정부로 삼을 목적으로 접근했으나 앤 불린은 더한 욕심이 있었다.
1520년대 중후반에 헨리 8세는 젊고 재치있는 데다 매력적인 앤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헨리 8세는 앤에게 정부(情婦)가 되어 달라고 했으나 앤은 왕의 사랑을 받은 당대의 여느 귀족 여인들과 달리 왕을 거부하고, 몸을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그의 애정을 부채질해 애태운다. 프랑스에는 공식 정부인 '메트레 상티트르'라는 지위가 있었는데,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궁정에서 전례가 없는 지위를 앤에게 약속했으나 앤은 거절하고 결혼을 원했다.[2] 앤은 여자로서의 매력으로 헨리 8세를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재치있는 입담과 지성으로도 그를 매혹시켰다. 신학에 나름 관심이 있었던 앤은
그렇게 몇 년간 알콩달콩 하던 헨리 8세는 "오랜 결혼 생활로 감정이 소원해진 데다 나이가 들어 이제 더는 자녀를 낳아줄 수 없는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헤어지고, 젊고 매력적인 앤과 결혼하여 적법한 아들을 낳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사실 앤이 헨리를 일방적으로 들볶아서 이런 결정을 내리게 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헨리 또한 간절히 앤과의 결혼을 원했으며, 결국 이후 벌어진 사태에서 가장 영향을 발휘하고 결정을 내린 사람은 헨리였다. 앤이 헨리에게 동침을 허락한 후에도 헨리는 "사생아가 아니라 적법한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며 거절하지 않았겠느냐고 설득했다.
아라곤의 카탈리나가 카를 5세의 이모였기에[4] 당시 헨리 8세에게 이혼이 정치적, 법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혼, 혼인무효화[5]를 감행했던 것은, 왕이 그만큼 대단히 절박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튜더 왕가의 유일한 남성이었고, 그가 재위기에 적법한 남자 후계자를 낳지 못하면 헨리 7세가 세운 튜더 왕가는 겨우 2대 만에 직전의, 장미전쟁처럼 피비린내나는 내전이 다시 한번 벌어질 위험이 있었다. 캐서린 왕비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메리 1세)를 두었지만 당시 풍속에 의하면 왕족은 왕족끼리 결혼하는 것이다. 따라서 메리 공주가 고모들처럼 스코틀랜드나 프랑스 같은 타국 왕족에게 시집가면 하나 남은 왕위 계승권은 외국에 팔려가는 격이라고 신하들도 우려했다.[6]
이처럼 이혼 문제는 드라마나 소설상의 불같은 사랑...이 아니라 스페인과 가톨릭 세력 VS 헨리 8세와 잉글랜드 정체성의 국교회 세력의 정치적 갈등의 대리전이었다. 역사적으로 선대 헨리 7세 시절 왕의 장자 아서 튜더와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약혼을 했고 캐서린은 지참금 20만 크라운을 챙겨서 잉글랜드에 왔다. 그러나 결혼 6개월만인 1502년 아서가 요절했고, 캐서린은 과부가 된다. 헨리 7세는 지참금을 반환하기 아까웠기 때문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과 지참금 문제로 다툼을 벌였고, 시아버지와 친아버지가 다투는 동안 캐서린은 몇 년 동안 과부 신세로 잉글랜드에 버려져 있었다. 대신 타협책으로 "캐서린을 아서의 동생 헨리와 결혼시킨다"는 둥의 협상이 있었으나, 좀처럼 성사는 되지 않은 채 7년을 끌었다. 헨리 7세가 사망하자 헨리 8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형수 캐서린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교회법상 결혼할 수 없는 사유였으나 당시 교황 율리오 2세가 기독교 군주끼리의 결합은 대의로 인정하여 관면해 주었다.[7]
결국 헨리 8세는 캐서린과 그녀와의 혼인을 무효화(annulment)해줄 것을 교황에게 요구했다. 이유는 "캐서린이 헨리 8세의 형인 아서 튜더와 먼저 결혼한 몸이었으므로, 이는 구약성경 레위기에서 "형수를 취한 자는 자손이 끊어진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자신의 그 처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은 교회법상 무효 사유에 해당했다(...)
이후 캐서린은 줄줄이 낳은 자식들은 사산되거나 요절하며 외동딸 메리 1세만 남았고, 헨리보다 6세나 연상인 캐서린이 30대 중반이 되자 헨리 8세는 왕비 소생의 아들은 기대하기 어려웠기에 이혼을 시도했다.
아라곤의 카탈리나가 헨리의 형 아서와 결혼할 당시 둘 다 16세였다. 중세 유럽에선 10대 중반에도 임신과 출산이 오히려 흔한 일이었고 10대 초반도 드문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로 봐서 6개월 간 결혼 생활을 했으면서도 처녀였다고 주장했던 건 당시 사람들에게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였던 것 같다.[8]
다만 아서와의 결혼은 시동생과의 새 결혼에서 명백한 혼인무효 사유에 해당하기 때문에 선행해서 아서와의 결혼이 무효임을 주장하여 헨리 8세와의 결혼이 적법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한 것이었다.
이미 헨리와의 결혼 이전 처녀라는 공식적인 증거가 잉글랜드 궁정에 제시되었고 헨리는 첫날밤에 "캐서린은 처녀였다"고 자주 자랑하곤 했다. 이는 애초에 헨리가 지참금을 많이 가져온 형수와 결합하려고 명분을 쌓은 성격도 있기에, 도리어 20년 후 자신을 옭아맬 불리한 증거이기도 했다.
게다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캐서린은 아예 성경에 대고 "헨리 8세와 결혼할 당시에 나는 처녀였다"고 맹세하기도 했다.
헨리 8세의 요구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혼인무효 요청을 불허했다. 명목상으론 "전임교황 율리오 2세의 처분을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실질적으론 캐서린의 조카가 당시 에스파냐(스페인)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였던 데다가, 교황 역시 전투에서 패망하여 사실상 황제의 포로 신세로 전락하여 황제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평소 순종적이었던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헨리 8세의 예상과는 달리 끝까지 "나만이 잉글랜드의 진정한 왕비이며, 나와 헨리 8세와의 결혼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버텼다. 캐서린은 늘 순종적이니 당연히 이혼도 순종적으로 해주겠거니 했던 단순왕 헨리는 이런 그녀의 태도에 당혹하면서도, 처음으로 대든다고 화를 냈다고(...)
7년에 걸친 긴 법적 공방과 로비 끝에, 헨리 8세는 마침내 수장령을 선포하고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부인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켜서 잉글랜드 판 종교개혁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를 출범했다. 당시 대륙의 유행하던 복음주의 신학에 관심이 많았던 앤은 잉글랜드 내의 종교개혁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연인 관계인 헨리 8세에게 영향력을 어느정도 미친걸로 보인다.
1533년 1월, 첫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가 강제 추방된 상태에서 헨리 8세와 앤은 마침내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앤 불린은 이미 계획적으로 아이를 가진 채 결혼했다. 그 해 부활절에 헨리 8세는 앤의 임신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9] 헨리는 앤이 임신한 아이가 그렇게나 고대하던 아들이라고 굳게 믿었고, 점성가들 대다수도 왕자의 탄생을 예고하여 이미 궁정서기들은 왕자의 탄생을 알리는 공식 문서까지 작성해 놓았다.
같은 해 9월에 앤은 자신의 첫 딸 엘리자베스 1세를 출산했다. 앤이 왕자를 낳을 것이라는 예상이 궁정에 널리 퍼져 있어서 모두들 실망했으나, 정작 헨리 8세는 "왕비가 공주를 낳았으니 곧 왕자도 낳을 것이다."며 무척 기뻐했고, 딸을 낳아 실망하고 있던 앤에게 "곧 아들들도 태어날 거요."라고 자신있게 말했다고 한다.[10] 아이의 탄생을 알리는 공식 문서에 적힌 "왕자prince"에는 s 한 쌍을 뒤늦게 추가해 "공주princess"라고 표시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를 출산한 후로 앤의 운명은 빠르게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자그마치 7~8년간 열렬한 연애를 이어나가며 영원히 사랑한 것 같던 두 사람의 관계는 고작 2년 9개월여 만에 파국을 맞고 만다.
2.3. 파경, 그리고 사형선고
두 사람이 파경을 맞이한 가장 큰 이유는 앤이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해 헨리 8세의 애정을 잃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태까지 앤의 논란 많은 행보와 불운이 여러가지로 겹치면서 그녀의 파멸에 불을 당겼다.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왕자를 낳지 못하고 엘리자베스 1세 이후로 아이를 연달아 유산하거나 사산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는 없고 여러 가지 설만 있다.
일단 앤의 혈액형이 RH- 형이라 첫째인 엘리자베스는 항체가 형성되지 않아서 무사히 낳을 수 있었지만 둘째부터는 항체가 형성되어 태아의 적혈구가 파괴되는 바람에 조기에 유산했다는 학설이 있다.[11] 앤의 유해를 연구한 결과도 이 학설을 뒷받침해 준다고는 하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헨리 8세의 모든 왕비들은 물론 정부들도 임신과 출산에 문제가 있었고, 태어난 자식들 중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제외한 상당수도 요절한 것을 생각해 보면 헨리 8세에게 매독이 있었거나 그밖에 여러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첫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 역시 아들을 비롯하여 많은 아이들을 낳았으나 메리 1세를 제외한 모두가 일찍 죽었다. 당시 영아, 유아 사망률이 높은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라지만, 그렇게나 많이 낳았는데도 하나같이 일찍 죽은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기는 하다.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가 낳은 유일한 적자 에드워드 6세가 요절한 것도 헨리 8세의 난잡한 성생활 때문에 발병한 선천성 매독 때문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다. 에드워드 6세를 낳기 전에는 엘리자베스 블런트라는 정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헨리 피츠로이를 낳았는데 헨리 피츠로이 역시 1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자세한 의료 기록에 당시 매독의 특효법으로 여겨졌던 수은 치료를 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전혀 언급이 없다.
앤 불린의 몰락에 결정적인 이유였던 아들을 못 낳은 것은 현대에는 남자에게서 유전되는 Y염색체 때문임을 사람들이 알지만, 중세 사회에서는 태아의 성별 등 임신과 출산의 모든 부분이 여자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계속 유산과 사산을 반복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자의 탓으로 여겨졌다. 물론 과학적으로도 여자 몸속에서 Y염색체의 생존율을 결정짓는 것은 여자의 내부가 산성과 알칼리성이냐에 따라 갈린다. [12] 또한 감염에 대한 인식이 없어 아이를 받는 산파가 손을 씻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던 당대의 위생 관념이나 무엇보다도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만 한다"는 스트레스가 유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13]
당대 기록에 의하면 앤과의 사이가 시들해질 결혼 중반 무렵에 헨리 8세는 앤의 시녀로 있던 조용한 여인 제인 시모어에게 빠져 있었다. 하루는 제인을 무릎 위에 앉히고 시시덕거리는 장면을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앤이 보고는 충격을 받았고, 결국 남자아이를 유산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접한 왕은 "하늘은 우리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려는가 보오." 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헨리 8세는 첫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이혼하는 과정에서 캐서린이 오랜 법정 투쟁을 벌였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망신을 거하게 당하면서 체통을 크게 잃었다.[14] 앤의 전임자였던 캐서린 왕비는 왕자를 낳지 못했다는 큰 흠만 빼고는 집안이 대단함에도 영국 이익에 반해 크게 정치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딸만 낳아 구박받았어도 동정표가 많았다. 또한 "덕이 높은 조강지처를 여우 같은 젊은 여자가 내쫓는다"는 구도는 앤이 악녀라는 평판을 얻기에 충분했다. 또한 절대 군주인 헨리 8세에게 직접 욕을 할 수 없으니 모든 비난의 화살은 앤을 향했다. 이러한 비난은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캐서린의 친정인 스페인에서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에서조차 캐서린이 죽기 전까지 앤을 정식 왕비로 인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앤이 헨리 8세의 연인이었던 시절, "앤 불린이 왕비가 되고자 캐서린 왕비를 몰아내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분노한 백성들이 앤을 습격하려 했다는 비화가 있을 정도다. 여담이지만 후에 사람들은 앤을 '여섯 손가락의 마녀'[15]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데 물론 이는 후대의 전설이다.
또한 앤은 신교도는 아니었으나 정치적, 개인적인 이유로 종교개혁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캐서린이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던 상황인 만큼 개혁신학 성향의 젠트리들을 조용히 지지하면서 보수적인 세력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앤이 사실상 잉글랜드와 교황청의 관계 단절의 동기 역할을 했으니 종교 갈등기에 적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앤과 불린 가문의 몰락을 바라던 정적들이 많은 상태에서 헨리 8세의 총애를 잃은 앤은 결혼 조건인 '왕자 출산'에 끝내 실패하면서 몰락해야 했다.
게다가 앤은 캐서린 왕비의 딸인 메리 1세와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앤은 메리에게 "나를 너의 새어머니로서, 잉글랜드의 왕비로서 인정해 달라"면서 화해의 손길을 몇 번 보냈지만, 친모 캐서린을 끝까지 편들었던 메리는 앤을 인정하길 거부하고 "나는 우리 어머니 외의 잉글랜드 왕비는 모른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에 불같은 성격의 앤은 메리를 친딸 엘리자베스 1세의 시녀로 삼아 기저귀를 가는 등의 일을 직접 하게 시켰고 "시종과 결혼시켜 버리겠다!" 등의 악담을 하기도 했다.[16][17] 메리는 자기 어머니를 쫓아내는 걸로도 모자라 끊임없이 자신의 격하된 신분을 일깨우고 자극하는 앤과 당연히 원수가 되었고, 상전으로 모시게 된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에게도 앤의 딸이라는 이유로 좋은 감정을 갖지 못했다. 앤은 메리를 굴복시키기 위해 온갖 나쁜 계모 짓은 다 해서 메리는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한 데다 앤의 구박과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에 큰 상해를 입었다.
다만 앤의 사후에 메리는 끊임없이 엘리자베스를 경계하면서도 자매의 정을 주는 일종의 애증을 보인다.[18] 원수의 딸이지만 어린 엘리자베스까지 미워할 수 없다고 생각했거나, 태어났을 때부터 기른 정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메리 1세는 즉위 후 엘리자베스가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자 처형할 수 있었는데도 살려주기도 했다. 물론 엘리자베스가 진짜 역모를 꾸민 게 아닌 데다 당시 튜더 왕가에 남은 직계 왕족이 얼마 없어서 내린 결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메리가 엘리자베스를 극렬히 증오했다는 증거도 없다. 엘리자베스에게서 앤 불린의 모습이 보이거나 신교도 성향이 거슬려 경계했어도 메리는 엘리자베스를 끝내 제거하지 못했다.[19]
거기다 자기 편인 사람들과도 갈등이 생겨 다투다가 결국에는 척을 지게 되었다. 자신을 지원해 주었던 토머스 크롬웰과 사이가 벌어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크롬웰은 당시 왕이 제일 믿는 심복이었고, 외가 하워드 가문의 수장인 외삼촌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와도 싸우다가 결국 사이가 틀어졌다.[20]
일이 이렇게 되자 헨리 8세는 또 "하느님이 나와 앤의 결혼을 반기지 않는다" 여기고 앤의 시녀였던 순종적이고 조용한 제인 시모어를 왕비로 세울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 앤과의 결혼을 무효화하려 한다.
앤은 그녀의 적들마저 놀랄 만큼 신속하게 몰락했다. 이미 다혈질적인 성격, 투기, 잇따른 사산으로 진작에 왕의 사랑을 잃었고, 외가와 친정도 그녀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앤의 젊은 시녀인 제인 시모어를 차기 왕비감으로 점찍은 헨리 8세는 앤을 런던 탑에 가두고, 그녀가 6명의 남자와 간통을 저지르고 특히 남동생[21]인 조지 불린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누명을 씌운 뒤[22]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는 모두 토머스 크롬웰의 솜씨로, 토머스 크롬웰은 헨리 8세가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이후 헨리 8세의 신임을 잃게 되자 그녀를 제거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당시 앤 불린의 혐의는 간통과 반역이었는데, 16세기 잉글랜드에서 왕의 적통이 혈통을 잇지 못할 경우 영국은 곧바로 내전에 들어갈 위험이 있었기에 국가 안보 문제로 간통은 왕실에 대한 반역죄로 간주되었다. 그녀는 정황 증거와 근친상간, 간통에 관한 소문만을 바탕으로 법정에 세워졌고, 왕의 궁정 음악가였던 마크 스미턴과의 간통을 포함해 여러 명이 고발되었다. 마크 스미턴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백하여 증인으로 나섰으며, 측근이었던 헨리 노리스와 윌리엄 브레러튼 등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일부 혐의는 앤이 왕실 출산을 위해 궁전을 떠나 있었을 때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또한, 재판에서 사건의 시기와 장소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왕의 묵인 아래 정치적 필요에 부합하고 토머스 크롬웰의 계략에 의해 빠르게 진행되었다.하층민 출신이었던 크롬웰은 명확한 배경 없이 출세했으나, 결국 그도 1540년 6월 반역죄와 이단 혐의로 체포되어 비슷한 방식으로 어떠한 명확한 증거도 없이 정치적 적대자들이 왕을 설득한 것만으로 1540년 7월 28일 런던탑에서 참수당했다.
한편, 헨리 8세는 과거 앤에게 주었던 불같은 사랑을 이제 와서 "마녀의 마법"이라며 애써 부정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 했던 것처럼 이혼이 아닌 혼인무효화를 단행하면서 앤과의 결혼 자체를 부정했고, 당시 고작 3세였던 엘리자베스마저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가 처형당하면서 사생아로 전락하여 계승권도 잃게 된다. 여담이지만 당연히 호칭도 "엘리자베스 공주"(Princess Elizabeth)에서 "엘리자베스 아가씨"(Lady Elizabeth)[23]로 바뀌었다. 영특했던 엘리자베스가 이런 사실을 바로 알고 "왜 이제는 나를 공주라고 부르지 않느냐?"고 물었다는 비화도 있다. 물론 나중에 헨리 8세의 분노가 풀리면서 계승권은 회복했다.
결국 앤은 36세의 나이로 런던 탑 내부 처형 집행장에서 참수형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헨리 8세는 처음에 앤을 마녀로 몰아 화형시키려 했으나 앤에게 동정심을 지녔던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의 호소와 처형 직전에 그래도 한때 사랑한 여자에 대한 마지막 배려를 하고 싶었던 일말의 양심으로 인해 빨리 죽을 수 있도록 참수형으로 처형 방식을 바꾸었다. 그리고 특별히 최고로 유능한 참수형 집행자를 프랑스 칼레[24]에서 불러 출장을 오게 했다.
원래 참수형은 도끼로 집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날이 무딘 편인 도끼로 목을 자르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내려쳐야 하기 때문에 곱게 죽을 수가 없었다.[25] 하지만 칼레의 집행인은 검으로 한번에 깨끗하게 목을 벨 수 있었으니 그나마 편하게 갈 수 있었다.[26] 런던 탑에서 앤은 처형 방식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웃으며 "내 목은 가늘어서 빨리 끝날 테니 다행입니다."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남기기도 했다고.
어쩌면 앤으로선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저 순간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결혼 전 무려 7년 동안 천하의 호색한 헨리 8세의 애정을 움켜쥐려고 끊임없이 마음 졸여야 했으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이고, 엘리자베스를 낳은 후 고작 2년 9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연달아 2~3번이나 5~6개월만에 유산하면서 육체적인 건강도 크게 상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가 왕비로 있던 시절에 그녀를 본 외국의 한 대사는 '늙고 추레한 여자'라고 혹평했다. 처형 당시 나이가 아직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밖에 안 되었으니 그 나이에 늙고 추레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면 건강상의 문제가 없었을 수가 없다.
앤은 처형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나는 정당한 이유로 처형을 당하는 것이며, 헨리 8세는 성군이니 그에게 충성을 다해 달라"
는 간단한 연설을 하고 "예수님에게 내 영혼을 맡깁니다"
라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참수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이나 태도는 매우 의연했다고 한다. 집행인은 짚더미 밑에 칼을 감추어 놓았는데, 일부러 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손을 내밀며 "칼을 건네줘!"
라고 외쳤고, 그 말을 들은 앤은 무의식적으로 목을 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집행인은 칼을 들어 앤의 목을 내리쳐 단번에 잘라냈다.2.4. 앤과 캐서린에 대한 헨리 8세의 태도 비교
역설적이지만 헨리 8세가 앤에게 실망했던 것은 이혼한 아라곤의 카탈리나(영어식으로 아라곤의 캐서린)와 그녀를 비교하게 된 탓도 있었다.일단 캐서린의 부모는 둘 다 각자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27]이었고, 캐서린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궁정에서 어려서부터 받은 엄격한 교육 탓에 말 그대로 남편에게 철저히 순종적인 삶을 살아가는 전근대의 현모양처였다. 그녀는 버림받은 상태에서도 자신을 소박놓은 남편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외로이 죽어가는 그날까지도 사랑하는 남편이 자신에게 돌아와 주기만을 기도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캐서린은 앤에 비해 여러 분야에 걸친 교양을 가졌고,[28] 결혼 생활 내내 어리고 이기적인 남편을 감싸주는 원숙함[29]도 갖추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답답한 이런 어머니 때문에 속이 터진 메리 1세의 한이 더 깊어졌다는 주장도 있는데 꽤 신빙성이 높다.
하지만 앤에게는 이런 장점들이 없었다. 헨리 8세는 한창 연애할 때는 앤의 총기 넘치고 발랄하고 귀여운, 때로는 도발적인 속성에 매혹되어 정신을 못 차렸지만 정식으로 결혼한 뒤에는 그런 면모들이 점점 왕비로서 적합하지 않게 느껴졌다. 전임자인 캐서린처럼 왕비로서 무게를 잡고 신료들과 외교관들과 원만히 지내며 막후에서 교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재기발랄한 대화를 나누고 즐겁고 화려한 사교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왕비로서 위엄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되면서 마뜩찮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듯 헨리 8세는 캐서린이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교양과 원숙함, 피로하면 기댈 수도 있는 든든함을 앤에게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되면서 부부 사이는 위태로워졌다.[30] 앤은 애초에 그렇게 교육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연애하던 시절 헨리 8세를 목매게 만들었던 앤의 밀고 당기는 연애술은 결혼 후 투기와 바가지로 변하면서 헨리를 더 멀어지게 했다. 관종인 헨리는 앤을 들어앉히느라 벌인 사태들로 인기를 잃자 심기가 상해 악플(...)을 받는 걸 앤 탓으로 돌렸다고.
결국 이런 점에서 비롯된 실망으로 앤에 대한 헨리 8세의 사랑은 결혼 직후부터 급격하게 식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라곤의 캐서린에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애초에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국교를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꾸는 등의 일을 여럿 벌여놓은 데다, 캐서린이 나이 들어 아들을 낳아줄 가능성이 없어진 것이 이혼을 결심한 큰 원인이 됐기 때문. 만일 캐서린에게 돌아간다면 그야말로 전유럽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그녀와의 재결합은 생각치도 않았을 것이다.
3. 창작물에서
수 세기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매료시킨 왕비는 많지 않았지만, 앤 불린은 확실히 그들 중 한 명이다.
― Art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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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영화
- 1920년 《앤 불린》: 헤니 포르텐
- 1933년 《헨리 8세 (The Private Life of Henry VIII》: 메르 오베른 (Merle Oberon)
- 1953년 《비련의 공주 엘리자베스 (Young Bess)》: 일레인 스튜어트
- 1966년 《사계절의 사나이 (A Man for All Seasons)》: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 1969년 《천일의 앤》: 준비에브 뷔조
전체적으로 나쁜 놈인 헨리 8세의 희생자 같은 느낌으로 그려졌다. 그렇다고 가련하고 착한 여인이라는 건 아니다. 성깔도 있고 이기적이기도 하고 왕에게 막 대들 만큼 겁 없이 당돌하기도 하다. 왕이 총애를 퍼주자 거기서 오는 권력을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왕의 맘만 변하면 바로 날아갈 권력임을 알기에 정도 이상의 전횡을 부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미워하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곤경에 빠뜨리고 즐거워할 정도로 순진함과는 거리가 먼 여자다. 헨리 8세의 눈에 띄는 바람에 온 가족들에 울지 추기경까지 나서서 "헨리 8세의 애인이 되어라"라고 권하지만, 이미 집안에는 헨리 8세에게 넘어가 그의 아이까지 가지고도 버림받은 언니 메리 불린이 있었기 때문에, 전혀 그럴 생각 따윈 없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을 약속한 헨리 퍼시를 다른 여자와 결혼시켜 버리고, 앤에게 "내 옆에 있으라"고 명령해서 앤을 묶어둔다. 하지만 앤은 헨리 8세를 미워해서 그의 구애에도 차갑기 그지없고 오히려 말대꾸를 하며 신경을 긁는다. 그러다가 나온 얘기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낳게 하고 싶다'는 헨리 8세와 '아들 낳아봤자 사생아에 불과하다'는 앤의 대답. 여기에 헨리 8세는 앤도 얻고 후계자도 얻기 위해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와의 이혼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즉, 이 작품에서 앤은 왕비가 되려는 야심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나 좋다고 내 사랑을 망친 이 남자가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심정으로 충동질했을 뿐. "혼인무효 요청이 거부당했다"는 소식이 로마에서 도착하자 헨리는 분노하지만, 앤은 실망한 기색도 없이 "불쌍한 헨리!"라며 헨리를 비웃고 있었다. 그러나 헨리가 끝끝내 가톨릭 교회와도 갈라서버리자, 자기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헨리에게 결국 넘어가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때만 해도 "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는 말라"고 하던 앤이지만, 엘리자베스 공주를 낳고 실망한 헨리와 사이가 점점 벌어지고 그가 한눈을 팔기 시작하자 그에 대한 애증이 깊어지면서 점점 표독해져서 "반대파들을 다 죽여서라도 내 딸의 계승을 보장하라"고 한다.
아들을 사산하고 나서 앤을 버릴 결심을 헨리에 의해 런던 탑에 갇힌 앤은 '그와 함께 한 천 일 동안 처음에는 그가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를 미워했다. 내가 그를 사랑하기 시작하자 그는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한 기간은 천 일 중 단 하루뿐이었다.'는 독백을 한다. 헨리가 찾아와 "이혼만 해주면 살려주고 엘리자베스와 해외에 나가 살게 해주겠다"고 회유하러 오지만 앤은 "엘리자베스를 사생아로 만들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면서 "내가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했던 말은 거짓이었고, 바람 피운 것도 사실이고, 당신이 낳을 아들이 몇이든 위대한 왕이 될 것은 엘리자베스이니, 나는 기꺼이 피를 흘릴 것이다"라고 쏘아붙인다. 앤이 처형당하고 어린 엘리자베스가 왕궁 정원에 홀로 거니는 장면 위로, 앤이 "위대한 여왕이 될 엘리자베스를 위해 내 피를 흘리겠다"는 위의 대사가 흘러나오며 영화가 끝난다.
- 1972년 《Henry VIII and His Six Wives》: 샬럿 램플링
- 2003년 TV영화 《Henry VIII》: 헬레나 본햄 카터
- 2003년 TV영화 《The Other Boleyn Girl》: 조디 메이 (Jodhi May)
- 2008년 《천일의 스캔들》: 나탈리 포트만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메리 불린과 헨리 8세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내성적이고 조용하며 선량한 메리에 비해 야심만만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외숙부 노포크 공작과 아버지의 지시로, 불린 가를 방문한 헨리 8세를 유혹하지만 승마에서 헨리를 도발했다가 왕이 말에서 떨어져 다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부상도 부상이고 왕이 여자 앞에서 낙마해서 체면을 구겼으니 유혹이고 뭐고 물건너간 상황. 그리고 왕을 간호하던 메리가 왕의 눈에 들어 온가족이 궁성으로 가게 되자, 여동생[31] 메리에 대한 미움이 조금씩 생긴다. 궁정에서 대귀족 헨리 퍼시를 꼬시는 데 성공해서 비밀리에 결혼하고 초야까지 치렀지만, 메리가 이를 부모와 외숙부에게 알리는 바람에 결혼은 취소당하고 프랑스로 쫓겨나자 본격적으로 메리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여동생 메리가 헨리 8세의 아이를 갖고 침대에 누워있음에도, 그리고 메리가 왕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대놓고 왕을 유혹해 메리를 버리게 만든다. 그러나 왕에게 몸은 허락하지 않은 채, 자신은 아들을 낳아 줄 수 있으나 결혼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낳아 봤자 사생아일 뿐이니 동침은 허락하지 않겠다고, 자신을 갖고 싶다면 왕비로 삼아 달라고 어필하여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도 쫓아낸다.[32]
그러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을 왕비로 만들기 위해 온갖 정적을 만들고, 반대파를 사형시키고, 가톨릭과도 갈라선 헨리는, 그러느라 쌓인 분노와 스트레스를 앤에게 폭발시킨다. 헨리는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하고 내쫓은 뒤 앤을 찾아와 "너 때문에 내가 캐서린도 쫓아내고 나라를 두 동강 내기까지 했으니 그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라"며 난폭하게 화를 내고, 앤은 저항하지만 끝내 그 자리에서 헨리에게 강간을 당한다.[33] 그 직후부터 왕은 이미 앤에게 냉담해졌고, 결혼식을 올리고 왕비로 즉위했어도 결혼생활은 불행하기만 했다. 잠자리도 늘 거칠었던 듯 어두운 얼굴로 메리에게 "왕이 너하고는 어땠냐"고 묻기도 하고,[34] 나중에는 아예 헨리 8세는 앤과의 부부관계에서 발기도 안 될 정도였다.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만 했던 앤은 "어떻게든 왕을 흥분시키기 위해, 침대에서 수치스런 짓도 해야 한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점점 히스테리와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앤은 임신했던 아이를 사산하고, 남동생 조지와 동침해 다시 아이를 가질 생각까지 했다. 침대에 올라가기까지 했다가 결국 실행은 못 했다.[35] 하지만 안 그래도 조지와 사이가 최악이던 아내 제인 파커가 이를 목격하고, 남편과 손위 시누이의 관계를 왕에게 고해바쳐서 결국 조지와 함께 참수된다.
- 2022년 《스펜서》: 에이미 맨슨 (Amy Manson)
3.2. 드라마
- 1970년 《The Six Wives of Henry VIII》[36]: 도로시 터틴
- 2007년 ~ 2010년 《튜더스》: 나탈리 도머[37]
시즌 1~2에서 주역으로 등장한다. 사실상 《튜더스》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드라마에서 인기도 높은 캐릭터였다. 실제 역사 속의 앤 불린도 헨리 8세의 왕비들 중 가장 유명한 여인이기도 했고. 아버지 토마스 불린 못지 않은 야심가로, 연인 토마스 와이어트를 망설임없이 차버리고 헨리 8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노력한다. 천진난만한 인상이지만 계산적이고 야망을 위해 거리낌없이 나아가는 성격이다. 헨리에게 순종적이기보다는 자신의 태도를 굽히지 않고, 토마스 크롬웰과도 사사건건 충돌한다. 항상 아들을 원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낳을 수 있었던 하나뿐인 딸인 엘리자베스에게는 애정을 아낌없이 쏟았고, 자신의 상황이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했을 때에는 딸의 안위를 무척이나 걱정했다. 그렇게 도도하던 그녀가 눈물짓던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도 딸 때문이었다.
캐서린 왕비와, 자신에게 끝까지 굴하지 않는 메리 튜더를 위협으로 여기는데다[38] 점차 자신 역시 캐서린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으로 갈수록 정신이 짖눌려간다. 이미 앤을 아내로 맞은 왕은 다시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하고, 앤 불린은 결혼 후 달라진 왕의 태도에 더욱 정신이 예민해지는 악순환. 결혼하고 1달 뒤에 모두가 예상한 아들이 아닌 딸 엘리자베스 1세를 낳고 나서는 몹시 상심하지만 "다음에는 아들을 낳으면 된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이후 임신한 아이를 임신 초기에 유산하자 점점 신경질적이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렵사리 헨리의 애정을 붙잡아 셋째 아이를 가지지만, 2번째 유산으로 이 아이마저 잃게 된다. 그런데 2번째 유산은 임신 초기에 헨리가 시녀 제인 시모어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앤이 극도로 분노하여 스트레스를 받은 탓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됐다. 안 그래도 남편의 사랑을 잃고 있다는 불안감에 빠져 있었는데, 그때 남편이 다른 여자랑 시시덕대고 있는 걸 눈앞에서 봤으니 흥분해 버렸다.[39] 하지만 모든 잘못된 일을 죄다 남 탓으로 돌리며 살아왔던 헨리는, 당연히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산하여 몸져 누운 앤에게 "내 아들을 잃다니?!"라며 질책하면서 "하늘은 우리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려는 듯하니, 그대의 몸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얘기하자"라고 하며 쌀쌀맞게 뒤돌아섰다. 이에 앤은 "제 잘못이 아녜요. 당신 잘못이에요! 제 사랑은 늘 당신께 있었는데, 당신은 제 앞에서 오입질을 하셨죠!"라며 절규한다. 그 와중에 남동생인 조지 불린과 다른 이들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시녀들이 오해하고, 앤을 모함하는 이가 거짓 자백을 하는 등 상황은 꼬일대로 꼬여간다. 이때 헨리는 "앤이 나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모함을 최측근인 찰스 브랜던 앞에서 언급하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그런 마음을 갖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연기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시즌 2 9화 참조)[40] 결국 헨리에게 버려져 런던 탑에 갇힌다. 남동생인 조지 불린이 참수를 당하는 장면을 창밖으로 목도하고 오열하는 모습은 애처로울 지경. 부친 토마스 불린은 모든 것을 잃고 목숨만을 건진 채 밖으로 나오고, 앤은 창문을 통해 애써 웃어보이며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인사하지만 부친은 그녀를 외면하고 떠나버린다. 끝내 희미한 희망조차 잃고 체념한 뒤 사형대에 오른다. 그녀가 죽는 순간에 진심으로 울어준 남자는 다름아닌 옛 연인 토마스 와이어트였으며,[41] 헨리는 후련한 듯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있었다. 앤이 처형을 기다리는 중간중간 우수에 찬 눈빛으로 한쌍의 백조를 바라보는 신이 나오는데, 백조들을 통해 앤과의 애증을 나타내는가 싶더니 마지막 장면에서 백조로 화려하게 장식한 백조 파이를 만끽한다.
최종 시즌인 시즌 4의 최종회에서는 헨리의 환각인지 아니면 정말 유령인지, 밤중에 헨리의 앞에 등장해서 "내게 죄가 없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았나요?"라며 "총명한 엘리자베스를 좀 더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 말에 헨리가 괴로워하며 "하지만 그 아이는 당신이 내게 저지른 일을 생각나게 한다."고 하자 앤은 더 냉정하게 "난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다만 당신에게 정말로 아들을 낳아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라고 항변한다. 또 엘리자베스를 "제 인생에서 가장 순수한 것이었죠."라고 지칭한다. 더 나아가 자신처럼 왕비가 됐다가 불행한 죽음을 맞은 자신의 사촌 캐서린 하워드의 일을 언급하며 "불쌍한 아이"라고 지칭함으로써 헨리를 더 괴롭게 하고는 사라지는데, 이때 짓는 차가운 미소는 참으로 섬뜩하다.
- 2015년 《울프 홀》: 클레어 포이[42][43]
드라마가 철저히 토머스 크롬웰의 시점에서 진행되다 보니, 상당히 차갑고 야심에 불타는 인물로 나온다. 지적이고 매력적인 여성이지만 한편으로 폭언에 가까울 정도로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등 한 성깔하고, 남편의 정부였던 언니 메리 불린이나 자신의 몰락이 가까워지며 헨리 8세의 총애를 받는 시녀 제인 시모어에게 차갑게 굴기도 한다. 한편 《튜더스》에서처럼 색기로 남편 잡아먹을듯한 광기나 폭력성은 나오지 않는다. 매력적이지만 지성적인 모습. 몰락이 가까운 시점 헨리가 바람을 피는 것을 못 본듯이 애써 외면하고, 올케인 로치포드 부인이 대들자 분노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한다. 그러나 때때로 자신이 휘말려 있는 권력 싸움에 대한 피곤함이나, 딸 엘리자베스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왕비로서의 절망이 뒤섞이는 시선이 언뜻 비치는 등 입체적인 인물. 결국 토머스 크롬웰의 적이 되지만 그가 존중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그녀의 최후는 드라마 《튜더스》와 해석이 약간 다르다. 비교하면서 보는 것도 재미.
프랑스 물을 먹었다는 점을 반영한 점인지 프랑스어도 자주 쓰고 은근히 발음이 불어스럽다. 크롬웰을 부를 때 Cromwell이 아니라 Cremuel이라고 하는 식.
- 2017년 《Horrible Histories》: 젬마 웰렌
- 2019년 ~ 2020년 《스패니쉬 프린세스》: 앨리스 노키스
주인공이 캐서린인 만큼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며 대사조차 변변찮다. 첫 등장은 아이일 때의 모습으로, 언니 메리와 손을 잡고 뛰어가다가 캐서린이 불러 세운다. 이때 캐서린이 다정하게 "해리 왕자가[44] 어디 있는지 아니?" 라며 묻는데, 훗날 악연이 될 셋의 관계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꽤 지난 후 헨리가 토마스 불린을 만날 때 같이 등장한다. 경의 두 딸들을 왕비의 시녀전으로 들여야겠다며 캐서린의 앞에서 대놓고 불륜을 선언하는 장면인데, 상처받은 캐서린의 표정과 대조되는 야망에 찬 미소가 인상적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헨리가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하고 앤과 결혼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에도 모습을 비춘다. 파란색 옷을 입고 진주가 달린 'B' 팬던트 목걸이를 차고 왕의 방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인데, 캐서린이 걸어와 그래봤자 왕비는 자신이라는 선전포고를 함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패기를 자랑한다. 극의 끝 무렵에도 만찬을 즐기는 헨리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여담으로 앤 불린의 외모 역시 고증에 맞추어 검은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로 설정하였다.[45]
- 2021년 《앤 불린》[46]: 조디 터너 스미스.
최초의 흑인[47]이라 논란이 일었는데, 사실 영국 사극에서 이런 식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고려해서 엄연히 백인이었던 실존 인물 역할에 흑인을 캐스팅한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2012년 BBC에서 제작한 드라마 《할로우 크라운 (The Hollow Crown)》에서 프랑스 출신의 헨리 6세의 왕비 앙주의 마거릿 역에 흑인 여배우 소피 오코네도를 캐스팅한 것. 당연하지만 실제 앙주의 마거릿은 백인이었고, 극 중 시대적 배경이 되는 15세기는 아직 서유럽에 아프리카계 흑인이 존재 자체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15세기의 유럽 흑인들은 절대다수가 남유럽(특히 이베리아 반도[48])의 무어인[49]이었고 본격적인 흑인 노예무역이 시작되던 때도 먼 훗날의 이야기다. 일각에서는 조디 터너 스미스가 인종만 흑인일 뿐 엄연히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인이므로 비영국계 백인 배우가 영국인 역할을 맡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런 주장은 목소리가 잘 어울리면 되는 성우와 관련해서 하는 게 적절하지 외모도 잘 어울려야 하는 실사 배우와 관련해서는 반만 먹혀드는 주장이다. 영국 백인 역할의 경우 더빙에서의 성우 캐스팅은 영국 흑인 성우가 맡는 게 다른 나라 출신 백인 성우가 맡는 것보다 훨씬 잘 어울리지만[50], 실사물에서의 배우 캐스팅은 반대로 다른 나라 출신 백인 배우가 맡는 게 영국 흑인 배우가 맡는 것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셈이다.[51]
블랙워싱 논란 이외에도 작중에서 앤 불린과 제인 시모어의 키스신까지 나온다(...). 방송되기 전부터 역사 왜곡 논란을 일으킨 끝에 시청률이 폭망했으며 imdb 평점도 4점대로 추락했다. 이후 AMC+로 미국에서 스트리밍 될 때 이러한 논란 때문인지 실제 역사에 허구적인 내용도 첨가되었다고 안내하는 문구가 드라마 시작 전에 나온다.
3.3. 다큐멘터리
- 2013년 《앤 불린의 마지막 날들 (The Last Days of Anne Boleyn)》: 타라 브레스낙 (Tara Breathnach)
- 2022년 《피와 섹스 그리고 왕실》: 에이미 제임스-켈리
3.4. 연극
- 1949년 《Anne of the Thousand Days》: 조이스 레드만
3.5. 오페라
3.6. 뮤지컬
}}} ||- 《레이디 베스》: 일본의 미하일 쿤체, 실베스터 르베이가 작곡.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이 되는 과정을 그렸다. 초연은 2014년에 도쿄 제국극장에서 올렸으며, 대거 개정한 재연판은 2017년에 상연됐다. # ## 엘리자베스 1세의 이야기인만큼 당연히 등장하며 작중 이미 고인이기에 영혼으로 등장하여 베스를 곁에서 지켜주며 위로하는 역할을 맡는다. 본 뮤지컬에서 앤 불린을 맡은 배우는 다카라즈카 가극단 주조 출신 카즈네 미오(和音美桜)가 연기했다. 2014년 초연과 2017년 재연 모두 싱글캐스트로 출연.
프롤로그에서 이미 참수되었다고 나오기에 작중에서는 영혼의 모습으로 나오며, 치를 떨면서 자신을 "요부", "매음녀"라고 욕하는 친딸 베스를 위해 곁에서 지켜주고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는 생전 자신의 출신성분에 대한 컴플렉스를 느끼기도 했으며, 거기 더하여 자신이 앤 불린의 딸이란 것을 매우 치욕스럽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본 뮤지컬에서 이를 잘 반영하였으며 레이디 엘리자베스 역시 단순히 청순가련한 공주 캐릭터상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실제 역사에서처럼 메리 튜더 여왕이 굉장히 증오하는 대상이기도하다. 레이디 베스의 무대•연출은 코이케 슈이치로(小池修一郎)가 맡았다.[53]
비주얼은 비록 고증대로의 흑발이 아닌 갈색 빛이 도는 흑발이지만, 드라마 튜더스와 울프 홀에서 푸른 눈으로 묘사되었던걸 초상화와 고증의 기록대로 '검정 눈'으로 나온 것이 특징이며 미디어 매체에서 묘사가 된 앤 불린 중에선 가장 간만에 고증의 묘사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익히 알려진 초상화 분위기와도 닮아있다.
- 《식스 더 뮤지컬》: 한국 초연 배우는 김지우, 배수정. 테마곡은 Don't Lose Ur Head[54], 테마색은 초록이다.
핸드폰을 잘 사용하는데, 공연 중 두 번의 셀카를 찍는다. 첫 번째는 솔로 넘버 때, 다른 한 번은 커튼콜 후 퇴장 전이다. Don't Lose Ur Head는 앤 불린이 헨리를 만나고, 아라곤의 캐서린을 밀어내고 왕비가 되는 과정, 그리고 헨리의 신임을 잃는 과정에서 앤이 내뱉은 실언들을 보여주고, 그로 인해 참수당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음악적 모티브는 에이브릴 라빈, 릴리 알렌으로 넘버는 통통 튀는 귀여운 느낌이다. 이후 자신의 우승을 확신하며 솔로곡 한 곡[55]을 더 부르려 하지만, 첫 소절에서 다른 왕비들에게 저지당한다. 공연 내내 참수 드립을 찰지게 친다. 아들과 사별한 제인 시모어에게 자기 몸은 머리와 사별했다고 맞받아치는 식. 마찬가지로 참수당한 캐서린 하워드와 쿵짝을 맞춰 참수 드립을 치는 장면도 있다. 왕비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쓴 넘버 SIX에선 헨리가 써준 Green Sleeves 시를 고쳐서 히트곡을 내고, 셰익스피어와 작사 작업을 함께 한다.[56]
3.7. 도서
- 2005년 <앤 불린의 삶과 죽음 (The Life and Death of Anne Boleyn)>: 에릭 아이브스 (Eric Ives)의 저서.
- 2019년 <Anne Boleyn: 500 Years of Lies>: 그녀를 악녀로서의 거짓된 루머들을 없애고 과감하게 새로운 분석을 제기한 도서.
3.8. 게임
- Europa Universalis IV: 헨리 8세의 왕비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정치 4, 외교 2, 군사 2로 생각만큼 능력치가 낮지 않지만 정치 5, 외교 4, 군사 4의 유능한 아라곤의 캐서린에 비하면 아쉬운 능력치다.
- 대항해시대 오리진: B급 교역 항해사로 등장한다. 게임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보석상 직업을 보유하고 있다. 스탯은 좋다고 보기 어렵지만, 보석 구매 할인/판매 할증, 구매량 증가, 귀금속 구매량 증가 등 항해사 스킬만큼은 다른 항해사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훌륭하다. 여담으로 외형도 호/불호가 갈리지만 호평이 많은 편.
4. 여담
- 의외로 딱히 그 당시 기준의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앤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에 따르면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거뭇한 피부[57]를 지녔다고 하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금발과 흰 백옥같은 피부를 미인의 조건으로 쳤기 때문에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상당히 이국적인 외모에 속했다. 금발에 푸른 눈이었던 언니 메리 불린이 더 미인으로 여겨졌다. 덕분에 눈에 띄었던 메리 불린은 유학 간 프랑스 궁정에서 난잡한 성생활을 했으며, 잠깐 헨리 8세의 정부가 되기도 했다.
앤의 무기는 외모보다 크고 예쁜 검은 눈과 풍부한 교양, 세련 된 모습이 매력이었다. 유달리 반짝이고 표정이 풍부한 검은 눈이 매력적이었기에, 앤에게 적대적이었던 이들조차 그 아름다운 눈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춤도 잘 추고 교양이 풍부한데다 화술도 뛰어나 남자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기로도 유명했다. 당시 유행의 최첨단이었던 프랑스 궁정에서 오래 교육 받고 몸가짐을 익혔기 때문에 매우 세련되고 매력적이었으며, "잉글랜드 여성이 아니라 프랑스 여성 같았다"라는 감탄 섞인 묘사가 남아 있다.
- 매우 지적이었으며 신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마르틴 루터가 주도한 종교개혁 붐이 일어나던 당시 "앤은 종교개혁을 지지했다"는 카더라 소리가 있는데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은 전혀 아니었다. (이 부분은 성공회, 헨리 8세 항목 참조) 앤의 외삼촌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잉글랜드 내 가톨릭 계열의[58] 수장급이었고,[59] 헨리가 수장령을 반포하고 잉글랜드 국교회를 출범시키긴 했지만 루터파는 잉글랜드에서 여전히 이단이었다. 루터파 신학에 영향을 받은 윌리엄 틴데일판 개신교 서적 반입시 반입자 소집자는 사형이었고 루터주의는 이단으로 선고되어 복음주의자들은 화형을 당하던 시기이다. 당시 잉글랜드 내에 잔존하던 가톨릭 세력들이 스페인 왕가의 혈통인 아라곤의 캐서린을 진정한 왕비로 여기고 앤 불린은 이세벨 급 마녀나 사탄으로 여겼기에 반동으로 개신교 세력과 정치적으로 호의를 보였다고 볼 수 있다.
- 워낙 정적이 많았기에 마녀였다, 손가락이 하나 더 있거나 유방이 하나 더 있는 기형이었다, 사악했다 등의 악성 루머가 많지만, 당대 기록에 의하면 매력적이고 재치있으며 적어도 절친한 사람들에게는 선량한 여자였다.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 결혼 후 처형까지의 약 3년 남짓 되는 시간으로 인해, 후대는 그녀를 '천일의 앤(Anne of Thousand Days)'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쥬느비에브 브졸드 주연의 고전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 아이러니하게도 앤 불린의 딸은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빛나는 왕 중 하나인 엘리자베스 1세로 즉위했고, 그 후 앤 불린의 이미지는 '여섯 손가락의 마녀'에서 '여왕의 어머니이자 신교의 성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딱히 어머니를 복권시키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초상화와 자신의 초상화가 함께 담긴 카메오 반지를 가지고 있었고, 궁정 사람들은 알아서 여왕의 어머니를 칭송했다. 탐욕스러운 토머스 크롬웰이 수도원에 해체에 대해 독실한 앤 불린과 대치하는 구도의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 조선시대 장희빈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왕에 의해 왕비가 되었다가 왕에 의해 왕비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것, 딱 하나 낳은 자식이 왕이 되었으며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 남편의 명령에 의해 죽게 되었다는 것, 둘 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나 현대에 들어선 당대의 평가만큼이나 악한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알고보면 평가가 상당히 갈리는 것 등. 그리고 둘 다 아버지가 외교관[60] 출신이고, 집안이 잘나가는 외교관-상인 가문이었다는 점도. 심지어 여배우들이 캐스팅되길 원할 정도로 인기 있는 배역에 자주 영상화된다는 점도 닮았다.
- 잉글랜드인들은 그녀가 참수된 날에 너무도 맑았던 하늘로 인해서 슬픈 푸른색을 'Anne blue'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그녀가 처형된 날이면 그녀의 고향 히버(Hever) 성과 런던 탑에서 자신의 잘린 목을 팔에 끼고 마차를 타고 달리는 그녀의 유령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런던 탑에서는 심심찮게 자신의 목을 들고 다니는 앤의 유령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1차대전 당시 런던 탑에서 간첩을 처형하기 직전에도 나타났다는 설이 있다.
- 스페인어 단어 중에 'anabolena' 라는 단어가 있다. 철자만 봐도 유래가 앤 불린임을 알 수 있는 단어로 뜻은 '미친 사람처럼 싸우기 좋아하는 여자' 이다. 그 유래에 대한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스페인에서 바라봤던 앤 불린에 대한 이미지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다만 꽤 오래된 단어라 21세기인 현재에는 그다지 많이 쓰이는 단어는 아니라고.
- 앤 불린의 초상화들은 전부 앤 불린 사후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신의 얼굴을 본떠 그리게 한 가짜 초상화이다. 실제 앤 불린의 초상화들은 앤이 참수된 후 불명예로 전부 태워지거나 버려졌다.
4.1. 일화들
- 푸르쿠아(Pourquoi: 프랑스어로 "왜?"라는 뜻)라는 하바니즈 개가 있었다. 하바니즈 개가 마치 질문을 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 앤 불린과 친해지고 싶었던 리슬 부인(Lady Lisle)이 선물했다. 리슬 부인은 그 후로도 앤에게 노래하는 꿩을 보내는 등 여러 노력을 했지만 왕비와 친구가 되지는 못했다(...). 아무튼 앤은 푸르쿠아를 무척 귀여워했지만, 1534년 12월 푸르쿠아는 "창문에서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녀들은 앤이 충격을 받을까 봐 헨리 8세에게 이 소식을 왕비에게 대신 전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앤을 싫어했던 신성 로마 제국 대사 샤푸이(차푸이스)는 매우 즐겁게 이 소식을 편지에 전했다. 그 때문에 샤푸이가 푸르쿠아를 암살(...)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신빙성은 없다. 우리안(Urian)이라는 그레이하운드도 길렀는데, 앤이 행차하는 도중 우리안이 멋대로 뛰쳐나가 근처 소를 물어뜯어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 왕과 왕비는 소의 주인에게 보상금을 지불했다.
- 헨리 8세가 앤에게 보낸 연애 편지는 남아 있으나 앤의 답장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다.
- 앤의 시도서(the Book of Hours)에 앤의 친필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 최후의 심판에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삽화 밑에 "그 때가 올 것이다"라고 라틴어로 적었다. 그 다음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 삽화 옆에는 "희망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라는 문구를 적었다.[61] 다른 시도서에는 헨리 8세가 여백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당신이 기도하며 내 사랑을 생각해 준다면, 나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토록, 헨리."라는 문구를 적었고, 그 밑에 앤이 답으로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상냥한 태도로 대한다는 증거를 매일 보실 수 있을 거에요"라고 적었다. 둘이 한창 연애할 때 적은 것일 듯.
5. 외부 링크
[1] 스펠링이 이렇다 보니 한국에서는 글자 그대로 써서 '앤 볼린'이나 '앤 볼레인'으로 쓰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영국산 창작물이나 다큐멘터리 등지에서 실제로 발음되는 것을 들어보면 '불린'과 '볼린'의 중간쯤 되는 발음에 가깝다.[2]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유럽에는 제도적으로 일부일처제가 확고히 규정되었다. 따라서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동양처럼 정식으로 혼인 관계가 인정되는 첩을 둘 수 없었다. 물론 정실부인/왕비 이외의 다른 여성과 관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나 그들은 단지 애인, 내연녀, 정부(情婦)에 불과했고, 정부들은 왕의 총애를 받으면 귀부인의 작위를 받기도 했다. (국왕의 정부는 특별히 로얄 미스트리스라고 칭하며 프랑스의 경우 여러 명의 로얄 미스트리스 가운데 단 한 명에게 '메트레상티트르(maitresse-en-titre)'라는 특수한 지위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후궁과는 명백히 다른 개념이다.) 정부가 낳는 왕의 자식은 왕의 적법한 혼인 관계에서 출생하지 않은 사생아이므로, 왕자/왕녀로 인정받지 못하고 왕위 계승권도 받지 못했다. 다만 왕이 사생아를 친자식으로 인지하여 작위를 주거나 경제적 지원을 해 주는 경우는 흔했다. 이러한 왕의 사생아들은 보통 서류상으로는 정부의 법적 남편의 자식으로 처리되어 세례성사를 받았다. 사실 이런 식으로 사생아를 처리하기 위해 정부들은 위장결혼을 한 유부녀인 경우가 많았으며, 정부의 법률상 남편(사실상 기둥서방)은 아내가 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를 본인의 호적에 올리는 대가로 금전, 작위, 관직 등의 보상을 받았다. 정실부인/왕비 이외에도 혼인 관계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첩/후궁을 둘 수 있고, 품계조차 받지 못한 일개 궁녀가 낳는 nn번째 아들이나 딸조차 왕비 소생보다는 한 단계 낮을지언정 엄연한 왕자녀로서 고귀하게 대우받았으며 아들이면 경우에 따라 보위까지 이을 수 있었던 동양의 왕실과는 대조적인 특징이다.[3] 헨리 8세의 이름으로 발표한 신학 책들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처럼 헨리에게 연금을 타먹는 인문주의자나 잉글랜드의 주교들이 왕의 명의로 발표한 것들이다. 다만 유력자의 이름으로 발표하는건 원래 필자들도 선호하던 방식이고 그 당시 주장을 강화하는 도구이기도 했으며, 딱히 현대처럼 욕 먹을 일도 아닌, 흔히 사용하던 수법이었다.[4] 카를 5세의 어머니 후아나의 여동생.[5]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혼인무효'라는 표현을 쓰는데, 애초에 중세시절 자주 이용했기에 이혼이니 혼인무효니 하는 용어는 중요치 않다. 현대에도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기에 '이혼'이라는 개념은 없다. 다만 '혼인무효'라는 것은 있다. 자녀에게 가톨릭 세례를 주는 것을 반대하거나, 결혼 전에 몰랐던 중대한 기만 사유가 있거나, 가톨릭 신앙생활을 반대하거나, 가톨릭 교회의 허락(관면) 없이 가톨릭 신자가 아닌 자와 결혼한 경우 등등 몇 가지 사유로 '혼인무효'를 할 수 있다. 이 '혼인무효'를 하지 않고 (세속 법으로) 이혼한 후에 재혼하면 '혼인조당'에 걸려, 정상적으로 성사를 받으며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 자세한 이야기는 혼인성사 참조.[6] 이 때문에 중간에 파기되었으나 메리 공주는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조카 카를 5세와의 약혼이 체결된 적도 있었고, 왕위 계승권 덕에 각국에서 혼인 상대로 인기가 많았다.[7] 이는 근친혼이 예사인 유럽 왕족의 다른 결혼에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법상 6촌(동양의 12촌) 이내의 친족은 원칙적으론 결혼할 수 없는 사이였지만, 귀족이나 왕족들은 상속과 계승권과 외교상 이유로 자주 관면을 요구하여 근친혼이 성행했다. 당시 유럽의 군주들은 전원 예외없이 통치 가문 출신과 결혼해야 했고, 결혼 상대로 어울리는지 이득, 신분, 격을 다 따져 결정했다. 그러다보니 선택지가 워낙 좁아져 친인척들간의 결혼이 빈번할 수 밖에 없게 것이다. 실제로 유럽 제일의 명문가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왕가와 모두 친척이었고, 덕분에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무시무시한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 국왕들과 왕비들의 얼굴을 보면 근친혼의 부작용인 안면비대칭, 심한 주걱턱 등이 눈에 띈다.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이 대표적인 예시.[8] 하지만 결혼 6개월 만에 죽은 것을 보면, 결혼 기간 내내 몸이 좋지 않아 2세 계획을 회복 후로 미루고 잠자리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9] 결혼식에서 헨리 8세가 "천 일 안에 아들을 낳지 않으면 널 죽이겠다!"라는 소리를 앤에게 했다는 설이 기록되었는데, 역사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당시 헨리 8세는 앤에게 푹 빠져 있었고 한창 연애할 때에는 대단히 낭만적이고 정열적인 것으로 유명했던 그가 새 신부에게 그렇게 차가운 말을 했을 가능성도 희박하기 때문이다.[10] 앤은 끝내 아들을 출산하지는 못했지만, 이때 태어난 딸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의 외모는 물론 성격도 가장 빼닮은 자녀로 평가된다.[11] 이를 신생아 용혈성 질환이라고 한다. 현재는 이러할 경우 첫째 자녀를 낳을 무렵 산모에게 Anti-D 항체를 주입하여 해결한다.[12] 여담이지만 필리파 그레고리가 집필한 《천일의 스캔들》 원작소설에서는, 앤이 가장 마지막에 사산한 아이가 기형아로 태어난 것이 앤이 마녀로 몰리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고 한다. <튜더스>에서도 헨리 8세가 "사산한 아이는 기형아였으니 내 아이일 리 없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앤이 기형아를 낳았다는 설은, 후대에 신교도와 앤의 딸인 엘리자베스 여왕을 싫어했던 반대파가 쓴 프로파간다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정말로 기형아를 낳았더라면 당시 궁정 기록이나 앤의 재판 기록에 전혀 언급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필리파 그레고리는 "나는 사학 전공이었으므로 역사를 정확하게 서술한다"고 주장하지만, 많은 면에서 부정확하고 재미를 위해 악의 넘치는 소문을 그대로 갖다 쓰는 등 악명이 높다.[13] 심지어 현대에 이르렀음에도 황태자비 시절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전 국가적인 압박과 통제로 인한 스트레스로 여러 번 유산을 거듭했던 일본의 마사코 황후의 경우만 보아도 당시의 압박은 차원이 달랐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14] 젠트리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아무리 절대 왕정의 군주라지만 손쉽게 조강지처를 내치고 그에 반대하는 교황청과 관계를 끊고 수장령을 선포하는 것은 어려웠다. 젠트리들도 헨리 8세와 마찬가지로 메리 공주가 당시 풍속에 따라 외국 왕족과 결혼하면 하나 남은 계승권이 외국 왕가로 넘어가는 것을 반대했기에 왕의 이혼을 지지한 것이다.[15] 앤의 손에 손가락처럼 보이는 혹이 하나 있었다는 설도 있으나, 진위는 알 수 없다. 외모는 사람의 선악을 나타내며 기형이 악의 상징이라고 여겨지던 시대에, 그렇게 눈에 띄는 흠이 있었다면 왕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는 반대 의견도 있다.[16] 일단 유럽에서 왕족의 시녀나 시종은 하녀, 하인과는 달라서 기본적으로 지체 높은 귀족들이 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왕족을 모시는 일이 귀족에게 명예로운 일이었지, 왕족에게 누군가의 시녀로 만들겠다는 것은 명백한 모욕이었다. 즉, 메리를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삼고 시종과 결혼시키겠다고 한 건 "엘리자베스는 적출 공주고 메리는 일개 사생아니까 엘리자베스보다 비천한 존재"라고 모욕하는 일이었다.[17] 애시당초 적출 공주라면 기본적으로 타국의 왕에게 시집가서 왕비가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으므로 시종과 결혼시킨다는 것은 메리의 적녀 자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며 현재보다 미천한 신분으로 떨어뜨리겠다는 말, 나아가 메리의 어머니 캐서린 왕비의 정통성도 없애버리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18] 드라마 《튜더스》에서는 이를 반영해, 메리는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의 시녀가 되는 굴욕을 겪으면서도 엘리자베스가 혼자 울고 있을 때 직접 안아 달래 주는 등 잘 돌봐 주었고, 나중에 엘리자베스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도 잘 지내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19] 실제로 메리 1세는 당시의 군주치고는 관대하고 정이 많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렇다 쳐도 제인 그레이도 살려주려고 했었다. 제인 그레이는 메리의 고모의 외손녀(즉, 5촌 조카)로 막장 부모에게 학대당하며 자라다가, 에드워드 6세 사후 권력을 탐한 부모의 강요로 여왕으로 옹립됐다. 이후 메리가 즉위하자 제인은 순순히 폐위에 동의했지만 그녀의 부모가 계속 반역에 가담하는 바람에 위험인물로 찍혔고 이런 상황에서도 메리는 제인을 어떻게든 살려주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20] 조카 앤 불린을 통해 세력을 강화했던 토머스 하워드는 사태가 나빠지자 앤을 버리고 잽싸게 발을 뺐고, 다른 조카인 캐서린 하워드를 또다시 왕비로 만든 후에도 똑같이 그녀도 외면했다.[21] 불린 가문의 3남매의 나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 게다가 영어로는 나이 상관없이 형제자매를 sister, brother라고 부르기 때문에, 누가 나이가 많은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메리 불린-앤 불린-조지 불린의 순서였다고 받아들이고 있다.[22] 영화 《천일의 스캔들》에서는 사산하는 바람에 극도의 절박감을 느낀 앤이 남동생 조지 불린을 침실로 끌어들이기까지는 하지만 둘 다 죄책감을 느껴 실행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앤을 감시하기 위해 몰래 따라다니던 시녀 제인 파커가 이를 목격한다. 제인은 조지 불린의 아내, 즉 앤 불린의 올케이다. 제인은 남편 조지에게 인격적으로 무시와 모욕을 당해 왔기 때문에 조지를 증오했다. 제인은 손위 시누이와 남편이 함께 침실로 들어가는 것까지만 목격하고는 그것을 헨리 8세에게 밀고하였고, 앤은 다음날 사산 사실을 고백하러 헨리 8세에게 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23] 참고로 lady는 백작 이상의 귀족의 부인이나 딸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왕족에서 귀족 신분으로 떨어진 것.[24] 이 당시 칼레는 중세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대륙에 마지막으로 남은 잉글랜드 영토였다. 나중에 메리 1세 때 프랑스와 전쟁을 하다가 빼앗긴다.[25] 실제로 도끼로 참수당한 토머스 크롬웰,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는 한 번에 목이 잘리지 않아서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아야 했다. 특히 메리 1세는 집행인이 잘못 내리쳐서 목이 아닌 뒤통수에 날이 박히는 바람에, 끔찍한 고통 속에서 남긴 "주여!"라는 단말마가 유언이 되고 말았다. 여담이지만 크롬웰의 경우는 헨리 8세가 보복 차원에서 일부러 서투른 집행인을 썼다는 비화가 있다.[26] 집행검(익시큐서너 소드)라는, 칼 끝이 평평한 양날검으로 지체 높은 신분이나 기사의 처형에 쓰였다. 참수형 항목 참조. 또한 아무리 사형당할 사람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다 해도 동서양 막론하고 "죽더라도 곱게 죽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던 듯하다. 이 당시 사형수의 가족들은 사형을 맡은 망나니에게 고통없이 빨리 보내달라는 뜻에서 돈을 건네주기도 했고, 단두대 역시 목을 한 번에 쳐서 죽이려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프랑스에서 처형 장면을 목격한 국왕 루이 16세가 저건 너무 참혹하니까 방법을 바꿔 보라고 해서 개발된 게 기요틴.[27] 캐서린의 어머니인 이사벨 1세와 아버지 페르난도 2세 항목 참고.[28] 위에서도 나왔지만 앤이 무식했다는 건 아니다. 캐서린이 ‘더’ 교양이 높았다는 것이다.[29] 헨리 8세는 즉위하자마자 아서와 사별하여 과부가 된 형수 캐서린에게 먼저 청혼할 정도로 그녀에게 푹 빠져있었고, 덕분에 금슬좋던 신혼 초에는 누가봐도 뻔히 알 수 있는 '까꿍 내가 누구게?' 식의 장난을 주변의 시녀들까지 질려할 정도로 쳐도 캐서린은 늘 웃어주었다고 한다.[30] 그나마 이런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은 말년에 마지막으로 들인 왕비 캐서린 파였다. 헨리 8세의 아내 편력은 품위있고 조용한 아라곤의 카탈리나- 발랄한 앤 불린- 역시 순종적이고 조용한 제인 시모어- 모처럼 정략결혼을 했으나 누구보다 빠르게 이혼한 클레베의 앤- 앤 불린보다 더 어리고 발랄한 캐서린 하워드- 마침내 마지막 아내가 된 원숙한 캐서린 파라는 식의 변덕을 보여준다.[31] 실제 역사와는 달리 원작 소설과 이 영화에서는 앤 불린이 메리 불린의 언니로 나온다.[32] 이 영화에서는 아라곤의 카탈리나와의 이혼도, 종교개혁(성공회)도 모두 앤이 헨리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그를 조종해 이루어진 걸로 나온다. 그러니 에릭 바나가 아무리 무게를 잡아도, 여자랑 자고 싶어 그 난리를 일으킨 헨리 8세가 몹시 바보처럼 보인다.[33] 원작과는 전개가 다르다. 원작에서는 헨리가 캐서린을 쫓아낸 뒤 후련해하고, 앤이 먼저 헨리를 찾아가 동침한다. 그리고 둘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도 좀 더 뒤의 일이다.[34] 메리는 놀랄 정도로 부드러웠다고 대답한다.[35] 원작소설과 2003년에 BBC에서 만든 TV판에서는 진짜로 해서 아이를 가졌다. 그 아이는 기형으로 사산된다. 원작 소설에서 조지 불린은 동성애자로 묘사되는데, 그가 유일하게 성적으로 끌리는 여자가 누나 앤이라는 상막장 전개라고 한다.[36] BBC에서 방영한 6부작 시리즈[37] 역사상처럼 검은 눈이 아니라 푸른 눈의 배우가 역을 맡았다.[38] 메리 튜더가 계승권을 되찾아 왕이 되면 자신과 자신의 친정 불린 가문을 파멸시킬 것임이 뻔하기에 더욱 위협으로 여겼다.[39] 당시 유럽 사회에서는 귀족들은 직접적으로 거절이나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고 돌려 돌려 표현하는 것이 예의였기 때문에 일단 이유를 불문하고 화를 내는 것은 체통이 깎이는 짓으로 여긴다. 더군다나 아무리 서양이어도 왕은 왕이다. 왕이 여자 밝히는 것에 대해 왕비가 질투는 할 수는 있어도 직접적으로 왕의 체면을 깎이게 만들면 도리어 욕을 먹는다.[40] 그러나 최종회에서 늙은 헨리가 왕비들을 회상하면서 앤 불린이 "나에 관련된 모든 고발은 거짓이고 당신은 알지 않았나요?"라고 물은 것을 보면, 헨리 역시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던 것으로 추정된다.[41] 와이어트도 앤과 간통 혐의를 받았지만, 그의 상관인 토마스 크롬웰이 손을 쓴 것인지 무사히 풀려났다.[42]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에서 엘리자베스 2세로 나온다.[43] 나탈리 도머처럼 푸른 눈이다.[44] 해리는 헨리의 애칭이다.[45] 실제 역사 속의 앤은 서구권 미인과는 다른 이국적인 외모였다고 한다.[46] 영국 채널인 채널5에서 제작한 3부작 미니 시리즈.[47] 앤 불린은 당시 사진 역할을 하던 초상화에서도 백인으로 그려졌고, 친자매인 메리 불린이 금발 벽안의 미녀로 이름이 드높았던 만큼 유색인종일 수가 없다. 또한 흑인을 멸시하는 걸 넘어서 애초에 흑인이라는 인종 자체가 흔치 않았던 그 당시 유럽에서 흑인이 귀족 반열에 오르고 왕비까지 되었다면, 분명 흑인으로 그려진 초상화나 기록이 남았을 텐데 그런 기록이나 야사 및 그림 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48] 이베리아 반도 내 영국령 지역인 지브롤터도 영국령이 된 것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의 일이다.[49] 이마저도 대다수가 아랍인이나 베르베르인 같은 중동계 백인이었고 일부만 흑인이나 흑백혼혈이었다.[50] 어차피 영국식 영어 억양을 잘 살릴 수 있기만 하면 되므로.[51] 한국으로 치면, 한국에서 태어난 비동아시아계(백인이나 흑인) 외국인 2세가 한국어가 매우 유창하고 그 외에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도 매우 높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사극에서 토착 한국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비한국계 동아시아인(대표적으로 중국인이나 일본인) 배우가 사극에서 토착 한국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보다 더 잘 어울린다고 볼 수는 없는 것과도 같다.[52] 앤 불린의 이탈리아어 표기이다.[53] 2023년 9월 30일부터 발생한 다카라즈카 내부에서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은폐를 시도 할 회의를 진행하려했다는 것과 다카라즈카 감독 및 일본 뮤지컬계 연출자로서도 갑질건이 보도 되고있어 논란 점화중인 상태의 일본 무대계 유명 감독이기도하다. 한국 EMK판 모차르트! 2016년 공연때 연출감독이 이 사람.[54] '이성을 잃다'와 '머리를 잃다' 두 가지 뜻을 가진 중의적 표현.[55] 아라곤의 캐서린의 장례식에서 노란 옷을 입겠다는 노래로, 첫 소절부터 아라곤 디스를 한다.[56] 여담으로 셰익스피어는 앤 불린 사후 태어나 그녀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시기에 활약했다. 앤 불린이 참수당하지 않고 장수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57] 그렇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백인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랬다고 봐야 하며, 상술한 앤 불린 미니시리즈마냥 앤 불린을 흑인으로 묘사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58] 왜 가톨릭도 아니라 가톨릭 계열이나면,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는 가톨릭 신자는 수장령과 반역법에 어긋나기 때문. 영국국교회 내부의 가톨릭 전통을 용인하려는 세력으로 보면 타당하다.[59] 그의 손자이자 동명이인인 토머스 하워드는 훗날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의 재위 시절에 가톨릭 세력을 등에 업어,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 결혼하고 엘리자베스 1세를 몰아낼려는 반란을 꾸몄다가 들통나 처형당한다.[60] 장희빈의 아버지는 역관.[61] 왕비가 되려는 야심을 보여준다고도 해석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