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7 22:19:06

헨리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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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잉글랜드 왕국 랭커스터 왕조 초대 국왕
헨리 4세
Henry IV
파일:Henry IV.jpg
왕호 헨리 4세
(Henry IV)
이름 헨리 볼링브로크
(Henry Bolingbroke)
출생 1367년 4월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볼링브로크 성
사망 1413년 3월 20일 (향년 45세)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민스터 예루살렘 방
재위 잉글랜드 왕국의 왕
1399년 9월 30일 ~ 1413년 3월 20일
배우자 메리 드 보훈[1] (1381년 결혼 / 1394년 사망)
나바라의 호아나 (1403년 결혼)
자녀 헨리 5세, 토머스, , 험프리, 블랜치, 필리파[2]
아버지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어머니 랭커스터의 블랜치
형제 필리파, 엘리자베스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헨리 4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청원파의 일원2.3. 프로이센 원정과 예루살렘 순례2.4. 1393-1397년 행적2.5. 토머스 모브레이와의 갈등과 추방2.6. 반란과 잉글랜드 왕위 등극2.7. 헨리 4세의 치세
2.7.1. 왕위 등극과 회유 정책2.7.2. 주현절 음모2.7.3. 스코틀랜드 원정2.7.4.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2.7.5. 퍼시의 반란2.7.6. 삼자 동맹2.7.7. 오와인 글린두르의 쇠락2.7.8. 외교2.7.9. 말년
3. 가족관계
3.1. 아내3.2. 자녀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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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국왕으로 장미 전쟁의 주요 세력이 된 랭커스터 가문의 첫 번째 왕이다. 에드워드 3세의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과 블랜치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며[3] 왕이 되기 전 이름은 헨리 볼링브로크(Henry Bolingbroke)였다.

2. 생애

2.1. 초년기

아버지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3남이며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고, 어머니는 전임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차녀인 블랜치다. 그는 링컨셔의 볼링브로크 성에서 태어났기에 왕이 되기 전엔 '볼링브로크의 헨리'로 불렸다. 생년월일은 연대기에 기록되지 않아 불분명하다.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그는 1361년 말로부터 7년 후에 태어났다고 한다. <랭커스터 왕과 롤라드 기사들(Lancastrian Kings and Lollard Knights)>의 저자인 C. B. 맥팔레인은 1366년 4월 4일부터 1367년 4월 3일 사이에 헨리가 출생했을 거라고 추정하며, 옥스퍼드 국립인명사전은 그가 1366년 4월 7일에 출생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또다른 출처에는 1366년 4월 7일, 1366년 5월 30일 및 1367년 4월 3일의 날짜가 기재되었다. 잉글랜드 왕실 연구가 이안 모티머(Ian Mortimer)가 집필한 논문 "헨리 4세의 생년월일과 왕실의 세족"은 헨리가 1367년 3월 말에서 5월 중순 사이에 태어났으며, 아마도 성목요일(4월 15일)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헨리는 손자의 탄생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3세가 소식을 전한 시종에게 5파운드를 지불한 1367년 6월 1일자 왕실 기록에 처음 언급되었다. 어머니 블랜치는 1368년 9월 12일 중세 흑사병으로 사망했는데, 그의 누나인 필리파와 엘리자베스는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여동생인 랭커스터의 블랜치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그는 두 누나와 함께 2년간 랭커스터의 블랜치의 보살핌을 받다가 아버지의 두번째 아내인 카스티야의 콘스탄사의 보살핌을 받았고, 나중에는 아버지의 정부이며 1394년 아버지와 결혼하게 될 여인인 캐서린 스윈포드에게 양육되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주요 랭커스터 가문 요새인 미들랜드의 튜트버리 성에서 살았다. 캐서린 스윈포드는 곤트의 존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을 낳았다. 이 자식들은 '보퍼트(Beaufort)'라는 성을 물려받았는데, 헨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374년 12월, 곤트의 존의 종자인 토머스 버튼이 7살의 헨리의 청지기가 되었다. 이후 헨리는 버튼으로부터 프랑스어와 영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목사 휴 헐로부터 라틴어를 교육받았다. 또한 가스코뉴 출신의 기사 윌리엄 몬탄데르로부터 군사 교육을 받았다. 1377년 6월 21일, 임종을 눈앞에 둔 에드워드 3세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살아남은 아들 리처드와 곤트의 존의 아들 헨리를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했다. 그 후 7월 16일에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 리처드가 리처드 2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렀을 때, 헨리는 더비 백작 작위를 받았고 의식용 검 중 하나인 커타나(Curtana, 참회왕 에드워드의 검)를 들고 다녔다.

1380년 7월, 헨리는 1373년에 사망한 제7대 헤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의 막내딸인 부유한 상속녀 메리 드 보훈과 결혼했다. 곤트의 존은 이 결혼을 승인받은 대가로 리처드 2세에게 5,000마르크를 지불했다. 결혼 계약은 1381년 2월 5일 에식스에 있는 보훔 가문의 사유지인 로치퍼드 힐에서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메리의 누나인 엘리노어는 헨리의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결혼했다.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우드스톡의 토머스는 보훈 가문의 영지 전체를 상속받으려고 메리에게 성 클레어 교단의 수녀가 되라고 설득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이 기록의 신빙성은 분명하지 않으나, 보훈 가문의 자매와 결혼한 삼촌과 조카가 이 가문의 영지 분할을 놓고 서로 논쟁을 벌였던 것은 분명하다.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발발했다. 농민 반란군이 하트퍼트셔에 있는 랭커스터 가문의 거주지를 공격했을 때, 곤트의 존은 스코틀랜드로 피신했고, 헨리는 런던 탑으로 도주했다. 6월 14일, 리처드 2세는 마일 엔드에서 반군 지도자들을 만나 합의를 이루려 했지만, 리처드 2세가 없는 사이에 농민 반란군이 런던 탑으로 진입했다. 탑 수비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반란군에 저항하지 않았고, 탑에 난입한 반란군은 켄터베리 대주교이자 잉글랜드 총리 사이먼 테오발드, 재무장관 로버트 헤일스, 켄트에서 세금 징수를 담당했던 의회 집행관 존 레그 등 여러 장관을 잡은 뒤 타워 힐에서 참수했다. 이때 헨리 역시 위험에 처했지만 사우스크 출신의 농민 존 페루르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훗날 왕위에 오른 헨리는 1400년 1월에 자신에 대한 반란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존 페루르를 사면했다.

1382년, 헨리는 리처드 2세와 보헤미아의 안나의 결혼식을 계기로 조직된 기사 토너먼트에 참가했고, 1383년 11월 곤트의 존과 함께 칼레에서 프랑스 사절단과 만났다. 1384년 아버지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으며, 1385년 곤트의 존이 이끄는 분견대에 가담해 리처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리처드 2세 치세 초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안 이 외에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여러 토너먼트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잉글랜드에서 가장 지치지 않고 경험이 풍부한 기사로 손꼽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헨리와 메리의 결혼식은 메리가 14살이었던 1384년 말에 거행되었을 것이다. 같은 해 12월 22일, 헨리는 아내의 아버지가 소유했던 헤러퍼드와 노샘프턴 백작 칭호를 받았다. 헨리와 메리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헨리는 아내에게 종종 선물을 보냈으며, 둘다 음악과 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나누곤 했다. 이 결혼을 통해 미래의 국왕인 헨리 5세를 포함해 적어도 6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메리는 딸 필리파를 낳은 직후인 1394년에 사망했다.

2.2. 청원파의 일원

1387년 11월, 리처드 2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속하려 하면서 왕권에 간섭하는 강력한 귀족 집단인 청원파의 지도자인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리처드 피츠앨런은 이에 맞서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함께 왕의 눈과 귀를 가리는 총신들을 타도하겠다며 군대를 일으켰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아룬델은 형 토머스 피츠앨런과 왕을 중재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87년 11월 14일, 우드스톡의 토머스, 리처드 피츠앨런, 제12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제5대 모브레이 남작 토머스 모브레이, 그리고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로 구성된 청원파 5인은 마이클 드 라 폴, 아일랜드 공작 로버트 드 베레, 요크 대주교 알렉산더 네빌, 대법원장 로버트 트레실리안, 전임 런던 시장 니콜라스 브렘브레 등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을 고발하는 글을 왕의 사절단에게 제출했다. 이에 왕이 보낸 사절들은 왕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영주들을 웨스트민스터로 초대했다.

11월 17일, 청원파는 웨스트민스터 홀 에서 국왕을 만났다. 그들은 군대를 해산하길 거부하고, 왕이 총신들을 체포하고 의회의 심판을 받게 할 것을 요구했다. 왕은 이에 동의하고 1388년 2월 3일에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총신들의 재판을 준비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으며, 의회에 모든 사람에게 불화를 잊을 것을 촉구하는 칙령을 발부했다. 이에 청원파는 왕이 자신들을 속였다고 여기고 군대를 일으켰다.

1387년 12월 19일 옥스퍼드셔의 레드콧 브리지 전투에서, 로버트 드 베레는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이끄는 4,500 병력에게 참패한 뒤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리처드 피츠앨런이 이끄는 반군이 런던에 접근하자, 리처드 2세는 런던 탑으로 피신한 뒤 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양보를 원하지 않았고,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왕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그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1388년 2월 3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열린 의회에서 청원파 5인은 왕의 총신들을 심판했다. 이들은 총 39개의 혐의를 낭독했는데, 그 내용은 왕의 미숙함을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하고, 법을 위반하고, 개인의 부를 위해 영향력을 사용하고, 또한 왕이 국가의 이익을 무시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그 결과 모든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8명이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이때 로버트 드 베레와 로버트 드 라 폴은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브레브레와 트레실리안은 처형되었다. 요크 대주교 알렉산더 네빌은 성직자로서 목숨을 건졌지만 영지와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때 왕의 가정 교사였으며 보헤미아의 안나 여왕에게도 신임받던 기사 사이먼 벌리 역시 권력 남용을 일삼아 몇년 만에 연간 수입이 20파운드에서 3천 파운드로 급증했으며, 부패한 사법 시스템을 만들었고, 심지어 도버를 프랑스에 매각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의회는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뒤 교수척장분지형을 선고했다. 안나 왕비가 사이먼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청원파는 이를 묵살했다. 리처드 2세는 그가 사형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단지 처벌을 간단한 참수형으로 대체하는 선에 그쳤다. 결국 사이먼은 1388년 5월 5일에 양팔에 수갑이 묶인 채 런던 전역을 순회한 뒤 타워 힐에서 참수되었다.

2.3. 프로이센 원정과 예루살렘 순례

청원파는 리처드 2세를 협박해 총신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권세를 쥐었지만, 1388년 8월 5일 스코틀랜드군이 제임스 더글러스의 지휘 아래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해 오터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아들인 헨리 퍼시를 사로잡은 사건이 벌어진 후 위세가 약화되었다. 1389년 5월 3일, 당시 22세였던 리처드 2세는 자신이 이미 성인이 되었으며 젊었을 때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스스로 국가를 통치할 준비가 되었다고 의회에 알렸다. 청원파는 자기들이 전권을 계속 누리기엔 여론이 좋지 않다는 걸 인식하고, 왕이 어느 정도 독립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기로 했다. 다만 리처드 2세는 여전히 윈체스터 주교이자 총리 윌리엄 위컴, 엑서터 주교이자 재무관인 토머스 드 브란팅햄,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 에드먼드 스태퍼드가 주도하는 의회를 통해 나라를 통치해야 했다.

1389년 11월 리처드 2세는 카스티야 원정을 실패한 뒤 아키텐에 있던 삼촌 곤트의 존을 불러들였다. 청원파 역시 정치적 평화를 유지하는 능력을 입증한 그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해 12월 런던에 도착한 존은 귀족들에게 화합을 이루라고 촉구했고,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의 갈등을 스스로 해결해 본보기를 보였다. 리처드 2세 역시 존에게 많은 보조금과 특권을 제공해 삼촌의 뜻을 지지한다는 점을 드러냈다. 또한 존과 그의 형제들의 동의 없이 왕실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칙령이 선포되었다. 이후 정국은 안정되었고, 청원파의 단결력은 약화되었다. 토머스 뷰챔프는 자기 영지로 은퇴했으며, 토머스 모브레이와 브롱브로크의 헨리는 리처드 2세와 화해한 후 그의 지지자가 되었다.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리처드 피츠앨런은 이전의 입장을 이어갔지만, 서로 크고 작은 마찰을 벌였다.

1390년 3~4월 다른 잉글랜드 기사와 함께 칼레 인근 세인트 잉글베르테에서 열린 국제 마상창시합에 참석해 큰 명성을 떨쳤다. 그 후 12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노바 공화국튀니지 십자군에 참석하려 했지만, 이 십자군에 함께 가려던 프랑스 귀족들이 그의 참여 제안을 거부헀다. 이에 헨리는 방향을 바꿔 프로이센으로 가서 튜튼 기사단과 가세한 뒤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상대로 십자군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1390년 7월 2척의 배를 고용하고 32명의 기사와 종자를 대동해 보스턴에서 출항한 뒤 8월 10일 단치히에 상륙했다. 이후 니에멘 강을 따라 이동해 튜튼 기사단과 합류했다. 9월 4일, 십자군은 빌뉴스에 도착하여 인근 요새를 공략했지만 빌뉴스 성채 공략엔 실패했고, 9월 22일 튜튼 기사단 영지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로 철수했다. 헨리는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했다. 1391년 3월 31일 잉글랜드로 귀환한 뒤 4월 30일 헐에 도착했다. 이때 그가 쓴 탐험 비용은 4,360 파운드였으며, 대부분은 아버지 곤트의 존이 제공했다. 그는 이 원정을 통해 튜튼 기사단의 호의적인 평을 받았으며, 군사 경험을 쌓았다.

1392년 7월 24일에 다시 프로이센으로 출발해 8월 10일 단치히에 도착했지만, 쾨니히스베르크로 이동했을 때 튜튼 기사단이 다시 원정을 벌이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헨리는 방향을 바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기로 했다. 9월 22일 50명의 일행과 함께 동유럽 여행을 시작한 그는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프라하에 도착해 안나 왕비의 형제인 바츨라프 4세의 환대를 받았다. 이후 에 도착하여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3세와 헝가리 국왕이자 미래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지기스문트를 접견했으며, 뒤이어 레오벤, 필라흐, 트레비소를 거쳐 12월 1~2일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12월 23일 베네치아에서 출항한 뒤 자라에 도착하여 성탄절을 보낸 후 코르푸, 로도스, 키프로스를 지나 항해를 이어가 1393년 1월 하반기에 야파(Jaffa)에 도착했다.

이후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일주일 이상을 보내며 다양한 성당을 방문하고 제물을 바쳤다. 1월 말에 배를 타고 귀환길에 올라 로도스에 장기간 머물다가 3월 21일 베네치아에 도착해 아버지가 보낸 2,000 마르크를 수령했다. 3월 28일 베네치아에서 출발해 파도바와 베로나를 거쳐 밀라노에 도착한 뒤 밀라노 통치자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환대를 받았다. 이후 몽세니스 고개를 건너 서부 부르고뉴를 거쳐 파리로 이동한 뒤 칼레에 도착했고, 6월 30일 도버, 7월 5일 런던에 도착했다. 이 여정에 총 4,915파운드의 비용이 들었는데, 대부분은 이전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곤트의 존이 제공했다.

2.4. 1393-1397년 행적

헨리는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 정기적으로 의회에 참석했다. 그의 서명은 1393년에서 1398년 사이에 발행된 42개의 왕실 헌장 중 14개에 기재되었다. 1396년 10월, 그는 아버지 곤트의 존 및 다른 귀족들과 함께 리처드 2세의 새 왕비인 프랑스의 이자벨을 아르드레에서 칼레까지 동행했다. 1397년, 리처드 2세가 우드스톡의 토머스, 리처드 피츠앨런, 토머스 뷰챔프 등 3명의 전 청원파를 숙청했을 때, 아버지 곤트의 존은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의 의장으로서 세 사람의 심판을 주관해 모두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때 헨리 역시 왕의 결단에 찬성했는데, 특히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즉각 처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리처드 2세는 숙청을 단행한 뒤 지지자들에게 보상했다. 1397년 9월 29일, 헨리는 헤리퍼드 공작 칭호를 받았으며, 10년전 청원파에 가담한 일에 대해 사면받았다. 또다른 전 청원파였던 토머스 모브레이는 노퍽 공작 칭호를 받았으며, 존 홀랜드는 엑서터 공작, 토머스 홀랜드는 서리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는 오말레 공작 작위를 받았다. 체셔 카운티와 웨일즈의 다른 여러 아룬델 영지는 왕실에 합병되었다. 9월 30일, 의회는 왕의 모든 결정을 승인하고 휴회했다.

리처드 2세가 이렇듯 자신에게 보상해줬지만, 헨리는 리처드 2세가 자신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봐 두려워했고, 왕을 만족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실에 좀더 자주 출두했고 리처드 2세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으며, 의회에서 리처드 2세를 즐겁게 해줄 발언을 골라서 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헨리 역시 잠재적인 숙청 대상으로 간주했다.

2.5. 토머스 모브레이와의 갈등과 추방

1398년 1월,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가 1월 27일 의회가 열리는 슈루즈버리로 가는 길에 매복해 곤트의 존을 죽이려 했다. 존은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수행원을 늘렸고, 토머스 모브레이는 계획을 취소했다. 1월 30일, 헨리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모브레이가 청원파의 반란에 가담한 적이 있었으며, 보복을 두려워해 왕실에 대항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에 리처드 2세는 18명으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를 선임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1398년 4월 29일 윈저 성에서 결성되었고, 그곳에서 헨리와 모브레이가 조우했다. 노퍽 공작은 자신이 청원파에 가담한 일은 이미 왕에게 사면받았는데, 이제와서 왕에 대한 음모를 꾸밀 리 없다며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헨리는 노퍽 공작이 왕에게 나쁜 조언을 제공하고 글로스터 공작을 암살한 것을 포함해 왕국의 많은 문제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결투 재판을 통해 진위를 밝히겠다고 제안했다. 국왕은 이를 받아들였고, 결투 재판은 9월 17일 코벤트리에서 열리기로 했다.

1398년 9월 17일, 잉글랜드 각지에서 몰려든 기사, 시민, 숙녀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투 재판이 열렸다. 대중은 환호로 두 공작을 맞이했다. 이때 왕이 돌연 개입해 지팡이를 던져 결투를 중단하게 했다. 이 재판은 전 유럽의 관심을 받고 있었고, 노퍽 공작이 승리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면 글로스터 공작 살해 문제가 다시 주목받을 것이고, 헨리가 승리하면 자신의 가장 위험한 정적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주는 꼴이 될 것이었다. 왕은 두 공작 모두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노퍽 공작은 평생, 헨리는 10년동안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헨리의 아들이자 상속인인 몬머스의 헨리는 아버지와 동행하는 것이 금지되어 사실상 인질로 남아야 했다. 리처드 2세는 헨리의 해외 망명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1,000마르크를 제공하고 유배 기간 동안 영지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주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1399년 2월 3일 곤트의 존이 레스터 성에서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3월 18일에 편지가 실수로 보내졌다며 철회했다. 곤트의 존은 죽기 전에 왕이 아들을 용서해주고 헨리가 유산을 물려받게 해달라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이를 묵살했고, 랭커스터 가의 영지를 몰수한 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귀족들인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 서리 공작 토머스 홀랜드, 오말레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에게 분배했다. 또한 볼링브로크의 헨리에게 적용된 10년 추방형을 종신 추방형으로 변경했으며, 앞으로 왕에게 대항하려는 모든 시도를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는 칙령을 내렸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왕의 이러한 조치에 심대한 충격을 받았고, 자신들도 언젠가 랭커스터 공작 가문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헨리는 잉글랜드에서 추방된 뒤 파리로 가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와 프랑스 공작들의 영접을 받았고, 호텔 드 클리송에서 지냈다.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결혼을 계획했다. 먼저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조카인 루치아 비스콘티를 고려했고, 그 다음엔 샤를 6세의 조카인 외 여백작 마리 드 베리를 고려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가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를 파견해 헨리의 결혼 계획을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또한 그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계획을 세웠지만, 리처드 2세가 상속권을 박탈하는 바람에 자금 마련이 어려워지면서 무산되었다. 그는 리처드 2세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고, 언젠가 아버지의 유산을 되찾고 리처드 2세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2.6. 반란과 잉글랜드 왕위 등극

당시 프랑스의 권력은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가 쥐고 있었다. 호담공 필리프는 잉글랜드와의 평화를 지지했고, 프랑스 공주 이자벨과 결혼한 리처드 2세와 우호관계를 이어가기를 희망했기에, 헨리가 리처드 2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걸 방지하려 했다. 그러나 1399년 5월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필리프가 파리 밖으로 나간 사이, 필리프의 라이벌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이 그에게 접근했다. 루이 1세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전쟁을 이어가길 희망했고, 헨리를 이용해 잉글랜드를 약화하고 싶었다. 6월 17일, 헨리는 루이 1세 도를레앙과 정식 동맹을 맺었고, "서로의 친구의 친구이자 서로의 적의 적이 될 것"을 맹세했다.

얼마 후,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출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이 때를 틈타 잉글랜드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1399년 6월 말, 헨리는 전임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아들인 토머스 피츠앨런, 전임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아룬델, 곤트의 존과 헨리 부자를 대대로 모신 기사 토머스 아핑햄 및 3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볼로뉴 항에서 3척의 배에 탑승한 뒤 출항했다. 그들은 노스 요크셔의 레이블카로 항해했다. 이 땅은 랭커스터 가문의 소유였기에, 헨리는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헨리는 레이븐스퍼에 상륙한 뒤 자신을 랭커스터 공작이라 칭하며 부당하게 몰수된 영지를 되찾기 위해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이에 랭커스터 가문을 지지하던 귀족 및 기사들이 대거 가담했으며, 잉글랜드 북부의 강력한 거물인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아들 헨리 '핫스퍼' 퍼시, 라비의 네빌 남작 랄프 네빌도 뒤따라 가담했다. 이때 헨리는 돈캐스터에서 자신의 상속 재산, 즉 렝커스터 공국과 보훈의 영지를 반환받는 데 전념할 뿐이며, 다른 것은 노리지 않는다고 서약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이런 서약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며, 훗날 퍼시 가문이 헨리 4세를 가리켜 "위증에 의지한 찬탈자"라고 비난하는 근거로 사용하고자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당시 아일랜드 원정에 착수했다가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으로 고전한 끝에 워터퍼드로 이동해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던 리처드 2세는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자 측근들을 모아놓고 조언을 요청했다. 이때 오말레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가 일부 부대를 육지로 먼저 보내고, 왕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뒤따라 가라고 제안했다. 리처드 2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제3대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의 지휘하에 일부 병력을 노스 웨일즈로 보냈고, 7월 19일에 나머지 군대와 함께 사우스 웨일스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이후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압도적인 병력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리처드 2세와 에드워드는 솔즈베리 백작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했다. 그러나 솔즈베리 백작의 군대는 왕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흩어졌다. 한편, 리처드 2세로부터 호국경에 선임되었던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군대를 일으켜 헨리를 치러 가던 중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해 7월 27일 버클리에서 헨리에게 항복했다.

1399년 8월, 리처드 2세는 군대와 수행원들을 이끌고 콘위 성에 이르렀다. 그는 체스터로 가서 반역자 헨리에 맞설 병력을 모집하려 했지만, 얼마 후 체스터가 8월 11일에 볼링브로크의 헨리에 의해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노리치의 에드워드를 비롯한 리처드 2세의 지지자 다수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에게 넘어갔고, 군대는 흩어졌다. 그는 아일랜드로 후퇴하거나 프랑스로 망명할 수 있는 배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가지 않고 존 홀랜드, 토머스 홀랜드 등 얼마 안 남은 이들과 함께 콘위 성에서 며칠간 머물었다.

이때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토머스 아룬델이 볼링브로크의 헨리에 의해 특사로 선임되어 콘위 성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반란을 일으킨 걸 후회하며, 자신이 받을 자격이 있는 영지를 돌려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리처드 2세 본인이 지지자 5명과 함께 의회에 출두해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살해한 혐의에 대해 답변해야 하며, 왕실 재산은 유지될 거라고 덧붙였다. 리처드 2세는 다소 망설이다가 8월 14일에 성을 떠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 일행은 도중에 헨리 퍼시가 숨겨놓은 병사들에게 체포되었고, 플린트 성으로 끌러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헨리는 리처드 2세가 과거에 저지른 행적을 고려할 때 왕으로 있도록 내버려둔다면 언젠가 복수하려 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여겼다. 그는 9월 말에 리처드 2세를 런던으로 이송해 런던 탑에 가둬놓고 갖은 압력을 가했다. 결국 1399년 9월 29일, 리처드 2세는 많은 증인 앞에서 왕위를 양위하는 조서에 서명한 후 왕관을 땅에 내려놓았다. 9월 30일, 의회는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지시에 따라 리처드 2세가 서명한 명령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요크 대주교 리처드 르 스크루프는 왕의 모든 범죄를 나열한 문서를 낭독하면서, 리처드 2세를 폐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처드 2세는 자신을 변호하고 싶어했지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칼라일 주교 토머스 머크를 비롯한 리처드 2세 지지자들이 왕을 옹호했지만 무시당했다. 결국 리처드 2세의 폐위가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왕좌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한 후 왕으로 선포되었다.

2.7. 헨리 4세의 치세

2.7.1. 왕위 등극과 회유 정책

1399년 10월 6일, 헨리는 의회를 소집했다. 토머스 아룬델은 헨리가 왕좌에 오른 것에 대해 옹호하는 연설을 했는데, 특히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을 억압한 자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에서 지배자들을 몰아낸 성경의 영웅인 유다 마카베오를 헨리와 동일시했다. 의회는 만장일치로 헨리를 왕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했다. 성 에드워드의 축일인 10월 13일, 헨리는 헨리 4세로서 잉글랜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왕위 등극에 대해 도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바로 여기에서 개인적으로 증명하라고 선언했지만, 누구도 그에게 감히 도전하지 않았다.

10월 14일, 헨리 4세는 의회를 개최한 뒤 1397년과 1398년에 리처드 2세가 내린 일련의 결정을 취소하고 1386년 청원파가 주관한 의회의 결정을 복원했다. 10월 15일 12세 또는 13세였던 장남 몬머스의 헨리를 웨일스 왕자, 아키텐 공작, 랭커스터 공작, 퀀월 백작에 선임했다. 10월 16일 리처드 2세의 총신들에 대한 재판에서, 헨리 4세는 관대한 조치를 내렸다. 리처드 2세의 조언자였고 헨리 4세를 추적했던 기사 윌리엄 바곳은 1년간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뒤 1402년부터 다시 의회에 자리잡았다.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는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살해를 묵인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런던 탑에 수감되었지만, 헨리 4세는 누이인 엘리자베스의 청원과 3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보증을 받고 존 몬타구를 석방하기로 했다. 리처드 2세를 끝까지 지지했던 노리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는 리처드 2세 폐위 후 체포된 뒤 런던 탑에 며칠간 억류되었다가 풀려났다.

1399년 10월 23일, 상원은 리처드 2세를 요새화된 장소에 종신 감금하기로 결의했다. 10월 28일, 리처드 2세는 런던 탑에서 요크셔의 폰테프랙트 성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헨리 4세는 '목욕의 기사'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기사단을 창설했다. 목욕 기사단은 입문 전, 신 앞에서 정화의 표시로 목욕을 한 후 사제의 축복을 받았다. 총 46명의 기사가 이 기사단에 포함되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자신의 추종자들을 보안관, 판사, 위원으로 승진시켜 권위를 드높였으며, 토머스 아핑햄 등 랭커스터 가문 가신들을 요직에 앉혔다. 그러면서도 리처드 2세가 임명한 관리들이 이전의 직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 정책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 심각한 음모와 반란에 휘말렸다.

2.7.2. 주현절 음모

1399년 12월 17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장인 윌리엄 드 콜체스터의 집에서 리처드 2세를 복위하기 위한 음모가 논의되었다. 이 음모에는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럼리 남작 랄프 럼리, 칼라일 주교 토머스 머크가 참석했다. 음모자들은 주현절을 축하하기 위해 윈저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석한 헨리 4세와 자식들을 죽이기로 결의했다. 주현절 축제는 성탄절부터 시작해 12일간 이어져 1400년 1월 6일 토너먼트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들은 킹스턴에서 무장부대를 모으고 야밤에 윈저성에 들어간 뒤 1월 6일 토너먼트에 참석한 헨리 4세와 아이들을 모조리 죽인 후 리처드 2세를 복위하기로 했다. 여기에 웨스트요크셔의 폰테프랙트 성에 감금되어 있는 리처드 2세를 빼돌리는 작전도 수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헨리 4세는 런던으로 달려간 뒤 병력을 소집했다. 음모가 발각된 걸 모르고 있던 존 몬타구와 토머스 홀랜드, 존 홀랜드는 기병 400명을 이끌고 윈저 성에 들어갔지만, 헨리 4세와 자식들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급히 도주했다. 존 홀랜드는 플레쉬 성에서 체포된 뒤 1월 16일 아룬델 백작 토머스 피츠앨런의 명령으로 피살되었다. 그의 수급은 플래쉬 성에 전시되었지만, 나중에 미망인의 요청으로 플레쉬에 있는 성당에 시신과 함께 안장되었다.

존 몬타구는 서쪽으로 도주하면서 리처드 2세가 탈출한 뒤 병력을 규합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리처드 2세의 지지자들이 많은 체셔로 가려고 했지만 시런세스터에서 헨리 4세에게 충성하는 집행관이 이끄는 민병대에게 토머스 홀랜드, 럼리 남작 랄프 럼리와 함께 체포되었다. 집행관은 재판을 위해 왕에게 이들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400년 1월 6일 또는 8일에 반란군이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하려고 시도했다가 격퇴되자, 분노한 군중은 죄수들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제5대 버클리 남작 토머스 버클리에게 그들을 처형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한 토머스 버클리는 세 사람을 처형했다. 이들의 수급은 옥스퍼드에 있는 왕에게 전달되었고, 왕의 명령에 따라 런던 브리지에 전시되었다.

헨리 4세는 1400년 1월 12일 옥스퍼드에서 음모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재판을 직접 주재해 22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37명을 용서했다. 이후 폰티프랙트 성에 갇혀 있던 리처드 2세가 사망했다. 리처드 2세의 정확한 사망 날짜와 상황은 불명확하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라파엘 홀린세드는 헨리 4세가 "누구도 자신에게서 '이 살아있는 두려움'을 없애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은 기사 피어스 엑스턴이 리처드 2세를 살해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또다른 연대기에 따르면, 리처드 2세는 자신을 구출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되자 벽을 향해 누운 채 식사를 거부했다가 아사했다고 한다. 일부 출처에서는 그의 사망 날짜가 2월 14일로 기재되었지만, 1400년 1월 29일에 리처드 2세의 죽음이 프랑스 왕실에 알려졌다는 기록도 있다.

리처드 2세의 유해는 그가 살아있다는 소문을 없애려는 의도로 런던으로 옮겨져 이틀간 세인트 폴 대성당에 전시되었고, 나중에 킹스 랭글리에 있는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헨리 5세는 리처드 2세의 유해를 리처드 2세의 첫 왕비인 안나가 묻힌 무덤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옮겼다.

2.7.3. 스코틀랜드 원정

헨리 4세는 통치 초기에 스코틀랜드 왕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북부에 대한 스코틀랜드인들의 습격이 더욱 빈번해지자, 1399년 11월 10일 의회에서 스코틀랜드에게 전쟁을 선포하곘다고 선언했다. 그는 먼저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분위기를 알아보기 위해 대리인을 북쪽으로 파견헀다. 그 결과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이 잉글랜드인이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접했고, 그는 즉시 침공 준비를 시작했다.

1400년 2월, 그는 재무관인 존 노버리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종주권에 대한 권리를 증명하는 일련의 문서를 작성하도록 명령했다. 7월 15일, 헨리 4세는 요청한 문서를 전달받았다. 이 문서는 스코트랜드 국왕 존 발리올에드워드 1세에게 경의를 표하며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확인한 사실을 되새겼으며, 1291년부터 1296년까지 스코틀랜드와 맺은 조약에서 발췌한 내용을 보충하여 잉글래드에 유리하게 해석했다.

1400년 7월, 헨리 4세는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3세에게 자신에게 경의를 표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당국은 협상을 제안했다. 8월 7일, 헨리 4세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자신에게 와서 그들의 영지에 대해 자신에게 경의를 표할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로스세이 공작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200~300명의 잉글랜드 기사와 스코틀랜드 기사가 마상창시합을 벌일 것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헨리 4세의 스코틀랜드 원정 계획은 스코틀랜드의 핵심 귀족 중 한 명인 제10대 던바 및 마치 백작 조지 1세 드 던바의 귀순 이후 가속화되었다. 이보다 앞선 1395년, 조지 1세 드 던바는 자기 딸인 엘리자베스를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3세의 장남으로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인 데이비드 스튜어트와 결혼시키기로 하고 막대한 지참금을 지불했다. 결혼을 허용하는 교황의 명령은 1395년 8월 10일에 발표되었지만, 이들의 결혼식은 교황이 명령이 도착하기 전에 거행되었다. 교황청은 이를 문제 삼고, 1397년 3월 10일 두 사람의 관계를 약혼으로 변경하고 일정 기간 별거 후 결혼을 허락한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후 제3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왕실에 압력을 가하자, 로버트 3세는 데이비드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의 약혼을 파기하고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딸인 마조리 더글러스와 데이비드 스튜어트를 결혼시켰다. 이에 반감을 품은 조지는 1400년 스코틀랜드에 있는 자신의 재산과 로버트 3세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온 가족을 잉글랜드로 이주시킨 뒤 헨리 4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해 6월 28일, 헨리 4세는 서신 특허를 통해 "스코틀랜드 국경의 조지 드 던바 백작과 그의 아내 크리스티나에게" 링컨셔에 있는 소머튼의 영주권을 부여하고 군대를 이끌게 했으며, 연간 100파운드의 금액을 지불하기로 했다.

1400년 8월 13일, 헨리 4세의 군대가 스코틀랜드의 헤딩턴 카운티를 침공했다. 당시 헨리가 동원한 군대는 맨앳암즈 800명, 장궁병 2,000명을 포함해 13,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헨리 4세는 헤딩턴을 공략한 뒤 그곳에 사흘간 머물렀다. 그 후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동부 스코틀랜드 국경과 로디언을 따라 진군하며 여러 수도원을 약탈했다. 8월 17일, 헨리 4세는 에딘버러 북쪽의 리스 마을에 도착한 뒤 로스세이 공작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며칠 후,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 성을 공략했다. 로버트 3세와 그의 궁정은 스코틀랜드 북부 산악지대로 피신했고, 스코틀랜드군은 전면전을 치르지 않고 퇴각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했고,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보급이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웨일즈에서 오와인 글린두르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헨리 4세는 어쩔 수 없이 철수했고, 11월에 스코틀랜드와 휴전 협약을 맺었다. 이후 헨리 4세는 두 번 다시 스코틀랜드 원정을 벌이지 않았다.

2.7.4.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

리처드 2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왕좌를 위협하는 강력한 대귀족들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는데, 이는 웨일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웨일즈는 반자치적인 봉건 국가, 주교령, 샤이어, 왕이 직접 소유하는 토지가 다양하게 섞인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리처드 2세에게 숙청된 이들의 땅이 몰수되어 왕의 지지자들에게 부분적으로 분배되었지만, 다수의 영지는 왕실 직할지가 되었다. 이때 많은 웨일스 사람들이 새로운 왕실 직할지를 대신 관리해주는 대가로 여러 직책과 지위를 획득했고, 이를 토대로 왕실의 신임을 얻어 출세길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잉글랜드의 새 국왕이 되었다. 웨일스인들은 자신들에게 출세길을 열어준 리처드 2세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이 사건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이 1400년 1월 헨리 4세를 암살하고 리처드 2세를 복위하려던 음모가 발각되면서 여러 사람이 숙청되었을 때 웨일스 출신 잉글랜드 궁수 대장이 처형되자, 웨일스 국경 도시인 체스터에서 심각한 소요가 일어났다. 웨일스인들은 이 일을 계기로 헨리 4세가 웨일스인들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으며, 리처드 2세에게 기용되었던 웨일스 귀족들이 모조리 숙청되고 영지를 잃을 거라는 불안감을 품었다.

이 무렵, 웨일스와 잉글랜드의 국경 지대에 속힌 포이스 사이차스의 부유한 지주인 오와인 글린두르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당시 그는 웨일스 주민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던 제3대 루틴의 그레이 남작 레지날드 그레이와 오랜 영지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1399년에는 리처드 2세가 주재한 법정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냈지만, 헨리 4세가 즉위한 뒤 새로운 왕의 추종자였던 레지날드 그레이가 재차 소송을 재기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게다가 레지날드 그레이는 다음 군사 작전을 위해 민병대를 모으라는 왕명을 오와인에게 의도적으로 전달하지 않았다. 오와인이 이 때문에 민병대를 소집하지 않자, 헨리 4세는 오와인을 반역자라고 규탄하고 모든 영지와 작위를 박탈했으며, 그레이 남작에게 반군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와인은 왕에게 서신을 보내 해명하려 했지만, 서신은 모종의 이유로 전달되지 않았다.

결국 이대로는 끝장이라는 걸 직감한 오와인은 1400년 9월 16일 일가족과 성 아삽 교회 학장을 포함한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웨일스 프린스를 자칭했다. 그는 9월 19일 그레이 요새를 공략한 뒤 파괴했으며, 덴바이, 루들란, 플린트, 하워든 및 홀트를 며칠 만에 공략했다. 9월 22일 오스웨스트리를 습격해 심각하게 파괴했으며, 9월 24일 남쪽의 웰시풀을 포함한 포이스의 여러 성채를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앵글시의 튜더 가문은 오와인의 형제인 튜더 압 그루퍼드의 지휘하에 봉기를 일으켰다. 튜터 가문은 앵글시의 저명한 가문이었으며,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 때 참여한 웨일스 궁수 대장 그윌림 압 튜더와 리스 압 튜더가 이 가문 출신일 정도로 리처드 2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곧 오와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스코틀랜드 원정을 한창 벌이고 있던 헨리 4세는 오와인이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군대를 돌려 9월 26일 슈루즈버리에 도착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노스 웨일스 전역으로 이동했지만, 그 과정에서 악천후 속에서 산속에 숨어있던 웨일즈 유격대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고 막심한 피해만 입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0월 15일 병력이 크게 줄어든 채 슈루즈버리 성으로 돌아왔다. 오와인의 반란군이 헨리 4세를 물리치자, 그의 명성은 웨일스 전역에 빠르게 퍼졌다.

1401년, 반란은 웨일스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웨일스 북부와 중부 시골 지역 전체가 오와인을 지지했으며, 북부 전역의 잉글랜드 도시, 성 및 사유지에 끊임없는 습격이 벌어졌다. 심지어 웨일스 남부의 브레콘과 궨트에서도 스스로 "오와인의 아이들"이라 자칭하는 이들의 봉기와 약탈이 벌어졌다. 헨리 4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전선에서 활약한 헨리 '핫스퍼' 퍼시를 웨일스 토벌대 지휘관으로 세웠으며, 14살된 아들 몬머스의 헨리 왕자를 헨리 퍼시의 부관으로 세웠다. 퍼시는 1401년 3월에 반란을 멈춘다면 오와인과 리스, 그윌림 튜더 형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사면하겠다는 내용의 사면령을 반포했다. 이후 리스와 그윌림 형제가 목수로 가장하여 성내로 진입하는 작전을 성사시켜 콘위 성을 공략하자, 헨리 퍼시는 120명의 맨앳암즈와 300명의 궁수를 데리고 콘위 성을 탈환하려 했지만 녹록치 않자 튜더 형제 역시 사면해주는 대가로 5월 말에 콘위 성을 탈환했다. 이후 헨리 퍼시는 반역죄로 기소된 웨일스인 9명을 거세한 후 배를 찢어 내장을 제거하고 산채로 불태우는 형벌을 가해 죽였다.

1401년 6월 중순, 오와인은 장병 400명을 이끌고 플린리몬에서 잉글랜드군 1,500명과 대적했다. 그는 지리를 잘 아는 이점을 제대로 살려 적군을 유인한 후 급습을 가해 적병 200명을 사살하고 생존자들을 생포했다. 이에 헨리 4세는 슈루즈버리와 헤레퍼드 성에서 대규모 병력을 집결한 뒤, 웨일즈 중부로 향했다. 그의 목표는 오와인에게 동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시토 수도회가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것이었다. 며칠 동안 악천후와 오와인 군대의 끊임없는 습격에 시달린 끝에, 헨리 4세는 스트라타 플로리다 수도원에 도착했다. 오랜 고생을 하느라 마음이 무척 상했던 헨리 4세는 이틀 간 공격한 끝에 수도원을 부분적으로 파괴한 뒤 오와인과 동맹을 맺은 것으로 의심되는 수도사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러나 오와인이 대규모 왕실군과 전면전을 벌이길 기피하고 유격전을 끊임없이 구사하자, 헨리 4세는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그의 군대는 장대비로 인해 완전히 젖었고, 갑옷을 입고 잠을 자야 했다. 한 번은 거센 빗줄기로 인해 헨리 4세가 있던 천막이 떠내려가서 헨리 4세가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잉글랜드군은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 채 막심한 피해만 입고 헤리퍼드 성으로 돌아왔다. 1401년 11월 2일, 오와인은 카나본 성을 포위 공격해 거의 함락시킬 뻔했지만, 성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피해가 커지자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반란 토벌을 맡은 헨리 '핫스퍼' 퍼시는 자신이 왕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헨리 4세의 억압적인 정책이 웨일스인들이 반란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만들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협상과 타협 만이 오와인의 반란을 종식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헨리 4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며 강경책을 고수했다. 그는 웨일스에서 잉글랜드의 지배력을 구축하려는 목적으로 새 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웨일스인은 잉글랜드에서 토지를 구입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웨일스에서 공직을 맡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어떠한 이유로도, 심지어 집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휴대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웨일스인 어린이는 잉글랜드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며, 웨일스 사람이 잉글랜드 여성과 결혼하면 엄중한 벌금이 부과되고, 잉글랜드 남성이 웨일스 여성과 결혼하면 어떤 공개 집회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조치를 통해 웨일스인들이 반란에 가담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웨일스인들은 여기에 분노해 오와인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402년 1월, 오와인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장본인인 레지날드 그레이가 루틴에서 오와인의 기습 공격을 받고 사로잡혔다. 루틴 자체는 오와인에게 점령된 뒤 방화로 파괴되었다. 그레이는 1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헨리 4세가 10,000 마르크의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풀려났다. 한편, 오와인은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3세와 아일랜드 지도자들에게 서신을 보내 잉글랜드에 맞서 항전하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1402년 6월, 오와인의 군대는 웨일스 중부의 브린 글라스에서 에드먼드 모티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모티머를 생포했다. 오와인은 큰 몸값을 받고 모티머를 석방하겠다고 제안했고, 모티머의 친구들, 특히 모티머의 누이 엘리자베스의 남편이었던 헨리 '핫스퍼' 퍼시가 몸값을 모집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헨리 4세는 모티머 가문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지 의심해 에드먼드 모티머의 몸값을 지불하길 거부했고, 급기야 에드먼드 모티머의 영지를 압수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드먼드 모티머는 격분해 오와인 편으로 돌아섰다. 1402년 11월 30일, 에드먼드 모티머는 오와인의 딸 카트린과 결혼했다. 이후 그는 리처드 2세의 후계자는 헨리 4세가 아니라 자신의 조카이자 제5대 마치 백작인 에드먼드 모티머라고 선포했다.

오와인은 자신이 가진 힘만으로는 잉글랜드 왕국의 공세를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외세의 도움을 받기를 희망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지배자들을 대상으로 동맹을 요청해 봤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하자, 프랑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웨일스의 성직자인 '젊은 그루퍼드'와 존 핸머를 프랑스로 보내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도와달라고 설득했다. 프랑스 왕실은 잉글랜드 왕국을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웨일스와 프랑스-브르타뉴 연합군이 키드웰리 성을 포위해 수 개월간 공성전을 치렀다. 여기에 스코틀랜드까지 프랑스 왕실의 설득을 따라 오와인을 돕기로 했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략선은 웨일스 주변에서 활동해 여러 잉글랜드 선박을 나포하고 오와인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1403년, 브르타뉴 함대는 영국 해협에서 잉글랜드 함대를 격파하고 저지 섬과 건지 섬, 플리머스 항을 황폐화시켰고, 프랑스 함대는 와이트 섬에 상륙했다. 1404년, 프랑스 함대는 웨일스 병사들을 승선시킨 뒤 잉글랜드 해안을 습격해 다트머스에 불을 지르고 데본을 파괴했다. 한편, 오와인은 1403년에 사우스 웨일스를 습격해 애버개브니, 케얼리언, 우스크, 뉴포트 및 카디프를 심각하게 약탈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헨리 4세는 군대를 재차 파견했지만, 이번에도 오와인의 유격 전술에 휘말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이후 오와인은 서남 방향으로 진군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대다수 마을을 복속시켰으며, 잉글랜드 영지와 성을 모조리 공략하고 파괴했다. 마지막으로 웨일스 남서부에 있는 잉글랜드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카마던 성이 오와인의 맹공을 받고 함락되었고, 뒤이어 글래모건을 황폐화했다.

이제 그의 명성은 웨일스를 넘어 잉글랜드 전역에 퍼졌다. 잉글랜드 왕실 관리들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모든 웨일스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웨일스로 가 오와인에게 가담했으며, 웨일스 노동자와 장인들도 잉글랜드 고용주를 떠나 오와인에 떼를 지어 합류했다고 보고했다. 여기에 그동안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전선에서 여러 전투를 수행했던 웨일스 궁수 수백 명과 숙련된 병사들이 반란에 가담하기 위해 잉글랜드군을 이탈했다. 이 당시 잉글랜드인들은 날씨가 나쁠 때마다 글린두르가 마법을 부리고 있다며 두려워했다. 잉글랜드군은 오와인에게 보복하고자 그의 집을 파괴했고 그의 영지인 글린디프위를 황폐화했지만, 그걸로는 아무런 위안도 얻을 수 없었다.

2.7.5. 퍼시의 반란

헨리 4세 치세 초기, 그의 주요 지지자이자 조언자는 퍼시 가문의 대표자인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아들 헨리 '핫스퍼' 퍼시였다. 헨리 4세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그들에게 두둑이 보상했다.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왕의 수석 고문이자 잉글랜드 무관장, 서부 국경 감시관, 칼라일 종신 성주, 맨 섬의 영지를 부여받았다. 헨리 '핫스퍼' 퍼시는 체스터와 노스웨일스의 판사, 여러 웨일스 성 및 동부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 베릭과 록스보로의 대장을 맡았다. 또한 노섬벌랜드 백작의 형제인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도 왕실 의회에 합류해 잉글랜드 제독을 맡았으며, 프랑스와 협상하는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헨리 4세는 한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는 게 위험하다는 걸 곧 깨달았고, 퍼시 가문의 권세를 줄이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1402년 3월, 헨리 4세는 헨리 '핫스퍼' 퍼시를 대신해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을 록스버러 성의 수비대장으로 선임했다. 이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지나친 권세를 누리는 퍼시 가문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후 노섬벌랜드 백작과 그의 아들은 왕에게 일련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왕이 국경을 지키는 데 필요한 재정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아서 수비가 잘 되고 있지 않다고 불평하는 것이었다. 또한 퍼시 가문은 헨리 4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전념하고 오와인 글린두르와 화해하기를 원했는데, 정작 헨리 4세가 반대로 하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헨리 '핫스퍼' 퍼시의 처남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오와인 글린두르에게 생포되었을 때, 몸값을 지불하려는 것을 막은 헨리 4세의 처사에도 불만을 품었다.

1402년 6월 22일, 조지 던바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헨리 4세의 허락 없이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네스빗 무어 전투에서 패트릭 햅번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해 사령관을 포함한 240명의 스코틀랜드인을 사살했다.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이를 복수하기 위해 9월에 잉글랜드 북부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총사령관을 맡고, 100명이 넘는 남작과 50명의 프랑스 기사를 포함한 대규모 스코틀랜드군이 조성되었다. 당대 연대기에는 40,000명에 달한다고 기술되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7,000 ~ 10,000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헨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창병 12,000명과 궁수 7,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소집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를 별다른 저항 없이 초토화한 뒤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그러다가 호밀돈 언덕에서 헨리 '핫스퍼' 퍼시, 조지 던바, 랄프 그레이스토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가로막혔다. 1402년 9월 14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80명의 스코틀랜드 영주가 생포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포함한 거의 모든 스코틀랜드 사령관과 30명의 프랑스 기사가 있었다. 반면 잉글랜드군은 단 기사 10명만 잃었다고 전해진다. 스코틀랜드 포로들은 북부 잉글랜드의 도시들에 보내졌다. 이때 헨리 4세는 포로가 된 스코틀랜드 남작들을 런던으로 이송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노섬벌랜드 백작이 답했다.
"그들은 왕의 포로가 아니라 백작의 포로입니다."

그러자 헨리 4세는 퍼시 가문이 포로들의 몸값을 받는 것을 금지했고, 이를 어길 시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노섬벌랜드 백작은 포로들을 돌려보냈지만, 더글러스 백작을 포로로 둔 그의 아들 헨리 '핫스퍼' 퍼시는 국왕의 요구를 따르기를 거부했다. 이에 헨리 4세가 연이어 질책하자, 헨리 '핫스퍼' 퍼시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억었다. 1403년 6월 초, 헨리 '핫스퍼' 퍼시는 체스터에서 헨리 4세를 성토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에 대한 반역과 배신을 했다고 비난했으며,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에드먼드 모티머[4]의 법적 권리를 부정하게 박탈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와 글린두르의 포로로 있던 에드먼드 모티머도 호응했으며, 포로로 잡혀 있던 스코틀랜드 영주들도 자유를 얻는 대가로 그와 동맹을 맺었다.

헨리 '핫스퍼' 퍼시는 숙부인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와 함께 슈루즈버리로 행진하면서 오와인 글린두르와 합세하고자 했고, 아버지 헨리 퍼시도 아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1403년 7월 21일 슈루즈버리에서 헨리 4세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와 대면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그는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끝내 전사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햄에 따르면,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적진에 무모하게 침투했다가 피살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앞을 좀더 잘 보기 위해 바이저를 열었다가 얼굴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5]

헨리 '핫스퍼' 퍼시의 유해는 슈롭셔 주 휘트처치로 옮겨져 가매장되었다가, 그가 살아있다는 소문을 불식시키려는 헨리 4세의 명령으로 슈루즈버리의 시장에 두 개의 맷돌 사이에 똑바로 세워져서 전시되었다. 이후 그의 수급은 베어져 요크에 보내져 요크 시의 성문에 박혔고, 몸통은 4등분되어 런던, 뉴캐슬, 브리스톨, 체스터에 별도로 보내졌다가 나중에 미망인인 엘리자베스 모티머에게 전달되었다. 엘리자베스는 1403년 11월에 남편의 유해를 요크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했다.

한편,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아들에게 합세하려고 남하했지만, 도중에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이 이끄는 군대에 가로막혀서 아들과 합세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슈루즈버리 전투 소식을 접하자 급히 워크워스 성으로 피신했다. 이후 상황을 살핀 끝에 모든 게 틀렸다는 걸 깨닫고 남쪽으로 말을 타고 내려가 8월 8일 요크에서 헨리 4세에게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헨리 4세는 그가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으로서의 직위를 박탈하고, 영지 일부를 몰수하며, 워크워스 성에 가택 연금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1404년 2월 6일, 헨리는 왕실 의회에 출석한 뒤 헨리 4세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한 뒤 사면을 요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복권을 이루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으로서의 직책은 영영 돌려받지 못했고, 잉글랜드 무관장 직책도 박탈당했다. 그리고 버윅 성, 제드버러 성과 제드버러 숲을 왕실에 넘겨야 했다. 여기에 안위크, 워크워스, 프라도, 랭글리 성에 왕실 수비대를 배치하는 데 동의해야 했다. 다만 이 4개 성 주민들이 퍼시 가문에게만 충성을 바치겠다며 복종을 거부했기에, 실제로는 수비대가 배치되지 않았다.

2.7.6. 삼자 동맹

헨리 4세가 퍼시 가문의 반란 진압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오와인 글린두르는 할레치를 공략한 뒤 그곳에 궁정을 세우고 '젊은 그루퍼드'를 총리로 선임했다. 또한 마킨레스에서 첫번째 의회를 소집해 웨일스의 귀족들로부터 정식으로 웨일스 왕자로 취임하고 국가 정책을 반포했다. 그는 웨일스를 웨일스 의회와 웨일스 교회가 존재하는 독립국가라고 밝혔고, 웨일스에는 2개의 국립 대학이 있으며, 선한 왕 허우엘 다가 제정했던 법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제 웨일스에 남은 잉글랜드의 세력은 몇 개의 고립된 성, 성벽으로 둘러싸인 몇 개 마을, 요새화된 일부 저택으로 축소되었다.

한편, 오와인은 헨리 4세에게 깊은 복수심을 품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비밀리에 서신을 주고받았다. 1405년 2월, 오와인은 헨리 퍼시, 에드먼드 모티머와 삼자 동맹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오와인은 웨일스 국왕이 되고, 에드먼드 모티머는 잉글랜드 국왕이 되며, 헨리 퍼시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요크 대주교 리처드 스크루프, 잉글랜드 원수 토머스 모브레이, 제5대 바르톨프 남작 토마스 바르돌프도 이 음모에 가담했다.

헨리 퍼시는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이 1405년 5월 초 영지에 머물고 있을 때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랄프 네빌은 사전에 위험을 경고받고 탈출했다. 이후 반란군은 1405년 5월 29일 쉽턴 무어 전투에서 패배했고, 생포된 스크루프 대주교와 모브레이 원수는 처형되었다. 이후 랄프 네빌이 이끄는 왕실군이 북쪽으로 이동하자, 퍼시는 바르톨프 남작 및 헨리 '핫스퍼' 퍼시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헨리 퍼시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헨리 4세는 노섬벌랜드 백작 편에 섰던 몇몇 영주들의 머리를 참수한 뒤 요크 성벽에 전시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의회에서 노섬벌랜드 백작의 모든 영지는 압수되었고, 그의 작위는 회수되었다. 헨리 4세는 스코틀랜드 측에 망명자들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스코틀랜드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헨리를 잘 대접했다.

1405년 3월 11일, 오와인의 형제 튜더 압 그루퍼드가 이끄는 반란군이 그로스몬트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게 참패했고, 튜더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1405년 5월 5일, 푸울 멜린 전투에서 리처드 그레이와 '절름발이 데이비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검은 리스'와 오와인의 아들 그루퍼드가 이끄는 반란군 무리를 물리쳤다. 리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루퍼드는 생포되어 런던 탑으로 보내졌다. 연대기 작가 우스크의 아담에 따르면, 헨리 4세는 푸울 멜린 전투에서 생포된 웨일스인 300명을 우스크 성 앞에서 모두 참수했다고 한다. 란타르남 인근의 시토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었던 존 압 하이웰도 전장에서 죽은 자들을 수습하던 중 잉글랜드 병사에게 사살되었다.

1405년 7월, 장 2세 드 리외가 이끄는 3,000 가량의 기사 및 맨앳암즈로 구성된 프랑스-브르타뉴군이 브레스트를 떠나 웨일스 서부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들은 충분한 식수를 못해 많은 말이 갈증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장 2세 드 리외는 오와인에게 우수한 공성 장비를 제공했고, 오와인은 이를 토대로 헤이버포드웨스트 시를 공략했지만 성채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웨일스-프랑스 연합군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글래머건과 궨트를 통과했고, 뒤이어 헤러퍼드셔를 지나 우스터셔에 도착했다. 이후 그들은 우스터 시에서 10마일 떨어진 그레이트 위틀리에서 헨리 4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마주쳤다. 헨리 4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에버리 힐에 진을 쳤고, 오와인은 이에 맞서 반대편 언덕에 진을 쳤다. 이후 그가 진을 친 언덕은 '오와인 언덕'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다. 양군은 8일간 소규모 접전을 치렀지만 대규모 전투를 벌이지 않다가,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양측 모두 철수했다.

2.7.7. 오와인 글린두르의 쇠락

1406년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평화 조약 체결이 임박하자, 장 2세 드 리외를 비롯한 대부분의 프랑스군은 웨일스에서 철수했다. 이에 다급해진 오와인 그린두르는 웨일스 교회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받들게 할 테니 자신들을 계속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이후 웨일스 반란 진압을 전담한 몬머스의 헨리 왕자는 원정을 감행했다가 오와인의 유격전에 시달리는 대신 웨일스에 대한 경제적 봉쇄를 조직하기로 했다. 그는 웨일스에 잔존한 잉글랜드 성들의 도움을 받으며 반란군의 무역로와 무기 및 식량 공급을 차단했다. 그 결과 1407년에 이르러 웨일스 영주들이 하나둘씩 잉글랜드군에 항복하기 시작했고, 애버리스트위스 성은 1407년 한여름에 몬머스의 헨리가 이끄는잉글랜드군에 포위된 뒤 가을에 함락되었다.

한편, 전임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스코틀랜드에서 잘 대우받았지만, 1406년 말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3세가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던 파이프 백작 머독 스튜어트와 헨리를 교환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자 웨일스로 달아나 오와인 글린두르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게 헨리 4세를 타도하고 에드먼드 모티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할 수 있도록 군대와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시기에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 파 간의 투쟁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그를 도와줄 여유가 없었다.

1407년 말 잉글랜드로 몰래 돌아온 헨리 퍼시는 요크셔의 보안관인 토머스 로크비에게 의지했다. 스코틀랜드 연대기 작가 바워에 따르면, 그는 헨리 4세와의 오랜 투쟁에 지쳐 자신이 사면을 받을 수 있도록 보안관의 도움을 받길 희망했다고 한다. 반면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햄에 따르면, 그는 보안관을 음모에 끌어들이려 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이후의 전개는 동일하다. 1408년 2월, 그와 토머스 바르돌프는 퍼시 가문이 이전에 소유했던 요크셔의 태드캐스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2월 19일 또는 20일, 그들은 태드캐스터 인근의 브래햄 무어에서 요크셔 보안관 토머스 로크비의 지령을 받은 장병들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두 사람의 머리는 베어져 런던 브리지에 공개 전시되었고, 몸통은 4등분 되었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수집된 뒤 요크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1409년, 몬머스의 헨리 왕자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할레치 성을 포위했다. 오와인은 협상을 위해 부하들을 프랑스로 보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젊은 그루퍼드'는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어 잉글랜드에 대항해 군사 행동을 취하도록 설득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결국 할레치 성은 함락되었고, 그 때까지 오와인과 함께 있던 사위 에드먼드 모티머가 전사했다. 에드먼드 모티머의 아내이자 오와인의 딸인 카트린과 두 사람의 자식들은 잉글랜드군에 생포된 뒤 오와인의 아들 그루퍼드가 갇혀 있던 런던 탑으로 투옥되었다.

오와인은 할레치 성에서 노인으로 변장해 겨우 빠져나간 뒤 군대를 재건한 후 1410년 슈롭셔 중심부를 습격했다. 그러나 습격은 격퇴되었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혔다. 이때 오와인의 가장 충성스러운 사령관이었던 '카디건의 검은 리스'가 체포되어 런던으로 이송된 뒤 타이번으로 끌려가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의 유해는 4등분 되어 런던 시의 4개 구역으로 보내졌고, 수급은 런던 브리지에 전시되었다. 1411년 또는 1412년, 필립 스쿠다모어와 리스 압 튜더는 각각 슈루즈버리와 체스터에서 체포되어 참수되었고, 그들의 머리는 도시 입구에 세워졌다. 1412년, 오랜 세월 런던 탑에 감금되었던 오와인의 장남 그루퍼드가 옥사했다.

1412년, 잉글랜드군 장성 '절름발이 데이비드'가 브래컨에서 오와인이 이끄는 웨일스군의 습격으로 생포되었고, 나중에 헨리 4세가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겨우 풀려났다. 이것이 오와인이 잉글랜드군에 목격된 마지막 행적이었다. 1414년 초, 롤라드파 지도자 존 올드캐슬이 해리퍼드셔에서 오와인과 서신을 교환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스노도니아에서 잔여 봉기군을 이끌고 있던 그윌림 압 튜더가 1413년에 체포되어 처형되기도 했지만, 오와인은 1412년 이후로 웨일스 산 속 깊은 곳에 숨은 채 잠자코 지냈다.

2.7.8.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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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12월 런던에서 마누일 2세를 맞이하는 헨리 4세[6]
그의 치세 때 엘섬 팰리스에서 1400년 12월부터 1401년 2월까지 동로마 제국황제 마누일 2세를 맞이한 뒤 함께 마상창시합도 한 적 있는데, 그는 잉글랜드 땅을 밟아본 유일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7]. 헨리 4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마누일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7.9. 말년

헨리 4세는 1408년부터 나병으로 짐작되는 피부병에 걸렸다. 그의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1410년부터 1411년까지 정부 업무에 전혀 관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장남인 몬머스의 헨리가 아버지를 대신해 섭정했고, 아르마냐크파와 내전을 치르던 중이던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을 지원하기 위해 잉글랜드군을 프랑스로 파견했다. 그러나 1411년 병세에서 어느정도 회복한 헨리 4세는 장남 헨리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져 사실상 영국의 통치자가 된 것에 반감을 품었고, 그 대신 차남 토머스를 총애했다. 그는 헨리를 정계에서 퇴출시킨 뒤 1412년 7월 9일에 토머스를 클라렌스 공작에 세우고 중용했다.

토머스 왕자는 아버지를 설득해 1412년 5월 18일 아르마냐크파와 부르주 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이에 따르면, 아르마냐크 파는 잉글랜드로부터 부르고뉴 파에 대적할 자금과 병력을 제공받는 대가로 아키텐에 대한 주권을 헨리 4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1412년 6월 8일 잉글랜드군 사령관에 선임된 토머스는 그해 8월에 4천 또는 8천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아르마냐크파를 돕기 위해 프랑스로 향했다. 그는 코탕탱 판도의 생발라후그에 상륙한 뒤 프랑스 서부를 횡단하며 루아르 강 남쪽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이후 부르주에서 아르마냐크파의 명목상 수장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과 합류했다. 한편, 아르마냐크 지도자들은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고,11월 14일에 체결된 부장세 협약에 따라 21만 에퀴를 잉글랜드에 지불해야 했다. 토머스는 이 원정으로 인해 명성과 이익을 많이 확보했다.

1413년 3월 20일, 중병을 앓던 헨리 4세가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예루살렘 방에서 사망했다. 부르고뉴 연대기 작가 앙게랑 드 몽스트렐레(Enguerrand de Monstrelet)에 따르면, 죽어가는 헨리 4세 옆 소파에 왕관이 놓여 있었는데, 왕의 숨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자 근처에 있던 시종들은 왕이 죽은 줄 알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도착한 몬머스의 헨리 왕자는 왕관을 들고 방을 나갔지만, 얼마 후 시트 밑에서 한숨이 들렸다. 하인들은 실수를 깨닫고 시트를 뒤로 젖혔다. 왕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왕관이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시종들로부터 왕자가 왕관을 가지고 갔다는 말을 듣자, 왕은 아들을 불러 왜 왕관을 가져갔느냐고 물었다. 이에 헨리 왕자가 말했다.
"이 사람들이 왕께서 돌아가셨다고 나에게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장자이고, 당신이 죽은 후에는 당신의 왕국과 왕관이 모두 내 것이었으므로 내가 그것을 차지했습니다."

헨리 4세가 답했다.
"그 왕관은 아직 네 것이 아니다. 내 것도 아니었지만."

헨리 왕자가 말했다.
"저는 아버지처럼 검으로 왕국을 지키겠습니다."

헨리 4세가 답했다.
"그렇게 해라. 나머지는 하느님에게 맡길 것이다. 그 분이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해다오."

그후 헨리 4세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훗날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시대극 <헨리 4세>에서 이 이야기를 차용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신빙성이 높지 않다고 본다. 헨리 4세의 유해는 전임 국왕들과는 달리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아니라 캔터베리 대성당에 묻혔다. 훗날 그의 두번째 아내인 나바라의 호아나의 유해도 그와 함께 묻혔다. 헨리 4세의 무덤 옆에는 토머스 베켓의 무덤이 있다.

3. 가족관계

3.1. 아내

파일:메리 드 보훈.webp
  • 메리 드 보훈(Mary de Bohun, 1369 ~ 1394): 제7대 헤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과 제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인 조앤 피츠앨런의 딸. 아버지가 사망한 후 누나 엘리노어와 함께 보훈 가문의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았으며,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결혼한 뒤 적어도 6명의 자식을 낳았다. 1394년 6월 4일 피터버러 성에서 막내딸 필리파를 낳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레스터 뉴어크 성모영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파일:나바라의 호아나.jpg
  • 나바라의 호아나(Juana de Navarra, 1368/1370/1373 ~ 1437):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와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딸인 발루아의 잔의 딸. 1386년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와 결혼해서 장 5세 드 브르타뉴 등 9명의 자녀를 낳았다. 1399년 11월 1일 남편이 사망한 뒤 브르타뉴 공국의 섭정을 맡다가 1403년 2월 헨리 4세와 재혼했다. 그녀는 아름답고 우아하며 위엄이 있다는 호평을 받았지만, 탐욕스럽고 인색했으며, 뇌물을 즐겨 받는다는 악평을 받기도 했다. 헨리 4세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한 뒤 잉글랜드 왕위에 의붓아들 헨리 5세와 한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헀다. 헨리 5세는 1415년 프랑스 원정을 떠나는 동안 그녀가 윈저 성, 윌링퍼드 성, 버크햄스테드 성, 하트퍼드 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헨리 5세가 장 5세의 형제이며 자신의 아들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석방하길 거부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419년 9월, 호아나의 개인 고해신부인 랜돌프가 의회에서 호아나가 헨리 5세를 암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발했다. 이로 인해 호아나의 막대한 재산은 몰수되었고, 그녀는 서식스의 페븐시 성에 투옥되었다가 켄트의 리즈 성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다가 1422년 헨리 5세가 죽기 5주 전에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재산을 돌려받았고, 노팅엄 성에서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헨리 5세
(Henry V)
1386년 9월 16일 1422년 8월 31일 카트린 드 발루아
슬하 1남[8]
2남 클래런스 공작 토머스
(Thomas, Duke of Clarence)
1387년 1421년 3월 22일 마거릿 홀랜드
3남 베드퍼드 공작 존
(John, Duke of Dedford)
1389년 6월 20일 1435년 6월 20일 부르고뉴의 안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4남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
(Humphrey, Duke of Gloucester)
1390년 10월 3일 1447년 2월 23일 에노 여백작 자클린
엘리너 코밤
1녀 팔츠 선제후비 블랜치
(Blanche, Electress Palatine)
1392년 1409년 5월 22일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
슬하 1남
2녀 덴마크와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왕비 필리파
(Philippa, Queen of Denmark and Norway and Sweden)
1394년 1430년 1월 5일 에리크 7세

4. 대중매체에서

  • 헨리 4세는 셰익스피어 사극 4부작 중 무려 2편의 주인공이다. 헨리 4세 1부와 2부로 나뉘기 때문이다.[9]
  • 2010년대에 들어와 BBC에서는 셰익스피어 사극 4부작을 '할로우 크라운(Hollow Crown)'라는 제하로 2차례 구현하였다. 2012년판에서는 제러미 아이언스가 연기하였다.[10] 지속적인 반란에 시달리면서 초췌해지는 연기가 일품. 마지막에는 헨리 5세[11]가 자신이 자는 사이에 왕관을 가져가자 분노하였으나, 이내 아들이 자신이 죽은 줄 알고 그랬다는 것을 알고는 용서하며 왕위를 승계하며[12] 사망한다. 2016년판에서는 톰 스터리지가 연기하였다.
  •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영화 더 킹: 헨리 5세에서 벤 멘델슨이 연기하였다. 해리 퍼시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궁정에서 장남인 헨리 5세에게 왕이 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차남인 토마스 왕자가 전사하자 죽어가면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횡설수설하다가 헨리 5세에게 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1] 험프리 드 보훈의 차녀.[2] 칼마르 연합에리크 7세와 결혼했다.[3] 다만 어릴때 죽지 않고 장성한 자녀들로만 따지자면 곤트의 존은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중에 3남이었고, 헨리는 곤트의 존의 장성한 아들중에 장남이었다.[4]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손자[5] 적장인 헨리 5세도 이 전투에서 얼굴에 화살을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6] 출처: St. Alban's chronicle 245페이지 - https://images.lambethpalacelibrary.org.uk/luna/servlet/detail/LPLIBLPL~17~17~179003~125372?page=244&qvq=&mi=244&trs=266[7] 로마 황제 전체로 치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최초이긴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잉글랜드에 있었을 당시에는 황제가 아니었던데다, 잉글랜드 역시 당시에는 독립국이 아닌 로마 제국브리타니아 속주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테트라키아 시기에 동로마가 아닌 서로마의 정제(正帝)로 처음 즉위했기 때문에, 동로마 황제로서 잉글랜드를 최초로 방문한 사람은 마누일 2세가 맞다.[8] 헨리 6세[9] 영문과에서 학부 졸업을 했으면 셰익스피어 사극 4부작은 알 것이다. <리처드 2세>, <헨리 4세 1부>, <헨리 4세 2부>, 및 <헨리 5세>가 그것이다. 셰익스피어 사극 4부작에는 속하지 않지만 평론가들은 <리처드 3세>도 역사극으로 분류한다.[10] 본인 이야기인 '헨리 4세'에서만. 1화 리처드 2세에서의 젊은 헨리 4세(헨리 볼링브로크)는 007 시리즈빌 태너로 알려진 로리 키니어(Rory Kinnear)가 연기하였다.[11] 톰 히들스턴[12]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왕관)은 아직 네 것이 아니다. 원래 내 것도 아니었지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