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0:59:07

로버트 드 베레(아일랜드 공작)

파일:로버트 드 베레(아일랜드 공작).jpg[1]
성명 로버트 드 베레
Robert de Vere
생몰년도 1362년 1월 16일 ~ 1392년 11월 22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
사망지 브라반트 공국 루뱅
아버지 토머스 드 베레
어머니 모드 우퍼드
아내 필리파 드 쿠시, 아그네스 드 론체크로나
직위 옥스퍼드 백작, 아일랜드 공작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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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제9대 옥스퍼드 백작, 아일랜드 공작. 리처드 2세의 총신이었다.

2. 생애

제8대 옥스퍼드 백작 토머스 드 베레와 아일랜드 재판관 랄프 우퍼드의 딸 모드 우퍼드의 외아들이다. 137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옥스퍼드 백작이 되었다. 이후 쿠시의 영주 앙게랑 7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장녀 이사벨라의 딸인 필리파 드 쿠시와 약혼했고, 1376년 10월 5일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1377년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리처드 2세에 의해 시종관에 선임되었고, 그의 총애를 받았다. 두 사람이 어찌나 친밀한 관계를 이어갔는지, 일각에서는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1385년 리처드 2세에 의해 더블린 후작으로 선임되었으며, 1386년 아일랜드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로써 그는 그로스몬트의 헨리에 이어 잉글랜드의 왕족 출신이 아닌 공작이 되었다. 이에 잉글랜드 왕족 및 대귀족들은 그에 대한 왕의 총애가 너무 과하다고 여겼다. 여기에 더해, 리처드 2세는 그와 서퍽 백작이자 대법관 마이클 드 라 폴, 가터 기사단의 기사이자 리처드 2세의 가정교사였던 사이먼 벌리를 무척 총애했고, 이들에게 국정 전반을 맡겼다. 이에 많은 잉글랜드 대귀족들이 자신들의 입장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세 사람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며 불만을 품었다.

1387년, 로버트는 리처드 2세의 왕비인 보헤미아의 안나의 시녀인 아그네스 드 론체크로나와 불륜을 맺은 끝에 필리파와 이혼을 감행하고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필리파의 삼촌이었던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그의 이 처사에 분노했고, 귀족들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하지만 리처드 2세는 그를 지지했고, 교황청에 거짓 증거를 보내 그와 필리파간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게 해줬다.

1387년 11월, 리처드 2세는 프랑스와 전쟁을 지속하려 하면서 왕권에 간섭하는 강력한 귀족 집단인 청원파의 지도자 리처드 피츠앨런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로버트 베레는 이에 호응해 아일랜드에서 4,000 병력을 규합한 뒤 런던으로 진군했다. 이에 리처드 피츠앨런과 우드스톡의 토머스,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군대를 일으켜 맞섰다. 1387년 12월 19일 옥스퍼드셔의 레드콧 브리지 전투에서, 그는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이끄는 4,500 병력에게 참패한 뒤 해외로 망명했다.

1388년, 청원파는 의회를 조직한 뒤 리처드 2세의 눈과 귀를 가려 국정을 엉망으로 이끈 죄를 적용해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이때 그는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모든 직위와 토지, 재산이 몰수되었다. 그 후 브라반트 공국의 중심지인 루뱅으로 가서 곤궁하게 지내다가, 1392년 멧돼지 사냥 중에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

3년 후인 1395년 11월 22일 리처드 2세의 지시로 그의 유해를 방부 처리한 뒤 잉글랜드로 가져와서 고향에 매장했다.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햄에 따르면, 많은 대귀족들은 그에 대한 증오심을 해소하지 못해 매장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리처드 2세는 관을 열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본 뒤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두 번 결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숙부인 오브리 드 베레가 10대 옥스퍼드 백작이 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공작과 더블린 후작은 단절되었다.


[1] 장 프루아사르 연대기 삽화, 레드콧 브리지 전투 후 도주하는 아일랜드 공작 로버트 드 베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