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목욕(沐浴, bath, [모굑], [mogjok̚])은 위생, 미용, 오락, 종교 등 여러 이유로 머리를 감고(沐) 신체를 씻는(浴) 행위를 말한다.2. 특징
인간의 피부는 본질적으로 친수성이 매우 높은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고, 털로 덮인 다른 동물들에 비해 노폐물에 쉽게 노출되었기 때문에 태초부터 물로 신체를 씻는 행위로 외부 오염에 대처해 왔다. 고대부터 동서양 모두 지하수가 흐르는 곳에 우물을 마을 단위로 설치해 이용했고 이를 이용해 목욕이 가능했다. 집안이 좋은 곳은 개인 집에도 우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대에는 수도관이 없었기에 강이나 바다가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하수가 없어 우물 조차도 없는 곳이라면 근처 강에서 물을 길러서 사용 해야 했다. 하지만 마을이 형성 된다면 우물은 보통 있다.몸을 깨끗이 하려는 주 목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많지만 휴식 및 즐거움 차원[1] 또는 종교 의식 차원에서[2]에서 하는 경우들도 있다. 필연적으로 나체가 되는 성격상 밖에서 볼 수 없는 욕실에서 개인적으로 하거나, 목욕탕을 이용한다면 기본적으로 남탕과 여탕 구분이 존재한다.
높은 피로 해소와 질병을 보조적으로 치료하는 데에 효과가 있으며, 뜨거운 물은 굳은 근육을 풀어주고 피부의 혈관을 이완시켜 혈액 순환을 촉진한다. 하루를 피곤하게 보냈거나 여행지에서 좀 많이 움직였다 싶을 때 따듯한 욕탕에 몸을 담그면 그 효과가 전신 마사지 못지 않다. 또한 체내 노폐물을 배출시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치질 등 항문 질환이나 각종 부인과 질환, 전립선 질환 등에도 효과가 있다.
일반적으로 머리만 남기고 온 몸을 물에 담그는 목욕이 있지만, 좀 더 실속을 챙기는 하체만 담그는 반신욕, 엉덩이만 담그는 좌욕, 발만 담그는 족욕, 상체를 숙여 등에 찬물을 끼얹는 등목 등 바리에이션이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오래 탕에 들어가 있으면 체력이 떨어지고 탈수 증세가 올 수 있으며, 탕에 들어가 있는 시간은 길어도 30분을 넘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신욕은 20분 정도가 좋다고 한다. 물 온도는 사람마다 기호 차이가 있을 수는 있으나 38도 정도(37도에서 39도)가 좋으며, 40도를 넘어 너무 뜨거울 경우 교감신경계가 자극되기 때문에 심신이 이완되는 효과를 얻기 어렵다.
나이를 먹을수록 목욕에 주의가 필요하다. 갑작스러운 체온 변화에 의해 쇼크로 별세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 독거 노인의 고독사 중에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며 별 건강 문제 없던 고령인이 혼자 목욕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관련사례로 별세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추운날에 주의가 당부된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조건에서 가능한 행위이다. 일본이 중국과 다르게 목욕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쿠로시오 해류와 화산지형으로 인한 온천 덕이다. 반대로 몽골처럼 물이 부족한 스텝, 사막성 기후인 곳에서는 전통으로 금기시 되었다. 물론 도시화로 인한 수도 시설이 잘 갖춰진 현대 도시인들은 꼭 청결이 아니더라도 자주 목욕한다. 단순 기분전환, 미용 등 다양한 이유로 목욕을 한다. 심지어 집이 좁아 욕조가 없어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구고 싶다는 이유로 굳이 목욕탕을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문화마다 다른데, 이슬람교는 반대로 신 앞에서 청결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목욕 문화가 발달해 있다. 이 외에도 기도를 하기 전에 손을 씻을 것을 요구하고, 그것도 안 되면 모래로 씻을 것을 강조한다.
이란에는 67년동안 목욕하지 않은, '가장 더러운' 사람도 있었다. 오랜 기간 목욕을 하지 않았음에도 건강상 문제가 없던 이 남성은 아모 하지라는 애칭이 있으며, 주민의 설득 끝에 목욕을 하고 난 뒤 자신의 집에서 조용히 숨졌다고. 기사. 이에 "청결함이 오히려 그를 병들게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부분은 2022년 12월 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일본의 유명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목욕을 극도로 싫어해서 거의 하는 법이 없었고, 어쩌다가 하더라도 목욕탕에 수건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아쿠타가와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법철학자 츠네토 쿄가 본인의 수기 <옛 친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旧友芥川龍之介)>에서 증언하기를, 수건을 가져가지 않았던 이유가 뭐였는고 하니 하도 목욕을 안 하는 탓에 수건 가져가는 것을 까먹어서였다고.
3. 국가별 목욕 문화
3.1. 인류는 언제부터 목욕했는가?
인류 역사에서 오래 전부터 목욕 문화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으며 현대에는 물과 비누로 몸을 씻는 것이 가장 흔하고 일반적인 방법인데, 진흙이나 우유, 심지어 원유로 하는 경우도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같은 목욕이라도 문화권마다 형태와 방식이 다르다. 특히 중국을 제외한 동아시아 나라들이 유럽보다 목욕 문화가 대체로 발달했다. 이는 아랍 국가들도 마찬가지.3.2. 동아시아
3.2.1. 한국
고구려에서는 사람들이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에서는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샘에서 씻기자 온 몸에서 빛살을 뿜었다는 신화가 전해짐과 동시에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조에서는 익선이 죄를 짓고 도망가자 대신 그 아들을 연못에서 목욕하게 해 죄를 면하게 한 일화가 나온다. 이러한 점을 보아 특히 박혁거세 신화는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오래 전부터 씻는 행위에 상징적인 의미까지 부여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불교가 큰 비중을 차지한 고려에서도 몸을 깨끗이 해야만 마음도 깨끗해진다는 종교적인 의미까지 더해졌다.
舊史載, 高麗其俗皆潔淨, 至今猶然. 每笑中國人多垢膩. 故晨起, 必先沐浴而後出戶, 夏月日再浴. 多在溪流中, 男女無別, 悉委衣冠於岸, 而沿流褻露, 不以爲怪. 浣濯衣服, 湅涗絲麻, 皆婦女從事, 雖晝夜服勤, 不敢告勞. 鑿井汲水, 多近川爲之. 上作鹿盧, 輸水於槽, 槽形, 頗如舟云.
옛 사서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3]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후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흐르는 시냇물에 많이 모여 남녀 구별 없이 모두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이 흐르는 것을 따라 속옷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의복을 빨고 명주나 삼(麻)을 표백하는 것은 다 부녀자의 일인데, 밤낮으로 일해도 힘들다고 하지 않는다. 우물을 파고 물을 긷는 것은 대개 내(川) 가까운 데서 한다. 위에 도르래를 걸고 물통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데, 그 물통은 배(舟) 모양과 비슷하다.
고려도경 23권 출처
옛 사서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3]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후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흐르는 시냇물에 많이 모여 남녀 구별 없이 모두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이 흐르는 것을 따라 속옷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의복을 빨고 명주나 삼(麻)을 표백하는 것은 다 부녀자의 일인데, 밤낮으로 일해도 힘들다고 하지 않는다. 우물을 파고 물을 긷는 것은 대개 내(川) 가까운 데서 한다. 위에 도르래를 걸고 물통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데, 그 물통은 배(舟) 모양과 비슷하다.
고려도경 23권 출처
대중화된 풍속으로 자리 잡은 목욕문화
사전적 의미의 '목욕'은 머리를 감으며 온몸을 씻는 것이고, '목욕재계'는 제사를 지내거나 신성한 의식을 행할 때 목욕해서 몸을 깨끗이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부정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
신라시대는 목욕재계를 계율로 삼는 불교가 전해지면서 목욕이 습관화되었으며,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죄수에게 목욕벌을 내리기도 했다. 삼국과 고려의 불교가 목욕재계를 율법으로 정하면서 주술적 수단이었던 목욕이 진일보했다. 불교가 국교로 부흥하면서 우리민족의 목욕문화는 더욱 성행하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에 대중화된 풍속으로 자리 잡은 목욕문화는 백제왕이 불상, 경전을 일본에 보내면서 함께 전파되었으며 불교가 발전한 통일신라시대에 증기욕이 발달되면서 더욱 확대되어 일본에 전파되기도 했다. 이는『先ぅ風俗史』라는 일본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 한증탕이 일본 서민들의 공동탕으로 지방에 널리 퍼졌다는 일본의 목욕풍속이 기록되어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목욕문화는 고려시대 서민들의 생활양식으로 전승되어 대중화되었다. 그동안 주술의 수단이었던 목욕은 고려시대부터 질병치료 및 예방의학의 개념이 정립되었으며,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내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온천의 치료효과에 관한 고려인들의 목욕문화를 엿볼 수 있다. 또 『고려사절요』에는 역대 왕들은 온천행차를 즐겼으며 병이 난 신하에게 온천욕을 권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선조의 목욕문화 - 문화재청
불교가 크게 융성하던 시대에는 절마다 욕조가 있고 사람들은 자기가 평소에 다니는 절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서는 숭유억불을 했다고는 하지만 피부에 좋다며 남아를 복숭아 꽃물로 씻긴 기록이나 쌀겨, 조두 등을 비누 처럼 거품을 내어 사용한 기록[4]과 수세미로 만든 일종의 목욕용 기구들과 전하는 이름들을 볼 때 비록 종교적인 의미는 사라졌더라도 씻는 것 자체는 꾸준히 행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대의 찜질방과 비슷한 유형인 한증욕(한증막)이 존재했으며[5] 글과 그림으로 많이 묘사된 탁족[6]이나 신윤복의 단오풍정 등을 볼 때 개울이나 강가 등 노천에서 씻는 행위를 즐긴 경우도 많았던 듯 하다. 다만 고려 때는 속옷이 드러날 정도로 옷을 벗고 씻었지만 조선 때는 유교의 영향인지 알몸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서 목욕용 옷을 따로 입고 씻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사전적 의미의 '목욕'은 머리를 감으며 온몸을 씻는 것이고, '목욕재계'는 제사를 지내거나 신성한 의식을 행할 때 목욕해서 몸을 깨끗이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부정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
신라시대는 목욕재계를 계율로 삼는 불교가 전해지면서 목욕이 습관화되었으며,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죄수에게 목욕벌을 내리기도 했다. 삼국과 고려의 불교가 목욕재계를 율법으로 정하면서 주술적 수단이었던 목욕이 진일보했다. 불교가 국교로 부흥하면서 우리민족의 목욕문화는 더욱 성행하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에 대중화된 풍속으로 자리 잡은 목욕문화는 백제왕이 불상, 경전을 일본에 보내면서 함께 전파되었으며 불교가 발전한 통일신라시대에 증기욕이 발달되면서 더욱 확대되어 일본에 전파되기도 했다. 이는『先ぅ風俗史』라는 일본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 한증탕이 일본 서민들의 공동탕으로 지방에 널리 퍼졌다는 일본의 목욕풍속이 기록되어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목욕문화는 고려시대 서민들의 생활양식으로 전승되어 대중화되었다. 그동안 주술의 수단이었던 목욕은 고려시대부터 질병치료 및 예방의학의 개념이 정립되었으며,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내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온천의 치료효과에 관한 고려인들의 목욕문화를 엿볼 수 있다. 또 『고려사절요』에는 역대 왕들은 온천행차를 즐겼으며 병이 난 신하에게 온천욕을 권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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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유교사상 '알몸전신욕' 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로 간주
조선 시대로 오면서 유교사상을 중시하는 종교적 환경의 변화로 목욕문화가 변화를 맞게 된다.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남녀의 혼욕과 알몸 노출목욕을 불온한 행위로 간주하여 황실이나 양반들은 목욕전용 옷을 걸치고 전신욕을 하였다. 이때부터 집에서 옷을 입은 채, 겨우 함지박과 대야를 이용한 수준의 부분 목욕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시대 목욕풍속은 성문화를 퇴폐시하는 유교사상이긴 하지만 청결을 중시하여 부분목욕문화가 발달한 시기이다.
조선 시대에는 개별가옥에 목욕탕이 별도로 없었으며 왕실에서도 세수간 나인이 목욕물을 별도로 준비해 올렸다. 궁안과 양반가의 부분목욕문화는 상이하지 않았다. 조선의 부분욕은 낯씻기, 손씻기, 발씻기, 뒷물, 이닦기, 머리감기로 구분된다. 하루에 꼭 하는 부분욕으로 세수, 이닦기, 뒷물이 있다. 수시로 하는 것은 손, 발씻기이다.
조선의 목욕풍속이 부분목욕이다 보니 전신욕은 연례행사로 별도 행해졌는데, 그 시기는 음력 3월 3일, 5월 5일, 6월 15일, 7월 7일, 7월 15일 등(늦봄에서 늦여름)이다.
우리 선조의 목욕문화 - 문화재청
왕실이나 민간에서 한반도 내의 온천지[7]로 온천욕을 다녀오는 일이 자주 있었으며 온양에는 행궁을 설치했을 정도이다. 당시 온천욕은 휴식을 취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의료적인 측면도 컷기에 1617년 정구(鄭逑)가 남긴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을 보면 당시 동래 온양 온천의 온정원(溫井院)을 찾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당시에도 이미 온양 온천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 잡지 못 해 수차례 개축하였으며 이는 1766년 부산 온양 온천에 세운 온정개건비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이 온정개건비 앞에 있는 석조(石槽)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당시의 욕조 유물이다. 봉산욕행록 등 당시 기록을 보면 나무 욕조도 같이 쓴 듯 하다.조선 시대로 오면서 유교사상을 중시하는 종교적 환경의 변화로 목욕문화가 변화를 맞게 된다.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남녀의 혼욕과 알몸 노출목욕을 불온한 행위로 간주하여 황실이나 양반들은 목욕전용 옷을 걸치고 전신욕을 하였다. 이때부터 집에서 옷을 입은 채, 겨우 함지박과 대야를 이용한 수준의 부분 목욕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시대 목욕풍속은 성문화를 퇴폐시하는 유교사상이긴 하지만 청결을 중시하여 부분목욕문화가 발달한 시기이다.
조선 시대에는 개별가옥에 목욕탕이 별도로 없었으며 왕실에서도 세수간 나인이 목욕물을 별도로 준비해 올렸다. 궁안과 양반가의 부분목욕문화는 상이하지 않았다. 조선의 부분욕은 낯씻기, 손씻기, 발씻기, 뒷물, 이닦기, 머리감기로 구분된다. 하루에 꼭 하는 부분욕으로 세수, 이닦기, 뒷물이 있다. 수시로 하는 것은 손, 발씻기이다.
조선의 목욕풍속이 부분목욕이다 보니 전신욕은 연례행사로 별도 행해졌는데, 그 시기는 음력 3월 3일, 5월 5일, 6월 15일, 7월 7일, 7월 15일 등(늦봄에서 늦여름)이다.
우리 선조의 목욕문화 - 문화재청
귀족계급에게 국한, 서민과는 별개의 목욕풍속
우리 민족 복식풍속이 버선을 신는 것이어서 발가락 사이 때가 끼는 것을 방지하는 목적으로, 궁안을 중심으로 귀족계급에게만 별개의 미용목욕 개념이 발달하였다. 그 방법은 자연에서 얻은 식물의 잎, 줄기, 열매, 뿌리줄 등을 중탕하여 목욕물에 섞어 입욕하는 미용탕으로, 대표적인 것은 인삼잎을 달여 넣은 인삼탕과 찐마늘을 목면망에 담아 식초를 함께 섞어 마늘탕을 즐겼다. 보편적으로 효과적인 미용탕인 난탕은 몸에서 은은한 향내를 나게 하는데 효과적이어서 혼례를 앞둔 상류층 신부에게 즐겨 행하는 탕요법이다.
고려, 조선의 역대 왕들은 온천욕을 즐겼는데 황해도 평산군에 있는 평산온천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살펴보면 태조, 세종, 세조가 온양온천에 머무르며 목욕하고 유숙하였다고 한다.
치료를 위한 전신욕, 온천욕과 한증욕
한증욕이란 흙, 바위를 소재로 불로 달군 후, 멍석, 가마니를 깔고 눕거나 앉아 땀을 내는 방식으로 현대의 불가마가 한증법의 유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방의 특색에 따라 바위, 흙의 성분이 다르기 때문에 한증방법은 같지만 약효는 차이가 있었다. 한증욕 풍습은 그 후에도 산야초(감나무순, 밤나무순 등)를 끓여 수증기를 쬐는 방식으로 발달하였으며 현대의 스팀미용법의 유래로 볼 수 있다.
우리 선조의 목욕문화 - 문화재청
현대의 목욕은 따뜻한 온탕에 들어가 몇 분간 때를 불리고 이태리 타올 등으로 몸을 문질러 피부 노폐물을 제거한다. 대중목욕탕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공용으로 탕을 쓰기 때문에 먼저 몸을 깨끗이 씻고 탕에 들어가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상식적으로도 땀과 각종 노폐물이 묻어있을 수 있는 맨 몸 그대로 공용탕을 들어가는 것은 상당히 배려가 부족한 행위이다.우리 민족 복식풍속이 버선을 신는 것이어서 발가락 사이 때가 끼는 것을 방지하는 목적으로, 궁안을 중심으로 귀족계급에게만 별개의 미용목욕 개념이 발달하였다. 그 방법은 자연에서 얻은 식물의 잎, 줄기, 열매, 뿌리줄 등을 중탕하여 목욕물에 섞어 입욕하는 미용탕으로, 대표적인 것은 인삼잎을 달여 넣은 인삼탕과 찐마늘을 목면망에 담아 식초를 함께 섞어 마늘탕을 즐겼다. 보편적으로 효과적인 미용탕인 난탕은 몸에서 은은한 향내를 나게 하는데 효과적이어서 혼례를 앞둔 상류층 신부에게 즐겨 행하는 탕요법이다.
고려, 조선의 역대 왕들은 온천욕을 즐겼는데 황해도 평산군에 있는 평산온천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살펴보면 태조, 세종, 세조가 온양온천에 머무르며 목욕하고 유숙하였다고 한다.
치료를 위한 전신욕, 온천욕과 한증욕
한증욕이란 흙, 바위를 소재로 불로 달군 후, 멍석, 가마니를 깔고 눕거나 앉아 땀을 내는 방식으로 현대의 불가마가 한증법의 유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방의 특색에 따라 바위, 흙의 성분이 다르기 때문에 한증방법은 같지만 약효는 차이가 있었다. 한증욕 풍습은 그 후에도 산야초(감나무순, 밤나무순 등)를 끓여 수증기를 쬐는 방식으로 발달하였으며 현대의 스팀미용법의 유래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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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때 미는 문화가 그리 오래되진 않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때를 밀려면 몸을 따뜻한, 보통은 뜨거운 물에 충분히 불려야 하는데, 겨울에는 말할 것도 없고 여름 시기에 조차 그런데 쓸 땔감이 있는 집은 거의 없었다. 역시 이 행위가 문화라고 불릴 정도로 널리 퍼진 건 아마도 대중목욕탕이 생기고 난 후일 것이다.
현대 가정에서는 간편한 샤워 기구를 기본으로 구비해 놓는 집구조가 많고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이 들기도 하는 목욕보다 간편하고 빠르게 할 수 있는 샤워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비누 등으로 몸을 닦은 뒤 물로 씻어내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피부과 의사들이 조언하기도 한다. 해외에서는 때를 밀고 나면 피부가 부드러워진다고 해서 한국식 때밀이가 미용법의 한 종류로 소개되고 있다.
한국 목욕탕에서는 때를 전문적으로 밀어주는 목욕관리사가 따로 있다. 등만 밀 경우, 전신을 다 밀 경우, 경략 마사지도 같이 할 경우 각각 가격이 다르며 시간이 꽤 걸리므로 예약은 필수다.
2000년대 TV 광고에서 거품 목욕이 언급되었다. 여성 출연자가 욕조에 입욕제를 넣고 거품을 내는 건데, 광고는 이를 고품격 생활로 묘사했다.
목욕하는 횟수도 각각 집안 스타일마다, 개인마다 다 다른데 일주일에 한 번씩 샤워하는 남성이 아내와 샤워 횟수로 다퉜다고 하소연하자 누리꾼들이 경악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주일에 1번은 다들 너무하다고 생각한 듯.
3.2.2. 일본
お風呂(おふろ)일본의 전통 관습으로 한번 물을 데워 준비한 탕을 물을 한 번 쓰고 버리는 게 아니라, 한 집 식구가 모두 목욕을 마칠 때까지 버리지 않고 쓴다. 물을 계속 갈아주는 것에 비해서는 위생적으로 좋지는 않지만, 그 대신 이미 채워진 물을 다시 데워주는 장치가 내장된 욕조가 흔하기 때문에 물이 식는 일은 거의 없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일본에서의 욕조에 들어갈 때는 무조건 씻고 들어가기 때문에 비위생적이라는 생각이 없다. 동일하게 물을 돌려 쓰는 한국의 대중목욕탕을 한국인 입장에서 더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다.
온천이나 목욕탕에서 남이 들어간 탕에도 들어가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별 거부감 없이 가정에서도 이렇게 쓴다. 위생 문제에 대한 염려 때문에 목욕탕에서처럼 물을 소독하는 소독제도 출시되어 팔리고 있다.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목욕하는 순서는 만약 손님이 있다면 접대의 관습에 따라 손님 먼저→아버지(가장)→아들→어머니→딸 순서로 욕조를 사용한다. 처음이자 가장 깨끗한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손님이나 집안 가장이어야 하기 때문이고, 과거에는 일본도 과거의 한국처럼 남아 선호 사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엔 손님이 나중에 씻는 경우도 있는지 만화 5등분의 신부에서 주인공 우에스기 후타로가 나카노 자매의 집에 묵으면서 목욕을 할 때 "미소녀들이 쓰고 난 물을 만끽하는 모양"이라는 언급이 있다. 이 경우 집주인인 나카노 자매들이 먼저 쓰고 그다음 우에스기가 썼어야 말이 된다.
하지만 20세기 말 무렵부터 점차 사춘기 자녀들이 반발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저출산으로 가구당 자녀 수도 줄고 가정 내에서 부부의 관계가 변화하며 사라져가는 풍습이다. 그래도 순서만 바뀐 채[8] 이렇게 가족이 같은 물에서 목욕하는 집도 제법 있다. 이런 풍습의 경우에는 전통시대에는 물을 받는다고 목욕물을 날라오는 것이 고역이기 때문이라면, 현대에는 가족 모두를 위해 매번 목욕물을 받는 것은 수도 요금 부담과 시간 소모가 크기 때문에 현실적인 타협책이다.
이렇게 목욕물을 돌려 쓰는 대신, 입욕하기 전에 샤워처럼 전신을 깨끗이 씻고서 입욕하는 경우가 많다. 전신을 한번 씻고 나서 입욕하는 것 자체는 현대에도 여러 나라에서 행하는 목욕 문화이다. 여러 사람이 쓰는 목욕탕과 수영장에서도 물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한 번 씻어주는 것을 매너로 여긴다. 고여있는 물을 많은 사람이 함께 쓰기 때문이다. 그 뒤에 탕에 몇 분 들어가있다가 나오는 식. 보일러로 물을 데우는 게 더 오래 걸리는 매우 심플한 목욕이다. 기성세대 일본인들에게 목욕은 매일 하는 일과 같은 것인지라 한 사람 목욕이 길어지면 동거인들이 골치 아파진다. 20분만 넘어가도 목욕시간이 길다고 욕을 먹을 수 있으므로 주의.
일본 젊은이들의 경우 한국 젊은이들 처럼 샤워를 더 자주 하므로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 기숙사나 쉐어하우스의 공용 욕실에서 목욕을 할 경우 룸메이트들이 난감해 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외국인이 일본 가정에 홈스테이를 하거나 방문하게 되면 외국에서 온 손님이 가장 먼저 목욕을 하게 배려해 준다. 문제는 젊은 세대 한국인이나 동아시아 이외 지역 출신들의 경우 자국에서 목욕하는 습관대로 목욕한 다음 물을 빼 버려서 주인은 주인대로 당황하고 손님도 주인이 당황한 것을 보고 당황해 했다는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실제 '일본 홈스테이 할 때 하면 안 되는 몇 가지'에 종종 언급되곤 한다.
다만 21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목욕물을 공유하지 않고 매번 물을 가는 집들이 제법 많다. 혹은 매번 갈지는 않더라도 한 두 번 정도는 갈아서 목욕물을 손님이 있다면 손님이 먼저 쓴 후 갈아내고 그 이후 갈아낸 물을 부부가 쓴 후 갈아내고 마지막으로 갈아내 받은 물은 자녀끼리 쓰도록 하는 집들도 있다. 이처럼 목욕물을 쓰는 규칙이 집집마다 다르니 만약 일본인의 가정에 손님으로 가 목욕할 일이 있다면 목욕하기 전에 물어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욕실과 화장실이 같은 공간에 위치한 대한민국과는 달리 둘이 아예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주거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하는데, 전통적으로 일본은 변소와 분리되어 있는 온천이나 주방에서 목욕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9] 근대화 이후에는 화장실과 욕실이 분리되어 있는 영국, 네덜란드 등 북해 문화권의 주택 구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는 욕실과 화장실이 한 방 안에 존재하는 미국식 주택 구조의 영향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샤워보다 목욕에 대한 선호도가 훨씬 강하기 때문에 만약 한국이나 미국처럼 목욕탕과 화장실이 한 공간에 있을 경우 누가 목욕을 하는 동안 아예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 일본도 독신자용 아파트나 기숙사와 같이 소형 주거지의 경우에는 둘을 구분하지 않고 3점식 유닛 배스 시공으로 욕실과 화장실을 한 공간에 배치하고 있다.
일본의 목욕 문화에는 자연 환경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일본 열도는 1년 내내 강수량과 습도가 고른 편이라 언제 어디서나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나무가 금방금방 잘 자라므로 땔감 구하기도 쉬웠다. 그리고 여름에는 일본 열도의 높은 습도와 온도로 인해 땀이 매우 많이 났고, 이 때문에 땀에 젖은 몸을 자주 씻을 필요가 있었다. 또한 화산대에 위치하다 보니 온천을 개발하기가 쉬웠기 때문에 목욕하는 것에 큰 불편이 없었다. 1970년대 이후 지어지는 집들은 규모가 작아도 욕조는 꼭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일본에서도 일본제국 시절의 하꼬방이나 1960년대까지는 임대주택에 욕조가 없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런 집에서 살기 위해 이동식 욕조인 '배스올'(バスオール)이 개발돼서 폭발적으로 유행한 바 있다. 이 이동식 욕조는 대개 부엌 한구석에 설치되었다.
현대 일본인들은 목욕을 하고 나서 우유를 마시는 습관이 있다. 미디어상에는 커피우유가 주로 등장하는데 실제로 많이 찾는 것은 과일맛이라고 한다. 온천 들어갔다 나오면 과일맛 우유 자판기나 아이스크림 자판기가 거의 무조건 있다. 크레용 신짱이나 원피스같은 창작물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현실에서도 그런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한국에서도 목욕 후 바나나 우유가 거의 국룰 대접 받는 것과 비슷하다.
일본에선 욕실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보통 표현하며 한국식 한자인 '목욕(沐浴)'은 일본에서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이는데, 생후 1개월 미만의 신생아를 탕에 담가 씻기는 것을 의미한다.
3.2.3. 중화권
중국인들은 씻고 싶어도 제대로 못 씻는다. 중국은 엄청난 물 부족 국가라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특히 북부는 한국 이상으로 겨울이 매우 건조[10]하고, 물 부족이 매우 심각해서 1일 1목욕이 어렵다. 숙소에서 씻는 건 당연히 무료로 생각하던 외국인들이 중국 대학 기숙사에 가면 샤워실이 유료인 걸 알고 충격받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강수량이 많은 남부는 물 과다여서 빈민층이라도 하루에 3~4번 넘게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는 그냥 맹물로 씻는 정도다. 중국에서는 물을 데우는 기능이 없는 가정들이 많기 때문에 한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이 주로 생각하는 목욕을 하려면 중산층 이상이어야 한다.중국인들이 게을러터지고 더러워서 목욕을 안 하고 다녀 외국인들에게까지 피해를 준다는 편견이 널리 퍼져있으나 실제로는 물 부족 문제가 크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중국인들도 목욕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실제로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이 목욕을 즐긴다고 자신의 책에서 서술하였다. 중국 전역의 온천들 가운데 관광지로 유명한 곳은 휴가철이 되었다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발디딜틈도 없을 정도다. 특히 후이족이나 위구르족은 청결함을 중시하는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중국내 비무슬림 민족들보다 씻는 문화가 발달했다. 단지 물 부족 때문에 그냥 평범하게 씻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을 뿐.
아예 안 씻는 건 아니고, 물을 아끼기 위해 미리 받아 놓는 식으로 한다.
목욕탕은 각 지역별로 어느 정도 보급되어 있으며 낙후된 곳은 가격은 싸지만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곳들도 다수 있는 반면에 어느 정도 괜찮은 곳은 각종 마사지 서비스 및 때밀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찜질방도 갖추어 놓는 등 한국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다.
대만은 일본의 영향으로 일본과 비슷한 목욕 문화가 있기도 하다. 일본 열도 못지않게 비도 진짜 많이 오는데 열대기후와 온대기후의 경계선이기 때문. 연 강수량이 2000mm는 기본, 심지어 3000mm를 찍는 곳도 있다. 대한민국 내에서 따뜻하고 비 많이 오기로 유명한 부산광역시와 제주도도 가오슝시 강수량 앞에서는 밀린다. 부산이나 제주도가 1500mm 찍을 때 가오슝은 1800mm 찍는다. 일본 제국 시기 일본인들이 타이완 섬을 방문해서 거기다가 목욕탕 건물을 설치했고 그 때 그 시절 그대로 건물을 쓰는 곳도 있다. 예를 들면 타이베이 근교 신베이터우 룽나이탕(瀧乃湯).
3.3. 이슬람권
후술하듯이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고대 로마의 유산과 함께 청결을 중시하는 이슬람교의 영향 덕분에 목욕탕이 비교적 온전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슬람에선 목욕을 매우 당연시했고 목욕탕도 알라를 뵙기 전 몸을 씻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에 아랍, 오스만 제국 등 이슬람 나라들에선 제아무리 폭군이라고 해도 적어도 몸을 씻는 목욕탕에서는 야한 짓은 금기시했다. 현대에도 이슬람 성원 앞에 몸을 다 씻진 못해도 손이나 발이라도 씻기 위한 수도 시설이 정비된 곳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이다.3.3.1. 튀르키예
자세한 내용은 목욕탕 문서 참고하십시오.튀르키예식 목욕은 로마 제국 목욕 문화를 이어받은 것으로[11] 유래가 깊으며 사우나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물이 아니라 증기로 몸을 씻는 방식
튀르키예식 목욕탕에서 목욕하는 방법은 아래와 같다. 관광지 목욕탕들도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으니 참고하자.
- 입구에 들어서면 홀이 있다. 여기서 입장료를 지불한다. 자기가 알아서 때를 밀려면 입장료만 지불하면 되고, 때밀이와 마사지까지 하고 싶으면 추가수당을 함께 지불하면 된다. 보통은 선불이며 탈의실 겸 보관함이 있는 방 열쇠를 준다. 해당 방에 들어가서 탈의하고 입구에서 준 페슈테말로 남자는 허리 아래, 여자는 가슴 아래를 둘러 가린다. 비누는 대부분 유료인데 무료로 주는 곳들도 있다.
- 준비를 마치고 하맘 안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코 앞도 안 보일 정도로 가득한 덥고 습한 증기가 맞이할 것이다. 심장이 약한 사람들은 호흡곤란 우려 때문에 애초에 입장을 통제한다. 정중앙에 괴벡 타쉬(Göbek Taşı)라고 불리는 큰 돌이 있고 가장자리에 수도꼭지와 의자들이 있는데 거기서 바가지로 물을 받아서 몸에 흠뻑 끼얹는다. 처음 두른 페슈테말이 젖어도 상관없다. 일행이 있으면 이때 함께 담소를 나누면서 때를 불리는데 보통 30분에서 1시간 정도 동안 때를 불리면 적절하다.
- 때를 민다. 만약에 때밀이 서비스를 요청했다면 이때쯤 때밀이 아저씨/아줌마가 들어올 것이다. 괴벡 타쉬 위에 누워서 때밀이 서비스를 받을 때는 우선 거품으로 온 몸을 마사지하듯이 덮고 때를 미는데 한국의 이태리타월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으로 박박 긁으니 너무 아프면 천천히 하라고 꼭 얘기하자. 중간에 페슈테말을 벗기고 중요 부분까지 다 밀어주는데 그 전에 거품으로 중요부위를 가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만약에 때밀이 서비스를 요구하지 않았다면 때수건으로 알아서 때를 밀자. 등은 일행이나, 역시 혼자 온 사람에게 밀어달라고 부탁하고 자기도 그 사람 등을 밀어주면 된다.
- 때를 다 밀고 미리 마사지 서비스를 요청했다면 그 다음이 마사지 시간이다. 역시 엄청난 위력으로 온몸을 유린하니 괜히 비명지르지 말고 천천히 하라고 얘기하자. 근데 마사지 받을 땐 어마어마하게 아파도 신기하게 피로가 풀리는 걸 볼 수 있다.
- 때밀이와 마사지까지 다 끝났다면 이제 몸을 행굴차례인데, 이건 하맘에서 나와 따로 마련된 샤워실에서 한다. 역시 각 방으로 막혀있는 구조인데 여기서 샤워를 깔끔하게 다 마치고 머리까지 감고 문을 나서면 목욕탕 입구의 홀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서 새 페슈테말과 수건 여러장을 줄 것이다. 이걸로 자기 방에 들어가 몸에 남아있는 물기를 잘 닦고 옷을 입으면 된다. 드라이기도 마련되어 있다.
-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대로 튀르키예식 목욕을 마무리하려면 옷을 입고 개운한 기분으로 입구의 홀에 앉아서 차를 한 잔 마셔야 한다. 이것까지 마쳐야 끝난다. 목욕탕이 굉장히 덥고 습하기 때문에 목욕을 마치고 밖에 나가면 한여름인데도 서늘하게 느껴질 것이다.
3.4. 유럽
의외로 생활의 한 형태로 정착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오해다. 고대 그리스 때는 온천에서 목욕 문화가 생겼다. 기사. 목욕을 자주 하면 건강에 좋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목욕은 일반 석재나 대리석을 사용해 만든 탕에 따듯한 물을 담고, 그 안에 들어가 시녀가 몸을 닦아주고, 목욕이 끝났다면 젖은 몸의 물기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고, 뽀송해진 몸에 기름을 발라줬다. 손님이 목욕을 한다면 시녀 또는 주인집의 딸이 입욕보조원 역할을 했다. 기사. 암흑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호메로스 서사시에도 욕조에 물을 데워 목욕하는 묘사가 여러 번 나오는데, 역시 여성이 목욕을 도와주고 목욕 후에는 몸에 기름을 바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특히 오디세이아에서는 온수 목욕이야말로 문명의 혜택인 것으로 표현된다. 스파르타의 열기욕도 유행했는데 증기탕에서 땀구멍을 열어 노폐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찬물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 끝맺었다고 한다. 목욕을 하면서 몸과 함께 마음도 닦는다는 인식이 있어 전 그리스에 유행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 최초의 공영 공중목욕탕은 기원전 4세기경에 생겼는데, 원래 강이나 바다에서 목욕하던 고대 로마인들은 이를 보고 그리스식 목욕에 매료되어 그리스식 목욕탕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기사. 또한 신체를 단련할 수 있으며 젊은 청년들의 교육을 담당한 시설인 체육관이 생기게 되자, 자연스레 땀을 씻을 수 있는 목욕탕도 같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링크.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할 때 욕조에 들어가자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비중의 개념을 깨달아 알몸으로 뛰어가며 εὕρηκα(대중적으로 유레카라고 알려진)를 외쳤다는 말이 유명하다.고대 로마인들은 그리스식 목욕탕을 만들기 전에는 신체를 나약하게 만든다면서 노예들의 목욕을 금지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목욕 문화가 확산되면서 부유층들은 안 보이고 으슥한 곳이긴 하지만 집에 목욕 시설을 갖추기 시작했고, 수로가 생겨 사람들이 많은 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공공목욕시설이 부흥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에서 로마인에게 목욕은 일상이었고 거대한 대중목욕탕(thermae, 테르메 또는 테르마이)은 황제가 신경쓰는 주요한 공공 시설이었다. 비유하자면 동네 놀이터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심지어 술잔치에 간단한 식사까지 즐기는 곳이었다(…).
문제는 고대 로마의 목욕탕은 위생상태가 대부분 개판이었다는 점. 고대 로마의 목욕탕 유적을 조사하면 거의 변소 수준으로 당대의 기생충과 병균을 찾아낼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목욕을 혐오했는데, 그의 기록에는 올리브유를 바른 사람이 탕에 들어가 올리브유 찌꺼기가 탕에 둥둥 떠다니고, 탕 속에서 때를 밀기도 했고, 변을 보기도 하고, 물을 자주 갈지 않았다고 나온다. 고대 로마의 목욕탕이 더러웠다는 증거는 매우 많은데 반대로 물을 자주 갈아줬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고대 로마의 목욕탕은 질병과 감염의 온상이었을 것이다. 자세한 건 목욕탕 문서 참고.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중세에 들면서도 동로마 제국에서는 여전히 목욕을 즐겼으며, 서유럽 역시 과거 고대 로마 목욕탕의 유산으로 즐겼고, 이 때문에 지명 중 독일어권에는 독일(Baden-Baden(바덴바덴)), 오스트리아(Baden bei Wien(바덴바이빈)), 스위스(Baden bei Zürich)처럼 독일어로 목욕을 뜻하는 바덴(Baden), 영국에는 영어로 목욕을 뜻하는 Bath(바스)라는 도시가 있다. 이슬람 문화권에도 사람들은 계속 목욕을 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서양의 성직자들은 "교회 오기 전에 씻고 오라"고 늘상 말했고, 목욕 자체도 부의 상징이다 보니 수차시설이 발달하면서 마을에 대중목욕탕이 하나씩 생겨났다.
하지만 유럽이 중세 후기로 접어들면서 목욕탕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던 매춘이나 알몸 등이 종교적 윤리에 의해 비판받고, 결정적으로 흑사병 창궐로 공공시설에서 목욕하는 문화가 사라지게 된다. 비슷한 예로 콩키스타도르 침략과 함께 들어온 천연두가 아즈텍 전체에 창궐하는 매개에는 대중목욕탕이 있었다. 몸을 청결하게 씻으면 전염병이 줄지 않는가 싶지만, 현대처럼 소독하는 것도 아니고 깨끗하게 청소도 안 했기 때문. 당대에는 미아즈마(Miasma), 즉 '나쁜 공기(독기)'가 병의 원인이라고 생각되었는데 그 나쁜 공기란 더럽고 뜨듯하고 물기가 많고 냄새가 역한 공기였다. 당시 목욕탕의 공기랑 정확하게 똑같다. 다만 목욕이 무조건 나쁜 것으로 취급된 것은 아니고, 피부병 등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학적 처방으로는 계속 살아남았기 때문에 당시 요양 온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나 여행 온 일부 베토벤의 여인들같이 바덴바이빈 등의 온천에서 목욕한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목욕을 터부시하면서 나는 악취를 없애기 위해 유럽은 상류층을 중심으로 향수 문화가 발달한다. 하지만, 같은 유럽이라도 북유럽과 러시아에서는 사우나 등으로 목욕 문화가 존속되었고,[13] 아이슬란드는 일본처럼 온천이 흔해서 일반인들이라도 목욕하기 수월했다. 남유럽도 가까운 북아프리카 지역은 물론, 대항해시대를 통해 조우하게 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 아시아의 문화적 영향으로 인해, 목욕 문화가 그대로 살아남았다. 일례로 통일 스페인 왕국의 실질적인 시조인 이사벨라 1세 여왕의 경우, 하루에만 네 번이나 목욕을 하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개인 위생을 중요시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영향으로 목욕을 1주일에 3번 꼴로 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이 루틴대로 목욕을 했다가 1주일에 3번 목욕을 한다는 게 너무 사치스럽고 외국스럽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비판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목욕을 격주로 하는 게 상식이었다. 또한 당시 온수 목욕은 하인들이 물을 데워서 양동이에 담아 욕실에 있는 욕조에 채우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영국산 리넨 소재로 목까지 단추가 채워진 얇은 가운을 입은 상태로 욕조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물을 데우고 채우는 데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욕조에 들어갈 때 나체 상태가 아닌 이유는 선술한 조선 시대의 목욕과 비슷하게 맨몸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목욕은 혼자서 하지 않고 주위에 시녀들과 왕비를 보러 온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욕조 안에는 백리향, 마조람, 굵은 소금이 포함된 허브 혼합물이 입욕제로 들어갔다. 또한 조향사가 목욕용으로 만든 아몬드, 잣, 습지아욱 뿌리, 백합 구근을 담은 향주머니를 입욕제로 쓰기도 했다. 목욕을 마친 후에는 침실을 맡은 시녀가 시트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감싸서 몸을 말리게 하고,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슈미즈로 갈아 입고 그 위에 가운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는 것으로 끝냈다. 아침에 목욕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아침식사가 욕실에서 제공되었다. 욕조는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온수용이고 다른 하나는 냉수용이었다. 이 외에도 베르사유 궁전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욕실 뿐만이 아닌 왕의 욕실도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장폴 마라는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면서 서류를 읽다가 암살당하기도 했다. 물론 장폴 마라는 본래 남유럽과 가까운 스위스 태생이긴 했다. 게다가 피부병 때문에 목욕을 자주 해야하는 체질인 것도 한몫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으로도 유명한 사건이다.
이후 19세기 초 산업 혁명의 시기에 가서, 뜨뜻하고 깨끗한 물로 씻으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경험적 지식이 퍼지자, 도시권들이 대대적으로 상수 시설을 재정비하고 공중목욕탕과 비누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과밀한 도시로 인해 노동자들에게서 퍼지는 전염병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가정은 매일하는 목욕이 사치였다. 당시 가정은 대부분 한 건물에 여러 가구가 북적북적 모여 사는 시스템이었고,[14] 각 가정에는 욕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중 특히 1875년 이전에 지어진, Two-up two-down 형태의 집에 사는 각 가정은 욕실이 없어 부엌 싱크대에서 씻거나, 일주일에 한 번 부엌이나 벽난로 앞에 양철 욕조[15]를 가져다놓은 후 거기에 물을 따로 데운 걸 부은 뒤 안에 들어가 비누로 목욕하고 남은 목욕물은 양동이에 따로 퍼서 버리고 욕조도 방에서 치워야 했다. 링크(일부 한글 번역). 이렇게 산업 혁명 시대의 노동자들은 제대로 씻지 못해서 꼬질꼬질한 몰골을 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당시 영국의 가장 열악한 노동 계급 가정의 상황을 묘사한 글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이 노동 계급 부부는 한 방에 십수 명의 자녀들과 함께 사는데, 집안은 언제나 난로의 연기로 매캐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욕조가 놓여져 있었고 이 욕조에서 가장이 퇴근 후에 목욕을 했다. 아이들은 방 구석의 침구 위에서 얼기설기 누워 잠에 들었고, 식탁도 없었기 때문에 밥은 서서 먹는 일이 많았다."
이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19세기 초엽부터 바닷물로 씻을 수 있는 대중탕이 리버풀의 부둣가에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부둣가의 선원을 위한 시설에 불과했고, 현대적인 의미의 대중목욕탕은 키티 윌킨슨(Kitty Wilkinson)이라는 아일랜드계 이민자 여성에 의해 세워졌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질병의 위험에서 해방되었고, 가난한 자들이나 노동 계급도 얼마든지 더운 물로 씻을 수 있게 되었다. 단, 무료 목욕은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져 목욕탕에서는 몇 펜스라도 돈을 받았다. 기사우리는, 전후에도 욕조에 완전히 앉지 않으면 무릎까지 차오르지 않는 물에서 목욕을 했어요. 당근을 씹으면서 달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부모님에게 전쟁 이전에 대해 말해달라고 조르죠. 그리고 그들이 말해주었던 담배 모양의 초콜릿과 통조림이 아닌 진짜 파인애플에 대해서 생각해보곤 했죠.
영국 작가 수잔 쿠퍼(Susan Cooper)
애거서 크리스티의 전후 작품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자주 언급된다.영국 작가 수잔 쿠퍼(Susan Cooper)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이 사정은 한 때 나아지지 않았다가 1960년대부터 가정집에 욕실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에도 빅토리아 시대 시절 지어진 테라스 하우스 건물에 계속 사는 빈민가의 극빈층은 여전히 목욕을 매일하는 것이 사치였다.
프랑스인들은 현대에도 목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샤워도 질색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특히 오랫동안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 있는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비단 프랑스인들 뿐만 아니라 유럽인 전체가 다 그렇다고 봐도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때도 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때미는 문화는 전세계적으로 그렇게 보편화된 문화는 아니라서, 2010년대 후반에 서구권에서 한류 열풍이 불기 시작하고나서야 미국을 중심으로 조금씩 퍼지는 상황이다. 그 이전에 때미는 문화가 있던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 등 몇 없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제외하면 석회암 지대가 대부분이라 생활용수가 석회수인 경우가 많기 때문. 석회 특성상 수분을 엄청나게 빨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물로 목욕이라도 했다간 피부가 뒤집어지기 십상이다. 물론, 상술했듯이, 남유럽과 북유럽, 동유럽 및 독일 등지는 여전히 목욕 문화가 대중화된 상황이다.
3.5. 미국
미국은 유럽 식민지로 출발한 국가지만 본토랑 다르게 목욕 문화가 발달한 편. 다만 미국도 개척 초기에는 당시 유럽의 목욕 문화가 그대로 들어와서, 보스턴에서는 목욕을 하기 전에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한다는 요상한 법도 있었다.또한 마크 트웨인은 목욕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 말을 남기기도 했다.
미국의 목욕 문화는 19세기 산업화 이후 급격히 발전했다. 워낙 독보적으로 부유했던 미국이다보니, 그 전까지 일반적이던 공동 화장실 등이 사라지고 가정집마다 부엌과 화장실이 딸려 있는 구조의 건축이 시도되었던 것. 이 시대에 인테리어 문화가 급격히 발전되었고, 타일을 사용해 화장실을 위생적으로 유지하는 문화나, 집마다 샤워부스와 욕조를 들이는 문화도 퍼졌다.
거품 목욕을 최초로 대중화시킨 나라가 미국이다. 저 산업화 시대에 고급 호텔 문화도 발전했는데, 호텔에서 서비스하는 거품 목욕이 고급 문화의 상징으로 마케팅되면서 자리잡게 된 것. 다만 거품 목욕 자체는 동아시아인들보다 백인이나 흑인들이 더 많이 하는 편.
특대에는 다민족 국가이다 보니 동아시아의 때를 미는 문화가 미국에 정착해 주에 따라서는 백인들도 때를 밀고는 한다.
3.6. 기타
아마존 같은 정글 지대는 말할 것도 없다. 기온도, 습도도 끔찍하게 높은 탓에 정글지대 주민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강가에서 목욕을 하곤 한다.4. 동물의 목욕
동물들도 스스로 목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일본 노천온천에 들어가 있는 일본원숭이나, 곰[16] 등 여러 야생동물이 기생충이나 병원균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으로 물이나 진흙을 이용해서 목욕한다는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다.
또한 그냥 물을 좋아하는 호랑이, 재규어, 아시아코끼리 등의 동물들은 심심하고 더울때 마다 들락날락 하면서 목욕을 한다.
새들은 날기 위해선 깃털 관리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목욕을 철저하게 한다. 물 목욕은 물론 모래 목욕이나 연기 목욕, 드물게는 몸에 개미들이 기어오르게 해 포름산으로 샤워하는 개미 목욕을 하는 사례가 있다.
돼지 같은 경우 물, 물이 없으면 진흙탕에서 몸을 뒹구면서 몸에 있는 기생충들이나 때를 벗겨낸다. 토끼 같은 경우 모래로 목욕한다고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로 토끼는 목욕을 하지 않고 햄스터나 친칠라의 모래 목욕 습성이 와전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5. 매체
- 가면라이더 리바이스 - 행복탕
- 게게게의 키타로 - 눈알 아버지
꿈빛 파티시엘 - 서로진- 도라에몽 - 신이슬
- 목욕의 신
- 목욕탕집 남자들
- 샤워신
- 여탕보고서
- 온천신
- 테르마이 로마이
- 특수전대 데카레인저 - 코도우 코우메
- 행복 목욕탕
- 후로걸!
- BEASTARS - 하루[17]
6. 언어별 명칭
<colbgcolor=#f5f5f5,#2d2f34> 언어별 명칭 | |||
한국어 | 목욕(沐浴) | ||
한자 | 沐浴(목욕) | ||
독일어 | das Bad(바드), Baden(바덴) | ||
Bod(메노나이트 저지 독일어) | |||
Bod, Båd(오스트로바이에른어) | |||
러시아어 | купание(kupánije, 쿠파니에), мытьё(mytʹjó), ва́нна(vánna), ба́ня(bánja) | ||
스페인어 | baño | ||
bañu(아스투리아스어) | |||
아랍어, 페르시아어 | حمّام(ḥammām, 함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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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1] 거품목욕이나 일본의 온천 문화가 이런 면이 강하다.[2] 힌두교 신자들이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는 것 등.[3] "귀천의 구분 없이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無貴賤之節, 然潔淨自喜.)" 『위서(魏書) 고구려(高句麗)』[4] 애초에 비누의 어원이 이것이다.[5] 한증막이라는 말은 지금도 사우나, 불가마와 비슷한 증기욕 시설을 일컫는 말로서 사용하기도 한다.[6] 개울이나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씻는 김에 풍취를 즐기며 노니는 일종의 피서나 소풍과 비슷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7] 탕정면, 온양, 온천동 등의 지명이 그 흔적이다.[8] 이 경우 아버지→어머니→자녀는 성별 구분 없이 나이 순으로 가는 경우가 많고, 만약 욕조와 욕실 사이즈가 넉넉할 경우 부부→형제/자매와 같이 한 번에 둘씩 씻는 경우도 있다.[9] 근현대에 접어들며 수세식 변소가 보편화 되기 이전에는 만약 변소와 온천 혹은 주방이 지근거리에 있거나 아예 함께 있다면 변소에 의해 온천 혹은 주방이 오염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때문에 전통적으로 목욕이 이뤄지는 장소와 배변이 이뤄지는 장소가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10] 냉대 동계 건조 기후, 스텝, 사막[11] 애초에 튀르키예 서부가 로마 제국 동쪽 변방이자 동로마 제국 중심지였다.[12] 다만 여기서 말하는 때밀이는 한국 목욕문화 처럼 때를 미는 게 아니라 그냥 비누거품 듬뿍 칠한 수건으로 몸을 빡빡 닦는 수준이다.[13] 사우나라는 용어가 핀란드어에서 유래됐다.[14] 대부분 안뜰을 겸한 정사각형의 건물이나 아니면 길거리에 다닥다닥 붙은 2~3층짜리 테라스 하우스(Terraced houses) 형태였다. 특히 백투백 주택(Back-to-back house)이 그렇다.[15] 욕조는 쓰지 않으면 밖에 놔두기도 하는데 바깥에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목욕을 하기 전 거미와 거미줄 등을 치워야 한다.[16] 불곰이 온천을 사용한 사례가 시튼 동물기에 언급된 바 있다.[17] 애니 한정으로 대형동물 사이즈 욕조에서 꽃잎 목욕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