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3:06:24

장폴 마라

<colbgcolor=#000034><colcolor=#fff> 장폴 마라
Jean-Paul Marat
파일:Jean-paul_marat.jpg
본명 장폴 마라
Jean-Paul Marat
출생 1743년 5월 24일
스위스 뇌샤텔주 부드리
사망 1793년 7월 13일 (향년 50세)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직업 과학자, 혁명가, 의사, 철학자
학력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정당

서명
파일:장 폴 마라 서명.svg
1. 개요2. 프랑스 혁명과 행적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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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97px-Jacques-Louis_David_-_Marat_assassinated_-_Google_Art_Project_2.jpg
자크루이 다비드<마라의 죽음> (1793년)
무지는 극단적인 독재가 싹틀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프랑스 혁명 시기 자코뱅혁명가이다. 개인적으로 부르봉 왕조에 격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매우 저돌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 당대에는 왕당파에게는 잔인하고 파렴치한 선동자, 그러나 국민들에게는 따뜻하고 관대한 모습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오늘날에서도 잔혹한 사형집행자와 혁명의 투사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랐다.

2. 프랑스 혁명과 행적

1789년 혁명 이후 "인민의 벗(ĽAmi du Peuple)"[1]이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정치일선에 뛰어들었다. 이 신문은 온통 선동적인 문구로 도배가 되어있으며, 혁명회의에서 "인민의 적에게 줄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귀족과 왕당파를 몽땅 없애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덕분에 프랑스 전 국토에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어오게 된다.

이 무자비한 숙청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인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마라는 1793년 7월 13일 지병인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욕을 하던 중 목욕탕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본인이 살아서 탈출할 생각을 포기하고 저지른 짓이었기 때문에 코르데는 마라를 죽이자마자 현장에서 붙잡혔으며 며칠 후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로 끌려갔다. 마라가 피부병을 앓았던 이유는, 정적들에게 쫓길 당시 도피처로 파리의 하수도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하수도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지내야 했으니 피부병을 앓게 된 것이다. 마라가 앓은 피부병은 가려움증이었는데, 말년에 가려움증이 악화되어 몸에 물집이 생길 정도였다. 가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매우 뜨거운 온수에 미네랄과 각종 약물을 넣은 물로 목욕하는 목욕 치료를 받았으며, 집에 돌아오면 거의 하루종일 욕조에서 지냈다. 마라의 글과 연설이 신랄하고 잔인했던 이유가 이 가려움증으로 인한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2]

마라의 암살 현장은 후에 화가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라는 그림으로 묘사되었다. 암살 당시의 사실을 상당히 왜곡시켜 그려진 그림인데, 예를 들면 마라를 살해한 코르데는 마라의 시신 곁에서 자수했는데 그림에서 묘사하지 않았고, 마라의 심장에 박혀있던 칼을 바닥으로 내렸으며, 마라의 표정을 평온하게 표현해 순교자의 이미지를 조성한 것. 그런 점에서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선전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다비드가 '심하게 부패해서 팔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흉칙한 마라의 시신을 미화해서 그렸다'라는 설이 널리 퍼져있으나, 이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마라는 다른 혁명거물과 달리 인기가 높은 상태에서 암살로 죽었고, 사망 3일 만에 엄숙한 국장을 통해 매장되었으므로 팔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부패한 상황이 아니었다. 다비드는 생전에 마라와 친분이 있었고, 장례위원이었기 때문에, 굳이 부패한 시신을 보고 그려야 할 정도로 정보가 부족하지도 않았다. 사실 사진이 아닌 인물화의 경우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방향으로든 화가의 의도에 의해 보정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고, 이를 따지고 드는 것은 이례적인데, 이정도로 여러 설들이 퍼지는 것 자체가 당대 마라가 얼마나 논쟁적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폴 자크 에이메 보드리의 그림은 다비드의 그림에서 지적된 내용들을 수정하여 그려진 것인데, 보드리는 마라 사후 태어난 인물이므로 역시 사건 현장을 직접 보고 옮겨 그려진 것은 아니다.

그의 시신은 이후 팡테온에 안장되었으나,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팡테온에서 추방되어 생테티엔 뒤 몽 교회에 안장되었고, 이후에 또 이장되었는데 현재 행방은 오리무중이라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한때는 의학자를 지망했으나 앙투안 라부아지에에게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라부아지에가 숙청당하고 1년 후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사형당할 때 개인적인 감정도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비록 그가 초기에 면허없이 의료행위를 하기는 했지만 당대에는 그렇게까지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고[3], 결국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으며[4], 왕족의 후원을 받을 정도로 의사로써의 명성도 꽤 높았다고 한다. 라부아지에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사실이지만, 의학 문제는 아니었다. 마라는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당대 논쟁의 중심이었던 플로지스톤설을 반박하는 실험을 하고는 논문을 써서 아카데미에 제출했다. 문제는 아카데미가 "오오 꽤 참신하네?"라는 반응을 보이자 "아카데미가 인정한 논문이다!"하고 출간해버린 것. 이것이 당대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였던 라부아지에의 신경을 거슬렀고, "인정 못함"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사실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도 없을 뿐더러, 라부아지에의 직업이었던 징세청부업자라는 게 자기 구역에서 재주껏 세금을 뜯어다 일정액의 상납금을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먹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엄청난 원한을 사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고, 따라서 최우선적인 숙청 대상 중 하나였다. 결정적으로 라부아지에가 체포, 구금되어 처형당한 것은 마라가 죽은 다음이었고 다른 징세청부업자들과 함께였다. 오히려 라부아지에는 혁명 초기에 혁명정부와 사이가 나쁘지 않아 미터법 도입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으나, 마라가 암살된 후 공포정치가 펼쳐지자 그 영향으로 숙청당한 것이다. 즉 마라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마라가 죽는 바람에 죽게 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마라는 플로지스톤 관련 논문 다음에는 빛에 대한 논문을 써서 뉴턴에게 도전장을 냈고, 그다음에는 피뢰침과 관련하여 당대 전기에 대한 최고 권위자였던 생 라자르의 이론을 반박하는 논문을 제출한다. 나쁘게 말하면 반항적이고, 좋게 말하면 반권위적이고 실증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과학자로써는 중요한 능력이고, 실제로 마라는 과학자로써도 유능함을 증명했다. 어떻게 보면 프랑스 판 벤자민 프랭클린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기의 지도자들 가운데 과격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코뱅파에서도 그 끝에 가있는 인물이었다. 당통은 온건한 편이었고, 로베스피에르는 귀족들의 무자비한 숙청만은 피하려고 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의외처럼 들리지만, 사실 공포정치가 막을 올린 시점이 바로 마라의 암살 이후다. 오늘날에도 마라에 대한 평가는 "무자비한 사형집행인"과 "혁명 최전선의 투사"로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 페터 바이스의 희곡 "마라/사드"가 마라에 대한 이러한 두 시각을 잘 다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를 암살한 샤를로트 코르데 문서에도 언급되다시피, 비록 왕당파에게는 잔인했지만 서민들에게는 따뜻하고 관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연상되는 이미지와는 달리 당시 대중의 인기는 대단했다.

3. 기타

  •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라를 개인적으로 존경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강구트급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를 마라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사실 스탈린의 취향 외에도 1920년대 소련은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뮌 혁명을 높이 사고 그로부터 교훈을 받은 레닌의 영향으로 프랑스의 혁명정신을 존경하던 면이 있었다. 때문에 마라의 동급 전함인 세바스토폴도 파리 코뮌을 기념하는 의미로 Парижская коммуна(파리시스카야 콤무나)로 개명했다.
  •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 마라의 살인사건을 수사할 수 있다. 정사와 거의 유사하게 진행된다. 따라서 이미 이 사건을 아는 플레이어는 수사를 하지 않아도 범인을 바로 검거할 수 있다.
  • 피터 히스토리아에서도 등장. 역사대로 하수구에 살아서 가려움증이 심한걸 고증했다.

[1] 몽테뉴파를 대변하는, 오늘날의 당 기관지에 가까웠다.[2]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캐나다가 합작하여 제작한 영화 <프랑스 혁명> 중 마라의 암살 장면.(2분경부터)[3] 아이 돌본 경험이 있는 할머니들이 아이들 약처방 하는 정도는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다.[4] 학위를 받은 논문 주제는 성병이었다고 한다.[5] 주인공의 직업은 자살조력자라는 가공의 직업으로서, 자신을 찾아온 의뢰인들이 자살하는 것을 도와준다. 미미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의뢰인도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에게 욕조에서 칼로 심장을 찔려 죽는데, 이 장면이 위의 그림을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