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토머스 모브레이 Thomas Mowbray | |
생몰년도 | 1366년 3월 22일 ~ 1399년 9월 22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엡워스 | |
사망지 |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 |
아버지 | 존 모브레이 | |
어머니 | 엘리자베스 세그레이브 | |
형제 | 존, 엘레노어, 마가렛, 조앤 | |
아내 | 엘리자베스 르 스트레인지, 엘리자베스 피츠앨런 | |
자녀 | 토머스, 마가렛, 존, 이사벨라, 엘리자베스 | |
직위 | 노퍽 공작, 잉글랜드 원수, 가터 기사단 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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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였으며, 청원파의 일원으로서 리처드 2세에 대항했다. 그러나 나중에 리처드 2세의 친위 쿠데타를 도와 청원파의 몰락에 일조했다. 이후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대립한 끝에 결투 재판에 임했다가 리처드 2세에 의해 추방되었고, 베네치아에서 사망했다.2. 생애
1366년 3월 22일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엡워스에서 제4대 모브레이 남작 존 모브레이와 제4대 세그레이브 남작 존 세그레이브의 딸 엘리자베스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존[1], 엘레노어[2], 마가렛[3], 조앤[4]이 있었다. 외할머니인 노퍽의 마가렛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손녀였다.아버지 존 모브레이는 1355년부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기사가 되어 브르타뉴 전선에서 기사로 활동하다가 1368년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하던 중 튀르크족에 의해 피살되었다. 또한 어머니 엘리자베스 세그레이브도 1368년 10월 9일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겨우 2살에 부모를 모두 잃은 그는 에드워드 3세의 후견을 받으며 궁정에서 자랐고, 자신의 친척이자 나이가 비슷했던 리처드 왕자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엄은 리처드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가까운 동료들로부터 술에 탐닉하고 여자를 밝히는 등 나쁜 영향을 받았다고 기술했는데, 이 동료들 중에 토머스도 있었을 것이다.
1383년 2월 15살의 형 존 모브레이가 사망한 후, 그는 모브레이 남작 칭호로서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또한 어머니를 통해 세그레이브 남작이라는 칭호를 물려받았으며, 노퍽, 서퍽, 레스터셔, 워릭셔에 광범위한 영지를 물려받았다. 1377년 절친한 친구였던 리처드 왕자가 리처드 2세로 즉위한 뒤, 그는 본격적으로 출세 가도를 밟았다. 먼저 시종관에 선임되었으며, 1383년 2월 12일에 노팅엄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그해 10월 26일 노팅엄 백작이라는 칭호로서 처음으로 왕실 의회에 소환되었다. 또한 같은 해 존 발리 경이 사망한 뒤 그를 대신해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385년 리처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으며, 그해 6월 30일에 증조부이자 초대 노퍽 백작인 토머스 브라더턴이 맡았던 잉글랜드 원수 작위를 받았다. 1387년 프랑스와 카스티야를 상대하는 해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점차 그를 멀리 했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리처드가 매우 싫어하는 인물인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 엘리자베스 피츠앨런과 결혼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이후 리처드 2세의 먼 친척이었던 제9대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가 토머스를 밀어내고 시종관에 선임된 후 왕의 총애를 받았다.
1387년 11월,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이 권력을 지나치게 남용한다고 여긴 귀족들이 청원파를 결성했다. 토머스의 장인인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 리처드 2세의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제12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 그리고 토머스 등이 이 청원파에 가담했다. 그해 11월 14일, 그들은 서퍽 백작이자 총리인 마이클 드 라 폴,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 요크 대주교 알렉산더 네빌, 대법원장 로버트 트레실리안, 전임 런던 시장 니콜라스 브렘브레 등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을 고발하는 글을 왕의 사절단에게 제출했다. 이에 사절들은 왕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영주들을 웨스트민스터로 초대했다.
11월 17일, 청원파는 웨스트민스터 홀 에서 국왕을 만났다. 그들은 군대를 해산하길 거부하고, 왕이 총신들을 체포하고 의회의 심판을 받게 할 것을 요구했다. 왕은 이에 동의하고 1388년 2월 3일에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총신들의 재판을 준비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으며, 의회에 모든 사람에게 불화를 잊을 것을 촉구하는 칙령을 발부했다. 이에 청원파는 왕이 자신들을 속였다고 여기고 군대를 일으켰다.
12월 19일, 청원파는 레드콧 브리지 전투에서 아일랜드 총독으로 있다가 왕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향하던 로버트 드 베레를 격파했다. 이후 반란군이 런던에 접근하자, 리처드 2세는 런던 탑으로 피신한 뒤 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양보를 원하지 않았고,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왕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그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1388년 2월 3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열린 회의에서, 토머스는 자신과 함께 하는 청원파 인사들과 함께 왕의 총신들을 심판했다. 이들은 총 39개의 혐의를 낭독했는데, 그 내용은 왕의 미숙함을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하고, 법을 위반하고, 개인의 부를 위해 영향력을 사용하고, 또한 왕이 국가의 이익을 무시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그 결과 모든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8명이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1389년 5월 3일, 리처드 2세가 22세의 나이가 되었다. 왕은 자신이 이미 성인이 되었으며, 어렸을 때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의회에 알렸다. 청원파는 리처드 2세가 여전히 의회를 통해 국가를 통치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독립을 얻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1392년경, 청원파는 점차 이전의 단결력을 상실했다. 제12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는 자기 영지로 은퇴했고,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리처드는 이전의 입장을 이어갔지만, 서로 크고 작은 마찰을 벌였다. 토머스와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리처드 2세와 화해한 후 그의 지지자가 되었다. 1391년, 토머스는 칼레 수비대장에 선임되었고, 그해 11월에 칼레에 이어 피카르디, 플란데런, 아르투아의 왕실 보안관을 맡게 되었다. 1394년 3월 노스웨일스의 순회판사로 선임되었고, 2달 후에는 체스터와 플린트의 순회판사로 선임되었다. 그해 9월, 그는 왕실군의 일원으로서 아일랜드에서 군사활동을 벌였다. 1395년에 돌아온 그는 프랑스 주재 잉글랜드 대사에 선임되어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의 오랜 휴전과 리처드 2세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인 발루아의 이자벨간의 결혼에 관해 협상했다. 1396년 10월에는 칼레에서 열린 리처드 2세와 이자벨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1397년 1월, 리처드 2세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잉글랜드 원수직이 그의 후손들에게 세습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이와 동시에, 토머스는 그로버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그해 7월 리처드 2세가 10년간 고대해온 복수를 단행해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 그리고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체포하는 데 일조했으며, 칼레에 이송된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감옥에 가둬놓고 감시했다. 9월 17일에 열린 의회에서, 리처드 피츠앨런은 즉각 처형되었고, 토머스 뷰챔프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리처드 2세에 의해 종신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우드스톡의 토머스는 9월 8일 칼레 감옥에서 피살되었다. 사람들은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리처드 2세의 명령으로 살해되었을 거라 믿었지만, 나중에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죽인 혐의로 기소된 이는 칼레 수비대장을 맡고 있던 토머스였다.
리처드 2세는 자신을 도운 토머스에게 큰 보상을 했다. 1397년 9월 28일 아룬델 가문 영지 일부인 루이스 매너와 서식스, 서리 일대, 그리고 미들랜드에 있는 워릭 가문의 17개 영지를 수여했으며, 9월 29일 초대 노퍽 공작에 선임했다. 이와 동시에, 그의 할머니인 노퍽의 마가렛은 평생 노퍽 공작부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토머스는 1398년 1월 26일 노퍽 공작으로서 의회에 소환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무렵에 곤트의 존과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정적으로 여기고 심한 대립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리처드 2세에게 곤트의 존과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지나치게 많은 영지와 권세를 가지고 있으니 경계하라고 수시로 조언했다.
1398년 1월, 토머스는 1월 27일 의회가 열리는 슈루즈버리로 가는 길에 매복해 존을 죽이려 했다. 곤트의 존을 평소 경계했던 리처드 2세가 이 계획을 승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존은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수행원을 늘렸고, 토머스 모브레이는 계획을 취소했다. 1월 30일, 헨리는 아버지 곤트의 존의 조언에 따라 모브레이가 청원파의 반란에 가담한 적이 있었으며, 보복을 두려워해 왕실에 대항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에 리처드 2세는 18명으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를 선임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1398년 4월 29일 윈저 성에서 결성되었고, 그곳에서 헨리와 모브레이가 조우했다. 노퍽 공작은 자신이 청원파에 가담한 일은 이미 왕에게 사면받았는데, 이제와서 왕에 대한 음모를 꾸밀 리 없다며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헨리는 노퍽 공작이 왕에게 나쁜 조언을 제공하고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암살한 것을 포함해 왕국의 많은 문제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결투 재판을 통해 진위를 밝히겠다고 제안했다. 국왕은 이를 받아들였고, 결투 재판은 9월 17일 코벤트리에서 열리기로 했다.
1398년 9월 17일, 잉글랜드 각지에서 몰려든 기사, 시민, 숙녀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투 재판이 열렸다. 대중은 환호로 두 공작을 맞이했다. 이때 왕이 돌연 개입해 지팡이를 던져 결투를 중단하게 했다. 이 재판은 전 유럽의 관심을 받고 있었고, 노퍽 공작이 승리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면 글로스터 공작 살해 문제가 다시 주목받을 것이고, 헨리가 승리하면 자신의 가장 위험한 정적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주는 꼴이 될 것이었다. 왕은 두 공작 모두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노퍽 공작은 평생, 헨리는 10년동안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토머스의 모든 영지는 칼레의 대장 및 잉글랜드 원수 직위와 함께 몰수되었고, 토머스는 이탈리아로 망명한 뒤 1399년 2월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그해 9월 22일 중세 흑사병으로 사망했고, 베네치아의 성 제임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훗날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헨리 4세로서 왕위에 오른 뒤, 토머스의 장남 토머스가 노퍽 공작 칭호를 제외한 나머지 소유물과 작위를 돌려받았다.
3. 가족
- 엘리자베스 르 스트레인지(1373 ~ 1383): 제6대 블렉미어의 스트레인지 남작 존 르 스트레인지의 딸.
- 엘리자베스 피츠앨런(1366 ~ 1425):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 남편 토머스 모브레이가 추방되어 베네치아에서 사망한 뒤 두 번 더 결혼했다.
- 토머스 모브레이(1385 ~ 1405): 제4대 노퍽 백작, 제2대 노팅엄 백작, 제7대 모브레이 백작, 제8대 세그레이브 남작, 잉글랜드 원수. 1405년 헨리 4세를 모살할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 마가렛 모브레이(1388 ~ 1437년 이후): 기사이자 해군 사령관 로버트 하워드의 부인. 초대 노퍽 공작 존 하워드의 어머니. 이들의 후손은 대대로 노퍽 공작위를 역임했다.
- 존 모브레이(1392 ~ 1432): 제5대 노퍽 백작, 제3대 노팅엄 백작, 제8대 모브레이 남작, 제9대 세그레이브 남작, 잉글랜드 원수. 1425년부터 제2대 노퍽 공작을 역임했다.
- 이사벨라 모브레이(? ~ 1452): 기사 헨리 페러스와 초혼, 초대 버클리 남작 제임스 버클리와 재혼.
- 엘리자베스 모브레이(? ~ 1423년 이후): 제3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