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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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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노르만 왕조 제2대 국왕
윌리엄 2세
William I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illiam_II_of_England.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윌리엄 2세
(William II)
출생 1056년 또는 1060년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사망 1100년 8월 2일 (향년 43-44세 또는 39~41세)
잉글랜드 왕국 햄프셔 뉴 포레스트
재위기간 잉글랜드의 왕
1087년 9월 9일 ~ 1100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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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영어 (William II of England)
고대 노르만어 Williame II
고대 영어 Willelm II
프랑스어 Guillaume II
라틴어 Gulielmus II, Willelmus II
별칭 홍당무
(Rufus/The Red)
아버지 윌리엄 1세
어머니 파일:800px-Blason_Comte-de-Flandre.svg.png 플랑드르의 마틸다
형제 로베르 2세, 리샤르, 헨리 1세 외 6명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1088년 반란과 진압2.3. 전제 정치2.4. 외치2.5. 사망
3. 기타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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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 왕국 노르만 왕조의 2대 왕으로 정복왕 윌리엄 1세삼남으로 태어나 그의 왕위를 이었다. 생몰년도는 1056년경 ~ 1100년 8월 2일, 재위 기간은 1087년 ~ 1100년. 얼굴이 붉었기 때문에 윌리엄 루푸스(라틴어 Rufus, 영어로는 red)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2. 생애

2.1. 초년기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자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윌리엄 1세플랑드르의 마틸다의 셋째 아들이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056년 또는 1060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윌리엄 1세의 두번째 아들인 리샤르는 윌리엄 1세가 사냥하던 중에 조기 사망했기에, 그는 실질적으로는 두번째 아들로 취급되었다. 맘스베리 수도원의 수도자이자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인 맘스베리의 윌리엄(William of Malmesbury, 1080년대 ~ 1142/1143)는 그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땅딸막한 체격에 붉고 긴 금발 머리를 가르고 이마가 열린 채로 남아 있었고, 눈에 반짝이는 반점이 있었으며, 항상 최신 유행의 옷을 입었고, 키는 작지만 놀라울 정도로 힘이 셌고, 배가 약간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웅변 실력이 전혀 없었고, 특히 짜증이 났을 때 말을 더듬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어릴 때부터 용기, 결단력,사냥과 군사 업무에 대한 열정 등에서 형제들 중 가장 두각을 드러냈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그는 켄터베리 대주교 랑프랑크의 지도 아래 자랐다. 그러나 형 로베르와의 사이는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1세기와 12세기 노르망디 수도자이자 역사가 오더릭 바이탈(Orderic Vital, 1075 ~ 1141/1143)에 따르면, 1178년 노르망디의 라글에서 한 가족이 함께 있었을 때, 주사위 놀이를 한창 하다가 지루해진 윌리엄과 헨리 형제는 윅층으로 올라간 뒤 형 로베르를 향해 오줌통을 쏟아부었다. 이에 로베르가 격분해서 형제간의 싸움이 벌어지자, 아버지 윌리엄 1세가 중재했다. 그러나 로베르는 아버지가 두 동생만 두둔한다고 여기고 측근들을 데리고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인 루앙을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아버지의 보복을 피해 플란데런 백국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 일화는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보며, 로베르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충분한 영지를 맡기지 않고 통치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을 거라고 추정한다.

1080년 4월 12일, 윌리엄 1세와 장남 로베르가 화해했다. 윌리엄은 로베르를 상속인으로 확인했고, 로베르는 삼촌인 오돈 드 바이외와 함께 잉글랜드를 통치할 책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1082년, 로베르는 아버지 윌리엄과 권한 배분 문제를 놓고 또 다시 갈등을 벌인 끝에 노르망디를 떠나 프랑스 국왕 피리프 1세의 궁정에 피신했다. 1087년 9월 9일, 윌리엄 1세는 루앙 인근 생제르베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윌리엄 1세는 죽기 직전에 로베르가 노르망디 공국을 갖고, 삼남 윌리엄은 잉글랜드 왕국을 가지며, 막내 헨리는 상당한 자금을 받으라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 후 삼남 윌리엄은 즉시 노르망디를 떠나 잉글랜드 왕국으로 달려간 뒤, 윈체스터의 왕실 재무부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그 후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고 모든 일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조언을 따르겠다고 약속한 끝에, 켄터베리 대주교 랑프랑크의 대관식 집전을 통해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2세로 등극했다.

2.2. 1088년 반란과 진압

윌리엄 2세가 켄터베리 대주교의 주관하에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노르만 귀족들은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양쪽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데 동시에 두 명의 주군을 섬겨야 하는 걸 몹시 껄끄러워했고, 윌리엄 1세 생전에 윌리엄 2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겠다는 언질도 없었는데 갑자기 아버지의 유언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대관식을 갑작스럽게 감행한 처사에 불쾌해 했다. 그들은 1066년 잉글랜드 원정 때 윌리엄 1세의 후계자로서 충성을 서약한 대상인 로베르를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공국의 유일한 군주로 받들기로 마음먹었다.

1087년, 지난날 윌리엄 1세에게 체포되어 5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로베르 2세에게 풀려난 바이외 주고 오돈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는 그 해 크리스마스에 윌리엄 2세의 궁정에 참석한 뒤, 잉글랜드 영지와 켄트 백작이라는 칭호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로베르를 유일한 군주로 받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노섬브리아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 노퍽과 서퍽의 보안관 로저 비고트, 러스터셔와 햄프셔 보안관이자 대지주인 휴 드 그랑메닐, 런던, 미들섹스, 에식스, 하트퍼드셔 보안관이자 런던 탑 순경인 조프루아 드 맨더빌 등과 함께 거사를 모의했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강한 거물 10인 중 윌리엄 드 워렌, 앨런 더 레드, 휴 다브랑슈 만이 윌리엄 2세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고, 슈루즈버리 백작 로저 2세 드 몽고메리를 비롯한 거물 7명은 오돈과 함께 로베르를 받들기로 했다. 로베르 역시 잉글랜드 침공을 위해 함대를 해안지대에 집결했다.

1088년 4월 부활절, 귀족들은 윌리엄 2세의 호출에 응하지 않고 바이외 주교 오돈의 지도하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각자의 성채의 방어력을 강화하면서, 노르망디에서 올 지원군을 기다렸고, 오돈은 런던과 켄터베리 사이에 위치한 로체스터에 군대를 집결했다. 여기에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와 로저 2세 드 몽고메리의 아들들과 함께 노르망디에서 파견된 선봉대가 오돈과 합세했다. 윌리엄 2세는 이에 맞서 런던에서 군대를 소집하면서, 전국에 모든 불공정한 세금을 폐지하고 공정하게 통치할 것이며, 평민들이 숲에서 나무를 베고, 짐승을 사냥하는 걸 허용하겠다고 약속해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 후 윌리엄 2세는 군대를 이끌고 톤브리지를 신속하게 점령했고, 오돈과 오돈의 동생이자 모르탱 백작 로베르가 피신한 펜버시 성을 포위했다. 로베르가 파견한 구원군은 잉글랜드 함대에 의해 차단되었고, 펜버시 수비대는 6주간 공방전을 벌인 끝에 굶주림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뒤이어 로체스터도 함락되자, 반란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했다. 많은 반란군은 목숨을 건졌고, 그 중 많은 이가 윌리엄 2세의 용서를 받고 영지를 누릴 수 있었다. 반면 오돈 주교는 잉글랜드 영지를 몰수당하고 잉글랜드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2.3. 전제 정치

그러나 반란을 진압한 후, 윌리엄 2세가 이전에 했던 약속은 금방 잊혀졌다. 1089년, 윌리엄 2세는 왕실 사냥과 자연 보호 구역 보호에 관한 법률을 크게 강화했다. 이에 농민들은 숲에서 나무를 베고 짐승을 사냥하는 걸 허용하겠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약속을 뒤엎은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주민들에 대한 세금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는 영지 소유자에게 방패금[1]을 도입했으며, 영주가 상속을 받을 때 막대한 구제[2]를 요구했으며, 더럼의 주교이자 왕의 수석 고문인 라눌프 플램바드가 이끄는 소규모 인사들이 왕의 주위에 포진해 정국을 이끌면서, 기존에 정치를 주관했던 대귀족들의 영향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1095년, 윌리엄 2세의 전제 정치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노섬브리아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 외 백작 기욤 드 외, 제2대 클레어 경 길버트 피츠-리처드 등을 앞세워 윌리엄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노르망디에서 로베르 2세를 상대로 밀어붙이던 윌리엄 2세는 급히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반란군이 거점으로 삼은 북부로 진격했다. 반군은 타인머스 성과 뱀버러 성에서 포위된 뒤 몇 달 후 항복했다. 윌리엄 2세는 반란 가담자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내렸다. 그들의 영지와 영주권을 몰수하는 것 외에도 많은 사람이 투옥되거나 처형되었고, 기욤 드 외는 실명형에 처해진 뒤 거세되었다.

한편, 윌리엄 2세는 신앙 문제에 무관심했고, 교회를 이용하여 자금을 확보하고 교황과의 관계를 제한했다. 주교나 대수도원장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구제의 명목으로 윌리엄 2세에게 상당히 많은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공백이 생긴 교구에 새 성직자를 세우길 거부하고 부하를 보내 해당 교구를 관리하면서 수입을 자신에게 바치도록 했다. 그가 사망할 당시 주교 3명과 수도원장 11명의 자리가 공석이었다. 이드머[3]에 따르면, 윌리엄 2세는 심지어 유대교로 개종하는 걸 고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은 윌리엄 2세를 폄하하려는 목적으로 지어진 이야기라고 추정한다.

켄터베리 대주교는 1388년 란프랑크 사망 후 1039년 말까지 공석으로 남았고, 윌리엄 2세는 켄터베리 대주교의 수입을 누렸다. 그러나 1093년 중병에 얼린 윌리엄 2세는 자기가 새로운 대주교를 임명하지 않았기에 천벌받았다고 여기고, 유럽 대륙에서 명망 높은 성직자인 안셀무스를 켄터베리 대주교로 선임하기로 했다. 그러나 안셀무스가 왕이 성직자들을 직접 임명하고 교황과의 연락을 제한하는 등 교회 직무에 간섭하는 걸 강격히 비판하면서 둘의 사이는 틀어졌다. 윌리엄 2세와 왕의 회유를 받은 주교들의 강한 압력에도 안셀무스가 굴하지 않자, 윌리엄 2세는 당시 성직자 서임권 투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맞서던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안설무스를 해임하는 데 동의하면 교황으로 인정하겠다고 권했지만, 우르바노 2세는 안셀무스를 켄터베리 대주교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후 안셀무스는 윌리엄 2세와 여러 차례 충돌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받자 1097년 로마로 향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교황이 그에게 대주교의 망토를 수여하기 위해 소환장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안셀무스는 대주교의 부재를 이용하여 다시 컨테버리 교구의 수입을 빼돌리는 윌리엄 2세가 자기를 해칠 것을 우려해, 윌리엄 2세가 사망할 때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윌리엄 2세에게 파문을 내리려 했지만, 안셀무스는 교황을 설득해 파문을 연기했다.

2.4. 외치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 왕국에 이어 노르망디 공국도 자기 소유로 삼고 싶어했다. 그는 여러 노르망디 귀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막대한 뇌물을 제공했고,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 내 반 로베르 세력을 회유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 결과 1090년 10월 말, 코난 빌라도라는 이름의 유력자가 윌리엄 2세와 손잡은 노르망 기사들을 루앙으로 끌어들였다. 11월 3일, 코난 빌라도의 추종자들은 윌리엄 2세와 손잡은 노르만 기사 레이날드 드 바렌스의 기사단을 루앙에 진입하도록 했다. 뒤이어 로베르 공작에게 충성하는 길베르 드 라들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시민들은 성문을 닫고 거부했다.

한편, 루앙에 있던 로베르 공작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루앙에서 병사를 급히 모은 뒤 레이날드 드 바렌스와 대적했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도시에서 탈출했다.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로베르 백작은 동료들의 조언에 따라 수도를 떠나 센 강 반대편에 있는 노트르담뒤프레 수도원에 들어가서 반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이후 그의 추종자들이 루앙으로 진군해 남쪽 문을 돌파하고 루앙 시내로 쇄도했다. 피비린내 나는 접전 끝에 코난 빌라도가 체포되었고, 탑에서 던져졌다.

1091년 초, 윌리엄 2세가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로베르 공작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필리프 1세는 이에 응해 프랑스군을 이끌고 노르망디로 진군했지만, 도중에 윌리엄 2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철수했다. 이후 로베르 공작과 윌리엄 2세는 서로의 입장차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걸 선호해 무력 대결을 자제했고, 더럼 주교인 기욤 드 생칼레의 중재로 1091년 2월 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캉 평화 협약에 따르면, 양자 중 한 사람을 지지했던 영주들은 몰수되었던 영지를 돌려받으며, 로베르는 노르망디, 팔캉 수도원, 세르부르와 몽에 대한 잉글랜드 국왕의 종주권을 자기 소유물로 삼았고, 헨리 왕자가 로베르 2세에게 3천 파운드를 지불하고 받아낸 코탕탱 반도 영지를 몰수하기로 했다. 여기에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 왕국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받았다. 또한 두 사람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는 데 상호 지원하기로 했으며, 로베르는 윌리엄의 상속자로 지명되고, 윌리엄 역시 로베르의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헨리 왕자는 이 조약에 반발해 몽생미셸 성에서 용병을 끌어모아 농성했지만, 두 형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몇 주간 항전한 끝에 4월에 성이 함락되자 브르타뉴로 망명했다. 또한 지난날 윌리엄 1세와 맞서 싸웠다가 1086년 윌리엄 1세에게 귀순한 뒤 노섬브리아의 소규모 영지를 다스리던 에드거 2세 역시 영지를 몰수당하고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1091년,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3세가 잉글랜드 북부 지역을 습격했다.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돌아온 윌리엄 2세는 곧바로 스코틀랜드 침공군을 조직했지만, 잉글랜드 함대가 폭풍으로 인해 흩어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육군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윌리엄 2세는 말 콜룸 3세에게 헌딩턴 백작령에 속한 잉글랜드 마을 12개를 양도하며, 말 콜룸 3세가 자기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연간 12마르크를 보내기로 했다.

1092년, 윌리엄 2세는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약을 파기하고 칼라일을 접수했으며, 이전에 스코틀랜드의 지배하에 있던 컴브리아를 자신의 소유물로 확보했다. 1093년, 말 콜룸 3세가 노섬브리아를 습격했다가 노섬브리아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의 기습 공격으로 전사했다. 이후 말 콜룸 3세의 동생인 돔날 3세가 스코틀랜드 군주가 되자, 윌리엄 2세는 말 콜룸 3세의 아들들을 왕위에 앉히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를 연이어 침공했다. 1097년, 돔날 3세가 잉글랜드군에 의해 타도되고, 에트가르가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에트가르는 이에 보답하고자 스코틀랜드 남부 로디언에 대한 윌리엄 2세의 주권을 인정했다.

한편, 윌리엄 2세는 웨일즈를 평정하려 했다. 윌리엄 1세 치세 말기, 루들란의 로버트가 이끄는 체스터 변경백국의 노르만 남작들은 북웨일즈 깊숙이 진군해 앵글시 시까지 도달했다. 1090년대 초, 로저 2세 드 몽고메리를 비롯한 웨일스 국경지대의 잉글랜드 영주들은 세레디젼, 핌브로크셔, 글래모건, 및 브렉녹 일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1094년, 포이스의 왕 카드완 압 블레딘(Cadwgan ap Bleddyn, 1051 ~ 1111)과 귀네드의 왕 그리퍼드 압 커난(Gruffydd ap Cynan, ? ~ 1137)이 이끄는 농민군이 침략자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잉글랜드-노르만 남작들은 펨브로크 주변의 조그마한 지형과 궨트 및 글래모건의 일부 국경 지대를 제외하고 웨일즈에서 축출되었다.

1095년 윌리엄 2세는 웨일즈 반란군을 평정하기 위해 그곳으로 출진했다. 웨일즈인들은 적이 접근하자 산속에 숨었고, 식량이 부족한 영국군은 지역 주민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큰 손실을 입고 패퇴했다. 1097년에 재차 원정이 감행되었지만 이번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98년, 체스터 백작 휴 다브랑슈와 슈루즈베리 백작 휴 드 몽고메리가 귀네드 왕국을 침공했지만, 그리퍼드 압 커난이 노르웨이 국왕 망누스 3세가 보내준 원군과 함께 앵글시에서 이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13세기 중반까지 소규모 원정을 제외하고는 노스웨일즈를 정복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1096년,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가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로 했다. 윌리엄 2세는 그에게 군자금로 쓸 10,000 마르크를 빌려주는 대가로 노르망디 공국을 3년간 대리 통치하기로 했다. 윌리엄 2세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주들에게 각 하이다[4]에 4 실링의 세금을 부과했다. 대출 자금이 확보된 뒤 로베르 2세는 예루살렘으로 갔고, 윌리엄 2세는 노르망디의 임시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질서를 회복하고 반항적인 남작들을 진정시켜서 중앙 정부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백상을 공략하기 위한 1097~1098년의 일련의 원정은 프랑스 국왕 루이 6세가 요새화한 성채에 가로막히면서 실패했고, 단지 기조르 요새를 건설하는 데 그쳤다. 대신 윌리엄 2세의 멘 원정은 성공적이었다. 1097년 멘 백작 엘리 1세 드 보젠시를 생포했고, 멘 전역을 통제하에 두었다. 그러나 1098년 앙주 백작 풀크 4세의 지원을 받은 반 노르만 세력이 봉기를 일으켰고, 윌리엄 2세의 치세가 끝날 무렵 멘 백국이 도로 독립했다.

2.5. 사망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eath_of_William_Rufus.jpg
윌리엄 2세의 죽음. 알퐁스 드 뇌빌 作. 1895년

맘스베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윌리엄 2세는 1100년 8월 2일 귀족들과 함께 햄프셔의 뉴 포레스트로 사냥을 갔다. 그들이 사냥감을 추격하는 동안 신하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고, 윌리엄 2세는 측근인 월터 티렐과 함께 홀로 남겨졌다. 두 사람은 저녁에 사슴을 만났다. 윌리엄 2세는 사슴을 향해 화살을 쐈지만 빗나갔다. 곧 또다른 사슴이 달려가자 티렐은 사슴을 향해 쐈지만, 이 화살은 사슴 대신 왕을 맞혔고, 왕은 그 충격으로 낙마하면서 가슴에 박혔던 화살이 지면에 부딪히면서 화살이 더욱 깊숙이 박히는 바람에 즉사했다고 한다. 오더릭 바이탈 역시 사슴 한 마리가 티렐과 왕 사이를 달리자 티렐이 화살을 쐈는데, 그 화살이 사슴의 털 사이로 미끄러져 나아가 왕의 가슴을 꿰뚫었고, 왕은 즉시 죽었다고 기술했다. 생드니 수도원장이자 프랑스 연대기 작가 수제르(Suger, 1081 ~ 1151)에 따르면, 티렐은 티렐은 윌리엄이 죽을 당시 자신이 왕과 같은 숲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고 밝혔다.

공식 기록에는 그의 죽음이 사고의 결과라고 명시되었지만, 이후의 상황은 심상치 않다. 가슴에 화살이 박힌 왕의 시신은 사냥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지역 농민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왕의 죽음에 대한 조사는 없었으며, 유해는 윈체스터에 급히 묻혔다. 주민들은 왕의 죽음을 하느님의 형벌로 여겼고, 그가 교회를 억압한 것에 반감을 품은 성직자들은 윌리엄 2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종을 치는 걸 거부했다. 여기에 사냥에 함께 했던 헨리 왕자는 윌리엄 2세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즉시 윈체스터로 달려가서 국고를 장악하고 사흘 후인 1100년 8월 5일 웨스터민스터 성당에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로 등극했다.[5] 일부 학자들은 티렐이 윌리엄 2세에 대항한 봉기에 여러 차례 참가한 바 있었고, 헨리 1세의 최측근이 될 길베르트 드 클레어의 여동생과 결혼한 걸 근거로 삼아 헨리 1세나 길베르트의 사주를 받고 왕을 암살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단순한 사고였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제시되며,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없다.

윌리엄 2세는 군사적인 면에서는 뛰어났지만 통치가 거칠었고 폭정을 저질렀기에 모두가 무서워하는 왕이었다. 특히 그의 치세에 일어난 잦은 원정으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비 부담이 증가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기에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증오를 받았다. 당연히 그가 죽었을 때도 잉글랜드에서 슬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대의 사후평가 또한 전쟁 잘하는 군인일 뿐 품위나 위엄과는 거리가 먼 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질서와 정의를 확립하고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평화를 지킨 것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으며, 프랑스의 멘을 되찾은 것 또한 치적으로 평가받았다.

윌리엄 2세가 쓰러졌다고 알려져 있는 장소에는 루푸스 스톤이라는 기념석이 세워져 있다.

3. 기타

교회와 귀족들에게서 미움을 받아서 모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인지 실제였던 것인지, 사망 이후 윌리엄 2세가 동성애자였다라는 기록 내지 의혹이 늘 있어왔다. 물론 당대에 교회와 반목이 심하고 사치를 좋아하던 윌리엄 2세의 성향을 동성애에 빗대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실제 윌리엄 2세는 40살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았고 정부도 없었으며 자식도 사생아도 없었다. 그리고 궁정에는 젊고 잘생긴 남작들을 충신으로 두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역사학자 중에서는 윌리엄 2세를 동성애자가 맞다고 인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양 눈의 색이 서로 달랐다고 한다. 성깔은 더러운 편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끌어 들이는 매력이 있기도 했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미디블2: 토탈 워에서 튜토리얼용 캐릭터로 조작할 수 있다. 튜토리얼은 아버지 윌리엄 1세와 함께 헤이스팅스 전투에 참전하고 잉글랜드를 장악하는 미션이다. 튜토리얼에서는 별칭인 '루푸스 왕자'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튜토리얼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그랜드 캠페인 시작 시점이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한 직후라 잉글랜드의 후계자로 등장한다. 여담으로 게임 시스템상 무조건 장자승계로 되어있는 한계 때문에 윌리엄 2세의 형 로베르가 거꾸로 그의 동생이 되어버렸다.
  • 김성한의 소설 바비도에서도 그의 죽음에 대한 일화가 짧게 언급된다.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화형을 택한 바비도[6]의 매력에 이끌린 왕세자[7] 헨리(후일의 헨리 5세)가 그에게 정의를 설파하며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지만, 바비도는 오히려 그의 선조인 헨리 1세[8] 사냥터에서 쓰러진 자기 형(=윌리엄 2세)을 버려두고 왕좌를 택한 덕분에 오늘날의 당신이 미래의 천자가 아니겠느냐고 비꼬며 헨리 왕자가 말하는 정의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 얼음과 불의 노래에 나오는 폭군 마에고르 1세의 모티브로 보인다. 정복왕의 아들이었다는 점, 교단과 마찰을 빚은 점, 폭군으로 평이 안 좋았다는 점, 군사적인 능력은 뛰어났다는 점, 자식 없이 의문사 했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

[1] Shield Money. 중세 잉글랜드에서 부과한 일종의 세금으로, 기사 봉토 소유자에게 왕의 군대에서 개인적으로 봉사한 대가로 부과되었다.[2] relèvement. 봉신이 부모로부터 영지를 상속받았을 때, 이 재산을 점유할 수 있는 허가를 주군으로부터 받는 대가로 지불하는 일종의 상속세[3] Edmer, 1060 ~ 1126, 성직자이자 연대기 작가[4] haida, 잉글랜드의 토지 크기 단위[5] 사실 헨리의 입장에서는 서둘러 권좌를 확보해야 했다. 윌리엄 외에도 그 위로는 노르망디 공인 큰형 로베르가 있었고, 윌리엄의 사망 소식을 들으면 로베르 역시 잉글랜드 왕위를 노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다만 로베르는 당시에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고 있었고 거리가 멀어서 빠른 대처가 어려웠다. 나중에 윌리엄의 부고를 듣고 로베르는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나 헨리가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격분해 잉글랜드 왕위를 두고 헨리와 대립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헨리의 재빠른 권좌 확보는 주효했던 셈이다.[6] 실존인물 존 바드비(John Badby)가 모티브이다.[7] 소설에서는 '태자'라고 불린다.[8] 헨리 2세라고 나오는 판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