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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웨식스 왕조 제9대 국왕 참회왕 에드워드 Edward the Confessor | |||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그려진 참회왕 에드워드[1] | |||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 에드워드 (Edward) | ||
출생 | 1003년 ~ 1005년 | ||
잉글랜드 왕국 옥스포드셔 아이슬립 | |||
사망 | 1066년 1월 5일 (향년 60-63세) | ||
잉글랜드 왕국 런던 | |||
재위기간 | 잉글랜드의 왕 | ||
1042년 6월 8일 ~ 1066년 1월 5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f091f><colcolor=#fff> 대관식 | 1043년 4월 3일 | |
별칭 |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 | ||
아버지 | 애설레드 2세 | ||
어머니 | 노르망디의 엠마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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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영어: Ēadƿeard Andettere (참회왕 에아드웨아르드)영어: Edward the Confessor (참회왕 에드워드)
라틴어: Eduardus Confessor (참회왕 에두아르두스)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서 실질적인 마지막 앵글로색슨족 출신 왕이었다.[2] 그와 그 뒤를 잠시 계승했던 해럴드 2세를 끝으로 앵글로색슨계 웨식스 왕조의 지배는 끝나고, 노르만계 노르만 왕조의 잉글랜드 지배가 시작되었다.
정치에 무관심했고, 강력한 귀족들에 가려 통치를 잘 하지 못했으며, 별명인 참회왕[3]이 주는 이미지처럼 오로지 신앙심만 강했던 왕... 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 반대였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는 활력에 넘치고 야심도 있었던 왕이었다는 것. 무관심한 왕 이미지는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앵글로색슨족인 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만 남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또 다른 평가로는, 그가 통치 전반기에는 적극적이었으나 후반기에는 무관심했다는 주장도 있다. 평이 여러모로 엇갈리는 인물.
2. 어린 시절
옥스포드셔의 아이슬립이란 곳에서 애설레드 2세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만 에드워드의 생모인 노르망디의 엠마는 부왕의 두 번째 아내였으며, 생모에게는 첫 번째 아들이었다.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003년~1005년 사이의 어느 해로 추정된다. 그의 어린 시절은 바이킹의 노략질과 덴마크의 잉글랜드 침략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덴마크 왕 스벤 1세 트베스케그와 그의 아들 크누트 대왕이 덴마크군을 이끌고 침략했고, 후일 스벤 1세는 결국 잉글랜드 정복에 성공하게 된다. 이에 에드워드의 일가는 노르망디로 피신하기도 했다. 에드워드의 아버지 애설레드 2세는 스벤 1세와 피터지게 싸웠으며, 두 왕 모두 죽자 각자의 아들끼리 대를 이어 싸웠다.13~15세쯤 되었을 1016년에 스벤 1세의 아들인 크누트와 싸우던 에드워드의 배다른 형 에드먼드 2세가 죽었고, 크누트가 왕위에 올랐기에, 에드워드는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인 노르망디의 엠마는 얼마 후에 크누트와 결혼했다(...) 다시 말해, 자기 남편(애설레드 2세)의 적(스벤 1세)의 아들이자 자기의 배다른 자식(에드먼드 2세)의 적과 결혼한 것이다. 전 남편인 애설레드 2세와 결혼할 때처럼 이번에도 두 번째 아내로 결혼했다
3. 왕이 되다
피난길에 오른 에드워드는 25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주로 노르망디에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 동안의 에드워드는 시골 촌 구석의 귀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유일한 왕위 후계자였지만 그 자신조차도 잉글랜드 왕이 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그의 친모(크누트 대왕의 아내)인 노르망디의 엠마도 그를 별로 밀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크누트 대왕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새로 낳았고 그를 왕으로 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레크누드로써 에드워드와는 씨다른 형제, 즉 이부동생이었다.1035년에 크누트 대왕이 죽고, 하레크누드가 덴마크 왕에 올랐다. 그런데, 크누트 대왕이 해럴드 1세를 포함한 전처의 자식을 서자로 격하하여 갈등의 불씨를 남기는 바람에 결국 사후 분쟁이 일어났고, 해럴드 1세는 잉글랜드로 가 섭정이라는 형태로 잉글랜드를 사실상 점령했다. 1037년 해럴드 1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3년 후에 급사하자, 상황이 좀 호전된 하레크누드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인 1041년, 병이 심각하여 곧 죽을 것을 깨달은 그는 이부형인 에드워드를 잉글랜드로 불러들였고, 1년 뒤인 1042년에 세상을 떠났다. [4]
하레크누드가 죽자,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였던 고드윈 백작은 에드워드를 왕으로 밀었다. 덴마크 출신 하레크누드의 지배를 받아온 잉글랜드 국민들은 앵글로색슨족인 에드워드를 왕으로 열렬히 지지했고, 1043년 4월 3일,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를 후원했던 세 명의 백작의 권세가 매우 강했기에 그의 실권은 약했으나, 그는 야심차게 강한 군주로서의 자리를 되찾아 나갔다. 역사가들은 집권 초기의 그를 야심차고 강력한 인물로 평가한다.
1045년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딸 에디스와 결혼했고, 고드윈과는 사위-장인의 관계가 되었다. 이 무렵의 고드윈 일가는 잉글랜드 남부 전부를 지배하고 있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집권기에 노르만족, 프랑스인들을 주로 고용했기에 인기를 잃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 정도는 아닌 듯하다. 다만 몇몇 외국인들을 집에 머무르게 했고, 그들이 좋은 평을 듣지 못한 건 맞다.
4. 고드윈과의 맞짱
에드워드와 고드윈 가문, 누가 이기든 언젠가는 한번 부딪칠 사이였다. 강력한 군주의 위치를 다시 확립한 에드워드와, 당대 제일의 권력가인 고드윈 가문은 권력에 대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에드워드에게는 고드윈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1036년에 에드워드의 동생 앨프리드는 잉글랜드로 돌아 왔다가 웨식스의 백작 고드윈에게 붙잡혔고, 고드윈은 그를 해럴드 1세에게 넘기기 위해 배에 태워 보냈다. 배 위에서 고드윈의 부하들은 앨프리드에게 만행을 저질렀다. 벌겋게 달아오른 꼬챙이로 앨프리드의 눈을 찔러 장님으로 만든 것이다. 얼마 뒤, 앨프리드는 그 상처가 덧나 사망했다. 이 일로 인해 에드워드는 고드윈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되었다.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1051년 9월, 에드워드에게 그의 프랑스인 처남이 찾아왔다. 그런데 처남의 부하들이 고드윈 백작령의 시민들과 싸움질을 하는 일이 생겼다. 에드워드는 고드윈에게 자신의 처남과 싸운 시민들을 잡아 가두라고 전했으나 고드윈은 에드워드의 처남이 먼저 문제를 일으켰다는 식으로 말하며 방관했다. 열이 받은 에드워드는 이 기회에 고드윈을 손보기로 했다.
에드워드를 따르던 레오프릭 백작과 시워드 백작은 병력을 소집했고, 고드윈 가의 두 아들도 자신들의 병력을 소집해서 대치했다. 그리고 양 측은 화끈하게 한판 붙...지 못하고 양측 모두 미적대며 싸우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곤란해진 것은 고드윈 쪽이었다. 왕에게 대들었는데 부하들이 싸우려 하지 않으니 왕이 제대로 군대를 끌고 오면 목숨이 위험한 판국이었다. 에드워드는 고드윈에게 신하를 보내 내 동생을 살려내면 용서해주겠노라고 조롱했다. 고드윈은 저항을 포기하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플랜더스와 아일랜드로 도망쳤다. 고드윈을 내쫓은 에드워드는 내친 김에 자신의 아내인 고드윈의 딸도 수도원으로 쫓아버렸다.
1년 후, 고드윈과 아들들은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전을 두려워한 레오프릭 백작과 시워드 백작도 이번에는 에드워드 왕 편을 들지 않았다. 에드워드 왕은 빡쳤지만 별 수 없었고, 그들의 백작 지위를 다시 인정해 줘야 했다. 그가 쫓아보냈던 아내도 다시 불러와야 했던 건 덤.
5. 정치는 이제 귀찮아
1050년대 중반 정도에 에드워드 왕은 고드윈의 세력을 견제할 정도의 세력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고드윈 가문도 세를 불려나갔다. 고드윈은 1053년에 죽었지만 해럴드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의 세력이 커졌고, 1057년이 되어서는 머시아를 뺀 잉글랜드 전역이 이들 손에 들어갔다. 이 무렵부터 에드워드는 정치를 점차 멀리하고 매일 사냥이나 다니게 된다.1065년 해럴드의 동생인 토스티그가 백작으로 있었던 노섬브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토스티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싶었지만, 협상가로 파견된 그의 형 해럴드는 도리어 그를 비난했다. 심지어 반란군을 달래기 위해 그를 백작에서 내쫓고, 모카 백작을 대신 임명하기도 했다. 토스티그는 반란을 진압해 달라고 왕 앞에서
1066년 1월 5일, 에드워드 왕은 사망했고, 다음 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되었다. 문제는 누가 왕위를 이을 것인가였다. 에드워드 왕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후계자가 명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누구를 후계로 할지 명확히 지정하지도 않았다. 그가 살아 생전 누구를 후계자로 생각했었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하며, 당연히 당대에도 논란이 많았다.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5]는 자신에게 넘기기로 이미 약속했다고 주장했고, 해럴드 2세는 왕이 죽기 직전에 자신에게 왕국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정통성으로 본다면 가장 적임은 애설레드 2세의 증손자인 에드거 2세였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벌어진 헤이스팅스 전투 직후 잠시 동안이나마 왕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에드워드 왕의 관심 밖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세력 또한 없어서 왕위와는 멀어졌다.
어쨌거나 고드윈 가의 해럴드는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왕이 죽은 다음 날, 즉 왕이 매장된 바로 그날이었다.
6. 여담
- 외모면에서는 키가 크고 혈색이 좋았으며, 머릿결과 수염도 아름다웠고, 전반적으로 왕으로서의 위엄을 풍기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 그가 쓰던 성 에드워드 왕관은 영국 역대 국왕들의 대관식 때에 대대로 물려쓰는 왕관이 되었다. 올리버 크롬웰 시대에 한번 사라졌다가 찰스 2세가 다시 복원했고, 이래 역대 영국 국왕들이 대관식 때 사용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이걸 썼다.
- 1161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앵글로색슨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시성되었고, 잉글랜드 왕으로서는 유일하게 시성되었다.[6] 에드워드는 성 조지가 수호성인으로 지정되기 이전까지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으로서 오랫동안 공경받았다. 그런데 사실 그는 불같이 화내는 경우도 잦았는데다가 사냥도 즐겼기에 성인으로 시성된 것은 정치적인 배려 때문이었다는 평가가 대다수다.
- 에드워드의 깊은 신앙심은 25년간의 망명 생활 동안 생긴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부정하는 입장이며, 중세에 그를 시성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것이라 보고 있다.
- 세계적으로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관련이 있다. 에드워드 왕이 1042년 ~ 1052년 사이에 사원의 재건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재건을 시작한 이유는 자신이 묻힐 왕족의 교회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사원은 그가 죽을 때(1066년)까지 완공이 안 되었으나 하여간 그는 그곳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현재 보는 건물은 에드워드 시대의 것은 아니다. 재건은 1090년경이 되어서야 완료되었는데, 1245년에 헨리 3세가 허물고 새로운 양식으로 개축했다. 그러나 이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업적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헨리 3세는 에드워드를 자기 아들의 세례명으로 할 만큼 에드워드 참회왕을 깊이 공경했다. 그래서 에드워드의 유해를 모신 성당을 더욱 장엄하게 최신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했던 것이다.
[1]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기념비적인 첫 장면. 에드워드가 당시 권신이었던 해럴드 고드윈슨을 불러 노르망디로 떠나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에게 당신이 잉글랜드의 차기 왕위 계승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을 지시하는 장면...이긴 한데 구라다. 바이외 태피스트리 자체가 노르만 왕조의 정당성을 홍보하려고 만든 프로파간다 같은 거라서 윌리엄 본인이 좋을 대로 각색한 내용들이 섞여 있다. 해럴드는 노르망디에 간 적도 없고, 에드워드는 해럴드의 보호를 받으라고는 했으나 왕위를 넘긴다는 말은 한 적이 없고, 윌리엄이 주장하는 '에드워드는 노르망디에서 내 밑에 있었을 때 내게 왕위를 준다고 했다!'는 말 역시 근거가 없는 본인만의 주장이었다(...) 여담이지만 잘 보면 윗부분에 라틴어로 에드워드 왕(Edward Rex)이라고 쓰여 있다.[2] 참회왕 에드워드 다음에 9개월 정도 즉위한 해럴드 2세도 앵글로색슨족이긴 한데 이 시기에는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역시 잉글랜드의 왕을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 측면에서 논란이 있었다. 게다가 해럴드 2세는 결국 윌리엄에게 패하고 죽었으며, 윌리엄은 해럴드 2세를 참칭왕으로 규정하고, 그를 왕의 지위에서 끌어내렸다. 그래서 참회왕 에드워드를 마지막 앵글로색슨 왕으로 보는 것이 대세이다.[3] 영어 원문인 'Confessor(證據者, 증거자)'의 의미를 고려하면 무슨 죄를 지어서 참회했다는 뜻이 아니라 덕행의 뛰어난 모범을 통해 그리스도 신앙의 증인이 되었기에 정확히는 '증거자'로 해석해야 한다.[4] 여담으로 이때문에 덴마크의 왕위가 노르웨이 왕가로 넘어가게 되는데, 자세한 사정은 노르웨이/역사 참조[5] 윌리엄 1세는 에드워드 왕의 모후인 노르망디의 엠마의 오빠인 리샤르 2세의 손자였다.[6] 공식 시성 절차를 밟진 않았지만 순교왕 에드워드 역시 관습적으로는 성인으로 공경받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