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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몬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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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존 몬타구와 존 홀랜드.jpg[1]
성명 존 몬터규
John Montagu
생몰년도 1350년경 ~ 1400년 1월 6일 또는 1월 8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솔즈베리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시런세스터
아버지 존 몬터규
어머니 마가렛 몬테마르
형제자매 엘레노어, 토머스
아내 모드 프랜시스
자녀 토머스, 앤, 마가렛, 엘리자베스
직위 솔즈베리 백작, 가터 기사단 기사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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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에 맞섰으며, 리처드 2세를 폐위한 헨리 4세를 처단할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살해되었다.

2. 생애

1350년경 잉글랜드 왕국 솔즈베리 백작령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존 몬타구는 초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의 차남이자 제1대 몬타구 남작이었고, 어머니 모드 프란시스는 제2대 몬테마르 남작 토머스 몬테마르의 딸이자 제3대 몬테마르 여남작이었다. 형제자매로 엘레노어, 토머스가 있었다. 1369년 19살일 때 백년전쟁이 재개되자,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케임브리지 백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합류한 뒤 가스코뉴에서 페리고르를 습격한 원정에 동행했다. 그는 부르델 공략에 기여해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고, 1370년 라 로슈 쉬르 욘과 부르봉의 페르쉐 상 함락에 기여했다. 이후에도 가스코뉴 전선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1383년이 되기 전에 왕실 기사로 발탁되었다.

1381년에서 1383년 사이에 런던 시장인 아담 프랜시스의 딸 모드와 결혼해, 하트퍼드셔, 에식스, 서식스, 도셋의 영지를 지참금으로 받았다. 1390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몬타구 남작 직위와 재산을 물려받았고, 1395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몬테마르 남작령을 물려받았다. 당대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험은 존이 존 위클리프를 추종하는 교파인 롤라드파에 속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존 위클리프의 제자에게 자기 영지에서 은신하게 했으며, 모든 신성한 그림을 성당에서 제거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많은 역사가들은 존이 1390년 또는 1391년에 10명의 기사와 함께 튜튼 기사단십자군에 가담하러 간 볼링브로크의 헨리에 가담한 점을 들며 롤라드파에 속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명백한 롤라드파 인사가 십자군에 가담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여럿 있으니 그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고본다.

1394년, 존은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본군보다 먼저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1395년 1열 다른 3명의 기사와 함께 롤라드파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리처드 2세는 이 법안을 제출한 자들을 강하게 비난했고, 결국 그들은 계획을 철회했다고 한다. 그러던 1397년 6월, 존의 백부인 제2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가 사망했다. 윌리엄 몬타구는 아들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존은 솔즈베리 백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이로 인해 막강한 부를 거머쥐게 된 그는 리처드 2세의 강력한 지지자로 급부상했다.

1397년 9월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지난날 청원파의 일원으로서 리처드 2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리처드 피츠앨런, 우드스톡의 토머스, 토머스 뷰챔프,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아룬델의 재판이 열렸다. 리처드 피츠앨런은 참수되었고, 토머스 뷰챔프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리처드 2세에 의해 영구 추방으로 대체되었고,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아룬델은 잉글랜드에서 추방되었다. 우드스톡의 토머스는 칼레 감옥에 갇혀 있다가 피살된 채 발견되었다. 그는 이 재판에서 리처드 2세를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토머스 뷰챔프가 소유했던 8개 저택을 보상으로 받았다. 같은 해, 그는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398년 초,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가 왕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고발했다. 이에 따르면, 모브레이는 존 몬타구를 비롯한 리처드 2세의 추종자들이 자신과 곤트의 존, 노리치의 에드워드,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와 도싯 후작 존 보퍼트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이 주장이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모브레이는 이에 불복했고, 두 사람은 진위를 가리기 위해 결투 재판을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리처드 2세는 결투 재판이 열리던 날 돌연 취소하고 둘다 추방했다.

1398년 9월, 존 몬타구는 3년 임기로 잉글랜드 원수에 선임되었다. 그해 12월에 파리로 가서 리처드 2세의 왕비 이자벨 드 발루아의 지참금을 받고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베리 공작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동생인 장 드 베리의 딸 마리와의 결혼을 막는 임무를 잘 수행했다. 1399년 3월 22일 트로브리지와 올드본을 수여받았다. 1399년 2월 곤트의 존이 사망하자, 리처드 2세에게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지 못하게 하자는 청원서를 제출해 성사시켰다. 이후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평화 협상을 벌였고, 1399년 5월에는 리처드 2세와 함께 2번째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1399년 6월,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에 상륙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 아일랜드에서 이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리처드 2세는 존 몬타구를 노스 웨일즈로 보내 병력을 모집하게 했다. 그러나 존 몬타구가 애써 모은 병력은 리처드 2세가 죽었다는 헛소문을 듣고 도주했다. 반면,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리처드 2세의 독단 정치에 질색한 대귀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막대한 병력을 제공받았다. 8월 11일, 몬타구는 콘위 성에서 리처드 2세와 만난 뒤 보르도로 피신할 것을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리처드 2세와 함께 플린트 성으로 가서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협상하려 했지만, 헨리는 협상을 거부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체포된 후 런던 탑으로 끌려간 뒤 강제로 퇴위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헨리 4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존 몬타구는 헨리 4세의 첫번째 의회에 소환된 뒤 청원파 척결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뒤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헨리 4세는 누이인 엘리자베스의 청원과 3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보증을 받고 존 몬타구를 석방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리처드 2세를 기필코 복위하기로 마음먹고, 12월 17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장인 윌리엄 드 콜체스터의 집에서 지지자들을 끌어모았다. 이 음모에는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럼리 남작 랄프 럼리, 칼라일 주교 토머스 머크가 참석했다.

음모자들은 주님 공현 대축일을 축하하기 위해 윈저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석한 헨리 4세와 자식들을 죽이기로 결의했다. 주님 공현 대축일 축제는 성탄절부터 시작해 12일간 이어져 1400년 1월 6일 토너먼트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들은 킹스턴에서 무장부대를 모으고 야밤에 윈저성에 들어간 뒤 1월 6일 토너먼트에 참석한 헨리 4세와 아이들을 모조리 죽인 후 리처드 2세를 복위하기로 했다. 여기에 웨스트요크셔의 폰테프랙트 성에 감금되어 있는 리처드 2세를 빼돌리는 작전도 수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왕은 즉시 런던으로 달려간 뒤 병력을 소집했다. 음모가 발각된 걸 모르고 있던 존 몬타구와 토머스 홀랜드, 존 홀랜드는 기병 400명을 이끌고 윈저 성에 들어갔지만, 헨리 4세와 자식들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급히 도주했다.

존은 서쪽으로 도주하면서 리처드 2세가 탈출한 뒤 병력을 규합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리처드 2세의 지지자들이 많은 체셔로 가려고 했지만 시런세스터에서 헨리 4세에게 충성하는 집행관이 이끄는 민병대에게 토머스 홀랜드, 럼리 남작 랄프 럼리와 함께 체포되었다. 집행관은 재판을 위해 왕에게 이들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400년 1월 6일 또는 8일에 반란군이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하려고 시도했다가 격퇴되자, 분노한 군중은 죄수들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제5대 버클리 남작 토머스 버클리에게 그들을 처형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한 토머스 버클리는 세 사람을 처형했다. 이들의 수급은 옥스퍼드에 있는 왕에게 전달되었고, 왕의 명령에 따라 런던 브리지에 전시되었다. 몸통은 시렌세스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그의 소유물과 직위는 왕실에 압류되었지만, 나중에 장남 토머스 몬타구가 돌려받았다. 1420년, 존 몬타구의 미망인인 모드 프랜시스는 헨리 5세로부터 남편의 유해를 버크셔의 비샴 수도원에 있는 몬타구 가문의 묘지로 옮기는 걸 허락받았다.

3. 가족

  • 모드 프랜시스(1370 ~ 1424): 런던 시장 아담 프랜시스의 딸.
    • 토머스 몬타구(1388 ~ 1428): 제4대 솔즈베리 백작. 백년전쟁에서 맹활약했지만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전사했다.
    • 리처드 몬타구: 기사.
    • 앤 몬타구: 몽클리, 애너리, 뱀프턴 남작 리처드 행크포드와 초혼, 기사 존 피츠루이스와 재혼, 제2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와 삼혼.
    • 마가렛 몬타구: 제5대 페레스 남작 윌리엄 페레스의 부인.
    • 엘리자베스 몬타구: 제6대 윌러비 남작 로버트 윌러비의 부인.


[1] 왼쪽 인물은 솔즈베리 백작 존 몬터규이고, 오른쪽 인물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