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6-25 12:45:57

후궁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조여정 주역의 영화에 대한 내용은 후궁: 제왕의 첩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황실왕실의 구성원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2em; word-break:keep-all"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padding: 2px 0px; min-width:40%"
{{{#!folding [ 황실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20px"
태상황 태상황후 태황태후
상황 상황후 황태후
황제 황후 여제 국서
후궁 남총
황태제 황태자비 황태녀 부마
황태자
황태손
친왕 친왕비 공주
군왕 군주
현주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padding: 2px 0px; min-width:40%"
{{{#!folding [ 왕실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20px"
태상왕 태상왕비 대왕대비
상왕 상왕비 왕대비
대원군 부대부인 부원군 부부인
국왕 왕비 여왕 국서
후궁 남총
왕세제 왕세자빈 왕세녀 부마
왕세자
왕세손
왕자 왕자비 왕녀
대군 부부인 공주
군부인 옹주
프린스 프린세스 프린스
}}}}}}}}}}}}


1. 개요2. 후궁 제도의 특징3. 한국사의 후궁 제도4. 중국사의 후궁 제도5. 일본사의 후궁 제도6. 베트남의 후궁 제도7. 오스만 제국의 후궁 제도8. 유럽의 로얄 미스트리스 제도9. 나무위키문서가 개설된 후궁들
9.1. 한국의 후궁9.2. 중국의 후궁9.3. 일본의 측실9.4. 유럽의 정부9.5. 오스만 제국의 후궁
10. 가상 인물
10.1. 정부 캐릭터
11. 관련 문서

1. 개요

후궁()은 동아시아에서 군주 이외의 여자들 중 내명부의 작위를 받은 자들을 칭하는 말이다. 사실상 제왕의 . 비빈(妃嬪)[1], 빈어(嬪御), 잉첩(媵妾), 빈잉(嬪媵), 궁빈(宮嬪), 궁인(宮人)[2], 내관(內官)[3], 육궁(六宮)[4] 등으로도 불린다.

후궁의 본래 의미는 궁궐의 뒤꼍, 안쪽을 뜻하며, 후정(後庭)·내정(內庭)·내전(內殿)·내궁(內宮)·내조(內朝) 등을 쓰기도 한다. 제왕이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고 의식을 행하는 영역의 다른 호칭인 외조(外朝)·외정(外庭) 등의 반대격으로, 제왕의 사적인 공간이다. 이곳에 제왕의 여인(妻妾)이 거처했기에 제왕의 처와 및 시녀(侍女)를 지칭하는 단어로도 쓰이게 됐다.

이후 같은 의미인 내전과 후궁을 분리하여 내전(中殿·中宮·中宮殿)을 제왕의 처(皇后·王妃)로, 후궁을 제왕의 첩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한 사례가 빈번해 현재 한국의 사전에선 내전(中殿·中宮·中宮殿)을 제왕의 정궁으로, 후궁을 제왕의 측실로 정의하고 있다.

2. 후궁 제도의 특징

일부다처제관습이 존재했던 고대부터 있었던 제도였고, 더욱이 한 나라의 주인인 군주가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는 것은 왕실이 가지는 위엄의 상징임과 동시에 군주의 유력 가문들과 동맹을 맺어 손쉽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많은 후궁을 둬서 정비와 후궁의 가문들끼리 서로 견제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어느 한 귀족가문에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도 했다.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면 어떨까[5] 얘기를 꺼냈다가는 미친 놈 취급당할 정도로[6] 일부일처제가 자리잡았던 고려에서도 "에이 그래도 왕은 예외죠"라며 후궁을 잔뜩 들였다.

또한 위엄과 동맹 외에 계승의 안정성을 위한 요소도 있었는데, 남과 여가 1대 1의 상황에서 자식 그중에서도 남자아들만을 얻는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게 보장되는 일이 아닌데다가[7], 전근대의 높은 영아 사망률까지 결합되면, 일부일처제와 적장자 상속제의 결합은 굉장히 불안정한 면이 있었기 때문.

실제로 일부일처제를 엄격하게 지키고 사생아의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럽에서, 왕실귀족 가문들은 급작스러운 사고나 전쟁 같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 후계자를 낳지 못했다는 맥빠지는 이유로 대가 끊겨 버리는 일이 많았다. 전쟁이나 합병 같은 것도 없었는데 독일 왕이 스페인의 왕을 겸한다는 식으로 어느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 자리를 겸해서 순간적으로 그 시대에만 나라의 영토가 엄청 커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대부분 대가 끊기는 바람에 외국의 친척한테 계승권이 넘어가면서 일어났던 일이다. 안그래도 유럽 왕실은 국제결혼이 잦았으니.

특히 서양 군주는 그 자신의 옥체 보존이 무엇보다 최우선인 동양 군주와 다르게 전쟁 같은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싸워야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전쟁 나갔다가 전사하고 대가 끊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후궁과 황후(왕비)를 아우르는 궁중 여관 제도를 통틀어서 내명부라 하는데, 이는 단지 황후와 후궁만이 속하는 것이 아니라 궁중업무를 보는 궁녀들을 포괄하는 체제다. 때문에 관념적으로는 모든 궁녀들은 군주의 여자들이므로 다 후궁이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궁중업무가 아닌 군주의 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여인들만 후궁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8] 보통 후궁제도라고 하면, 내명부 제도 중에서도 왕의 아내/에 관한 것만을 가리킨다(황후나 왕비도 포함).

후궁은 원칙적으로 남편인 군주가 죽은 다음에는 궁에 거주할 자격을 잃는다. 소생이 없을 경우 비구니가 되고, 소생이 있을 경우 그 집으로 나가 사는 게 일반적이다. 당연하지만 후궁 자신의 아들이 군주로 즉위한 경우엔 예외다. 중국에선 이런 경우엔 황후에 준하는 지위를 받을 수 있었고 때로는 수렴청정도 할 수 있지만, 한국, 특히 적서 구분이 엄격한 조선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무덤보다 한 단계 낮은 이 되고 사당은 전보다 낮은 으로 불렀다. 한편 국왕의 생모로서 이렇게 어정쩡하게 살아있는 경우에 대한 칭호는 의외로 조선 후기에나 정립되었는데, 이조차도 원래는 사도세자를 잃고 아들 정조효장세자의 양자로서 대통을 잇게 되자 혜경궁 홍씨영조 사후 후궁도 아니고 대비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놓이는 바람에 정조가 궁여지책으로 '자궁(慈宮)'이라는 칭호를 급조 만들어서 왕비에 준하는 지위를 만들어준 것이 순조 즉위 후 생모인 수빈 박씨에게도 준용된 것이었다. 다만, 19세기에도 후궁이 낳은 왕위계승자가 등극을 하는 예는 없었고 넓게 봐도 의민황태자 영왕의 생모 순헌황귀비 엄씨가 고작이었던데다 그 역시 조선의 제후국 예법과는 다른 황제국의 예법을 따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임금의 후궁이 원자를 낳고 원자가 훗날 보위에 오르자 '자궁'으로 불린 예는 수빈 박씨 뿐이었다.

후궁은 사실 궁궐에 남아 있어도 남편이 죽으면 역할이 소멸된 거나 마찬가지이므로, 궁궐에 있어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왕실의 재정 압박 문제도 있고, 후궁 개인으로서도 살 떨리는 궁중생활 때려치고 출가한 자식의 사가에서 편히 지내는 것이 훨씬 편한 인생이다.

황후나 왕비가 사망하거나 폐위될 경우, 명문가 출신의 후궁이면 드물게나마 정식으로 황후나 왕비로 책봉되는 경우가 있었다. 중국의 경우는 아들이 황제가 되면 후궁이었어도 황태후가 된다.[9] 조선의 경우 성종의 후궁 숙의 윤씨가 당시 임신중임에 가점을 받아 정식 왕후로 승격되었고,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가 역시 원자를 낳아 정식 왕후가 되었지만 그녀의 사사 이후 숙종은 내명부 여인의 왕후 책봉을 금지시켜버렸다.

3. 한국사의 후궁 제도

문서 참조.

4. 중국사의 후궁 제도

문서 참조.

5. 일본사의 후궁 제도

문서 참조.

6. 베트남의 후궁 제도

가장 최근의 왕조인 응우옌(阮)조에서는 황제의 정처가 살아 있을 때는 단순히 귀비에 봉하였다가, 사망한 뒤에 황후로 추봉하였다.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의 아내인 남프엉 황후는 제외)
  • 황귀비(皇貴妃, Hoàng Quý Phi)
  • 1계 비(一階妃, Nhất giai Phi)
  • 2계 비(二階妃, Nhị giai Phi)
  • 3계 빈(三階嬪, Tam giai Tân)
  • 4계 빈(四階嬪, Tứ giai Tân)
  • 5계 첩여(五階婕妤, Ngũ giai Tiếp Dư)
  • 6계 첩여(六階婕妤, Lục giai Tiếp Dư)
  • 7계 귀인(七階貴人, Thất giai Quý Nhân)
  • 8계 미인(八階美人, Bát giai Mỹ Nhân)
  • 9계 재인(九階才人, Cửu giai Tài Nhân)

7. 오스만 제국의 후궁 제도

하렘 참조

8. 유럽의 로얄 미스트리스 제도

유럽에서는 크리스트교의 영향으로 일부일처제가 오래 전부터 자리 잡아 동양과 같은 후궁 제도가 없었다.

그러나 후궁에 비견될 만한 제도는 있었는데 바로 '공식 정부'(情婦, Mistress)라 할 만한 존재를 두는 것이다. 의 정부를 영어로 로얄 미스트리스(Royal mistress)라고 부르며, 프랑스에서는 메트레상티트르(maîtresse-en-titre), 일본에서는 공첩(公妾) 또는 총희(寵姫)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 영어권도 후궁과 정부를 확실하게 분간하고 있어서 후궁은 'Royal Concubine'로 달리 표기하고 있다.

후궁은 왕비보다 지위가 낮을 뿐 엄연한 왕의 아내로 인정 받았지만, 정부는 단지 내연녀에 불과했다. 따라서 정부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지지 않았지만 권리 또한 없었다. 예를 들어 후궁이 다른 남자와 관계하면 간통으로 처벌을 받았지만, 정부는 문어발을 걸쳐도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지언정 법적으로 처벌 받지는 않았다. 부부 관계가 아니니 간통을 운운할 근거도 없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찰스 2세는 정부 바바라 팔머가 다른 남자들과 정사를 벌이는 장면을 몇번이나 목격했는데도, 바바라는 물론 그 애인들에게도 처벌을 가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찰스 2세가 유난히 자기 정부의 남자 관계에 대해 관대했던 탓도 있다.

그 대신 동양의 후궁은 모시는 왕이 살아있는 한 왕의 첩으로서 계속 궁에 거주하였고, 후궁의 자식은 왕비 소생 적자녀에 비해 한 단계 낮은 지위의 서자녀이기는 해도 엄연한 왕족으로 대우를 받았다. 특히 서자는 적자보다 우선순위는 밀렸긴 해도 왕위 계승권이 있었기에 중국사나 한국사에서, 후궁의 소생으로 태어나 황위나 왕위를 이어받은 군주가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정부는 오로지 왕이 베푸는 총애와 호의에 기대어 궁에 거주하는 것이기에 왕이 살아있어도, 총애를 잃는 즉시 궁에서 내쳐졌고 그 자녀들도 왕위 계승권을 갖지 못하는 사생아에 불과했다. 왕이 사생아를 친자로 인지하고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는 경우는 흔했으나, 그래봤자 귀족 작위를 받는 게 한계였고 왕족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만 보더라도 샤를 9세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정부가 낳은 사생아였기에, 앙굴렘 백작위만 주었을 뿐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결국 발루아 왕조는 대가 끊겼다.

왕의 총애를 잃거나 사후 그 정부들이 궁에서 쫒겨나 보복받은 사례도 많다. 정부에게 있어 왕의 총애만이 권세를 누리게 해주는 유일한 이유였는데, 그 왕이 사망함으로서 유일한 보호막이 사라지고 우대받을 자격조차 없어진 것이다. 예시를 들자면 에드워드 3세의 정부로 국정을 농단하며 부를 축적한 걸로 악명높은 앨리스 페러즈는 에드워드 3세의 임종이 임박하자마자, 모든 권력을 상실하고 재판에 회부되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토지도 몰수당하고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앙리 2세가 죽을 때까지 가장 총애한 정부이자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넘어서는 권력을 누린 디안 드 푸아티에도 앙리 2세가 죽자마자 카트린의 명으로, 왕에게 선물받은 왕가의 보석부터 성까지 반환당하고 앙리 2세의 장례식 참석마저 금지당한 뒤 정치에서도 배제당한 채 남은 평생을 조용히 살아야 했다.[10] 알렉산드르 2세의 정부이자 귀천상혼한 후처인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는 유리옙스카야 여공작 작위를 하사받고 비공식적인 황후로 대우받으며 잘 나갔으나, 알렉산드르가 폭탄테러로 사망하자마자 자식들과 함께 러시아 황실에서 내쳐졌고 연금을 지급받는 대신 황실 거주지에서 살 권리마저 포기하고 해외를 전전해야만 했다. 에드워드 7세의 정부인 앨리스 케펠도 에드워드에게 경제적으로 풍족한 지원을 받는 것은 물론 그의 정치 고문으로서도 상당한 입지를 자랑했지만, 에드워드 7세의 사후 아버지의 정부를 꺼린 조지 5세에 의해 모든 궁중 행사에서 배제되고 사교계에서도 소외되면서 단번에 모든 입지를 상실했다. 이외에도 총애해주던 왕의 사후 생활고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산 정부들은 많다. 이것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부군으로 모시던 왕의 사후 출궁은 하되 왕족으로 대우받고 자식이 있으면 경제적 어려움없이 편안한 여생을 보내던 동양의 후궁들과 다른 점이다.

왕의 정부들은 유부녀들이 많았는데, 이는 정부가 왕의 사생아를 낳으면 정부의 원래 기둥서방 남편의 아이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11] 유명한 퐁파두르 부인이나 뒤바리 부인 같은 사람들이 '부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 때문이다. 왕이 처음부터 귀부인에게 손을 대는 경우도 있었지만[12], 미혼이거나 신분이 낮은 여성을 귀족과 결혼시켜 신분세탁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매우 드물게 끝까지 미혼으로 남는 경우도 있었는데, 찰스 2세의 정부였던 넬 그윈배우 출신의 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세탁용 결혼을 하지 않아 끝까지 천민 신분으로 남아서 찰스 2세의 사망 이후 재정적으로 고생을 했었다. 로얄 미스트리스들이 대중들에게 매춘부라고 비난받은 것은 단순히 외간 남자와 불륜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실제로도 경제적 문제로 코르티잔(courtesan)을 겸하면서 상류층 고객들을 후원자로 두거나, 코르티잔 본인이 작위 및 사생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당한 남자를 골라 위장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13] "불륜이나 저지르는 부도덕하고 문란한 매춘부" 라는 인식이 박힌 것이다.

이렇게 왕의 정부가 된 귀부인들은 남편과 별거하고 사실상 이혼 상태에 들어갔다. 당연히 남편들은 아내를 왕에게 빼앗기는 것이니 불만을 품었지만, 왕이 그 대가로 막대한 선물을 하사하거나 지위를 주기도 해서 참고 넘어갔다. 드물게 이 재산과 지위 때문에 아내가 왕의 정부가 되는 걸 환영하는 유부남 귀족들도 있었고, 애초에 왕이 정부를 신분세탁해줄 목적으로 찾아다가 결혼시킨 한미한 귀족 같은 경우엔 자기도 그 대가로 받은 게 있으니 불만이 있어도 대놓고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왕이 정치를 못하면 대놓고 왕을 비난 못했으니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들이 대신 비난 받은 것처럼, 정부도 왕실을 대신해서 비난받은 샌드백이었다. 상기 유명한 퐁파두르 부인뒤바리 부인도 알고 보면 성품은 나쁘지 않았지만 죽을 때까지 악녀, 탕녀라고 비난 받았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평생동안 프랑스의 백성과 귀족들에게 증오를 받은 건 그녀가 적국인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것도 있었으나, 남편 루이 16세에게 정부가 없었기에 비난을 대신 받은 것도 있었다. 왕의 정부는 단순한 국민들의 욕받이(?) 역할 뿐만 아니라 각종 사교 행사들을 주관해야 했는데, 이를 본처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직접 주관해야 하다 보니 국민들에게 더더욱 반감을 사게 된 것이다.[14]

유럽 왕실에서 모티브를 따온 한국산 창작물들 대다수는 황비, 귀비 같은 칭호를 붙이거나 후궁으로 동일시하는 등 로얄 미스트리스를 후궁으로 오해해 잘못된 고증으로 묘사하거나, 복식과 배경만 중세 유럽이지 사실상 동양 왕실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공첩, 총희로 표기한 일본산 창작물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도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의 왕의 정부가 되는 엔딩들, 은하영웅전설의 정부 캐릭터인 안네로제 폰 그뤼네발트, 주산나 폰 베네뮌데를 후궁으로 잘못 번역하는 사례가 많다.[15]

9. 나무위키문서가 개설된 후궁들

9.1. 한국의 후궁

9.2. 중국의 후궁

9.3. 일본의 측실

9.4. 유럽의 정부

분류:로얄 미스트리스도 참고할 것.

9.5. 오스만 제국의 후궁

10. 가상 인물

※ 남자 후궁 캐릭터는 남총 문서에 기재한다.

10.1. 정부 캐릭터

해당 문단은 주로 유럽 왕실을 묘사했거나 유럽 왕실에서 모티브를 따온 창작물의 정부(총희)들로 후궁이 아니다. 단 일부 동양 창작물(특히 한국산 판타지 소설)에서는 정부를 후궁으로 묘사하거나 동일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확실히 정부로 묘사되거나 일본어 창작물 한해 로얄 미스트리스의 일본어 번역어인 공첩, 총희로 표기된 경우에만 넣을 것.

다만 동양권은 일부일처다첩 제도가 일반적이였다보니 한일 통틀어 유럽의 정부 고증을 완벽하게 묘사한 작품들은 거의 없다. 심하게는 후궁의 특징이 섞이거나 아예 이름만 정부지 후궁이랑 차이가 없는 작품도 존재한다.

참고로 소비자들의 배려를 위해서인지 실제 유럽 왕실의 로얄 미스트리스와 달리 창작물의 로얄 미스트리스들은 미혼녀들이 대다수이다. 일부 고증에 신경쓴 작품은 기혼녀도 있었다는 식으로 둘러댄다.

11. 관련 문서


[1] 비(妃)를 왕의 처의 작위로 쓴 한국에선 비빈의 정의가 추가되어 의 정궁인 왕비와 빈 이하 모든 후궁을 아우르는 단어로 쓰이거나 왕의 정궁인 왕비와 세자의 정궁인 세자빈을 통합한 단어로도 쓰였다. 중국황실과 옛 국가, 고전의 내용을 인용할 때는 후궁의 의미를 띤다.[2] 조선에서 궁인은 후궁과 왕실 시녀를 모두 아우른다. 그러나 궁중의 여인을 총칭하는 궁녀가 왕실 시녀의 호칭으로 정의되면서 궁녀의 같은 말인 궁인과 내인(內人: 나인)도 왕실 시녀의 호칭으로 이해되고 있다.[3] 후궁을 내관, 시녀를 궁관으로 구별해 부르기도 했다. 현대 국어 사전에는 내관은 내시를 지칭하는 단어로, 궁관은 궁내직 혹은 동궁 소속 관원으로 정의되고 있다.[4] 《예기(禮記)》에 “옛날 천자(天子)의 후(后)는 6궁(六宮)·3부인(三夫人)·9빈(九嬪)·27세부(二十七世婦)·81어처(八十一御妻)를 세웠다.”고 한 것에서 비롯된다. 육궁에 정궁이 포함되어 있어 내명부 후비(后妃: 정궁+후궁)의 다른 말로도 쓰인다.[5] 당시 고려몽골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남성이 너무 부족해서 결혼을 못하는 여성이 많았다. 여자가 결혼을 못한다는 건 전근대 사회에선 생존의 위협이 된다.[6] 대신 박유가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면 어떻겠냐"고 왕에게 건의했다가 저잣거리에서 부녀자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했다고 한다. 한국사 공부를 할 때 고려는 여성권이 강했다는 사례의 단골로 나오는 일화.[7] 당장 현대에도 각종 고부갈등과 고민을 낳는 이유가 된다는 걸 상기하자.[8] 조선을 기준으로 후궁들도 궁에 살면서 맡은 임무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군주 부부의 잠자리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왕실 제사나 손님 접객 같은 임무를 가지고 있어서 엄연한 관료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9] 정확히는 선대 황제의 황후였던 황태후 1과, 새로 즉위한 황제의 생모인 후궁 출신 황태후 2, 이렇게 두 명의 황태후를 동시에 세울 수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선대 황제의 황후를 '성후황태후'(聖后皇太后), 새로 즉위한 황제의 친모를 '국모황태후'(國母皇太后)라고 칭했으며, 청나라에서는 전자를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 후자를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라고 칭했다.[10] 그나마 이것도 카트린이 디안과 인척관계인데다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던 걸 참작해 미약한 처벌을 내린 것이다.[11] 물론 눈 가리고 아웅일 뿐 당시 사회에서도 소문 좀 듣는다 하는 사람들은 왕의 자식임을 다 알았다. 일종의 출생신고 같은 개념으로 법적 아버지가 필요했던 것.[12] 이 경우는 대부분 왕의 권력을 이용해서 귀부인을 탐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불륜'이었다. 어지간한 막장 왕이 아니고서야 왕족과 준왕족은 당연하고 서로 척 지면 문제가 발생할 만한 세력 있는 고위 귀족가의 귀부인을 먼저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현존하는 로얄 미스트리스 중 작위가 높은 자들은 낮은 작위부터 시작해 총애를 받아 작위가 상승한 것이다.[13] 퐁파두르 부인의 생모인 마들렌 드 라 모트가 이렇게 위장결혼을 한 코르티잔이었다. 마들렌은 스캔들이나 사생아들을 처리할 용도로 프랑수아 푸아송과 위장결혼을 하고, 결혼 후에도 매춘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남편 프랑수아는 아내의 손님과 후원자들이 귀족 계층이라서 연줄이 생기는 것을 오히려 환영했다. 이 때문에 퐁파두르 부인은 프랑수아 푸아송이 친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후원자 중 하나인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이 친부라는 의혹이 있었다.[14] 마리 앙투아네트는 평민들에게까지 공개된 공개 저녁식사에 참가하지 않고 소치고 닭치는 목가적 취미생황에 몰두하게 되면서 자기에 대한 루머를 만회할 기회를 회피하고 민중과 점점 괴리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15] 다만 은하영웅전설 같은 경우는 동양의 후궁 제도가 섞여있는데, 황제가 이런 정부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사생아가 아니라 서자로서 엄연한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는다는 점과 외간 남자와의 불륜이 금지된다는 점에서 유럽 정부의 고증을 지킨 것은 아니다.[16] 사실 정부라고 하기 애매할 정도로 가벼운 사이였으나 애정관계였던 것은 사실이다.[17] 이들 모두 형식상으로는 티글블무드 보른의 연인, 즉 후궁으로 분류한다. 정실은 레긴이다.[18] 등장 당시에는 성빈이었으며, 홍상학 부녀가 몰락한 후에 중전이 되었다.[19] 작품 마지막에는 그 동안의 죄가 전부 밝혀져 폐위되었다.[20] 처음에는 무수리였지만 어쩌다 승은을 입은 후에는 임신하지 않았는데도(나중에 사고로 유산하고 나서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워낙 초기라 복자 본인도 몰랐던 듯.) 숙원 첩지를 받았다. 혜원옹주를 구한 공과 함께 삼간택이 다가오면서 소의로 봉해졌고, 성빈이 중전이 된 후에는 유일한 후궁인 혜빈이 되었다.[21] 회귀 전에는 지은 아이린느 샤나 카스티나에게 밀려 황비가 되었지만 회귀 후에는 황후가 된다.[22] 왕자를 낳은 후 우이가 군후가 되면서 차비로 격하되었지만 나중에 우이가 사라지면서 다시 군후가 되었다.[23] 외전에서 그동안 저지른 간통이 밝혀져 내명부에서 제명당한다.[24] 외전에서 유진과 이혼해 내명부에서 제명된 후, 문관이 되어서 다른 남자와 혼인한다.[25] 우온이 아들을 낳은 뒤에 정식 군후가 됐지만, 2년이 되지 않아 사라진다.[26] 호겸(신대욱)과 신유영의 어머니.[27]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 노수눌(盧守訥)의 양녀로 들어가 가례를 올렸다. 노수눌은 실존인물로, 인목왕후의 외가인 광주 노씨 집안의 사람이다.[28] 원래는 윤임과 정혼했으나 그와 파혼하고 아버지에 의해 연산군의 후궁 숙원이 되었다.[29] 서리꽃에서 롱희를 측비라고 소개한 것, 불환곡에서는 1황자 운의 결혼기념으로 송하를 점령국에서 품과 동시에 롱희를 귀비로 책봉하였다.[30] 작중 시점에서는 이미 고인.[31] 회상에서 이름만 언급되었고 봉오제 사건 이후 황제의 후궁들 중 비와 빈 품계를 받은 이가 롱희 밖에 없어 새 비빈을 들였다는것을 보면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32] 현 황제와 오륜공주의 모친으로 작중 시점에서 이미 고인이다.[33] 작품 최후반엔 황후로 즉위하고 작약만가 본편에선 태후가 된다.[34] 출신이 비천하여 성이 없고, 품계 또한 없다. 작중 황제의 후궁들 중 품계가 있는 이는 리빈 하나뿐인데 이 경우는 황제가 불순한 목적으로 품계를 준 것이다. 다른 후궁들은 황제가 관심을 두지 않아 품계가 없으며, 황제가 유일하게 총애하는 삼미랑은 출신이 천한데다 내명부를 관장하는 태후와 사이가 나빠 품계를 받지 못했다.[35] 작중에서는 고인이지만 아들이 서자로 밝혀졌다.[36] 선황제의 후궁 중 하나이자 틀라의 친모.[37] 당나라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나라가 배경인 원작 소설에서는 대략 60여명의 후궁이,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25명의 후궁이 등장한다.[38] 윤례의 생모.[39] 원작에서는 후궁 출신 황후로 나오지만, 가장 유명한 미디어믹스인 드라마에서는 후궁이였던 적이 없으며 작품 시작 시점 혹은 그 직전에 황후로 즉위한다.[40]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41] 현비 묘씨와 함께 총애를 독차지하는 순원황후를 질투했다.[42] 순원황후에게 2시진(4시간) 동안 꿇어앉는 벌을 받고 유산한 후궁.[43] 드라마에 나오는 흔상재의 원형 중 하나. 원작에서의 행보가 드라마 초반부의 흔상재의 행적과 유사하다. 원작 후반부에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견환에 의해 벌을 받아 냉궁에 갇힌다.[44] 드라마에 나오는 단비 제월빈의 원형 중 하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후궁들 중 가장 선량한 인물이자 모든 미디어믹스를 통틀어서 4~6명 밖에 없는 황제를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 중 한명이다.[45]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 황제에게 견환의 대역으로서 사랑받았던 후궁들 중 한명이다. 견환의 대역들 중에서는 가장 큰 총애를 받았다.[46]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 모용 세란여동생.[47]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 견환의 대역인 위균과 견환의 나이를 비교하면서 견환이 늙었다며 조롱했다.[48]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 견환의 입궁 동기이자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49] 드라마에 나오는 흔상재의 원형 중 하나. 같은 궁을 쓰던 기귀인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자청해서 견환의 편이 되어 도움을 주었다.[50] 드라마에 나오는 부찰 의흔의 원형 중 하나.[51] 중국 드라마 옹정황제의 여인의 후속작.[52] 숭경황태후 뉴호록씨.[53] 길태빈.[54] 체자레 데 코모의 어머니이자 레오 3세의 정부.[55] 동대제국의 황제 소비에슈의 정부. 나중에 이전 황후였던 나비에랑 이혼한 소비에슈와 정식으로 혼인하면서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그동안 저지른 악행과 도망 노예 출신이었다는게 들통나면서, 황후 자리에서 폐위된 뒤 감옥에 유폐되었고 결국 그곳에서 자살한다.[56] 소비에슈의 아버지 오시스 3세의 정부 중 하나.[57] 오시스 3세의 정부 중 하나. 그가 가장 총애한 정부였다고 언급된다.[58] 프린세스 메이커 2의 등장인물. 성을 방문할 때 예의범절이 85 이상이면 대화를 허가해주고 화술 수치당 인맥을 높여준다.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귀비(윈도우즈 판), 후궁(리파인 판)으로 오역되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