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7 00:42:46

소정호

연희공략 후궁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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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50A3E5><colbgcolor=#000> 연희공략 등장인물
소정호
파일:연희공략.소정호.jpg
이름 소정호(苏静好)
배우 왕원가(王媛可)[1]
민족 한족
가족관계 남편: 건륭제
자녀: 6황자 영용
거주지 종수궁
<rowcolor=#50A3E5> 품계 3품 2품 7품
순(纯)비
순귀비(纯貴妃)
소답응(강등)

1. 개요2. 작중 행적3. 성격4. 실제 역사

[clearfix]

1. 개요

드라마 《연희공략》의 등장인물. 건륭제의 후궁인 순혜황귀비 소씨를 모티브로 하는 인물.

2. 작중 행적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보친왕부에 격격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부찰 용음과 절친이었고, 그녀의 집에 놀러갔다가 용음의 남동생인 부찰 부항에게 반하게 된다. 이때 시녀인 옥호를 시켜서 편지와 옥패를 부항에게 전달했고 부항이 옥패를 계속 차고다니는 것을 보고 부항도 자길 좋아한다 여긴다. 황제의 시침도 피하고, 황후에게 그토록 충성하는 것도 부항 때문이다. 후궁 신분이라 맺어질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부항을 향한 순정은 지키고 싶었기에 좋은 집안의 규수가 보이면 부항의 짝으로 추천하곤 했다. 하지만 부항이 영락을 좋아하고 이청과 혼인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부항에게 자신을 좋아한게 아니냐고 묻지만 사실 편지는 옥호가 중간에 가로챘고 옥패는 누나인 용음이 준 걸로 여겨서 계속 하고다녔던 것 뿐, 부항은 순비에게 마음이 없었다. 결국 10년간의 짝사랑이 허상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비는 타락하게 된다.[2]

타락 직후 소정호는 계략을 짜서 황제의 총애를 얻은 후 6황자 영용을 출산하고 직후 순귀비로 봉해진다. 자신이 낳은 영용이 황후의 7황자 영종보다도 태후와 황제의 관심과 사랑을 못 받자, 황후의 아들이 자기 아들의 앞길을 막을 것이라 판단하고 장춘궁에 불을 내서 영종을 죽인다. 심지어 이때 불이 났을 때 끄려고 준비해 놓는 물까지 얼려 놓는 치밀함까지 보인다. 그렇게 영종이 죽고 황후는 크게 상심하여 자살한다.

그 후에 황후의 복수를 하기 위해 눈에 불을 키는 위영락을 계속해서 괴롭히지만 52화에서 유비에게 역으로 계략에 빠져 답응으로 강등당하고, 냉궁으로 유폐된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이 모든 게 계황후의 계략임을 알게 된다. 조용히 지내고 싶었던 숙신에게 자꾸 황후파에 가담하라고 언질을 주는 바람에 소정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숙신은 직접 냉궁에 찾아가서 태감들을 시켜 연줄로 목을 졸라 죽인다. 그리고 내내 뻔뻔한 얼굴로 지냈지만 숙신이 용음을 죽인 일에 대해 거론하자 점점 겁에 질린 표정이 되고 "전부 죄악이지. 평생 속죄할 수 없는 죄야..."라고 말하며 뒤늦게 죄책감을 느낀다. 시신은 목이 반쯤 떨어져 나가 아주 끔찍한 상태여서 청소를 맡은 궁녀가 기절할 정도였다.[3] 그리고 소정호의 아들 영용은 후에 입양보냈다고 언급되면서 대통을 이을 수 없게 되었으니 소정호는 죽어서도 편할 수 없게 된 셈이다.

3. 성격

별달리 욕심을 잘 표현하지는 않는 성격이긴 하지만, 꼭지가 돌아버리면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다. 짝사랑하던 부찰 부항 때문에 황후에 도움을 줬었지만 사실 부항이 자신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 그야말로 맛이 가버렸다.

다만 맛이 가는 와중에도 자기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은 잘하는데 황후가 사망한 직후, 자신이 6황자 영용의 생모라는 사실을 내세워서 황후 욕심을 낼 수도 있지만 굳이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소정호는 일단 한족이고, 이 드라마에서 대기(抬旗)[4]를 받았다는 묘사도 없었기에 스스로가 황후가 될 수 없음을 모르진 않았을 거다.

4. 실제 역사

순혜황귀비 소씨건륭제의 왕부 시절 격격으로 들어가 건륭제 즉위 후 봉호 순수할 순(純)자를 받고 빈(嬪)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건륭 2년에는 비, 건륭 10년에는 귀비에 책봉되었다. 후에 황귀비로 진봉되었고 사망하기 8일 전 황귀비 책봉례를 받았다. 그녀는 계황후 휘발나랍씨, 효의순황후 위가씨를 제외하면 건륭제의 후궁들 중 유일하게 책봉식을 마친 여인이다.

순혜황귀비 소씨는 실제로는 46세에 사망하였고,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 초상화를 보면 제법 미인인 것을 알 수 있다. 건륭제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이중 장남은 다라순군왕 애신각라 영장이고 차남은 화석질장친왕 애신각라 영용이며 고명딸 화석화가공주[5]는 부찰 부항의 아들인 부찰 복륭안에게 시집간다. 순혜황귀비는 팔군기에 속해 있는 한군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건륭은 출기정책을 펼치면서 기인의 수를 줄이려고 했으나 소씨의 집안을 건륭 4년에 한군기 정백기 포의집안에 편입시켰다. 비록 만주족 성인 가(佳)를 받지는 못했으나 입기를 했다는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다.

참고로 팔기에 든 한족 후궁 또는 첩은 만주족 성씨를 써야 한다는 관례 비슷한 것이 있었다. 고귀비와 영귀비, 가귀비는 건륭제때 만주족 성을 받아서 고가씨, 위가씨, 금가씨가 되었다. 그런데 원래부터 만주족이었던 동가씨는 명나라때 한족에 투항하면서 동씨로 바꿨다. 만주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다시 만주족이 되었으나 지은 죄가 죄라서 바로 동가씨로 바뀌지는 못했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원래 성인 동가씨로 돌아왔다. 다만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The Tong in Two Worlds: Cultural Identities in Liaodong and Nurgan during the 13th-17th centuries에 의하면 다른 지역에 살던 한족이 주작한 것으로 나온다.[6]

그러므로 소씨가 만주족 성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위영락의 모티브가 되는 포의 출신의 효의순황후 위가씨보다 신분이 낮다는 뜻이 된다. 위가씨는 적어도 만군기 포의에 속해 있었기에 만주족 성씨도 받을 수 있었다. 순혜황귀비처럼 총애받은 다른 한족 출신 후궁들이 모두 고가씨, 위가씨, 금가씨[7] 등의 만주족 성씨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 민인이었기 때문에 대우가 시원찮았음을 알 수 있는데 사후 자신들의 아들들이 차기 황제 후보 자리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8]는 것을 생각하면 취급이 꽤 안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장가행의 곽성통(곽 폐황후), 의천도룡기 2009년판 은소소 역으로 유명한 배우로 한국에서는 TS샴푸 광고에 출연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2] 이 과정에서 부항의 짝이 좋은 집안의 규수면 그래도 이해하겠는데 왜 하필 영락 같은 천한 신자고 노비를 사랑하느냐고 대성통곡한다.[3] 비하인드 컷신에서는 소답응이 숙신의 이름을 부르짖다 환관들에게 목이 졸려 죽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방영본에서는 검열된 듯.[4] 팔기가문에 속하는 기(旗)를 변경시켜주는 것을 의미한다.[5] 하인들에게 항상 상냥하게 대해서 '불수공주'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6] The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에 따르면 이러한 한족의 만주족 세탁이 심했다고 한다.(사실 다른 민족들도 만주족으로 세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인들도 초기에 만주팔기로 배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세탁을 시도하기도 했다.) 불만을 표시하는 만주족들도 있었는데, 황제나 다른 고위직 만주족들이 타민족 동화 목적이 있었는지 만주족의 군사기술을 시험쳐서 통과하면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7] 금가씨는 조선 출신이다. 정확히 말하면 선조 때 조선에서 청나라로 귀화했다.[8] 장남인 3황자는 아예 건륭 13년 효현순황후 부찰씨의 장례식에서 애도를 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건륭제가 황위계승권을 박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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