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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white,#505050> 언어 | 왕족 칭호로써 | 제후 칭호로써 | ||
남성형 | 여성형 | 남성형 | 여성형 | |
한국어 | 공작·대공(大公)·대군[1] | 군주(君主) 또는 제후(諸侯)[2], 대공[3] | ||
라틴어 | Princeps[4] | Principissa | (좌측과 동일) | |
영어 | (Royal) Prince | (Royal) Princess | (Sovereign) Prince | (Sovereign) Princecess |
독일어 | Prinz[5] | Prinzessin | Fürst[6] | Fürstin |
프랑스어 | Prince (Royal) | Princesse (Royale) | Prince (Souverain) | Princesse (Souverain) |
이탈리아어 | Principe (Reale) | Principessa (Reale) | Principe (Sovrano) | Principessa (Sovrano) |
스페인어 | Príncipe (Real) | Princesa (Real) | Príncipe (Soberano) | Princesa (Soberano) |
러시아어 | [ruby(Принц ruby=Princes)] | [ruby(Принцесса, ruby=Princessa)] | [ruby(Князь, ruby=Knyaz)] | [ruby(Княгиня, ruby=Knyaginya)] |
에스페란토 | (Reĝino) Princo | (Reĝino) Princino | (Suverena) Princo | (Suverena) Princino |
우리는 흔히 'Prince'를 단순히 '왕자'로 배워왔다. 특히 학교에서 영어를 배울 때 'Prince = 왕자'로 외우도록 가르친 탓에, 그 이면의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Prince'는 중세 이후 유럽사에서 중요한 제후 작위와 왕실 작위로 사용된 용어다. 단순히 군주의 아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지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작위다. 군주의 아들들이 이 작위를 받는 일이 잦아 '왕자'로 번역되었지만, 이는 혈통과는 별개로 특정 작위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더구나 국가별로 사용 방식이 달라, 영국에서는 모든 왕자가 'Prince' 작위를 받는 반면, 스페인에서는 왕위 계승권자인 장남만 받는 등 차이가 있다.[7]
2. 유래
프린스(Prince)의 어원은 크게 라틴어 계통(Princeps)과 게르만어 계통(Fürst)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라틴어 Princeps
라틴어의 경우 로마 황제가 가지던 많은 직위 중 하나인 프린켑스(Princeps)[8]에서 비롯하였다. 로마 황제의 직위인 '군 통수권자'에서 황제 그 자체를 의미하도록 차용된 임페라토르(Imperator)나, 비슷하게 로마 황제의 직위였던 '수석대제관' 혹은 '최고사제'에서 교황의 칭호로 변모한 폰티펙스 막시무스처럼 로마 황제의 칭호가 이후 유럽 군주의 명칭으로 굳어진 예이다.
- 게르만어 Fürst
게르만어에서는 first와 어원을 공유하며, 태생이나 혈통이 고귀한 자, 으뜸인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봉건제 이전 부족제 시절에는 족장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이렇듯 양자 모두 '수석', '으뜸', '고귀함' 등을 내포하였기에 상통하는 말로 취급되었다.[9]
프랑크 왕국이 등장한 이래 중세 유럽은 게르만인 세력이 주도하게 되었는데, 지역마다 차이는 있으나 법률용어는 라틴어를 사용하고 실제 사용하는 언어는 게르만어의 영향을 받은 지역 언어를 쓰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게르만의 Fürst 칭호는 라틴어 Princeps로 옮겨졌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는 과정에서 서프랑크의 유산을 물려받아 국왕 중심의 정치질서를 유지하려는 성격이 강했던 서유럽의 왕국들과 대공위시대를 거치면서 제후 중심의 정치질서를 형성하게 된 신성 로마 제국은 필연적으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차이 외에도 언어적 측면에서도 서유럽권에서는 라틴어 어휘를 폭넓게 수용하여 프린스(Prince) 칭호로 정립된 반면, 독일 지역에서는 게르만어의 전통을 이어나려는 성향이 있었기에 퓌르스트(Fürst) 발음이 그대로 쓰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반된 태도는 칭호의 사용에 있어서 중대한 차이점을 불러왔는데, 서유럽권에서는 봉건질서에 편입된 영역제후들이 고대 로마에서 유래된 관직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고 프린스를 자처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으며, 반면 독일 지역에서는 황제가 영역제후를 퓌르스트로 공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문에 중세에 서유럽의 프린스들은 봉건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반독립적 세력의 자칭 칭호로 쓰인 반면, 독일에서는 퓌르스트가 황제에게 직접 신속된 제후 신분을 가리키는 개념이자 선제후(Kurfürst)·제국제후(Reichsfürst)·주교후(Fürstbischof) 등 공식적 지위의 칭호로도 폭넓게 사용된다.
근세까지 프린스와 퓌르스트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근대에 서유럽에서는 프린스 칭호가 왕족 전용 칭호로 자리잡게 되었고, 그 영향을 받아서 독일권의 통치 가문들도 구성원의 칭호로 'Prinz'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즉, 프린스는 독일어를 기준으로 제후 또는 군주의 칭호인 퓌르스트(Fürst)와 통치 가문 구성원의 칭호인 프린츠(Prinz) 개념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10]
2.1. 유의점
현대인들은 전통적인 왕실 제도나 귀족 체제에 관한 이해도가 낮다. 때문에 프린스(Prince)는 칭호(title)의 개념임에도 최근에는 서유럽 군주정 국가들의 왕자들에게 주로 쓰이는 칭호인 점에서, 현대인들은 이를 '왕자'라는 신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11]동아시아에도 전통적으로는 왕족 신분 개념과 작위 칭호는 별개의 개념이었다. 군주의 자녀는 정식으로 칭호를 받기 전에 황자(皇子)·황녀(皇女) 또는 왕자(王子)·왕녀(王女)로 칭해졌고, 정식으로 친왕·대군·공주 등으로 책봉된 뒤에야 공식으로 지정된 칭호인 봉호로 호칭될 수 있었다. 현대 한국어 화자들은 대체로 해당 개념을 정확히 구분하지 않기에, 일반적으로 왕자에 상대되는 어휘를 왕녀가 아닌 공주로 사용하듯, 칭호와 신분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혼용한다.
문제는 유럽의 프린스들은 실제로 왕자인 경우도 있지만, 리히텐슈타인이나 모나코 처럼 일부 나라에서는 군주의 칭호로 사용되고 있는 문제가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왕자가 아닌 귀족의 작위 칭호로도 쓰였다는 점에서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4세기 무렵부터 작위가 단순 상훈 개념으로만 사용되었고 실제로는 상징적인 영토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과 달리, 유럽에서는 14세기에 들어와서야 봉건제가 쇠퇴했으며 귀족 신분이 있는 나라들의 경우 귀족들의 작위가 현재까지도 어느정도 상징성이 유지되는 경우도 있다는 정서적 차이점도 존재한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군주의 공식 후계자에게 태자·세자라는 칭호만 부여했으나, 유럽에서는 왕족들에게 상속 서열을 공인하는 개념이 있었으며 최우선 상속인에게는 특정한 작위가 세습되는 전통이 있는 경우도 있는 차이점도 있다.
이러한 차이점들을 완전히 이해해야 프린스 칭호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2.2. 프린스의 위상 차이
유럽 지역에서 보편적인 귀족 작위는 라틴어를 기준으로 Dux-Comes-Baro 3종류다. 동아시아권에서는 이를 공작-백작-남작으로 번역하고, 대체로 Comes에서 파생되어 서열이 구분된 작위들을 오등작 개념에 끼워맞춰 후작이나 자작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서유럽의 프린스(Prince)나 신성 로마 제국의 퓌르스트(Fürst)는 원래 봉건제적인 작위 칭호가 아니었으며, 근세에 반독립적 지위를 갖고 있던 세력이 편입되는 과정에서 기존에 자칭해왔던 칭호가 승인되었거나, 군주 중심의 정치 질서가 확립되어 왕족을 예우하기 위해 도입되어 작위 체계에 들어온 것이다.
또한 근세에 정립된 유럽 귀족의 서열 관념에서는 작위의 서열에 앞서 신분의 서열이 우선되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근세에는 중세 시절과는 달리 공작(Dux)이나 프린스가 주권을 공인받는 사례들이 생겼으며,[12] 이에 따라 작위 칭호의 서열에 앞서서 주권자 신분인지, 왕족 신분인지, 단순 귀족 신분인지에 따른 신분 구별이 필요하다. 또한 귀족이라 하더라도 준군주 신분으로 예우하도록 공인된 독일 연방의 슈탄데스헤어나 스페인의 그란디(Grande)와 처럼 일반 귀족보다 서열이 높은 별도의 신분이 제정된 경우도 있다.
따라서 프린스 계통 칭호는 군주·제후나 공작·후작 가운데 어느 하나로 일률적으로 정의하여 번역하기보다는, 개별 사례마다 그 성격을 파악해야할 필요가 있다.
2.2.1. 군주 지위 예시
국가/문화권 | 작위의 표기 | 대상 | 사용 상황 및 의미 |
중세 유럽 | Prince | 작은 영토의 군주 | 중세 봉건제에서 소규모 영토를 통치하는 독립 군주. |
슬라브족 | Князь(Kniaz) | 초기 슬라브의 지방 군주 | 본래 독립적인 지역 군주를 뜻함. 후기에 귀족적 의미로 축소됨. |
리히텐슈타인 | Fürst von Liechtenstein | 리히텐슈타인 대공 |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 중 유일하게 주권국가로 현존. |
모나코 | Souverains de Monaco | 모나코 대공 | 독립 군주의 칭호로 사용. 모나코의 통치자로, 세습 군주제 하에서 국가를 대표. 예: 알베르 2세. |
안도라 | Co-Prince | 안도라의 공동 군주 | 전통 협약에 따라 프랑스 대통령과 우르헬 주교가 공동 군주로 역할. |
2.2.2. 왕족 작위 예시
국가/문화권 | 작위의 표기 | 대상 | 사용 상황 및 의미 |
영국 | Prince | 왕의 직계 자녀 및 왕족 | 왕의 아들에게 주로 수여. 상징적 칭호 예: Prince of Wales(태자) Prince of Sussex(현재 해리 왕자가 보유) |
프랑스 | Prince du Sang | 왕가의 직계 혈통 | '왕가의 피'를 의미. 왕의 방계 자손이나 가까운 친척에게 부여. |
Prince de... | 공작의 적자 | 프랑스 왕실 방계 가문의 후손에게 명예 칭호로 사용. 혈통 강조. | |
Prince of France | 황제(나폴레옹)의 친인척 | 프랑스 제국에서 나폴레옹 일가 친척들에게 사용. | |
독일 | Prinz | 왕족 및 방계 친족 | 군주 또는 슈탄데스헤어 일가의 직계 상속자가 구성원이 공유. |
러시아 | Князь(Kniaz) | 황족 및 고위 귀족 | 1866년 이후 벨리키 크냐지(Великий Князь)를 칭할 수 없는 방계 황족이 사용. |
오스만 제국 | Şehzade(셰자데) | 파디샤의 직계 왕족 | 단순한 왕족으로서의 신분을 나타냄. 군주적 권한은 없으며, 의례적 지위를 강조. |
중국 | 親王 | 직계 황족 | 황자(皇子) 또는 황제의 친형제에게 수여되는 지위. |
조선 | 군(君) | 종친 | 세자·세손이 아닌 왕족에게 부여. 중전 소생의 왕자일 경우 대군으로 봉함. |
일본 | 왕(王) | 황족 | 황실의 직계 자손. 일부 황족의 경우 친왕으로 격상함. |
사우디아라비아 | 아미르 | 사우드 가문의 모든 남성 구성원 |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의 구성원 약 15,000명 모두에게 수여됨. 영어로 번역시 'Prince'. 무함마드 빈 살만 (Amir Mohammed bin Salman) |
2.2.3. 귀족 작위 예시
- 독일의 Fürst
신성 로마 제국에서 Fürst는 황제로부터 상당한 독립적 지위를 승인받은 제후들로, 1648년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국제적으로 주권이 공인되기도 했다. 다만 유의해야할 점은 당시 영방국가에 오늘날의 주권국가와 동일한 지위가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영방국가들에는 독자적인 통치권과 외교권이 인정되었으나, 그것이 신성 로마 황제 및 제국법에서의 독립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이 해산되었음에도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프로이센 왕국처럼 강대국이 아닌 영방국가들은 사실상 프랑스 제국에 종속되었으며, 1815년에는 독일 연방이 결성되어 그 구성국으로 편입되어야 했다.
- 오랑주 공국
본래는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의 제후국인 오라니엔(Oranien) 백작령이었으나, 1163년에 황제로부터 제국제후(Reichsfürst) 지위를 공인받았다. 1544년에 통치 가문이 나사우 가문으로 바뀌었는데, 이후 나사우 가문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실질적인 통치 가문이 되기도 했다. 1672년에 프랑스과 네덜란드 간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오랑주 공국은 프랑스군의 침공을 받아 점령당했다. 나사우 가문이 칭호를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 프랑스 측에선 부르봉 왕조의 방계 가문인 콩데 공(Prince de Conti)이 오랑주 공(Prince de Orange)을 겸하도록 조치했는데, 1713년에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랑주 공국은 프랑스에 정식으로 합병되었지만 작위 칭호는 나사우 가문이 계속 사용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이후 나사우 가문이 네덜란드의 왕위를 갖게 되면서 오라녀 공(Prins van Oranje)은 네덜란드 국왕의 후계자가 세습하는 칭호가 되었다.
- 외교의 달인 메테르니히 후작
근대 독일에서 Fürst는 공작(Herzog)보다 낮지만 백작(Graf)보다 높은 점에서 후작 서열의 작위로 확립되었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이 붕괴될 무렵부터는 유력 선제후국에서도 자국 내부의 일반 귀족 작위로 Fürst 칭호를 도입하기도 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트리어 선제후를 배출한 메테르니히 가문 출신으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무장관으로 등용되어 전후 유럽의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빈 회의를 주도했다. 그는 1813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귀족 작위인 '후작(Fürst)'이 되었다. 메테르니히는 외교적 책략과 유머로 유명했는데, 한 번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사적 압박에 대해 "우리는 프랑스군을 이기지 못하지만, 프랑스의 오만함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2.3. Prince에 대응하는 여성 군주로서의 프린세스
'Princess'라는 칭호가 군주로서 사용된 사례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군주제는 남성 우선 상속 체제를 기반으로 했다. 중세 봉건제에서는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군사적 책임이었다. 왕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거나 군대를 지휘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 여성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는 여성 통치자가 등장할 가능성을 제한했으며, 여성 군주가 등장하더라도 'Princess'라는 단어는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우려가 있어 'Princess' 대신 'Queen'이나 'Queen Regent'와 같은 다른 칭호를 사용했다. 따라서 'Princess' 칭호가 군주적 지위를 나타낸 사례는 주로 소규모 공국(Principality)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공국은 규모가 작고 독립성이 약해, 여성 통치자가 'Princess' 칭호를 달고 군주로서 기록될 수 있었다.- 루이즈 이폴리트(Louise Hippolyte)
국가: 모나코 공국
재위 기간: 1731년 2월 20일 ~ 1731년 12월 29일
루이즈 이폴리트는 모나코 공국의 통치자로, Sovereign Princess 칭호를 가진 유일한 여성 군주였다. 그녀는 아버지인 앙투안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당시의 사회적 한계로 인해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하기보다는 남편 자크 프랑수아 드 고요 드 마튀냥과 공동 통치를 해야 했다. 그녀의 재위는 짧았지만, 모나코 역사에서 유일한 여성 Sovereign Princess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콩스탕스(Constance of Antioch)
국가: 안티오키아 공국
재위 기간: 1130년~1163년
콩스탕스는 아버지 보에몽 2세의 뒤를 이어 안티오키아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섭정 체제 아래에서 통치권이 행사되었다. 이후 그녀는 여러 차례 혼인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며 십자군 국가의 복잡한 정치적 환경에서 공국을 다스렸다. 콩스탕스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Sovereign Princess로 기록되었으며, 당시의 혼란 속에서도 공국의 명맥을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번역
위에서 살펴볼 수 있듯, 한자문화권의 언어에서는 유럽의 프린스와 일치하는 어휘가 따로 없다. 특히 작위 칭호인 프린스를 번역할 때에는 개별 사례마다 그 성격을 파악한 뒤에 상황에 맞게 적절한 번역어를 선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군주(君主)
프린스 어원의 의미를 가장 살린 번역으로, 특히 '통치자'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쓰일 때는 해당 번역이 가장 적절하다. 일례로 니콜로 마키아벨리 저서 인 《Il Principe(영어: The Prince)》는 동아시아권에서 《군주론》으로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작위 칭호를 구성하는 고유명사로 쓰일 때는 다소 어색한 경우가 발생하는데, 근세 서유럽 왕족의 프린스 칭호나 신성 로마 제국·독일 등의 프린스는 군주 신분의 칭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 제후(諸侯)
신성 로마 제국의 퓌르스트(Fürst)를 번역할 때 가장 적합한 번역이 된다. 유럽에는 동아시아권의 제후와 같은 개념은 없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퓌르스트 개념과 가장 유사한 한자어 어휘는 제후이기에 통용되고 있는 번역어이기도 하다.
역사학 용어로 중세 10~12세기 무렵 자생적으로 등장한 군소 유력자들을 'Castellan(성주)'로 분류하면서, 이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공식 작위를 보유한 유력 상급 제후들을 '(territorial) Prince'로 정의하는데 이는 '영역제후'나 그 약칭인 '제후'로 번역되고 있다.
- 대공(大公)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유럽 왕가의 황태자나 소국(小國)의 군주를 의미하는 단어로 '대공'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서유럽의 왕족 프린스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공작(Duke)보다 대체로 우월한 신분으로 여겨지는 점에서 프린스를 대공으로 번역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어보인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독일어권의 Großherzog·Erzherzog나 슬라브권의 Великий Князь 등도 대공으로 번역되고 있어서, 프린스를 무작정 대공으로 번역하기가 다소 난감한 경우도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문제는 대공(작위) 문서나 후국 문서 참조.
- 공작(公爵)
서유럽 왕족의 프린스 작위를 번역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채택된다. 일례로 영국의 Prince of Wales의 경우, 주한영국대사관측에서 공식 번역으로 '웨일스 공'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 마찬가지로 공작으로 번역되는 Duke(Herzog)와 구분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슬라브권에서는 프랑크 왕국에서 기원한 Duke(Herzog) 작위를 도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서유럽권에서 대체로 프린스로 번역되고 있는 [ruby(Князь, ruby=Knyaz)] 칭호를 그대로 공작으로 번역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다.
- 후작(侯爵)
16세기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이나 근대 독일의 퓌르스트(Fürst)에 한정해서 적합한 번역으로, 독일어 사전의 뜻풀이에서도 "(15~16세기 이후) 후작"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는 16세기까지 퓌르스트는 주로 황제 직속의 상급 봉신들을 통칭하는 범칭으로 쓰였기 때문이며, 퓌르스트가 공작(Herzog)과 백작(Graf) 사이 서열의 공식 작위로 완전히 자리잡은 것은 신성 로마 제국 말기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 이외의 프린스를 후작으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데, 서유럽권에서는 Marquess(영어)·Marquis(프랑스어) 등이 '후작'으로 번역되고 있기 때문이며, 동유럽 슬라브권에서는 프린스로 번역되고 있는 'Князь'는 'Великий Князь(대공)' 같은 칭호와 연계를 고려하면 '공작'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퓌르스트는 군주적 지위를 갖는 칭호이기에 이를 '후작'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나,[13] 독일어권에서 퓌르스트는 영방국가의 주권자에게만 한정되어 쓰인 칭호가 아니다. 일례로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했다가 1815년에 복구된 헤센 선제후국은 프랑스 제국이 직할령으로 점거하고 있던 월경지인 카체넬른보겐(Katzenelnbogen) 백작령을 처분하기 위해 이를 프로이센 왕국에 매각했다. 문제는 해당 영토는 헤센 가문의 분가인 헤센-로텐부르크와 공동 소유지였다는 점이었다. 이에 프로이센 측에서는 헤센-로텐부르크에 '라티보르 공작(Herzog von Ratibor)' 및 '코르베이 후작(Fürst Corvey)' 작위를 수여하여 해당 거래를 성사시켰다. 라티보르 공작과 코르베이 후작은 주권이 공인되는 지위가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준군주적 지위인 슈탄데스헤어 신분도 아닌, 단순한 프로이센 왕국의 일반 귀족 작위였다. 즉, 근대에 독일에서는 퓌르스트가 공작과 백작 사이의 작위 칭호로 완전히 자리잡은 것이다.
- 친왕(親王)
한국어 화자들이 프린스를 일괄적으로 왕자로 번역하는 사례와 유사하게, 중화권에서는 자신들에게 더 친숙한 어휘인 '親王(亲王)'으로 일괄 번역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그 영향을 받아서 프린스를 '친왕'으로 옮기는 사례도 있다. 다만 무작정 '왕자'로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린스를 모조리 친왕으로 옮기는 것은 부적절하거니와, 한국어 화자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친숙한 어휘도 아닌 문제가 있다.
- 군(君)
일각에서 프린스 작위의 번역어로 제시하기도 한다. 프린스 작위가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쓰인 작위가 아니었고 한자문화권에선 오등작이 일반적인 작위로 인식되고 군작이 비정규 작위로 쓰였던 점에서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통치 작위의 경우 '국군(國君)'으로 옮기거나, 왕족 작위를 '대군(大君)' 등으로 옮기는 등, 일부 표현을 덧붙이면 범용성 있는 번역이 될 수 있다는 이점이 제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군작은 원 간섭기에 제후국의 작위로 제정한 것이기에, 대체로 오등작보다도 낮은 지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문제가 있다. 또한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에서 군작을 정식 작위 칭호로 도입한 사례도 없기에, 프린스를 군작 개념으로 번역하는 시도는 그다지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3.1. 잘못된 번역 예시
- Prince of Monaco를 모나코 왕자라고 번역하는 경우, 왕자가 군주 역할을 하는 듯한 혼란이 발생한다.
-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도 주인공은 왕자가 아니라 소행성 B-612호의 '군주'이다.
- Prince of Wales'를 '웨일즈 왕자'로 오역한 사례는 'Prince'가 영국 왕태자를 뜻하는데도, 단순히 '왕자'로 번역하여 왕태자라는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 사례이다.
- 해리포터 혼혈 왕자(Harry Potter and the Half-Blood Prince)에서 'Prince'는 왕자가 아닌 Prince 가문을 뜻한다.
4. 사례
4.1. 독일어권
- 초기 게르만 사회와 프랑크 왕국(5세기~9세기)
'Fürst'는 게르만 부족 사회에서 수장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로 사용되었다. 프랑크 왕국(481년~843년)에서는 지역 지도자를 칭하거나, 로마의 후원받는 귀족 지위와 유사하게 쓰였다.
- 신성 로마 제국 초기(962년~13세기)
962년 오토 1세의 황제 대관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되면서 'Fürst'는 황제의 직속 봉신을 지칭하는 범칭으로 자리 잡았는데, 초기에는 황제에게 직접 충성을 맹세하는 제후라면 누구든 자칭하는 것이 가능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Herzog)들은 매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 황권을 크게 위협했는데, 후세에는 그러한 영향력을 두고 '부족 공국'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 정도였다. 황제로 선출된 이들의 주요한 정책은 그러한 공작들의 세력과 권위를 축소시키는 것에 있었다.
오토 1세가 공작령을 축소하고 그 대신 고위 성직자들을 영주로 임명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주교후(Fürstbischof),[14] 수도원장후(Fürstabt), 사제장후(Fürstpropst) 등이 등장했다. 이들을 통칭하여 '성직 제후'라고 부른다. 성직자는 결혼을 할 수 없기에 세습되지 않으며, 당시에는 황제가 성직자를 자기 입맛대로 서품할 수 있었던 점을 노리고 시행한 정책이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황제가 직접 Fürst를 공인하는 '제국제후(Reichsfürst)' 제도를 시행했는데, 공작(Herzog)의 신분적 권위를 다른 황제 직속의 제후들과 동등하게 낮추려는 의도로 도입한 것이었다.
하지만 11~12세기 동안 황제와 교황이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성직자의 서품권은 교황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특히 대공위시대를 거치며 황권은 크게 약화되어 영역제후들은 같은 시기의 서유럽과는 다르게 황제에게서 상당한 정치적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흐름의 결과, 성직 제후 정책이나 제국제후 정책은 본래의 의도와 달리 제후의 독립적 지위를 보장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성직 제후는 제국 내 유력 제후들이 황제 선거 과정이나 교황과의 거래를 통해 적당한 가문 구성원을 꽂아 넣어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자리로 변모되었다. 제국제후 또한 결과적으로 제후의 신분을 보장하고 독립적 권한을 공인하는 제도로 전락한 것이다.
- 1356년 금인 칙서
황제 선출 권한을 갖는 선제후(Kurfürst)가 공식화되고, 그 지위 또한 제국 내 모든 제후에 우선하도록 지정되었다.[15] 이후 선제후가 되지 못한 유력 제후들을 달래기 위해 공작(Herzog)을 선제후에 버금가는 지위로 공인했다. 그 결과 선제후나 공작들은 Fürst 칭호보다는 본래의 지위를 내세우길 선호하게 되어, Fürst는 점차 백작(Graf)급 제후들의 통칭으로 자리잡는다.
- 신성 로마 제국 15~16세기
선제후나 공작들이 휘하 봉신을 백작으로 임명하는 사례가 일반화되자, 황제의 직속 제후들은 자신들과 봉신 백작들을 구분짓고자 Fürst 칭호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16] 16세기 무렵부터는 제후들 가운데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영지들을 후국(Fürstentum)으로 통합하는 것을 승인해달라고 황제에 요청하여 이를 관철하는 사례들도 생겨남에 따라, 'Fürst' 칭호는 공식 작위화되었다.
한편 제국의회가 상설화되면서 '제국제후(Reichsfürst)'는 단독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로 자리매김한다. 다만 제국제후로 지정되는 것이 그 영지를 후국(Fürstentum)으로 승인하는 개념은 아니었고, 반대로 후국(Fürstentum)으로 승인된다고 해서 그 제후가 무조건 제국제후 지위를 얻는 것 또한 아니었다. 때문에 Fürst 중에는 제국백 신분으로 공동투표권을 행사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황제의 직속 제후들은 유럽의 국제사회에서 주권이 보장되었다. 이에 백작급 제후의 영방국가들이 후국(Fürstentum) 지위를 승인받으려는 경향이 보편화되어, 'Fürst'는 공작보다 낮지만 백작(Graf)보다 높은 위상을 확립하게 되었다.
또한 서유럽권의 영향을 받아 일부 영방국가의 통치 가문들이 가문 구성원의 칭호로 '프린츠(Prinz)'를 도입하기도 했다. 본래 중세 유럽에서는 귀족의 작위 칭호는 소유 가문의 수장이 독점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 구성원 전원이 공유하는 칭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영방국가에 주권이 공인되자 통치 가문의 대표 작위는 주권자가 독점하는 것이 일반적인 외교 관례를 따르게 되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 나폴레옹 전쟁~독일 연방(1803년~1866년)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이 해산되고 라인 동맹이 출범했으나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1815년에 독일 연방이 결성되는 정치적 격동이 이뤄지는 가운데, 독일의 영방국가는 40여개 가량으로 정립되었다. 기존 선제후국은 왕국 또는 대공국 지위로 공인되었고, 그외의 영방국가는 대체로 공국(Herzogtum) 또는 후국으로 재편되었다. 해체된 영방국가의 통치 가문과 제국백 가문들은 독일 연방에서 슈탄데스헤어라는 신분을 얻게 되었는데, 슈탄데스헤어 작위 서열 역시 공작(Herzog)-후작(Fürst)-백작(Graf) 순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산될 무렵부터 일부 선제후국에선 자국 내의 일반 귀족 작위로도 공작(Herzog)과 백작(Graf) 사이에 후작(Fürst)을 도입했다. 프로이센 왕국은 1848년에 대대적인 행정개혁을 단행하여 기존 신성 로마 제국 시절에 유래된 개별 영지 단위를 통폐합하여 주(Province)를 도입했으며, 1850년에 같은 가문 소속이긴 했으나 주권이 공인된 영방국가 지위였던 호엔촐레른헤칭겐·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후국을 완전히 합병했다.
또한 독일 연방 시점에는 메클렌부르크 가문이나 올덴부르크 가문 등 일부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통치 가문들이나 슈탄데스헤어 가문에서 그 구성원의 칭호로 프린츠(Prinz)를 사용했다. 때문에 가문의 대표칭호는 백작(Graf)임에도 그 구성원이 프린츠 칭호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왕국에서는 최우선 왕위 계승자에게 'Kronprinz'(영어 Crown Prince) 칭호를 수여하기도 했다.
- 독일 제국(1871년~1918년)
독일 제국의 제후국으로 통합된 영방국가의 통치 가문들은 비록 주권을 상실했으나 나름 제국의 구성국으로서 기존의 지위를 이어갔고, 그 외 슈탄데스헤어의 특수한 지위 또한 그대로 인정되어, 독일 연방 시절에 비하면 실질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다.
- 현대 독일(1918년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군주제가 폐지되어, 황실인 호엔촐레른 가문을 포함한 구성국의 통치 가문들 또한 슈탄데스헤어와 유사한 신세가 되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슈탄데스헤어 및 일반 귀족들의 법적 지위도 모두 박탈되었다. 하지만 다수의 귀족 가문은 기존의 작위를 칭호를 자칭하거나 프린츠(Prinz) 등을 자처하고 있어, 귀족 전통을 이어가는 상징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4.1.1. 독일권의 군주·제후급 칭호 비교
독일 | 한글 | 영국 | 프랑스 | 설명 |
Kaiser | 황제 | Emperor | Empereur | 신성 로마 제국 및 독일 제국 최고 군주 |
Kurfürst | 선제후 | 독일왕을 선출할 권한을 갖는 최고위 제후 | ||
König | 왕 | King | Roi | 독일왕, 나폴레옹 전쟁 이후 선제후였던 군주 |
Großherzog | 대공 | 신성 로마 제국 해산 이후 왕위를 공인받지 못한 선제후 | ||
Herzog | 공작 | Duke | Duc | 선제후보다 서열이 낮은 제후 |
Fürst | 후작 | Prince | Prince | 공작보다 서열이 낮은 제후 |
Graf | 백작 | Earl | Comte | 공작보다 서열이 낮은 제후 또는 선제후·공작의 봉신 |
Kronprinz | 태자 | Prince of Wales | Dauphin | 왕위 계승권자의 칭호로 사용 |
Prinz | 왕자 | Prince | Prince | 통치 가문 또는 슈탄데스헤어 가문의 구성원 |
독일에서 왕은 'König'이었는데, 신성 로마 제국 시절에는 제국 내부에선 황제(독일왕) 이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칭호였다. 황제 선거라는 제국 내부의 정치적 사정으로 보헤미아 공작이나 프로이센 공작이 왕으로 승격된 사례는 있었으나, 이들도 제국 내부에서는 선제후 지위를 내세우는 편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일부 선제후가 왕위를 공인받았고, 그렇지 못한 선제후들은 대공 지위를 공인받는 데에서 그쳤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한 독일 연방의 구성국들은 프로이센 왕국에 직접 합병된 사례들을 제외하면 독일 제국 시절에도 구성 제후국의 일부로 남았다.
-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선제후’(Kurfürst)의 갈등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Fürst’ 칭호를 가진 제후들이 황제선거에 참여할 권한을 가졌으며, 이들은 ‘Kurfürst’(선제후)로 불렸다. 선제후는 제국 내에서 독립적인 군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황권을 제한하였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며 제후들에게 세금 부과를 시도했으나, 가장 큰 세력이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는 가장 큰 반 황제 세력이었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 및 다른 제후들과 함께 이를 강력히 거부하며 제국 내 자치와 독립성을 주장했다. 황제는 여러 차례 세금 납부를 설득하고 협상을 시도했지만, 영방국가들의 지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군사적 대응은 불가능했다. 특히 황제는 선제후의 지지를 기반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선제후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3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의 저항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선제후들은 황제를 선출할 때마다 황권을 제한하는 조건을 내세웠다. 대표적으로, 1356년 룩셈부르크 가문의 황제 카를 4세의 금인 칙서(Golden Bull)는 선제후들의 특권을 공식화하며 황권을 더욱 약화시켰다. 신성 로마 제국은 약 300개의 독립적 제후국으로 구성된 느슨한 연합체에다가 제국의회 등 황권을 제한하는 장치가 한가득이었기 때문에 황제는 제후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중앙집권제를 이루지 못했다. 한편, 주변 강대국들은 이러한 신성 로마 제국의 약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프랑스, 스웨덴, 프로이센 왕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등은 영방국가와 동맹을 맺거나 갈등을 조장하며 제국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내부적 분열과 외부적 압력이 결합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허울뿐인 껍데기만 남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서서히 황권 행사를 포기하고 보헤미아 왕관령,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 자신들의 세습 영토 경영과 확장에 주력했다. 나폴레옹 전쟁은 결정타가 되었고, 1806년 프란츠 2세가 황제 지위를 포기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1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뒤로한 채 해체되었다.
- Fürst von Liechtenstein
오스트리아 빈이 근거지였던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원래 합스부르크 가문의 봉신인 남작이었다. 가문의 시조인 카를 1세는 루돌프 2세에게 등용되어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재상(Obersthofmeister) 직위를 맡았었다. 루돌프 2세는 무능으로 인해 신망을 잃었기에 1606년부터 그 동생인 마티아스 대공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카를은 여기에 합류하여 마티아스를 지지했고, 그 보답으로 마티아스는 1608년에 신성 로마 황제 자격으로 카를을 제국제후(Reichsfürst)로 지정했다. 이후로도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에서 활약하며 많은 재산과 영토를 받기도 했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에서는 해당 사례를 근거로 퓌르스트(Fürst)를 자처했으나, 본질적으로 신성 로마 황제의 직속 제후가 아닌 합스부르크 가문의 봉신 신분이라는 점에서 대외적인 공인을 받지 못했다. 이에 1699년에 황제의 직할지였던 셸렌베르크 령(Herrschaft Schellenberg)을 매입했으나, 여전히 황제 직속 제후 신분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결국 1712년에 인근의 파두츠 백작령(Grafschaft Vaduz)을 매입한 뒤 두 영지를 후국(Fürstentum)으로 통합하는 것을 황제에게 신청했으며, 1719년에 이를 승인받고 나서야 황제의 직속 제후 신분을 공인받게 되었다.
하지만 20세기 무렵까지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정작 후국 내부의 사정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오스트리아의 장교나 외교관 등을 역임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봉신으로 활동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후국이 프랑스 제국의 괴뢰 신세가 되어 오스트리아의 적국이 되었음에도, 당시의 주권자인 요한 1세 요제프는 오스트리아군의 지휘관이자 외교사절로 활동하는 기괴한 모습도 연출되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도 리히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곁다리 취급을 받았고, 오스트리아 제국과 함께 '독일'에서 퇴출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주권국가가 되었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망한 뒤에도 계속 오스트리아에 머물렀으나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뒤에야 리히텐슈타인으로 이주했다.
- 빌헬름 황태자(Kronprinz)와 제1차 세계 대전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빌헬름 크론프린츠(빌헬름 2세의 맏아들)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을 이끌었다. 그는 젊고 활발한 성격으로 대중적 인기가 있었지만, 전쟁 중 그의 리더십은 종종 비판받았다. 특히 그는 서부 전선에서 여러 실패를 경험했는데, 프랑스와의 베르됭 전투에서는 독일군의 참혹한 피해를 초래하며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 이후 망명 생활 중 그는 사냥과 파티를 즐기는 모습으로 대중의 비난을 받으며 스스로를 "고독한 황태자"라 부르기도 했다.
- 루트비히 2세 Prinz와 '백조의 성'
'프린츠'는 독일에서 왕족이나 귀족의 남성 자손을 의미한다. 루트비히 2세 프린츠는 공식적으로는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이었지만, '백조의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자신의 환상적인 건축물, 특히 노이슈반슈타인 성으로 유명하다. 이 성은 디즈니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 성의 모델이 되었다. 루드비히는 평소 현실 세계보다 자신만의 판타지와 예술 세계에 심취해 있었고, 이는 결국 그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 '작센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아우구스트 2세로 선출되기도 했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드레스덴을 예술의 중심지로 바꾸었고, 드레스덴은 '엘베의 피렌체'라는 별명을 얻었다. 재미난 일화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자신의 예술 수집품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한 화가에게 "나를 위한 최고의 작품을 가져오지 않으면 내 성에서 나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4.2. 프랑스
4.2.1.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의 작위는 중세 시절부터 성립된 봉건 계약들을 통해 관습적으로 성립되었으며, 법제화된 제도로서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왕국의 영토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종래에 프린스 칭호를 사용하던 외부 세력이 프랑스 국왕과 봉건계약을 맺고 프랑스 귀족으로 편입되기도 했고, 모나코처럼 국왕으로부터 주권을 승인받으면서 형식상 봉신 관계를 맺은 프린스도 있었다.또한 역대 국왕들은 다양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는데, 작위 칭호의 근원이 되는 봉건제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는 적통의 단절을 명분으로 봉신의 영지를 회수하거나 왕실에서 직접 국내·외의 영지들을 매입하는 등의 방식으로 왕실 직할령을 늘려나가는 정책을 시행했다. 왕실 직할령으로 편입된 영지들은 공작령(Duché)이나 후작령(Marquisat)으로 재구성되어 왕족들에게 분봉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국왕이 지방관들을 파견하여 통치 권한을 행사했기에, 왕족들은 명목상의 작위를 보유할 뿐이었다. 16세기 무렵부터 각지에 분봉된 왕족들의 영지를 공국(Principauté)으로 승격시키는 형식으로 왕족들의 칭호를 프린스(Prince)로 격상시키고 종래의 작위 칭호도 그대로 겸하게 했다. 이렇게 등장한 프린스 작위는 아래와 같이 분류된다.
- Princes du sang(혈통의 프린스)
왕실 직계 혈통을 따르는 남성 후손을 가리킨다. 왕위 계승권이 있는 왕족만을 포함하며, 왕의 아들, 손자, 증손자 등이 해당된다.
- Princes légitimés(합법적 프린스)
왕의 사생아 중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후손을 의미한다. 이들은 종종 왕위 계승권이 없지만, 특정 상황에서 인정되거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한다. 왕족으로 예우를 받긴 했으나, 공식적으로 왕족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인 준왕족이었다.
- Princes étranger(외국의 프린스)
외국 왕족들을 의미한다. 프랑스 국왕이 주권을 공인했거나 해외 왕조의 후예로 공인한 경우에 해당되며, 사실상 준왕족으로 예우 받았다.
프랑스 국왕으로 공인된 프린스들은 대표 작위 하나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대체로 몇 종류의 작위를 겸했는데, 이렇게 겸임하고 있는 작위들 간의 서열을 따질 경우에는 공작(Duc) 작위를 프린스 작위보다 우선하는 서열로 사용했다. 이렇듯 겸임하고 있는 프린스 작위를 'Princes de titre(명목상 프린스)'로 분류하기도 한다.
17세기 무렵이 되면 프랑스 국내에서 일반 귀족이 국왕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은 '공국(Principauté)'을 보유한 경우는 사라졌다. 즉, 17~18세기에 왕족·준왕족이 아닌 일반 귀족 프린스는 좋게 말해서 작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경우고 실질적으로는 작위 칭호를 사칭하는 사례에 해당된다.[17]
4.2.1.1. 프랑스 왕국의 작위 비교
계급/칭호 | 설명 | 외국 비교 |
왕(Roi) | 프랑스 왕국의 군주. 절대 권위와 신의 대리자로 간주됨. | 영국: King |
태자(Dauphin) | 왕위 계승자의 공식 칭호. 14세기부터 도팽 지역과 연결된 상징적 칭호. | 영국: Prince of Wales |
프린스(Prince) | 중세의 Princeps(Fürst) 칭호에서 유래. | 영국: Prince[18] |
공작(Duc) | 프랑크 왕국 시절 공작(Dux; Herzog)에서 유래. | 영국: Duke |
후작(Marquis) | 프랑크 왕국 시절 변경백(Marchio; Markgraf)에서 유래. | 영국: Marquis |
백작(Comte) | 프랑크 왕국 시절 백작(Comes; Graf)에서 유래. | 영국: Earl(백작) |
자작(Vicomte) | 본래 백작의 가신이었으나, 독립하여 프랑스 국왕과 봉건계약을 맺음. | 영국: Viscount |
남작(Baron) | 국왕에게 직접 봉토를 하사받은 영주. | 영국: Baron |
비담(Vidame) | 본래 주교의 가신이었으나, 주교를 배반하여 프랑스 국왕과 봉건계약을 맺음. | |
영주(Seigneur) | 국왕과 봉건 계약이 체결된 봉신이나 공인된 지위를 받지 않은 경우. |
프랑스의 프린스는 대체로 공작(Duc)과 유사한 격으로 여겨졌다. 왕족·준왕족의 경우에는 공작보다 높은 서열로 여겨졌으나, 대표 작위가 프린스인 일반 귀족이라면 대체로 신성 로마 제국의 퓌르스트(Fürst)의 사례에 따라 공작보다는 낮은 격으로 보았다.[19] 16세기부터 프린스는 점차 왕족 전용의 칭호로 자리잡았다.
사실 프랑스에서 작위 칭호의 서열은 명확하게 규정된 바가 없으며, 굳이 따지자면 그 당시의 관례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다고 하는 편이 그나마 정확하다. 일례로 남작(Baron)의 경우, 13세기 후반 무렵[20]에 처음으로 국왕이 하사하는 작위로 도입될 당시에는 국왕 직속의 제후 신분으로 여겨졌기에 상당히 영예로운 칭호였다. 하지만 국왕이 해당 작위를 매작하는 사례가 빈번했고,[21] 프랑스 왕국의 영토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외국의 남작들도 지속적으로 편입되었기에, 이미 14세기 전반에 이르면 남작 작위의 권위는 다른 외국의 사례와 크게 다를바 없게 되었다.[22]
-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에 대항한 루이 13세의 친동생 Prince 가스통의 반란
가스통 도를레앙(Gaston d’Orléans)[23]은 ‘Prince de Sang’이자 Orléans 공작으로, 왕의 혈통을 강조하며 자신을 왕위 계승자 또는 정치적 대안으로 내세웠다. 루이 13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상황에서 가스통은 귀족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반란을 주도했다. 가스통은 루이 13세에게 "형님은 왕이지만, 왕국은 왕의 의지만으로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귀족들의 뜻을 듣지 않는다면 왕국은 분열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루이 13세는 "나는 신이 선택한 왕이다. 귀족들이 왕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반역이다."라며 단호한 입장을 내놓았다. 결국 가스통은 1626년 샬레 공모 사건 (Conspiration de Chalais)과 1630년 '듣기 좋은 날의 음모'(Journée des Dupes) 사건 그리고 '1642년 생마르 음모 사건 (Cinq-Mars Conspiracy) 등의 반란을 일으킨다. 가스통은 루이 13세에게 3번이나 붙잡혔지만 친동생이라는 이유로 루이 13세는 그를 처형하지 않고 정치적 권한만 제한한 채 풀어준다.[24] 이후 ‘Prince de Sang’ 칭호는 프랑스 혁명 전까지 왕족의 권위를 상징했지만, 혁명 이후 귀족 사회의 몰락과 함께 정치적 의미를 상실했다.
- 프랑스의 Prince de Conti
루이 14세는 그의 사촌에게 'Prince de Conti'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는 실제 영토가 없는 명예 칭호였다. Conti 가문은 왕실의 특권을 유지하고 싶어 했으나, 루이 14세는 이들을 정치적으로 배제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결국 Prince de Conti는 실질적 권력이 없는 상징적 칭호로 남았다.
-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루이 14세의 동생 필리프 1세, 오를레앙 공작은 루이 14세와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필리프는 전투에서도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그의 화려한 의상과 사치스러운 파티로 더 유명하며 태양왕이라는 별칭을 가졌다. 특히, 그는 궁정에서 여성의 패션과 메이크업에 관심이 많아 종종 여장을 하고 춤을 추곤 했다. 그의 독특한 성격은 당시 프랑스 궁정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프랑스 왕태자 Dauphin(도팽)의 비극
'Dauphin'은 프랑스 왕국의 왕태자를 지칭하며, 루이 16세의 아들 루이 샤를 (루이 17세)의 이야기가 특히 유명하다. 프랑스 혁명 당시, 왕실이 폐위되고 그의 부모(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된 후 어린 루이 샤를은 감옥에 갇혔다. 그는 비참한 환경에서 살았으며, 결국 10세의 나이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부족해 이후 '가짜 도팽'들이 나타나 자신이 살아남은 루이 17세라고 주장하는 사건이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 '격언의 대가' 라로슈푸코 Duc(공작)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라로슈푸코 공작은 자신의 책 '격언집 (Maximes)'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했다. 예를 들어, 그의 유명한 격언 중 하나는 "우리의 미덕은 종종 우리의 악덕보다 더 교묘한 위선이다"라는 것이다. 한 번은 그의 친구가 "당신의 격언들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웃으며 "불쾌하지 않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 사디즘의 기원 사드 Marquis(후작)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백작 가문 출신으로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는 문란한 행적들로 악명을 얻었으며 몇 차례 투옥되길 반복했다. 결국 빈곤에 빠져서 작가로 활동했는데, 성적 자유와 인간 본능에 관한 급진적인 사상으로 당시 프랑스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고, 이러한 작품들은 오늘날 '사디즘(Sadism)'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 한 번은 사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화장지와 음식 포장지에 소설을 적어 간수들을 통해 외부로 몰래 전달했다는 일화도 있다. 1772년에 영지가 후작령으로 격상되었고 이후 프랑스 혁명을 겪게 되면서 가문의 유일한 후작으로 남았기에 오늘날에는 '사드 후작(마르키 드 사드)'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본인은 1772년 이후에도 '백작'을 자처하고 다녔다. 당시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는 후작을 사칭하는 일이 빈번해서 저명한 후작 가문이 아니라면 일단 사기꾼으로 여기고 보는 경우가 흔했기에, 사드 후작은 정식으로 후작 칭호를 쓸 수 있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용하길 꺼렸던 것이다.
4.2.2. 프랑스 제국
프랑스 제1제국에서 Prince는 모든 작위들 중 가장 높은 서열의 작위였다. 프랑스 제국의 작위 등급은 다음과 같다.[25]등급 | 작위 | 설명 |
황실 대공 | 제국 대공 (Prince Imperial) | 제국의 황태자 작위, 나폴레옹 2세가 보유 |
황실 대공 | 프랑스 대공 (Prince of France) | 황제의 가족이 보유한 작위로 보나파르트 가문 외 인물도 포함 |
대공 | 주권대공 (Sovereign Prince) | 제후국(Principality)을 다스리는 군주, 예: 장 란, 베르나도트 |
대공 | 승리대공 (Victory Princes) | 군사적 공로를 기리는 작위, 고대 로마의 승리 칭호에서 유래 |
공작 | 대영지를 보유한 공작 (Duchies Grand Fiefs) | 광활한 영지를 보유한 공작 작위, 단 영토의 주권은 없음 |
공작 | 승리공작 (Victory Dukedoms) | 군사적 공로를 인정받아 주어진 작위 |
공작 | 그 외의 공작위 | 그 외 다양한 목적과 필요에 따라 부여된 공작 작위 |
백작 | 제국백작 (Counts of the Empire) | 성씨+백작으로 불리며 총 251개 존재 |
남작 | 제국남작 (Barons of the Empire) | 성씨+남작으로 불리며 총 1,516개 존재 |
기사 | 제국기사 (Knights of the Empire) | 총 385개 기사 작위가 존재하며 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통해 수여됨 |
프랑스 제국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04년 황제에 즉위하며 설립한 국가로,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정복하며 프랑스 혁명 이후 새로운 정치 체제를 도입한 제국이다.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첫 번째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이후 1852년 나폴레옹 3세가 제2제국을 선포하며 잠시 부활했다. 제국 시기에는 중앙집권적 정치와 황제 권력을 중심으로 한 행정 체계가 강조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기(1804-1815)의 프랑스 제국에서 'Prince'는 황제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인물에게 주어진 작위였다. 이는 단순한 혈통적 신분뿐 아니라, 황제의 정치적 권력 구조와 행정 체계를 뒷받침하기 위한 역할이었다. 'Prince' 작위는 황제의 가족(보나파르트 가문)과 나폴레옹의 측근에게 부여되었으며, 명예와 함께 실질적인 행정 권한이 주어졌다. 나폴레옹은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충성심을 중시했고, 혈통보다 신뢰가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프랑스 제국의 'Prince'는 프랑스 왕국 시절과 달리 전통적인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 'Prince' 칭호의 소유가 영토 소유로 연결되지 않았다. 군주 및 귀족 신분을 부활시켰음에도 봉건제를 부활시켰다는 비난까지 듣긴 싫었던 모양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제들에게 'Prince' 작위를 부여했지만, 이들이 그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심하게 갈등을 빚었다. 특히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나폴리와 스페인의 왕으로 임명되었지만, 독립적인 정책을 펼치려다 나폴레옹과 충돌했다. 나폴레옹은 이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왕관을 줬더니 왕 노릇을 한다!"라고 비꼬았다는 일화가 있다.
조제핀의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 또한 'Prince' 작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Viceroy) 및 프랑크푸르트 대공의 최우선 후계자 지위를 겸하기도 했다. 그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고, 이로 인해 "황제의 완벽한 아들"로 불리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한 번은 외젠에게 "내 진짜 혈통보다 너처럼 충실한 자가 훨씬 낫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교 | 프랑스 제국 | 프랑스 왕국 | 영국 |
기원 | 황제 가문, 정치적 신뢰 기반 | 혈통 중심(왕족) | 혈통 중심 (왕의 자녀) |
대표 작위 | 나폴레옹 가문(Prince) | 도팽(Dauphin) | Prince of Wales (태자) |
지위 부여 방식 | 황제의 신임과 정치적 필요에 따라 | 왕의 혈통에 따라 세습 | 혈통에 따라 왕의 자녀에게 부여 |
영토 | 영토와 무관, 명예적 성격 강조 | 대개 영토를 소유함 | 영토와 무관, 상징적 의미 |
주요 역할 | 행정·군사적 책임 수행 | 귀족적 권위 | 왕위 계승 서열, 왕실 대표 역할 |
4.3. 영국
영국에서의 'Prince'는 다른 나라의 'Prince' 개념과 비교할 때, 역사적·의미적 측면에서 여러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기원
영국에서 'Prince'라는 단어는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프랑스에서 유입되고 나서 독창적인 발전 과정을 거쳤다. 특히 웨일스 정복 이후 왕위 계승자를 공식적으로 지칭하는 칭호로 특화되었다. 이는 영국 왕실이 다른 유럽 왕실과 차별화되는 봉건적 체계를 유지하며 작위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음을 보여준다.
- 'Prince'의 칭호 사용제한
가문 단위로 작위 칭호를 공유하는 전통이 있던 다른 유럽 지역과 다르게 영국에서는 작위 사용을 제한하고, 왕실 작위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원칙도 일찍 도입했다. 특히 1917년 조지 5세가 왕실 칭호 사용을 제한한 이후 체계적인 규제가 확립되었다. 현대 영국에서는 'Prince' 칭호가 왕실 직계 혈통으로 엄격히 제한되며, 군주의 아들과 손자(남자 계통)에게 주로 부여된다. 이로 인해 영국에서 'Prince'는 단순한 작위를 넘어서는 강력한 상징성을 가지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Prince'는 대중의 주목을 받는 왕실 인물을 상징하며, 국가 정체성과 영국 왕실의 대중적 이미지의 중심이 되었다. 찰스 3세와 그의 아들 윌리엄, 해리는 대중문화와 왕실의 역할을 연결하며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특히 'Prince of Wales'라는 칭호는 웨일스를 넘어 영국 왕실 전체의 상징으로 작용하며, 특정 지역이나 민족의 정체성과도 깊이 결부되어 있다.
- Prince Consort라는 독특한 배우자 작위
영국 왕실은 남성 배우자에게 특별한 칭호인 'Prince Consort'를 부여한다. 이는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이 처음으로 받은 칭호로, 왕권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여왕의 배우자로서의 지위를 상징했다. 'Prince Consort'는 영국 왕실에서만 독특하게 사용되는 칭호로, 다른 유럽 왕실에서는 이를 찾기 어렵다. 대부분의 유럽 왕실에서는 여왕의 배우자가 독립된 칭호를 갖지 않으며,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서 호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Prince Consort'라는 작위는 영국만의 독창적인 시스템이다.
4.3.1. Prince의 의미 역사적 변천 과정
- 로마가 영국을 지배하던 시기(기원후 43년~410년)
기원후 43년 클라우디우스 로마 황제는 브리튼을 제국의 일부로 통합하고자 정복을 명령했다. 로마군은 그 해 43년에 브리튼에 상륙하여 현지 켈트족 부족을 물리치고 브리튼섬 남부를 중심으로 속주(Provincia Britannia)를 설립했으며, 주요 로마 도시로 런디니움(현재 런던), 에보라쿰(현재 요크) 등이 건설되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Princeps'라는 'Princeps'는 황제 개인의 칭호가 존재했으나 이 개념이 브리튼 지방 지도자에게 확장된 흔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410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브리튼에서 로마군 철수를 명령하면서, 브리튼은 로마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브리튼에서 로마가 철수한 후, 브리튼은 다양한 게르만족(앵글족, 색슨족, 유트족)에게 점령되었다.
- 앵글로색슨 시대(5~11세기)
로마가 물러난 후, 잉글랜드는 앵글로색슨족의 지배 아래 놓였다. 이 시기에는 중앙집권적인 봉건 체계가 자리 잡지 않았고, 여러 독립적인 왕국들(머시아, 노섬브리아, 웨식스 등)에서 각각의 군주 체계가 운영되었다. 이 시기에도 Prince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았고 앵글로색슨 문헌에서 라틴어 princeps가 드물게 등장했지만, 이는 왕족 칭호가 아닌 "지도자" 또는 "주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나마 Prince 개념에 가장 가까운 용어는 Ætheling로 "고귀한 혈통"을 의미하며, 왕자 또는 왕위 계승권자의 역할과 유사했다.
- 노르만 정복 이후(11세기~13세기)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며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를 세웠다. 노르만족은 바이킹의 후예이긴 하지만 이미 노르망디에 정착한지 200년이 흘러 그 정체성과 혈통, 언어, 풍습, 문화, 종교는 프랑스인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 영향으로 오랫동안 영국 왕실과 주요 귀족층은 프랑스어를 썼으며, 대표적인 예시로 그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 2세도 평생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구사했다.[26] 노르만 정복 이후, 노르만족이 잉글랜드에 프랑스 봉건 체계와 작위 제도를 도입하면서 'Prince'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prince'라는 단어는 왕실 작위를 지칭하는 데 점차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왕족 전체를 지칭하는 포괄적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특정 계승자를 지정하지는 않았다.
- 'Prince of Wales' 칭호의 시작(1284년)
자세한 내용은 웨일스 공 문서 참고하십시오.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정복한 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후일의 에드워드 2세)를 'Prince of Wales'로 임명하며 공식적으로 왕위 계승자를 나타내는 칭호로 자리 잡았다. 이 칭호는 웨일스 독립 통치자를 흡수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졌고, 이후 왕실에서 왕위 계승자의 작위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 백년전쟁(1337년~1453년)
14세기 중반,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가 'Prince of Wales' 칭호를 사용하면서, 왕실 작위로서의 'Prince'의 상징적 위상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왕위 계승자로서 군사적 지도자로도 유명해지며, 'Prince'의 역할이 단순히 혈통적 지위를 넘어 정치적·군사적 리더십을 포함하게 되었다.
- 튜더 왕조(15~16세기)
튜더 왕조 시기에는 왕실의 지위와 작위가 더욱 체계화되었고, 'Prince'의 역할과 위상이 강화되었다. 헨리 8세 시기에는 왕실 남성의 작위를 외교적 상징으로도 활용하며 유럽의 다른 왕실과 동등한 위치를 강조했다. 이 시기부터 왕위 계승자는 반드시 'Prince of Wales'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는 왕실 작위 체계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 근대 영국(17~19세기)
17세기 스튜어트 왕조와 이후 18세기 한노버 왕조에 이르러, 'Prince'는 왕실 계보를 나타내는 공식 작위로 정착되었다. 한노버 왕조 시기, 'Prince'는 유럽 대륙 왕실과의 연계를 통해 더욱 체계화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 알버트 공에게 'Prince Consort' 작위를 부여하며, 'Prince' 작위를 공식적인 왕실 역할로 확대했다. 이 시기에는 왕실 작위와 관련된 대중적 상징성이 강화되었다.
- 현대 영국(20~21세기)
현대 영국에서는 'Prince' 작위가 왕의 직계 남성 후손들에게만 주어지며, 왕위 계승 순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Prince of Wales'는 여전히 왕위 계승자를 나타내는 공식 작위이며, 현재 찰스 3세의 장남 윌리엄 왕자가 이를 보유하고 있다.
4.4. 슬라브권
<colbgcolor=white,#505050> 슬라브조어(재구) | [ruby(kъnędzь, ruby=kŭnędzĭ)] | |
고대 동슬라브어 | [ruby(князь, ruby=knyazĭ)] | |
러시아어 | [ruby(Князь, ruby=Knyaz)] | |
폴란드어 | książę | |
체코어 | kníže | |
슬로바키아어 | knieža | |
불가리아어 | [ruby(княз, ruby=knyaz)] |
러시아어를 기준으로 '크냐지(Князь)'의 어원은 고대 게르만어의 'kuningaz(게르만조어)'와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즉, 어원상으로는 현대 독일어의 'König(왕)', 영어의 King과 같으며, 핀란드어나 에스토니아어 등에서도 이에 맞춰 번역되고 있다.
본래 이 칭호는 고대부터 슬라브권에서 대족장급 통치자가 사용하는 칭호였다. 중세 유럽에서는 라틴어로 Rex(왕), Dux(공작), Princeps(프린스) 등으로 번역되었으나 점차 프린스로 번역하는 것이 통용되었다. 이는 중세 가톨릭 세계관에서 'Rex(왕)'는 황제나 교황의 승인을 받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칭호로 여겨졌으며, Princeps(프린스)를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정식으로 승인되지 않은 통치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폴란드 왕국처럼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교황의 승인을 받은 군주는 'Rex(왕)'으로 공인되기도 했다.
중세에는 군소 크냐지들을 통합하여 '벨리키 크냐지([ruby(Великий князь, ruby=Velikii Knyaz)])' 칭호를 내세우는 통치자들도 등장했다. 해당 작위는 그 당시부터 라틴어로는 'Magnus Dux(영어 Grand Duke)'로 번역되는 것이 통용되었고, 한자문화권에서는 주로 '대공(大公)'으로 번역되고 있다. 벨리키 크냐지에 복속된 기존의 크냐지들은 본래의 세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 칭호 또한 그대로 유지된 경우가 많았다. 근세 유럽에서는 점차 벨리키 크냐지를 군주 개념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생겨나기도 하여, 동유럽의 사례를 근거로 '대공' 칭호를 군주 개념으로 도입한 사례가 서유럽에서도 생겨났다.
한편 슬라브권에서는 보이보드(Voivode)라는 칭호도 쓰였는데, 왈라키아 공국처럼 군주의 칭호로 쓰인 경우도 있고, 오스만 제국에 종속된 토착 지배자의 칭호로 쓰인 예도 있다. 이런 경우에 서유럽권 언어로는 대체로 프린스로 번역되었다. 다만 슬라브권에서 보이보드 계열의 어휘는 원수나 총독 개념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보스니아 왕국에서 'Veliki Vojvoda Bosanski(보스니아 대공)[27]'는 작위 성격의 칭호가 아닌 최고 군사 지휘관 개념인 관직이었고, 러시아 제국에서 'Воевода(Voevoda)'는 지역 총독 개념의 관직이었다. 현대에도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 국가들에선 보이보드가 최고위 군사계급 칭호로 쓰인다.
4.4.1. 러시아
- 키예프 루스(9세기~13세기 초)
현대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키예프 루스가 원래 봉건제 국가가 아니라, 키예프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Киевский)를 중심으로 여러 크냐지(Князь)들이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연맹체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10세기 이후 키예프 대공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면서 지방 크냐지들은 키예프 대공에 종속되었으나, 여전히 자신의 영역에서는 자치적 통치권을 행사했다. 키예프 대공의 권력은 11세기 중엽에 정점을 이뤘으나, 11세기 후반에 이르면 흑해 무역로의 쇠퇴로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2세기부터는 대공위 계승권자들끼리 내전을 벌이며 정치적인 불안정 상태가 지속되었고, 그러한 틈을 타서 지방 크냐지들도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전반에 몽골의 침략으로 키예프 루스는 완전히 붕괴되어 몽골에 복속되었으나, 몽골인들은 해당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보단 해당 지역의 크냐지들에게 조공을 받거나 징병 의무를 부과하는 간접적인 통치를 시행했다.
- 모스크바 대공국의 등장(1283년~1547년)
몽골의 지배기간 동안 블라디미르-수즈달에서 기원한 모스크바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Московский)이 초창기에는 몽골 킵차크 칸국의 통치에 협력하며 점차 루스족 세력을 규합하는 위치로 성장했다. 15세기에 킵차크 칸국이 약화되는 틈을 타면서 본격적으로 몽골과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16세기 초에 이르러 몽골에게서 완전히 독립하고 주변 루스족 국가들을 통일하게 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에 합병된 기존 루스족 국가의 통치자들은 그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지 않고 대공의 봉신인 '크냐지(Князь)'로 편입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몽골의 지배기간 동안에 루스족 지도자들의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지위는 킵차크 칸국의 승인(야를리크)을 받아야 했었기에, 몽골에게서 독립한 이후에는 점차 해당 칭호의 사용을 꺼리게 되었다. 때문에 이반 3세는 대외적으로 '제3의 로마'를 자처하며 차르([ruby(Царь, ruby=Tsar)])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반 4세 때부터는 공식적으로 차르 칭호를 채택하여 러시아 군주의 대공 칭호는 폐기되었다.
- 루스 차르국(1547년~1721년)
차르 칭호가 공식적으로 채택되면서, 남성 왕족은 '차레비치([ruby(Царевич, ruby=Tsarevich)])', 여성 왕족이나 정실 부인은 '차레브나([ruby(Царевна, ruby=Tsarevna)])'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 황제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황제격 칭호인 '차르'를 도입하였음에도, 유럽권에서는 단순히 슬라브족의 군주 칭호로 취급했을 뿐 실제 황제격 칭호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었다.
표트르 1세는 러시아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낙후되어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재위 기간 동안 서구화 개혁을 추진하여 국력 향상을 꾀했다. 이에 따라 서유럽 귀족 작위 체계가 도입되기도 했다. 유럽에서 백작([ruby(Граф, ruby=Graf)])과 남작([ruby(Барон, ruby=Baron)]) 개념을 수입해 왔으나, 공작(Duke, Herzog) 개념 대신 기존의 크냐지 칭호를 공식 작위 체계로 편입시켰다.[28] 기존의 크냐지들을 포함해 군소 영주인 보야르들에게 작위가 수여되었고, 이를 계기로 보야르 칭호를 완전히 폐기했다. 서구화 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대북방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차르 칭호를 '임페라토르([ruby(Император, ruby=Imperator)])'로 고치면서 결국 황제 지위의 대외적 승인까지 받아냈다.[29]
- 1797년 파벨 1세의 황실 개혁
18세기까지 제위 계승권을 두고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었기에, 1796년에 즉위한 파벨 1세는 살리카법의 원리를 도입해 승계 질서를 세우고자 했다. 그 결과 황태자와 황태자비만이 '체사레비치([ruby(Цесаревич, ruby=Tsesarevich)])' 및 '체사레브나([ruby(Цесаревна, ruby=Tsesarevna)])'로 불릴 수 있도록 개정하고, 그 이외의 황족들은 원래 군주의 칭호였던 '대공([ruby(Великий князь, ruby=Velikii Knyaz)])' 작위를 수여하게 된다.[30]
- 1866년 알렉산드르 3세의 황실 개혁
세대 항렬의 제한 없이 방계 황족들이 모두 대공 작위를 받는 상황에서 정치적 안정이 이어지자, 이제는 대공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게 되어 황실 재정에 큰 부담을 주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결국 대공 작위의 수여 범위를 황제의 손자 항렬까지로 제한하고, 그 이외에는 일반 공작(Князь) 작위를 수여하도록 수정했다.
5. 나무위키에 등재된 프린스(보이보드) 목록
- 블라드 가시공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슈테판 3세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프로이센 왕국의 재상. 빌헬름 1세 시대에 비스마르크후(Fürst von Bismarck)를 받았다. 퇴임 후 빌헬름 2세에게 받은 라우엔부르크 공작(Herzog zu Lauenburg) 작위는 본 문서와는 다른 작위이며, 일대작위였던 탓에 그의 사후 폐지된다.
-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 프로이센 정치가. 하노버 지역의 귀족 출신으로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재상의 자리에 올라 무기력했던 군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보좌하여 프로이센 왕국을 지켜냈다.
- 후녀디 야노시 -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 헝가리 왕국 섭정
- 필립 마운트배튼 -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국서,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공[31]
6. 관련 문서
[1] 한국에서 역사적으로 사용된 왕족의 칭호로 간주되기에 사용되는 번역어이다. 본래 군(君) 칭호는 고구려에서 왕족에게 부여하였고 고려에서는 왕자들만 사용한 특수한 칭호였으나, 오등작 체계가 정비되면서 사용되지 않는다. 이후 원 간섭기에 원나라의 요구로 제후국의 격식에 맞는 관제를 도입하면서 부활하고 제후가 책봉하는 작위 칭호로 격이 낮아졌다. 또한 외국의 작위들은 보통 오등작 체계에 맞춰 번역하는 관례가 자리잡았기 때문에, 군(君) 칭호로 번역하는 경우는 드물다.[2] (특히 영역의) 통치자를 일컫는 말로 쓸 때 사용한다. 맥락상 군주론처럼 독립적 통치자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면 '군주', 영역제후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면 '제후'로 번역한다.[3] 현대 유럽의 소규모 독립군주국의 군주에 대한 역어로, Grand Duke 등과 Prince를 포괄한다.[4] 고대 로마사에서는 당연히 황제 및 초기 제정(원수정)을 가리킨다. 중세사에서도 문맥에 따라서는 종종 학술용어로서 중세 성기에 출현한 하부 통치계급인 성주층(castellan)에 대비되어 중세 초기부터 존재해온 상부 통치계급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5] 왕족이 퓌르스트급 작위를 받을 때 대신 수여된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 Fürst von Wales)처럼 영역제후 작위에서 비롯한 경우는 Prinz라고 옮기지 않으니 주의.[6] 원래는 공작(Herzog)보다 낮은 변경백·방백 등의 영역제후들을 폭넓게 일컫는 통칭이었으나, 16세기 무렵부터 공작보다 낮은 여러 작위들을 Fürst 단일 작위로 통합하는 것을 황제에게 승인받는 형태로 공식 칭호로 사용하는 제후들이 등장했다. 전자는 그냥 '제후'로 번역되며, 후자는 서열상 공작보다는 아래이므로 후작이 적절하나 어원상 원래 그냥 '군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문제로 인해 '대공'이나 '공작', '후작' 등 중구난방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그냥 아예 '퓌르스트' 혹은 영어식의 '프린스'로 그대로 음차하는 경우도 있다.[7] 스페인에선 왕위 계승권자인 장남에게 'Príncipe de Asturias(아스투리아스 공)' 칭호가 주어진다. 다른 왕자들은 'Infante(인판테)'라는 칭호를 받는다.[8] 어원적으론 Primus(맨 앞)와 -ceps(움켜쥐는 자, 취하는 자)로 이루어져있다. 흔히 제1시민으로 번역되지만, 어원을 그대로 직역하여 수령으로도 번역 가능하다.[9] 이외에도 같은 유래의 단어로 산스크리트어의 프라타마(prathama), 그리스어의 프로토스(prōtos)가 있으며 더 근원을 거슬러가면 모두 궁극적으로는 인도유럽조어의 어근인 *per-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10] 개요에 정리된 언어별 용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실제로 서유럽권의 언어에서 Fürst와 Prinz를 구분하는 어휘는 없다. 이를 엄밀하게 구분할 때에나 별도의 수식어를 붙인다.[11] 이는 동아시아권에서 뿐만 아니라 서유럽권 언어의 화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독일어의 영향을 받은 동유럽권에서나 Fürst와 Prinz가 구분된다.[12] 이는 백년전쟁 당시 부르고뉴 공작이 프랑스 국왕과의 봉신 관계를 청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군주 지위를 승인받지 못해 왕국으로 승격하고자 노력했던 사례와 대비된다.[13] 아마도 한자 '작(爵)'이 '벼슬'을 의미하기에, 이를 신하적 칭호로 여기는 논리로 보이나, 사실 유럽 또한 중세에는 황제나 왕 만이 정당성있는 군주의 칭호로 여겨졌다. 근세에 종교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고 주권 개념이 등장함에 따라 공작(Dux)이나 프린스 등도 주권을 인정받는 사례들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주권을 행사하는 독립적인 Dux라고 해서 다른 군주의 신하 신분인 Dux와 별개의 칭호를 사용했던 것도 아니었다. 언어적 차이를 감안하여 군주 성격을 갖는 경우에 한정해 '공작'이라 하지 않고 '공'으로 부르는 관행이 있다고 해서 Dux를 '공작'으로 옮기는 것을 오역으로 치부할 수 없듯이, 독일의 Fürst를 '후작'으로 옮기는 것을 오역이라 할 수는 없다.[14] Fürst(erz)bischof은 한국어로 (대)주교후로 번역되며 (대)주교공으로 번역하는 사례도 있다. 영어로는 Prince-(arch)bishop으로 번역된다. 주교후 목록[15] 성직 제후 중에서는 마인츠, 쾰른, 트리어 대주교후가 선제후로 공인되었다.[16] 제국제후 신분이 공인되었으나 Fürst 칭호를 공식화하지 않은 백작(Graf)이라면, 'gefürsteter Graf'로 분류된다. 다만 작위나 그 보유자를 이렇게 호칭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그 영지의 지위를 구분할 때 'gefürstete Grafschaft'로 명기하면서 쓰이는 편이다.[17] 사실 이 시점엔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 작위를 사칭하는 일이 빈번하기도 했다.[18] 왕자와 공작 겸임[19] 이런 사례들 상당수가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였으나 프랑스 국왕과 봉건 계약을 맺으면서 프랑스 귀족으로 편입된 경우이기도 하다.[20] 그 이전의 프랑스에서 Baron은 원래 국왕 직속 봉신들을 통칭하는 어휘였다.[21] 프랑스 왕국에서 징세는 정기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그 과정과 절차도 굉장히 복잡했기에 징세가 실현되더라도 재정을 즉시 확보할 가능성도 낮았다. 또한 종래 백작 이상급 작위처럼 실질적인 통치권을 부여할 의도도 없었기에, 판매하는 남작 작위는 명목상의 지위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17세기에 이르면 루이 14세가 여러 차례 엄청난 규모의 매작을 단행했기에, 아예 명목상의 남작령조차 없는 경우마저 발생했다.[22] 특히 프랑스 왕국의 경우, 다른 외국들처럼 왕실에서 휘하 봉신들의 작위를 엄격하게 관리하진 않았기에, 작위의 사적인 거래도 딱히 제지하지도 않았다. 결국 공식적인 매작까지 성행하면서 17세기 후반 부터는 귀족들이 대놓고 작위를 사칭하는 경우도 흔해졌다.[23] ‘Prince de Sang’칭호를 가졌으며 동시에 Orléans 공작 작위도 보유[24] 사실 반란이 너무 맥없이 진압되어서 그렇기도 하다. 자신이 블루아 성에 유폐시켰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와 화해한 것도 있고[25] 아래 한국어 번역들은 공식적인 번역이 아니다.[26] 그래서 영국-프랑스 라이벌 관계를 들먹일 때 노르만 정복은 사실 프랑스의 잉글랜드 정복이었다라는 떡밥은 양국 국민들의 불타는 주제이기도 하다.[27] 영어로는 'Grand Duke of Bosnia'로 번역된다.[28] 한자어로 '후작'이나 '자작'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 서유럽의 작위들은 본래 '백작'의 파생 작위 개념이다.[29] 당시 유럽인들은 오스만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의 실력 앞에서 외교적으로 황제 칭호를 승인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내심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어떻게든 그들을 '황제'로 부르지 않고자 내부적으로는 이전에 내세웠던 대표 칭호였던 술탄이나 차르 등을 그대로 사용해나갔고, 이러한 언어적 관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30] 여성 황족이나 정실 배우자는 여성형인 '벨리키 크나즈냐([ruby(Великая Княжна, ruby=Velikii Knyaginya)])'로 부른다.[31] 그 외에 이 논쟁에서 후보로 거론된 작위로는 영연방 공(Prince of the Commonwealth), 대공(Prince Consort), 왕국 공(Prince of the Realm, 적절한 번역인지는 불확실), 왕공(Prince Royal) 등이 있었다. 여기서 Prince Consort를 번역한 대공은 일반적인 대공 작위가 아닌 유럽 여왕의 국서를 칭하는 대공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유럽에서, 왕가의 황태자나 여왕의 부군(夫君)을 이르는 말'이라고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