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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4><colcolor=#ffffff> 이탈리아 왕국 부왕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외젠 드 보아르네 Eugène de Beauharnais | |
이름 | 외젠 로즈 드 보아르네[1] (Eugène Rose de Beauharnais) |
출생 | 1781년 9월 3일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 | 1824년 2월 21일 (향년 42세) |
바이에른 왕국 뮌헨 | |
배우자 |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공주 (1806년 결혼) |
자녀 | 조제핀, 외제니, 오귀스트, 아멜리, 테오딜란드, 카롤린, 막시밀리앵[2] |
아버지 |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
어머니 | 조제핀 타셰 드 라 파제리 |
형제 | 오르탕스 |
종교 | 가톨릭 (세례명:에우제니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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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제의 별이 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신의를 지켜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On ne peut nier que l’astre de l'Empereur commence à pâlir; mais c’est une raison de plus pour ceux qui ont reçu de ses bienfaits de lui rester fidèles."
- 1813년, 나폴레옹을 배신하면 이탈리아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연합국의 결정을 전한 장인어른인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편지에 답하며[3]
프랑스의 장군. 바이에른 왕국의 초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副王).[4]"On ne peut nier que l’astre de l'Empereur commence à pâlir; mais c’est une raison de plus pour ceux qui ont reçu de ses bienfaits de lui rester fidèles."
- 1813년, 나폴레옹을 배신하면 이탈리아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연합국의 결정을 전한 장인어른인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편지에 답하며[3]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장군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와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유일한 아들이며, 나폴레옹 1세의 양아들이다.
나폴레옹이 몰락의 조짐이 보이자,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 그를 아무 망설임 없이 배신하고, 연합군 밑으로 들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양아버지인 나폴레옹을 마지막까지 훌륭히 보필한 몇 안되는 충신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격언의 반대가 되는 사례.
2. 생애
2.1. 전반부
자작(vicomte) 집안의 적자로 잘먹고 잘 살다가 아버지가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때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게 된 것을 계기로 가문의 몰락이 시작되는 듯했지만...외젠의 누이동생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의 회고에 의하면, 외젠은 정부에 강탈당한 아버지의 칼을 되찾기 위해 당시 한창 명성을 떨치던 전쟁의 천재를 찾아갔는데, 이때 외젠의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은 나폴레옹은 아예 직접 칼을 가지고 보아르네 저택을 방문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외젠의 어머니이자 보아르네 장군의 미망인 조제핀과 사랑에 빠지면서 1796년 3월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부 국내판 나폴레옹 위인전에도 실려 있는 일화.[5]
남매는 처음에 촌스러운 아저씨가 계부가 된 것을 싫어했다고 하나 나폴레옹은 외젠과 오르탕스를 자신의 양자로 거두고 애정과 관심을 쏟아주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경험이 있는 나폴레옹과 의붓자식들은 곧 친해졌고, 외젠은 1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참모가 되었으며 1차 이탈리아 원정에서 빠르게 실전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6]
1798년의 이집트 원정에도 종군했으며 생 장다르크(아크레)에서 부상당했고 1799년 8월 의붓아버지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 후 나폴레옹이 브뤼메르 쿠데타로 통령의 자리에 오르자 통령 경호 엽기병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그렇게 털리고도 정신 못 차리는 오스트리아를 관광태우러 제2차 이탈리아 전쟁에 나섰을 때도 종군했으며, 마렝고 전투에서는 자신의 엽기병대를 지휘하며 용감하게 싸웠다.
외젠은 처음엔 조제핀의 재혼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폴레옹은 외젠에게 친아버지 이상으로 신뢰와 애정을 보여주었다. 사실 비교하기도 뭣한 게 외젠의 친아버지 알렉상드르는 가족을 아끼긴 커녕 아내를 촌뜨기라고 후려치고 자식들은 방치한 채 애인들과 놀아나고 아내에게 누명을 씌우려다 역습당해 공개 석상에서 개망신당한 인물이다. 즉 아버지로서는 0점인 인간. 특히 이집트에서 조제핀의 바람기를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준 나폴레옹[7]에 감동해 어머니에게 당장 애인과 헤어져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영국군에게 압류당한 탓에 전해지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영국에서 그 편지를 공개해 나폴레옹의 마누라가 바람났다는 것이 유럽 전체에 알려지는 바람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귀국한 직후 조제핀과 이혼하겠다고 씩씩거리며 쫓아왔지만 외젠과 오르탕스의 눈물어린 호소에 이혼은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8] 이후 나폴레옹은 1804년에 프랑스의 황제에 등극하고 조제핀도 황후가 되었다. 외젠은 나폴레옹의 친자식은 아니기 때문에 계승권은 없었으나 나폴레옹의 든든한 지지 속에 순혈 황족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프란츠 2세가 3차 대불동맹을 일으키자 외젠은 다시 의붓아버지를 따라 전쟁에 종군하였다. 이때도 훌륭한 공적을 많이 세우며 순조롭게 승진해 나갔고 이후 벌어진 4차 대불동맹 전쟁에서는 이미 이탈리아 군단의 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참고로 이때 외젠의 나이는 고작 24세. 아무리 군공이 있고 나폴레옹의 군사원수들이 젊은 편이라곤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지나치게 어린 편인데 나폴레옹도 실력은 둘째치고 나이 탓에 주변의 불만이 생길거라 느꼈는지 자크 마크도날 원수를 군사고문으로 붙여주었다. 그리고 1806년(외젠 25세 당시) 나폴레옹은 이제까지의 공적을 치하할 겸 외젠을 이탈리아의 부왕으로 임명하였고 바이에른 왕 막시밀리안의 딸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공주와 결혼까지 주선했다.[9] 이후 이탈리아 방면에서 주둔하게 되어 비교적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는 듯했다.
1809년 나폴레옹은 결국 조제핀과의 이혼을 결심했지만, 이후에도 외젠과 여동생 오르탕스[10]를 보호했으며 친자식처럼 사랑하였다. 조제핀은 이혼 조건으로 외젠을 이탈리아 부왕에서 이탈리아 왕으로 높이는 것을 내걸었으나 외젠은 무슨 개수작이냐면서 열을 내며 반대했다. 나폴레옹의 가족들 중에서는 가장 개념인.
2.2. 스웨덴의 왕위계승을 제안받다
1810년 칼 아우구스트 왕태자의 사망으로 유일한 직계 계승자가 죽자 스웨덴 국왕 칼 13세는 외젠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11] 다만 스웨덴 국법상 스웨덴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선 루터교회 개신교로 개종해야 했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외젠은 이 점 때문에 스웨덴 왕의 양자로 들어가는 걸 단호히 거절, 이후 나폴레옹의 웬수가 되는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이후 나폴레옹의 몰락과 외젠의 행보를 볼 때 외젠이 여기서 스웨덴 왕위를 받았으면 나폴레옹이 적어도 조금 더 오래 버텼을 가능성이 높았고 못버텼다 해도 스웨덴 왕조를 베르나도트가 아닌 자신의 핏줄에게 이을 수도 있었다.[12]
2.3. 양아버지에게 의리와 명예를 지키고 살다 가다
그렇게 몇 년간 예쁜 아내와 알콩달콩 기후 좋은 이탈리아에서 재미나고 편하게 사는 듯 싶었지만... 1812년 계속되는 러시아의 어그로를 참다 못한 나폴레옹은 60만 대육군을 소집해 러시아 원정에 나서고, 외젠도 이 원정에 참여하게 된다. 원정이 폭망하고 보로디노 전투의 패전으로 더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나폴레옹은 후퇴하기로 결정하고 퇴각 임무의 총책임을 조아킴 뮈라에게 맡겼으나이후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뮈라가 달아나면서 또다시 그 군대를 떠맡았다. 외젠은 최선을 다해 러시아 제국군을 저지했지만, 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인해전술로 방어선을 돌파하여 바르샤바를 점령한 데 이어 베를린에 입성하여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체결했다. 나폴레옹은 외젠에게 함부르크를 사수할 것을 지시했는데, 이에 따라 외젠이 마그데부르크로 이동하자마자 순식간에 블뤼허가 드레스덴을 점령해버렸다. 드레스덴은 친불국가인 작센 왕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외젠의 부대는 완전히 고립되는 상황이 되어 말그대로 바람앞에 촛불 신세가 됐다. 어찌저찌 포위망을 뚫었으나, 심한 부상을 입어 치료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과다출혈로 죽을뻔 했다. 뤼첸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그에게 이탈리아의 방어를 맡겼으나,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맞아 계속 고전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양아버지가 쪽수로 연합군에 밀릴 것을 예상하고 병력을 싹싹 긁어모아 지원을 가려 했으나, 아내[13]의 꼬임에 넘어가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린 뮈라의 방해로 지원을 가지 못했다. 이 때 대불동맹군으로부터 이탈리아 전체를 줄 테니 나폴레옹을 배신하라는 제안까지 받았으나 쿨하게 거절했다. 문서 최상단의 문구 참조.
1814년 4월 11일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상원을 소집해 스스로 이탈리아의 왕이 되려 했으나, 4월 20일 밀라노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결국 장인에게 항복하고 다시는 나폴레옹 전쟁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백일천하로 나폴레옹이 권좌에 복귀한 후에도 약속대로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으며[14] 장인으로부터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이라는 작위를 받고 귀족으로 살다가 1824년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 뮌헨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3. 평가
비록 친자가 아닌 의붓아들이었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과 능력은 나폴레옹 일족 그 누구보다도 위였다. 장인어른에게 더 이상 나폴레옹의 전쟁에 관여하지 않겠다 약속한 뒤에는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당시에도 일절 관여를 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성격 자체가 강직하고 의리를 중시하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덕분에 외젠은 나폴레옹의 몰락에서 벗어나 장인어른 치하에서 여생을 편히 살 수 있었다.훌륭한 인격과 군사적 능력으로 나폴레옹이 외젠을 후계자로 지정했다면 어떠했을까?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사람이다. 나폴레옹에겐 친아들인 나폴레옹 2세가 있었지만 너무 나이가 어려서(1811년생) 당장 실질적인 후계자로 지정하기란 불가능했다.
다만 나폴레옹이 외젠을 후계자 감으로 보았을지에 대한 것과는 별도로, 설사 외젠을 후계자로 지정하고 싶어도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폴레옹 집안인 보나파르트 가문은 보수적인 정서를 가진 코르시카인이어서 그런지, 혈통에 대한 집착과 가족주의 성향이 강해서(전형적인 이탈리아 혈족주의) 외젠과 같은 외부 인사에게는 반감이 대단했다. 실제로 나폴레옹 본인을 제외하면 보나파르트 가문에선 외젠을 가족이나 친척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들은 총각인 나폴레옹이 애 둘 딸리고 소문 나쁜 과부를 데려온 것을 싫어했고, 대놓고 바람 피운 며느리와 의붓자식들을 자신들보다 우대하는 것에 단단히 꼬여 있었다. 그러니 만약 나폴레옹이 외젠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면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멋대로 굴던 남매들 때문에 고생하던 나폴레옹에게는 더 골 때리는 상황이 됐을 수도 있다는 것.[15]
물론 실리적 차원에서 보면 분명히 명분은 있었다. 특히 나폴레옹의 가족들은 나폴레옹만한 능력도 없는 주제에 야심만 대단하였다. 특히 나폴레옹의 친여동생인 카롤린 보나파르트라는 작자는 자기 남편인 조아킴 뮈라를 꼬드겨 오빠를 배신하게 만들었고,[16] 그 대가로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여 퇴위해야 했다.[17] 이런 가족들에게 가족이랍시고 제위를 이어주느니 차라리 피는 안 섞였어도 끈끈한 의리를 바치는 외젠이 더 낫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나폴레옹의 형제자매들 중 제일 주제넘는 야심을 가졌던 인물은 큰여동생 엘리자와 막내여동생 카롤린 뿐이었고, 다른 형제들은 나폴레옹을 지지고 볶긴 했지만 딱히 이렇다 할 사고는 치지 않았으니만큼 이들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특히 조제프와 루이는 나폴레옹의 형제자매들 중 제일 멀쩡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뒤를 이었다는 나폴레옹 3세는 적어도 외치에서만큼은 엄청난 암군으로 손대는 전투마다 족족 패배하는 졸장에다, 베니토 후아레스가 멕시코 대통령으로 재임 중인 멕시코에 막시밀리아노 1세를 황제로 즉위시키는 바람에 멕시코라는 나라를 멕시코 대통령과 황제가 공존하는 기형적인 나라로 만든 것도 모자라,[18] 막시밀리아노 1세가 베니토 후아레스 때문에 위기에 몰렸을 때 돕지도 않고 모르쇠로 일관한 탓에 막시밀리아노만 죽게 만드는 등의 패착을 일삼다가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에 굴욕적인 참패를 당하며 황제 자리를 물러났다. 이걸 보면 차라리 외젠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뒤를 잇는 게 훨씬 나았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나폴레옹은 "외젠과 오르탕스는 내가 힘들 때 배신하지 않은 유일한 가족"이라고 말하며 애정을 버리지 않았고, 외젠은 나폴레옹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오르탕스는 나폴레옹의 탈출을 적극 계획하는 등,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족으로 남았다. 보아르네 남매를 미워하던 레티치아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어머니)도 나중에는 이를 인정해, 나폴레옹의 사후 오르탕스와 팔짱을 끼고 아들의 추억담을 얘기하기도 했다고.
4. 그 외
아내는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장녀로 바이에른 왕국의 공주인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공주(1788~1851)다.
결혼 당시 아우구스테 공주에겐 이미 약혼자(바덴 대공의 아들)가 있었으나, 나폴레옹이 강제로 약혼을 깬 뒤 외젠과 결혼시켰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 사이는 굉장히 좋았고 무려 7명의 아이가 생겼다. 이 중 큰딸인 조제핀(어머니 이름을 따라 지었다)은 스웨덴 왕 오스카르 1세의 아내, 큰아들 오귀스트는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의 남편[20], 셋째딸인 아멜리는 브라질 초대 황제 페드루 1세의 황후가 되었고[21], 둘째아들 막시밀리안은 아버지와 요절한 형의 뒤를 이어 로이히텐베르크 공작(Herzog von Leuchtenberg)이 되었다. 즉, 외젠은 오늘날 스웨덴 왕가의 조상이 되는 셈. 아이러니한 건 딸 조제핀과 결혼한 오스카르 1세의 아버지가 바로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라는 것이다. 나폴레옹 1세의 배신자가 되는 스웨덴의 왕 그 사람 맞다. 즉 외젠 드 보아르네는 양아버지의 원수와 사돈지간이 된 셈이다. 비록 오스카르 1세가 정부를 두는 바람둥이긴 했지만 왕비인 외젠의 큰딸 조제핀은 온 나라에 소문 날 정도의 미인에다 (남편의 바람기로 냉랭하긴 했지만) 부부 금슬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서 수많은 자녀를 두어 지금까지 스웨덴 왕족은 외젠의 핏줄을 이어오고 있다.
3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인 차남 막시밀리앙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장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결혼하면서 러시아에 살게 되었다. 여담으로 니콜라이 1세는 사위인 막시밀리앙에게 로마놉스키 공작위 (Prince Romanovsky)와 Imperial Highness (황실 전하) 칭호를 주었기 때문에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위를 물려받지 못한 다른 후손들 역시 로이히텐베르크 공자/공녀와 로마놉스키 공작을 칭했고 막시밀리앙의 후손들은 러시아에 귀화하여 러시아식 이름을 쓰게 되었다. 8대 공작인 세르게이 게오르기예비치 드 보아르네가 미혼으로 1974년 사망하면서 로이히텐베르크 공작가는 단절되었고 현재는 귀천상혼 출신 후손들만 남아있다.
외젠의 여동생인 오르탕스는 외젠의 의붓 숙부 뻘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의 동생)와 결혼해서 훗날의 나폴레옹 3세인 샤를 루이 나폴레옹을 낳았다.[22] 즉 외젠에게 나폴레옹 3세는 외조카(동생 오르탕스의 아들이니) 겸 의붓 사촌(의붓 숙부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이니)이다.
참고로 아내인 아우구스테 공주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와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어머니 루도비카 공주의 이복언니이기 때문에 외젠은 두 사람의 형부이다. 조피 대공비는 한때 나폴레옹 2세[23]와 염문설이 돌았다.
5. 가족관계
5.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 요세피나 (Joséphine, Queen of Sweden and Norway) | 1807년 3월 14일 | 1876년 6월 7일 | 오스카르 1세 슬하 4남 1녀[24] |
2녀 | 호엔촐레른헤힝겐 공비 오이게니 (Eugénie, Princess of Hohenzollern-Hechingen) | 1808년 12월 22일 | 1847년 9월 1일 | 호엔촐레른헤힝겐 공 콘스탄틴 |
1남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오귀스트 (Auguste, Duke of Leuchtenberg) | 1810년 12월 9일 | 1835년 3월 28일 | 마리아 2세 |
3녀 | 브라질 제국의 황후 아멜리아 (Amélie, Empress of Brazil) | 1812년 7월 31일 | 1873년 1월 26일 | 페드루 1세 슬하 1녀 |
4녀 | 뷔르템베르크 백작부인 테오딜란드 (Théodoline, Countess Wilhelm of Württemberg) | 1814년 4월 13일 | 1857년 4월 1일 | 우라흐 공작 빌헬름[25] 슬하 4녀 |
5녀 | 카롤린 공녀 (Princess Caroline) | 1816년 | 1816년 | |
2남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앵 (Maximilian, Duke of Leuchtenberg) | 1817년 11월 1일 | 1852년 11월 1일 | 러시아의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슬하 4남 3녀 |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드보아르네'로 표기한다.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맏사위. 니콜라이의 장녀 마리야 여대공과 결혼했다.[3] A. Du Casse, ⟪Mémoires et correspondance politique et militaire du Prince Eugène publiés, annotés et mis en ordre par A. Du Casse⟫, 10 vols. (Paris: 1858-1860), vol. IX, 305[4]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은 나폴레옹 본인이었다. 즉, 국왕인 나폴레옹을 대리해 이탈리아 왕국을 통치하는 총독에 가까운 개념이나, 일반적인 총독보다는 권한이나 권위가 훨씬 더 크다. 스페인 제국이나 영국에서도 나폴리나 인도를 통치할 때 그 총독에게 부왕 직함을 붙인 바 있다.[5] 이는 훗날 나폴레옹이 각색한 이야기라는 설이 유력하다.[6] 다만 이는 오르탕스의 어머니 조제핀이 바라스의 정부였다가 나폴레옹의 아내가 된 것에 대한 세간의 가쉽(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직이 바라스가 옛 정부를 나폴레옹에게 떠넘기기 위한 지참금이었다던가)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므로 가감해서 볼 필요는 있다.[7] 다만 휘하 장교의 아내 폴린 푸레스와 맞바람을 피우기는 했다(...).[8] 이때 상황 자체가 나폴레옹이 이혼한다면 나폴레옹 자신에게도 정치적인 치명상이 될 상황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조제핀이 (나폴레옹의 인기가 최고 자리에 도전해도 될만해진 것 같기도 해서) 정신차리고(?) 바람기가 사라져 부부 생활도 안정되었다. 문제는 이제부턴 거꾸로 나폴레옹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9] 이미 아우구스테 공주는 바덴 대공국의 후계자인 카를 공자와 약혼했는데 나폴레옹이 파혼시키고 외젠과의 결혼을 주선했다. 다만 카를에게도 자신이 입양해 가족처럼 대우한 외젠의 육촌 여동생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와 결혼시켜 보상해주었다. 아우구스테와 외젠의 결혼생활은 별다른 잡음없이 좋았다.[10] 샤를 루이 나폴레옹, 나중의 나폴레옹 3세의 어머니. 오르탕스는 사실상의 이혼 상태에서 플라오 백작(실제 친아버지는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라는게 정설이다)과 밀통하여 모르니 (자칭) 백작을 낳았다. 나중에 모르니는 이부형인 샤를 루이 나폴레옹을 도와서 제2제국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여러 장관직을 거친 후 모르니 공작이라는 진짜 작위를 받았다. 모르니는 극작가로도 활동했는데 다작에 비해서 작품의 질은 그저 그렇다는 평이고 연극계에서의 진짜 업적은 19세기의 대 여배우인 사라 베르나르를 발굴한 것이라고 한다.[11] 갑자기 왜 스웨덴 국왕의 후계자에 스웨덴의 피가 일절 이어지지 않은 외젠이 나오냐 할 수 있지만 이 당시 스웨덴은 대북방전쟁 중 칼 12세 전사 후 국왕과 귀족 계층의 분쟁, 계속된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구스타브 3세는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암살당했고, 칼 13세는 조카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러시아 제국과의 핀란드 전쟁에서 패전한 여파로 폐위당하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지겨운 정쟁을 이어가기보단 당시 최강국인 프랑스 제국의 수뇌부에게 왕위를 주어 정쟁을 끝내기로 한 것이다. 프랑스 수뇌부 중에서도 외젠인 이유는 외젠이 양자로 받아들이기 적당한 청년 나이대이기도 했고 스웨덴인 또한 존경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1순위로 꼽혔다.[12] 이후 외젠의 딸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이 베르나도트의 아들 오스카르 1세와 결혼하면서 스웨덴과 노르웨이 왕실은 결국 외젠의 여계 후손이 된다.[13] 세상이 정말 무섭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게 이 '아내'라는 여자가 다름아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여동생 카롤린 보나파르트이다.[14] 만약 나폴레옹의 편을 들었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15] 하지만 나폴레옹이 마리 루이즈에게서 아들을 낳자 제위계승권 날아갔다고 날뛴 걸 보면 이유고 뭐고 그냥 싫었던 것일지도.[16] 결국 인과응보인지 남편 뮈라의 총살과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오스트리아군의 포로로 잡히고, 포로에서 풀려난 뒤에도 배은망덕의 본보기로 두고두고 비난을 받으며 고생했다.[17] 특히 나폴레옹 군단 원수 중 한 명이자 폴란드 왕족 출신 원수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이 전투에서 엘스터 강에 빠져 익사했다. 이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장 란이 포탄에 맞아 전사한 것과 동급의 거대한 피해였다.[18] 다만 멕시코에서의 실패와 결정적으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패배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그렇지 제2차 아편전쟁, 베트남 원정 같이 이긴 전쟁도 있다.[19] 나폴레옹을 옹호하자면 외젠과의 혼담을 밀어붙인 대신 조제핀의 전 남편 알렉상드르의 당조카 스테파니를 양녀로 삼아(고아였기 때문에 조제핀이 부양자로 데리고 있었다.) 프랑스 공주 신분을 준 뒤 아우구스테의 전 약혼자인 바덴의 카를 공자에게 시집보냈다.[20] 문제는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요절했다는 것[21] 3년 동안 행복하게 살다가 딸 하나를 두고 페드루 1세가 요절했다. 참고로 페드루 1세는 마리아 2세의 아버지이다. 본래 포르투갈 왕을 겸하다가 딸에게 양위해 버리고 브라질 황제로만 남은 것. 고로 아멜리는 마리아 2세의 새어머니이자 큰오빠 오귀스트의 장모가 된다(...). 이 무슨 개족보야 다행스럽게도 이후 오귀스트가 요절하고 마리아 2세가 페르난두 2세와 결혼하면서 공동 통치를 하며 이러한 개족보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다.[22] 친자가 아니라는 설이 유명하나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23] 나폴레옹 1세와 그의 두번째 황후인 마리 루이즈의 아들로 나폴레옹의 유일한 적자다.[24] 칼 15세, 오스카르 2세 등[25] 테오딜란드 사후 공작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