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5:46:11

조제핀 드 보아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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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AA39D><colcolor=#000000> 프랑스 제국 나폴레옹 1세의 황후
조제핀 드 보아르네
Joséphine de Beauharnais
[1]
이름 마리 조제프 로제 타셰 드 라 파제리[2]
(Marie Josèphe Rosé Tascher de La Pagerie)
출생 1763년 6월 23일
프랑스 왕국 마르티니크
사망 1814년 5월 29일 (향년 50세)
프랑스 왕국 뤼에유말메종
배우자 보아르네 자작 알렉상드르 (1779년 결혼 / 1794년 사망)
나폴레옹 1세 (1796년 결혼 / 1810년 이혼)
자녀 외젠, 오르탕스
아버지 조제프 가스파르 타셰 드 라 파제리
어머니 로제 클레르 데 베르제 드 사누아
형제 카트린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처녀 시절2.2. 첫번째 결혼 생활2.3. 두번째 결혼, 나폴레옹과의 결혼 생활2.4. 나폴레옹의 이혼 선언2.5. 이혼하다2.6. 죽음
3. 기타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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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제핀은 늘 거짓말을 했어. 하지만 늘 우아하게 처리했지. 그녀는 내가 일생 동안 가장 사랑한 여자였다.
- 나폴레옹 1세
단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소. 단 하룻밤도 그대를 내 팔에 끌어안지 않은 적이 없소. 어떤 여인도 그대만큼 큰 헌신과 열정, 자상함으로 사랑하지 않았소. 공감과 사랑, 진정한 감정으로 묶인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오.
- 나폴레옹 1세, 조제핀의 죽음을 듣고 말하길.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첫 황후. 나폴레옹 3세외할머니이기도 하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한때 형수, 그리고 장모였다. 자녀로는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가 있다. 나폴레옹 1세와의 사이에서는 아이가 없었다.

현재 스웨덴, 덴마크, 벨기에, 노르웨이룩셈부르크 공가가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다. 외젠의 장녀 조제핀 드 로이히텐베르크오스카르 1세와 결혼하면서 그 후손들이 각국의 왕이 되었다.

2. 생애

2.1. 처녀 시절

처녀 시절의 본명은 마리 조제프 로즈 타셰 드 라 파제리였다.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마르티니크[3]에서 태어난 크레올[4]이다.

그녀의 친가인 파제리 가문은 원래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허리케인으로 인해 사업이 망하면서 빈궁한 처지로 전락했다. 결국 고모 데지레가 본토의 부자 귀족의 정부가 되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살게 되었지만, 데지레를 정부로 삼은 귀족 내연남은 여색의 대가로 데지레에게 장기간 경제적 지원을 해주기엔 나이가 좀 많았다.[5] 결국 데지레는 자신의 12살짜리 조카딸을 프랑스로 불러 내연남의 막내아들과 결혼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불행히도 오기도 전에 죽어 버렸고, 다시 15살짜리 조카딸을 대타로 불러들여 결국 결혼시켰다. 마리 조제프 로즈는 이후 남편의 성을 따라 마리 로즈 드 보아르네라 불리게 된다.[6]

2.2. 첫번째 결혼 생활

하지만 이 부부의 사이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아들을 하나씩 낳기는 했지만 남편 알렉상드르는 아버지의 내연녀의 조카딸보다는 본인이 직접 선택한 내연녀(...)를 선호했고 아예 집을 나가기에 이르렀다. 결국 남편이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별거를 결정했고 마리 로즈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렇게 생과부가 되는가 싶었는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며 그녀는 진짜 과부가 되었다. 남편 알렉상드르가 처형된 것이다. 알렉상드르는 귀족 신분이었지만 미국 독립전쟁에 자원하고 프랑스 혁명 전쟁에도 장군으로 참전하는 등 비교적 혁명파에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피해갈 수 없어 결국 불성실한 지휘로 패전을 자초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감되었다가 처형되었다. 마리 로즈도 투옥되었으나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풀려났다. 참고로 그녀가 풀려난 건 처형 바로 전날이었다.[7]

마리 로즈는 감방 동기 테레사 탈리앵과의 친분으로 총재 정부 아래의 파리 사교계에 들어가 이름을 날리면서 테레사 탈리앵과 공유하게 된 바라스 총재를 비롯해 수많은 연인을 두었다.[8] 이 와중에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와 나폴레옹의 인연을 계기로 나폴레옹과 교류하게 되어[9] 1796년 6살 연하의 젊은 장군 나폴레옹과 결혼하였다.[10] 정말로 인생사 새옹지마. 이때부터 마리 로즈는 역사에 흔히 알려진 조제핀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2.3. 두번째 결혼, 나폴레옹과의 결혼 생활

나폴레옹은 파리 사교계에서도 손꼽히는 미녀인 조제핀에게 푹 빠져 열렬히 구애하던 것에 비해 상류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조제핀은 볼품없는 외모[11]의 군인 나폴레옹에게 크게 애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폴레옹과 결혼하게 된 이유는 조제핀의 애인이자 당대의 권력자였던 바라스가 나폴레옹의 장래가 유망하다며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군인으로 여자 대하는 데 서툴렀던 나폴레옹은 조제핀을 보자마자 그녀의 매력에 홀딱 빠져 첫눈에 반해 버렸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에게 보내는 편지에 "당신의 편지를 보고 있으면 결혼한 지 50년 된 부부 같아!"라고 적기까지 했으며 훗날 '내가 여자의 매력에 무관심한 건 아니지만 나는 여자 때문에 정신을 놓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여자와 함께 있으면 수줍어지고 불편하다. 그러나 조제핀은 나에게 자신감을 준 최초의 여자였다' 고 회상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1796년에 어느날 밤 자고 있던 시장을 두들겨 깨워 약식 결혼을 치르기에 이른다. 당시 혁명 정부 하에서 유행하던 이 약식 결혼은 본인들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파기가 가능했다. 나폴레옹을 별로 사랑하지 않았고 마지못해 결혼한 조제핀은 나중에 쉽게 헤어질 생각으로 이런 결혼식을 올렸으나 이는 나중에 결정적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된다.

이런 마인드로 결혼했으니 조제핀이 나폴레옹을 사랑할 리가 없었고 나폴레옹이 결혼 이틀 만에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자 조제핀은 미모의 연하남 이폴리트 샤를을 불러들여 거의 대놓고 애정행각을 벌이기에 이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폴레옹은 신혼의 아내가 보고 싶다며 아내를 보내주지 않으면 파리로 철군해 버리겠다고 바라스에게 징징댔고 바라스와 총재 정부는 조제핀의 등을 떠밀어 반강제로 원정지까지 보내는데 그 때도 연인 샤를을 데려갔다고 한다.

급기야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조제핀의 아들 외젠을 데려갔을 때 그녀가 파리 근교의 저택에서 연인과 밀회를 즐기기에 이르자 이 소식은 파리 전체에 퍼졌다. 이를 모르던 유일한 사람인 남편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그 소식을 듣고 홀딱 뒤집어졌다. 거기다 이 사실이 외국까지 퍼지면서 전 유럽이 신이 나서 비웃는 와중에 귀환한 나폴레옹은 분노하여 아예 이혼을 생각했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도 복잡했고[12] 조제핀도 울면서 사죄한 데다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던 그녀의 아이들까지[13]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만류하는 바람에 결국 화해했다. 이후 조제핀은 자신의 불륜을 반성하고 정숙한 아내로 살게 된 반면 나폴레옹은 더 이상 조제핀에게 열중하지 않고 유명 여배우나 귀부인들을 총애하게 된다.

2.4. 나폴레옹의 이혼 선언

조제핀은 낭비벽이 심한 데다 결정적으로 후사마저 없었기 때문에 결국 1810년에 나폴레옹과 이혼하게 되었다. 자신의 무수한 바람과 냉담함에도 자신을 기다려주는 나폴레옹에게 감동한 조제핀이 마침내 진심으로 나폴레옹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정작 나폴레옹은 이미 조제핀에 대한 애정이 식은데다[14] 자신의 합법적인 후계자를 얻는 동시에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고자 했다. 조제핀은 나폴레옹에게 이혼을 통보받았을 때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리고 졸도까지 했으며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텼다고 한다. 나중에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안 아들 외젠의 설득으로 이혼에 동의했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졸도한 건 완전히 쇼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만큼 충격을 안 받은 건 아니지만 젊어서부터 많은 시련을 겪었던 경험이 있어 그 정도 일로 졸도할 만큼 심약한 성격이 아니었다고. 놀라서 안아 옮기는 하인에게 날린 대사는 "불편하니 살살 좀 안아라"였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의 사교계 여인들의 필수 스킬엔 기절하기가 있었다. 남자들이 결투 등 남성스러움을 과시하는 문화가 있듯 여자들은 충격을 받으면 기절하는 여성스러움을 과시하는 문화가 있었다.

파일:illo-front.jpg

이혼 통보에 졸도(하는 척)한 조제핀.

2.5. 이혼하다

이혼을 결정하긴 했으나 나폴레옹도 조제핀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라서 이혼할 때도 나폴레옹은 그녀가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충분히 지원해 주었다. 유명한 말메종 궁전이 바로 그녀가 말년을 보낸 궁전이다.[15] 더불어 조제핀에게 황후로서의 지위와 의전 절차를 계속 유지시켜 주었고 이혼 후에도 계속해서 서신 교류와 만남을 이어갔다.

혼란스러운 혁명기에 살아남았던 처세술의 달인답게 파리에 연합군이 입성한 후엔 딸인 오르탕스와 함께 말메종에서 무도회를 열고 러시아 제국알렉산드르 1세를 초청하기도 했는데 알렉산드르 1세는 조제핀을 여전히 황후인 것처럼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고 한다. 탈레랑과 알렉산드르 1세의 지원에 힘입어 루이 18세의 새로운 정부도 조제핀에게 공작부인의 작위를 내리고 재정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지만 그녀는 나폴레옹의 몰락에 대해서 무척이나 슬퍼했고 엘바섬의 나폴레옹에게도 비밀리에 접촉하여 줄을 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16]
"때때로 나는 우울해서 절망감에 죽을 수도 있을 지경이다. 나는 보나파르트의 운명을 견딜 수 없다."

2.6. 죽음

그러던 중 5월 말에 알렉산드르 1세와 같이 승마를 하던 조제핀은 갑자기 오한을 느끼고 폐렴에 걸려 앓아 누웠는데 5월 29일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그녀의 유언은 "보나파르트, 엘바, 로마 왕."이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나폴레옹은 이틀 동안 방안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심적 괴로움에 시달렸다. 나폴레옹의 유언은 "프랑스, 군대, 선봉, 조제핀"이었다. 후일 엘바 섬을 탈출해 백일천하 기간 동안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한 후 퇴위하고 유배를 떠나게 된 나폴레옹은 도중에 조제핀이 말년을 보낸 '말메종' 성을 방문해 눈물을 흘리며 "나의 불쌍한 조제핀, 그렇게 좋아하는 장미꽃을 꺾으며[17] 길을 걷는 그녀의 모습을 지금 볼 수 있을 것만 같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3. 기타

  • 나폴레옹이 조제핀을 버리고 마리 루이즈와 결혼한 것을 정치적 실수로 보기도 한다. 당시 조제핀은 "승리의 부인(마담 드 빅투아르)"이라고 불리며 병사들의 인기를 얻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이 조제핀과 함께 하던 시기는 프랑스와 그 자신이 잘 나가던 시기였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손녀인 마리 루이즈[18]와 결혼한 후 국내적으로는 국민들이 마리 루이즈를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하고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몰락이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프랑스인', '프랑스 민족'이란 담론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시절에 험악한 혁명 시기를 다른 파리 시민들과 함께 겪으며 국모의 자리까지 올랐던 조제핀은 프랑스 민중의 입장에선 사생활의 일탈이나 사치와는 별개로 동네 언니에서 황후까지 올라간 자랑스런 혁명의 딸로 인식했다. 본인의 배경이 서민은 좀 오버라고 할지라도[19][20] 조제핀은 프랑스 혁명기의 평지풍파를 남들과 똑같이 겪으며 서민들의 고충과 정서를 잘 이해하던 사람이었다. 이런 민중과 정서적으로 가까웠던 황후를 쫓아내고 전통적인 적국이자 프랑스 혁명이 타도하려 했던 구 체제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녀를 새로 들였으니 민중의 반응이 좋을 리가 없었다.
  • 샅내카망베르 치즈 같다거나 암내가 심했다는 소문이 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직후 어느날 연회를 벌였는데 아무리 봐도 황제가 보이지 않자 사람들이 찾다보니 그는 소파에서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노는 시종들이 황제를 그냥 깨우면 무례하니 나폴레옹이 좋아하는 치즈를 가져와서 코에다가 대고 맡게 하면 일어나리라고 의견 합의를 보았는데, 막상 치즈를 들이대니까 나폴레옹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조제핀,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못하겠어."였다. 영어로는 "Not tonight, Joséphine"이라고 하는데 이 구절은 남성이 여성의 성관계 요청을 거절하는 관용구로 쓰인다. 이건 부인병인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여성의 체취에 성욕을 느끼던 나폴레옹의 독특한 성적 취향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나폴레옹은 샅내나 암내에 페티쉬가 있었는데 오죽하면 전쟁 나갔다 돌아오며 조제핀에게 쓴 편지 중에 씻지 말고 기다리시오가 있었다고. 나름 재밌는 일화긴 하지만 부위가 부위인지라 대중적으로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뭐하기 때문에 어린아이 같은 대상에게는 그 냄새가 아니라 암내라고 자주 바꿔서 전파된다.
  • 조제핀은 궁전 정원 연못에서 백조를 키웠는데, 나폴레옹은 그 백조들에게 총을 쏘는 장난을 즐겼다고 한다. 조제핀이 화를 내면 재미있어했다고.
  • 바라스의 또다른 정부였던 테레사 탈리앵과는 절친이었는데 소문에는 3P 관계까지 있었다고 한다. 바라스 외에도 당대의 권력자나 재력자들과 염문이 꽤 많았고 실제로 그렇게 남자들에게서 뜯어낸 돈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하지만 사치벽이 있었기 때문에 빚을 많이 져서 나폴레옹이 집권한 뒤에도 그녀의 빚 문제로 골치를 썩였다고 한다. 게다가 황후가 된 이후로는 사치가 더 심해져 매년 수백 벌의 드레스와 수백 켤레의 구두와 장갑을 각각 구입했는데 나중에는 나폴레옹의 눈치가 보여 자식들에게 비밀리에 돈을 빌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치벽 때문에 오히려 당대의 유행을 선도했고, 밑바닥에서 자수성가한 벼락출세자들이 득실거리던 나폴레옹 궁정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기여했다고.
  • 사실 엄청나게 남자를 밝히고 사치가 심해서 나폴레옹의 골치를 썩이기는 했지만 그런 한편으로는 선량하고 인정이 많아서 인망이 높았다. 어려운 처지의 친구나 이웃도 제법 도와주었고 고아가 된 남편의 당질녀 스테파니를 데려다 키우기도 했다. 남편이었던 보아르네 장군은 인성이 그리 좋지 않았던지라 조제핀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고[21] 때문에 장군이 혁명으로 죽기 얼마전에 이혼한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조카도 아니고 이혼한 남편의 5촌 조카를 데려다 키운 거다.[22] 스테파니는 덕분에 조제핀이 나폴레옹과 결혼하자 나폴레옹의 피부양자가 되어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와 함께 단숨에 황족 신분이 되고 외국의 왕자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나중에 외손녀가 벨기에 왕가로 시집을 가면서 벨기에 국왕의 직계 조상이 된다. 스테파니는 완전히 인생 자체가 로또 맞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때 조제핀이 거둬주지 않았다면 스테파니는 운이 아주 좋아야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 같은 곳에 들어가 자란 뒤 약간의 재산 있는 남자에게 시집 가는 거였고 운 나쁘면 거리를 떠돌다 굶어 죽거나 창녀가 될 가능성도 다분했다. 실제로 당시 프랑스에서는 스테파니 정도의 신분으로 고아가 된 경우 그렇게 풀리는 경우가 득실득실했다. 그런 처지에서 맘씨 좋은 인척 아줌마가 자기를 데려가더니 어느날 갑자기 신분이 황족으로 급상승 하고 옛날 같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진짜 왕자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 오스만 제국의 태후 나크시딜 술탄이 조제핀의 사촌인 에메 뒤비크 드 리베리(Aimée Dubuc de Rivery)라는 설이 있다. 프랑스 출신으로 알려진 나크시딜 술탄은 수녀원에 가기 위해 배를 탔다가 바르바리 해적에게 납치되어 코스탄티니예로 끌려갔고 압뒬하미트 1세의 눈에 띄어 황후가 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친프랑스식 개혁을 시행하였기 때문에 퍼진 소문으로 한때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되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 이후 1794년에 폐지된 흑인 노예제를 1802년에 부활시킨 것은 조제핀의 부탁 때문이었다. 마르티니크 섬에 있는 조제핀의 친정이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했고 흑인 노예 없이는 사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조제핀 사후 마르티니크의 생가에는 조제핀의 흉상이 만들어졌는데 머리가 한 번 잘려나가고 복원한 이후에도 누군가 계속 잘라간다고 한다. 단순한 에피소드 같지만 실제로 아직까지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던 아이티 혁명을 강경 진압하고 재침공하면서 혁명 초기만 하더라도 적지 않은 조류였던 식민지의 유색인종이지만 프랑스 국가와 프랑스 혁명의 이상엔 공감하던 흑인 크레올, 해방 노예 계몽주의자들의 전통을 박살낸 게 나폴레옹이었다. 인종 정책에 있어서 제정은 확실히 공화정보다 더 후퇴한 면을 보였고 아이티에서 벌어진 대참극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자국 프랑스인들에게는 위대한 국가와 자유주의적 제국을 선물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보편적 이상주의는 후퇴시킨 나폴레옹 치세의 성격에 있어 상당히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 한 관광객이 파리 벼룩시장에서 오래된 장신구 하나를 관광기념품으로 구입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공항검문대를 통과하다가 파리 공항경찰에게 유물 밀반출혐의로 체포 당할 뻔 했는데 헐값으로 산 오래된 장신구가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선물한 장신구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 나폴레옹 3세의 황후인 외제니 드 몽티조의 롤모델이기도 했다. 사치도 적당히 하면서 명품 상인들의 인망도 얻고 한편으로는 과도한 사치비용을 절약해서[23] 가난한 사람에게 기부하기도 했다.
  • 2002년 방영된 프랑스에서 제작된 나폴레옹 전기 드라마에서는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2023년에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나폴레옹에서는 바네사 커비가 맡았다.

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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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에서는 조세핀으로도 불리지만 프랑스어로는 조제핀이 올바른 발음이다.[2]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드라파제리'로 표기한다.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3] 그녀의 부모가 1771년까지 세인트루시아에서 살았기 때문에 실제 출생지는 세인트루시아일 가능성이 높지만 대혁명의 여파로 세인트루시아가 영국령이 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세례를 받은 곳이자 프랑스 점령시절 세인트루시아의 관할권을 가지고 있던 마르티니크를 공식적인 출생지로 처리했던 것으로 보인다.[4] 오늘날에는 흑/백 혹은 백/적 혼혈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지만 당시에는 그냥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 혈통을 의미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페닌술라르 문서 참조.[5] 당시 이미 60대 중반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막내 아들, 즉 조세핀의 남편보다 오래 살았다는 점이 함정이다.[6] 묘하게도 당시에는 조제프라는 이름을 빼고 마리 로즈라는 이름을 썼다. 이후 조제프의 여성형인 조제핀은 다음 남편 전용 이름이 되지만 당연히 이때의 이름도 남편의 성을 딴 조제핀 보나파르트였으므로 오늘날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는 정작 거의 사용하지 않은 이름인 셈이다.[7] 남편은 반동을 불과 4일 앞두고 처형당했다.[8] 그중에는 나폴레옹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라자르 오슈 장군도 있었다.[9] 다만 이는 후대에 윤색된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로베스피에르파로 간주되어 사실상 실직한 나폴레옹이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하러 바라스에게 눈도장을 찍으러 다녔으며 따라서 이 과정에서 이미 바라스의 안방마님 격이었던 조제핀과 어느 정도의 교류는 있었을 것이다.[10] 사실 조제핀의 정부이자 총재 정부의 주역 바라스가 조제핀에게 질리기 시작하고 관계를 정리하면서 대신 구해준 조제핀의 신랑감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는 것이 당대의 세평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바라스를 몰락시킨다.[11] 얼굴 자체는 미남이었지만 프랑스 황제가 되기 전의 나폴레옹은 정말로 너무 말라 볼품없어 보이긴 했다고 한다. 게다가 코르시카 출신이었던 나폴레옹은 사교계에서 보기엔 발음이나 행동 면에서 촌티가 줄줄 흘렀을 것이다.[12] 당시 나폴레옹은 본인을 '개선장군'으로 포장하여 얻은 인기를 기반으로 쿠데타에 가담할 계획이었지만 귀국하자마자 이혼부터 하면 대중의 이미지는 개선장군이 아니라 속된말로 NTR당한 걸 알자 군대도 내팽개치고 달려온 바보 남편이 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나폴레옹과 가장 친한 부하 장 란 역시 이 때 같은 처지에 놓였는데, 이쪽은 정치적 입지가 필요없었기 때문에 가차없이 이혼했다(...).[13] 나폴레옹은 조제핀의 아들딸을 몹시 아꼈다. 혼사도 자기 집안이나 유럽 굴지의 명문가와 엮어주었고 이후 유배갔을 때는 '내 유일한 가족은 외젠뿐이었다'고 회상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녀의 딸 오르탕스는 자기 남동생과 결혼시켰는데 이후 오르탕스가 바람을 피워 사생아를 낳아왔을 때조차 이혼하겠다는 동생의 요청을 거부한다.[14] '평범한 이들의 잣대를 위대한 이들에게 들이대지 말라'고 말하며 피차 바람을 피워댔기 때문에 애정 문제는 아니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자신의 다른 정부까지 아이를 낳은 상황에서 자신의 생식 능력은 증명되었으니 합법적인 후계자를 얻고 싶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15] 이 곳은 지금도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조세핀과 나폴레옹의 일생에 관한 여러 전시품들을 소장하고 있다.[16] 그러나 나폴레옹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마리 루이즈와의 관계를 회복해 나폴레옹 2세를 다시 데려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데다 조제핀이 알렉산드르 1세에게 줄을 댄 것을 배신행위로 여겼기 때문에 이를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17] 조제핀은 장미를 매우 좋아해서 수많은 품종의 장미를 수집했고 그녀를 보필하는 영국인 정원사대륙봉쇄령에도 구애받지 않고 어떤 항구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과 이혼한 후 '말메종' 성에서 생활할 때는 250 종류의 장미를 말메종의 뜰에 심고 장미를 채집하러 돌아다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을 배려해 자신이 모은 장미를 식물 화가 피에르 조제프 르두테(Pierre Joseph Redouté, 1759-1840)에게 그리게 하여 기록에 남겼을 정도였다.[18] 마리 루이즈의 친할아버지인 레오폴트 2세의 막내 여동생이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다. 마리 루이즈에게 앙투아네트는 고모할머니인 셈.[19] 조제핀의 출생지는 마르티니크 섬으로 부유한 설탕 농장 경영자의 집에서 태어났다. 물적으로는 풍족하지만 신분 자체는 평민이었는데 본래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이렇게 돈 많고 교육을 받은 평민, 즉 제3계급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물적인 의미에서 서민은 아니었어도 나름 혁명기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되는 인물이었지만 조제핀의 처녀적 성인 타셰 드 라파제리에서 타셰 가문은 프랑스의 지방 영주 출신인 귀족 집안이며 타셰 드 라파제리는 타셰 가문의 종가이므로 완전히 평민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20] 사실 유럽은 귀천상혼 배제가 심하기 때문에 왕실에서 신분이 맞지 않는 결혼 및 왕가보다 급이 낮은 가문과 결혼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괜히 현대까지도 영국에서 캐서린 미들턴이 결혼 당시 평민 왕세자비라며 화제가 되었던 게 아니다. 하물며 시대를 감안하면 아무리 재벌가라도 제3신분 출신이 황후까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컸다.[21] 독일 왕족 여성인 아말리아 제피린을 애인으로 두고 있었으며 아이들에게도 무심했기 때문에 조제핀의 아이들이 친아버지 보아르네보다는 양아버지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22] 조제핀은 귀족에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바라스의 정부였으니 빽이야 있었지만 워낙 낭비벽이 심하다보니 재정적으로는 완전히 파산 상태였다. 살고있던 집도 남의 것인데다 생활도 완전히 빚으로 꾸려가고 있는 상태였다. 아직 미모가 남아 있고 여기저기 인맥이 남아있어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바라스에게 버림받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게 분명한 상태였기 때문에 바라스도 그녀가 부담이 되나 그냥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나타난 나폴레옹에게 바톤 터치하는 식으로 넘겨버렸다.[23] 황실에 기본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아닌 특별세금으로 사치를 하는 것은 자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