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족2. Princes du sang
Princes of the Blood.[1]방계 왕족으로 재위 중인 국왕의 증손자녀들, 그리고 전직 국왕의 적자[2]들의 남계 후손들이다. 즉,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장남과 그 직계 후손이 아닌 방계 왕족들이 이 계급에 해당된다. 따라서 원칙상으론 위그 카페의 모든 부계 적자 후손들은 Princes du sang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 모든 방계 왕족들이 Princes du sang가 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이는 Princes du sang 작위가 발루아 왕조를 거쳐 부르봉 왕조 시대에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루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의 가장 마지막 공통 중시조인 성왕 루이 9세의 후손이 아닌 방계 후손들은 Princes du sang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라틴 제국의 황족이던 카페-쿠르트네 가문 (Capetian House of Courtenay) 역시 그 예로, 부계로 따지면 루이 9세의 증조부인 루이 7세의 동생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Princes du Sang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물론 이들은 이에 반발하여 수 차례 이의를 제기하며 Princes du Sang를 자칭했지만[3]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강해진 왕권 앞에선 일개 귀족의 청원 따위는 묵살되었다. 심지어 발루아 왕가 치세에는 부르봉 가문의 직계 분가인 부르봉-카렌시 가문조차 Princes du sang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1530년에 가문이 아예 단절될 때까지 왕실추밀원에도 입각하지 못했다.[4]
Princes du sang 작위를 가진 이들 중 가장 왕위 계승 서열 높은 자에겐 Premier prince du sang (First Prince of the Blood)라는 작위를 주어 다른 Prince du sang들과 차별성을 두었는데, 우리가 알만한 대표적인 Prince du sang 가문들은 대부분 Premier prince du sang을 한 명 이상 배출해냈다. 부르봉 왕조의 시조인 앙리 4세, 부르봉-오를레앙 왕조의 시조인 루이필리프 1세 역시 Premier prince du sang의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었다. 한국사로 치면 조선 후기 대원군 작위를 작위의 하향조정을 특별히 면제받아 계속 세습한 대원군가 종손이나 중국사로 치면 청나라의 마찬가지로 작위의 하향조정을 특별히 면제받아 친왕 작위를 계속 세습한[5] 소위 철모자왕과 비슷한 개념이다. 역대 Premier prince du sang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역시 Prince du sang와 마찬가지로 발루아 왕조를 거쳐 부르봉 왕조에 완성된 것이므로 최초의 Premier prince du sang 역시 발루아 왕조 중기부터 임명되었다. Premier prince du sang은 6개 가문과 14명이 있었고 이 중 4명은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추가적으로 부르봉-방돔 가문의 앙투안 드 부르봉과 앙리 드 부르봉은 각각 공동왕, 단독왕으로서 나바라(나바르)의 국왕에 올랐다.[6]
가문 | 이름 | 기간 | 비고 |
발루아-오를레앙 가문 | 루이 도를레앙(Louis d'Orléans) | 1465 ~ 1498 |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 밀라노 공작, 루이지 1세[7]. 나폴리 국왕, 루이지 3세[8]. 발루아-오를레앙 왕조의 창시자. |
프랑수아 당굴렘 (François d'Angoulême) | 1498 ~ 1515 | 앙굴렘 백작, 프랑수아.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9].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창시자. | |
발루아-알랑송 가문 | 샤를 달랑송(Charles d'Alençon) | 1515 ~ 1525 | 알랑송 공작, 샤를 4세. |
부르봉-몽팡시에 가문[10] | 샤를 드 부르봉(Charles de Bourbon) | 1525 ~ 1527 | 부르봉 공작, 샤를 3세. 몽팡시에 백작, 샤를. 반역죄로 추방.[11] |
부르봉-방돔 가문[12] | 샤를 드 부르봉(Charles de Bourbon) | 1527 ~ 1537 | 방돔 공작, 샤를. 부르봉 가문의 수장. |
앙투안 드 부르봉(Antoine de Bourbon) | 1537 ~ 1562 | 방돔 공작, 앙투안. 나바르 공동왕, 안토니오[13]. | |
앙리 드 부르봉(Henry de Bourbon) | 1562 ~ 1589 | 방돔 공작, 앙리[14]. 나바르 국왕, 헨리케 3세[15]. 부르봉 왕조의 창시자. | |
부르봉-콩데 가문 | 앙리 드 부르봉(Henry de Bourbon) | 1589 ~ 1646 | 콩데 대공 (Prince de Condé), 앙리 2세. 앙리 4세의 5촌 조카[16]. |
루이 드 부르봉(Louis de Bourbon) | 1646 ~ 1686 | 콩데 대공 (Prince de Condé), 루이 2세. 대(大) 콩데(Le Grand Condé). | |
앙리 드 부르봉(Henry de Bourbon) | 1686 ~ 1709 | 콩데 대공 (Prince de Condé), 앙리 3세. | |
부르봉-오를레앙 가문 | 루이 도를레앙(Louis d'Orléans) | 1709 ~ 1752 | 사르트르 공작, 루이[17]. 오를레앙 공작, 루이[18]. |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Louis Philippe d'Orléans) | 1752 ~ 1785 |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1세. | |
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 (Louis Philippe Joseph d'Orléans) | 1785 ~ 1793 |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 필리프 에갈리테[19]. | |
루이필리프 도를레앙(Louis Philippe d'Orléans) | 1814 ~ 1830 |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3세.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 1세. 부르봉-오를레앙 왕조의 창시자. |
[1] 한국어 위키백과에선 혈통친왕이라고 번역하고 있다.[2] 1714년 7월에 루이 14세가 자신의 서자인 멩 공작과 툴루즈 백작을 Princes du sang으로 인정하고, 다른 왕족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가진다고 선언했지만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하자 고등법원은 이를 무효화 시키면서 다시 적자의 후손만 Princes du sang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3] 프랑스 정부에선 쿠르트네 가문의 Princes du Sang 칭호를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이 보유한 작위로만 호칭했다.[4] 이는 부르봉 가문에 대한 일종의 견제이기도 했다.[5] '세습망체'라고 한다.[6] 앙리 드 부르봉은 프랑스의 앙리 4세이기 전에 나바라의 헨리케 3세였다.[7] 1499년부터 1512년까지.[8] 1501년부터 1504년까지.[9] 1515년부터 1521년까지.[10] 부르봉-몽팡시에 가문은 부르봉 가문의 방계 가문으로 샤를 3세의 아내, 쉬잔 드 부르봉이 부르봉 본가의 후계자였고 부르봉 본가이 단절될 경우 부르봉-몽팡시에 가문이 부르봉 본가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부르봉-몽팡시에 가문이 그 정통성을 이어 받아 부르봉 본가가 되었다.[11] 샤를 드 부르봉은 부르봉 가문의 방계 가문이던 부르봉-몽팡시에 가문의 후계자였고 그의 아내였던 쉬잔 드 부르봉은 부르봉 본가의 후계자였다. 샤를은 아내와 결혼한 이후 합법적으로 부르봉 공작위와 영지를 상속 받았는데 아내가 사망하자 부르봉 공작위에 대한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루이즈 드 사부아 (루이자 디 사보이아)가 혈족관계 상 자신이 더 쉬잔과 가까운 사이라며 부르봉 공작위를 요구했고 샤를에게 정략결혼을 제안했다. 그러나 후사가 없던 샤를은 자신보다 14살이나 많은, 55세의 폐경기의 여성과의 결혼을 거부했고 이를 빌미로 프랑수아 1세가 반역죄라는 죄목으로 샤를을 추방시켰다. 이후 샤를은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프랑수아의 숙적이던 카를 5세의 군대 지휘관으로 복무하며 충성을 맹세 하였으나 후에 카를이 프랑스를 공격할 때 전사하고 만다.[12] 샤를 드 부르봉-몽팡시에가 반역죄로 추방된 이후 부르봉-방돔 가문이 부르봉 본가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가문의 수장임을 상징하던 부르봉 공작위는 주어지지 않았다.[20] 우리가 아는 그 부르봉 왕조와 스페인의 보르본 왕조, 보르본 왕조의 방계 가문인 보르보네-양시칠리아 왕조, 그리고 현재 룩셈부르크의 대공위를 차지하고 있는[21] 부르봉-파르마 가문 모두 부르봉-방돔 가문의 직계 후손이다.[13] 아내인 호아나 3세가 나바라(나바르)의 여왕으로 즉위하자 공동 왕으로 즉위했다.[14] 1562년에 즉위. 이후 자신의 사생아였던 세자르 드 부르봉 (César de Bourbon)에게 방돔 공작을 물려주었다.[15] 1572년부터 1610년까지 재위. 참고로 프랑스의 왕으로선 1589년부터 1610년까지 재위했다.[16] 루이 1세 드 부르봉-콩데의 손자로 루이 1세 드 부르봉-콩데는 나바라의 공동 국왕이던 앙투안 드 부르봉-방돔의 동생이자 제 1대 방돔 공작인 샤를 드 부르봉-방돔의 아들이었다.[17] 1703년부터 1723년까지.[18] 1723년부터 1752년까지.[19] Philippe Égalité. 평등한 필리프라는 의미로 혁명 이후 스스로 자신의 모든 작위를 버린 뒤 개명한 이름이다. 왕족이면서 프랑스 혁명에 참여하여 자금을 조달했으나,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고 혁명 세력의 통수를 치려던 것이 발각되어 역으로 처형당하고 만다.
[20] 부르봉 공작위는 1527년 이후 계속해서 공석이었다가 앙리 4세가 즉위한 이후 자신의 사촌이던 앙리 2세 드 콩데 대공에게 작위를 넘겼다.[21] 장 대공의 아버지인 펠릭스 공자가 부르봉-파르마 가문 출신인지라 자연스럽게 룩셈부르크 대공가 구성원들 역시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구성원이 되었지만 장 대공의 자녀가 본가와 귀천상혼으로 갈등을 겪게 되자 장 대공은 본가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어머니인 샤를로트 여대공의 가문명인 나사우-바일부르크를 왕조명으로 계속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현재는 화해를 했기 때문에 룩셈부르크 대공가 구성원들은 모두 부르봉-파르마의 공자/공녀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