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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프로이센 국왕 · 독일 황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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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7년 3월 22일 | ||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 |||
사망 | 1888년 3월 9일 (향년 90세)[1] | ||
독일국 베를린 | |||
재위기간 | 프로이센 국왕 | ||
1861년 1월 2일 ~ 1888년 3월 9일 | |||
북독일 연방 의장 | |||
1867년 7월 1일 ~ 1871년 1월 18일 | |||
독일 황제 | |||
1871년 1월 18일 ~ 1888년 3월 9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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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빌헬름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Wilhelm Friedrich Ludwig) | ||
부모 |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어머니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 ||
형제자매 |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첫째 여동생 샤를로테, 둘째 여동생 프리데리케, 첫째 남동생 카를, 알렉산드리네, 둘째 남동생 페르디난트, 막내 여동생 루이제, 막내 남동생 알브레히트 | ||
배우자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 (1829년 결혼) | ||
자녀 | 장남 프리드리히 3세, 장녀 루이제 | ||
종교 | 루터교회 (프로이센 교회 연합)[2] | ||
신체 | 180cm[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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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어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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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 왕국 제7대 국왕이자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을 바탕으로 강력한 프로이센 왕국군을 조직했고 또 다른 독일 통일 후보인 오스트리아 제국을 격파해 독일 통일을 주도하였다. 이후 스페인 국왕의 즉위를 둘러싼[4] 프랑스 제2제국의 나폴레옹 3세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해 알자스-로렌 지방을 흡수하고 마침내 1871년 독일의 황제국을 창시함과 동시에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로이센 국왕, 독일 황제를 역임한 호엔촐레른 가문 군주 중에서 최고령으로 즉위한 군주고 더 나아가 독일 역사상 최고령 군주이다.[5] 다만 빌헬름 1세는 왕태제였다가 즉위했다. 왕태자를 거쳐서 즉위한 황제로는 아들인 프리드리히 3세가 최고령이다.
2. 생애
2.1. 즉위 전
1810년. 왕자 시기.
어린시절에 어머니 루이제 왕비,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오른쪽)와 함께 산책하는 빌헬름 1세.
1797년 3월 22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왕국의 전통에 따라 어린 나이부터 프로이센군의 장교로 복무하며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여 대육군과 맞서 싸웠고, 이후 평생을 군인으로 보내다가 2살 위의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아들이 없어서 후계자가 되었다.
1848년 3월 혁명 때는 강경 진압을(대포로 진압을 명령) 주장해서 '총알 왕자(또는 포도탄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혁명군의 살해 위협에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하는데 이 당시 역시 강경 진압을 부르짖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눈여겨보았다. 당시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즉위 전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고, 군주주의자와 반동 복고 세력의 바람과 따로 놀았는데 혁명이 터지자 진압에 주저하고, 혁명군에 사로잡혀 굴복하게 되자 융커들을 비롯한 보수 반동 세력의[6] 많은 인사들이 겁많고 나약한 국왕에 실망하고 왕태제 빌헬름 왕자에 주목했다. 다만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황제로 추대하겠다고 했을 때는 형에게 이를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다. 그 역시 형처럼 국민에 의해서 황제로 추대된다는 생각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이를 거부하면 혁명이 더욱 급진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혁명이 나가리되자 다시 프로이센으로 돌아왔는데,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혁명 이후 외교적으로 오스트리아의 독일권 내 주도권 주장에 굴복하는 등 실망스런 통치 기간을 보냈고 있었다. 빌헬름은 특유의 호전적인 군인답게 오스트리아를 향한 군사적인 행동을 원했지만, 결국 오스트리아가 개입하여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을 훼방하는 것을 보고 큰 굴욕감을 맛보았고,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을 주장했던 요제프 폰 라도비츠가 끝내 해임되고 나서도 그와 계속해서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았다.
1850년부터 1858년까지는 코블렌츠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 아우구스트 폰 베트만-홀베크, 막시밀리안 볼프강 둔커 등 자유주의 학자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이 중 베트만-홀베크의 경우 자유주의-보수주의 성향의 보헨블라트당에 속했는데, 빌헬름 1세도 이들의 영향을 어느 정도 조금씩 받게 되었다. 이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60세가 되는 해(1857년)에 정신병이 발작해서 통치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헌법에 선서를 한 후 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게 되었다. 섭정 기간 동안에는 외교적으로 계속해서 독일 내 프로이센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집중했다. 하지만 1859년 이탈리아 통일 전쟁의 일부인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보며 마냥 외교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형이 사망하자 1861년 왕위에 올랐다.
2.2. 즉위 후
2.2.1. 독일 통일 이전
즉위 전인 섭정 시절부터 평소의 지론대로 군대를 강화하려고 했고, 1859년에 폰 론을 장관으로 임명하여 국방 개혁안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예비역 지휘를 현역 장교에게 맡기는 개혁안과 징병제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는 예산 문제로 하원과 충돌하자[7] 퇴위를 불사하며[8] 평소 눈여겨 본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전격 기용하였다. 아무튼 이렇게 임명된 비스마르크는 유명한 철과 피 연설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의회의 예산권을 대놓고 침해하고 군대 예산을 늘렸는데, 이것이 가능한 건 역시나 총리는 오로지 국왕에게만 책임을 지지 의회 따위와 수직관계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외 군주제 전통에 길들여진 의회에서 더이상 강한 충돌을 원치 않아서이기도 했다.[9] 어쨌건 결과적으로 본인이 원하는 대로 밀어붙여 강군을 만들기는 했다.덴마크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두고 긴장이 심화되던 차, 1863년 가을에 마침내 덴마크 정부가 슐레스비히를 자국 영토로 공표하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폭발하게 되었고 빌헬름 1세는 어전 회의에서 이들의 애국적인 주장을[10] 좌시할 수 없다며 군사적인 개입을 지시했다. 그렇게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발발했는데, 파병해놓고도 빌헬름 1세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프로이센의 영토로 추가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따라서 순전히 이들의 독립을 지원하려는 생각으로 출발한 것이었는데, 전쟁이 끝나갈 무렵 군사적 피해가 아쉬웠던 건지 마음을 다시 바꿔먹고 프로이센군이 많이 희생당했으니 합병이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즉,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이 지역의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공감해서 파병하고 합병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민족주의는 아랫 것들의 상스러운 불순사상이라 생각하던 게 빌헬름 1세의 지론이었다.[11]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아예 합병하길 원했던 빌헬름 1세 및 프로이센 정부와 달리 오스트리아는 이 곳을 독립적인 지역으로 두고 싶었고 지속적인 갈등을 빚고 있었다. 결국 1866년 6월 9일 프로이센군이 홀슈타인으로 진군하고, 오스트리아를 주도로 독일 연방 국가들이 군사적 행동을 결정하면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다만 이 시기 빌헬름 1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미국 역사학자 데니스 쇼월터의 경우 빌헬름 1세가 전쟁 개시와 회피 두 가지 옵션을 모두 열어두고 싶어했으며, 전쟁이 개시될 경우에도 주변국들을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선제적인 공격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에 의한 개전을 원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제프리 워로의 경우 비스마르크나 몰트케와 달리 빌헬름 1세는 애초부터 군사적인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공통적인 부분은 빌헬름 1세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바라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허나 즉위 전부터 지속적으로 소독일주의자들과 교류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통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피하려 했다기보다는 승전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신중을 기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실제로 오스트리아가 열강 중에서도 좀 덜떨어진 취급을 받기 시작한 것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지고 오헝제국으로 연명하기 시작한 뒤부터이지, 그 전까지만 해도 무시못할 중부유럽의 터줏대감 강자였다. 이런 나라를 상대로 프로이센이 그토록 선전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쨌건 유능한 프로이센군은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고, 1850년의 굴욕을 잊지 않고 있었던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를 포함한 수뇌부에게 아예 빈을 침공하고 보헤미아 왕국의 일부를 할양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12]결과적으로 이 제안은 몰트케와 비스마르크가 거절했고, 프로이센군에 콜레라가 유행 중이었으며, 프랑스가 슬슬 휴전 압박을 넣기 시작함으로써 없던 일이 되었다. 승전이 확실시 된 8월 15일 경에는 프로이센의 북독일 소국들 합병이 국가적인 통일을 촉진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정당화하기도 했다. 승전한 결과 하노버 왕국, 헤센 선제후국, 나사우 공국, 프랑크푸르트는 아예 프로이센 왕국령으로 합병시켜버리고 나머지 북독일 소국들도 북독일 연방을 출범하며 사실상 통치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당시 종전을 종용했던 프랑스의 반응에서 알 수 있다시피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독일 지역의 세력 균형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프로이센 또한 이를 내정 간섭으로 여겨 양국 정부와 민족 간의 긴장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이후 1870년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엠스 전보 사건이 터지면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한다. 비스마르크가 의도한대로 전쟁은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시작했고 프로이센은 방어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며 아무 국가도 프랑스를 돕지 않게 되었다. 되려 남독일 국가들이 민족주의적 정서에 힘입어 프로이센 편에 줄줄이 붙어버렸고, 시작부터 전쟁은 프로이센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후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영묘당에 묻힌 어머니의 석관 옆에 무릎을 꿇으며 결의를 다진 빌헬름 1세는 몰트케에게 전쟁 계획 수립을 맡겼다. 스당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자 그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 전쟁 후반부에는 아예 직접 군사 회의를 주재하며 전략적인 차원에서 사실상 진두지휘했고, 결과 및 방향성을 놓고 비스마르크로 대표되는 정부와 몰트케로 대표되는 군대 사이에 간극이 발생하면 이를 성공적으로 중재해 하나로 통일해나갔다. 국민 여론
2.2.2. 독일 통일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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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건 뇌물 액수에 만족한 루드비히 2세는 빌헬름 1세에게 황제 제위에 올라달라는 서신을 썼고, 뒤이어 또 한번 비스마르크의 뒷공작으로 남부 독일 제후 중 빌헬름 1세의 사위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17]도 빌헬름에게 황제 자리에 올라달라고 요청했다.[18] 그 외 뷔르템베르크 왕국과 헤센 대공국 등도 자국 정치권 및 여론에 등떠밀려 비스마르크와 협상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남독일 군주들을 설득하는 과정들도 빌헬름 1세를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헌법에 의해서 자신이 황제로 공인되거나 북독일 연방 의회 대표단이 자신에게 황제 칭호를 수락할 것을 부탁하는 등 즉위 과정에 있어서 민주적인 절차도 탐탁치 않아 했다. 더군다나 후술할 황제 칭호에 대한 문제는 더욱 빌헬름 1세를 지치게 만들었고 의욕을 떨어뜨렸으나 이미 판은 다 완성된 상황이었고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황제 자리가 '독일국의 황제(Kaiser von Deutschland)'[19]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그런 식이면 구성 제후국들의 군주들이 얄짤없이 신하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수용하지 않을 거라는 비스마르크의 설득 때문에 독일인 황제(Deutscher Kaiser)가 수여된 것이다.[20] 한국어로는 ①Kaiser der Deutschen[21], ②Kaiser von Deutschland[22], ③Deutscher Kaiser[23] 모두 '독일 황제'로 해석할 수 있지만 차이가 있다. 당시 자유주의 입헌주의자들은 사회계약론에 바탕한 국민 주권을 기반으로 군주제라도 아래에서 추대된 권력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의미는 군주주의자들에게 "권력이 아래에서 나왔다면, 아랫 것들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거냐?"는 굉장히 불순한 사상으로 여겨졌다. 나폴레옹(Empereur des Français)과 루이필리프(roi des Français)의 칭호가 그 부류인데 '프랑스인의 황제/왕'이란 것에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②의 칭호는 기존 봉건제의 왕국이나 제국은 신이 통치권을 수여했다는 종교적인 정통성까지 있기 때문에 어느 제후나 인민 따위에게 묻지 않고 신성불가침한 통치권력이 수여받았다는 의미라서 역시 독일 군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즉 ①은 독일'인'의 황제, ②는 독일국의 황제, 그리고 ③은 그냥 독일인 황제를 의미하는데, ①의 경우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는 감히 까마득한 아랫것들에게 수여받았다는 전제가 있으니 왕정주의자들에겐 입헌세력의 불순한 발상이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위에 나온 나폴레옹의 황제 칭호도 그렇고, 더욱이 전 유럽 왕실에게 왕따당한 루이 필리프의 '시민의 왕' 같은 천박한 칭호였다. 1848년 혁명 당시 독일 혁명을 주도한 혁명파에서 빌헬름 1세의 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바쳤다가 거절당한 제위도 ①이었으니 당연히 빌헬름 1세에겐 무엄한 칭호일 뿐이었다. ②는 독일 군주들이 프로이센과 명목상 동등한 제후국왕들이 빌헬름의 신하가 되는 것이라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래서 대안이라고 추대된 ③의 칭호는 그냥 (독일인) 황제인데 독일 군주 중에 대표격으로 추대 되었다는 정도이자 독일인 중 황제라는 별 다른 의미 없는 칭호 였다.
그래서 빌헬름 1세는 취임식 아침까지 비스마르크에게 "독일인 황제"(Deutscher Kaiser) 자리는 외국 군주가 오면 의전상 각국 왕실 근위 연대 소속으로 수여하는 '명예 대령'직에 불과하며 이 칭호로 프로이센 국왕 자리가 가려질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또한 황제 호칭에 대한 빌헬름 1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고 싶어서였는지, 즉위식에서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가 군주들을 대표하여 건배사를 올릴 때도 이미 정해진 ③"Deutscher Kaiser"으로 칭하지 않고 그냥 "빌헬름 황제"라고 칭했다.
독일 황제관을 쓴 빌헬름 1세.
빌헬름 1세(왼쪽)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오른쪽).[24]
어쨌건 독일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는데에는 성공했다. 물론 통일 이후에도 비스마르크와 항상 뜻이 일치한 것은 아니며 갈등도 있었지만, 빌헬름 1세는 자신보다 그가 나라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하에게 맡기는 인내심을 보여줘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몇몇 경우는 빌헬름 1세의 의견이 더 옳았던 것으로 훗날 판명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사이가 안 좋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동유럽 외교 정책에서 두 사람은 크게 대립하였는데, 이 외교 정책은 "비스마르크이기에 할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곧 "비스마르크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비스마르크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는 비판은 곧 비스마르크에 대한 극도의 상찬이기도 하다.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끼인 양면전선 독일의 전략적 상황은 비스마르크 뿐만 아니라 그냥 독일 자체의 지정학적 문제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문제다. 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성공적으로 해낸 정치인이 비스마르크 말고 누가 있는지 떠올려보면 딱히 떠오르지가 않는다. 유럽은 좀 잘나간다 싶으면 단체로 몰매맞는 대륙이다. 후대의 빌헬름 2세와 아돌프 히틀러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프리드리히 대왕마저도 힘 좀 쓰려고 하다가 양쪽에서 공격받고 파멸에 이를 뻔한 걸 생각하면, 독일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정치 / 군사 정치인들 가운데 오스트리아를 패서 주도권을 뺏고, 프랑스를 쳐서 파리에서 행진을 하고, 독일 통일까지 이루는걸 단 한 세대 만에 이루었음에도 적절히 주변국의 어그로를 관리하면서 최대한의 이익을 보장받는 선에서 확장을 멈추면서 독일의 외교적 정세를 파국에 이르게하지 않는다는 건 비스마르크가 해내기 이전까지는 상상하기도 힘든 업적이었고, 동시에 그 이후로도 누구도 이루지 못했다. 다시 말해 비스마르크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안 될 일을 "비스마르크의 초월적인 대전략적 혜안과 외교적 감각덕에 살아있을 때 동안만 유지했다."라는 말과 같다는 뜻이다.
[25]
자세히 설명하자면 지금은 상상하지 힘들지만 본래 독일과 러시아는 굉장한 우호 관계였었다. 프로이센을 구원해준 독빠 황제로 유명한 표트르 3세부터 시작해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둘은 연합군이었으며 황실끼리도 관계가 굉장히 깊었다.[26] 당장 러시아 역사상 손꼽히는 군주인 예카테리나 2세도 안할트 아스카니아 가문[27]출신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슈테틴 태생인 데다가 프로이센에서 시집온 여인이었다.
그러던 와중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발칸반도로 세력을 넓히게 되는데 이에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반발하여 갈등을 빚게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스마르크가 스스로 중재자를 자처하며 베를린 회의가 열렸다. 이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는 당연히 독일이 러시아편을 들어줄 것이라 잔뜩 기대를 했으나 기대와 달리 독일은 앞서 언급한 대로 중재자라는 애매한 위치를 고수했고 이는 러시아에게 있어서 곧 배신이라 여겨졌다. 러시아 황실은 엄청나게 분노해 독일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편지까지 보내며 지금까지의 우호적인 대독일 외교관계를 상당부분 수정하여 재정립 하는 수순까지 이르렀으며 비스마르크는 이에 대비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하게 된다.
그래도 비스마르크가 직접 활동하던 시기에는 분노한 러시아를 살살 달래가며 최소한 적대관계로 돌아서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이미 위에서 언급 되었듯 이는 시스템이 아니라 비스마르크 개인의 능력에 의존한 것이었고 비스마르크 사후에 작동할 시스템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본인이 사라져도 후대까지 잘 작동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바로 재상으로서의 임무인 만큼 이 점에서 비스마르크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결국 이후 손자 빌헬름 2세가 즉위하고 비스마르크를 내쳤는데, 이때부터 독일과 러시아는 오랜 우호관계가 파탄나고 본격적인 적대관계로 돌변하여 마침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오스트리아를 제 앞가림도 못하는 과대 평가된 나라[28]라고 지적하며 과연 러시아 대신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는 게 옳은 선택인가 의문을 표시했고 이 점에서는 빌헬름 1세가 옳았음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입증되었다.[29] 참고로 빌헬름 1세는 공적 관계에서 신뢰한 것과는 별도로 개인적으로는 비스마르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비스마르크 같은 재상 아래에서 황제 노릇 하기 참 힘들다.(Es ist nicht leicht, unter einem solchen Kanzler Kaiser zu sein)"는 그의 명언(?)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다.[30]
내정에 있어서 비스마르크에게 거의 유례없는 전권을 위임하긴 했지만, 때때로 아니다 싶으면 조정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독일 제국 성립 이후 1871년부터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반교황-반가톨릭적 문화투쟁 때도 이른바 수도원법이 제정되며 독일 내 거의 대부분의 수도원을 폐원시켜버렸는데, 이때 간호원 및 병원의 역할을 하는 수도원 만큼은 예외로 둘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은 빌헬름 1세가 요구하여 받아들여진 것이다. 만일 개정안이 시행되지 않았다면 국민 여론 악화 및 도의적인 비판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가톨릭 세력은 명분을 얻고 비스마르크 정부는 정치적 부담을 얻었을 것이다. 또한 쾰른 대주교의 반대 의사를 의식해 반가톨릭 교회법학자인 요한 프리드리히 폰 슐테를 본 대학교 교수로 임용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이런 것들을 두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공격에 있어서 빌헬름 1세가 회의적으로 바라보았고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제동을 걸었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만약 맞다면, 문화투쟁이 실질적으로는 비스마르크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끝나버렸기 때문에 앞을 잘 내다봤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비스마르크가 문화 투쟁의 포문을 연 것 자체가 빌헬름 1세의 동의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도 존재하기 때문에, 빌헬름 1세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 그래도 어쨌거나 상술한 두 건은 빌헬름 1세 뜻대로 안 됐으면 상황이 더 악화되었을 소지가 크긴 했다.
말년에는 정부에 의한 대대적인 개인 숭배가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인기가 좋아 사실상 국민적 정체성의 상징적인 인물로써 대중들 사이에서 추앙받았다. 그리고 보수 반동적인 황제답지 않게 언론들과 가까이 했는데, 기자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보도하는 것을 허락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집을 나가있는 동안 기자들이 집을 방문하는 것도 허락했다. 즉위 이전에 괜히 자유주의 인사들과 교류했던 게 아니었긴 한 듯. 언론들은 대체로 황제를 긍정적으로 보도했고 규칙적이며 근면한 노신사의 이미지로 표현했다.
2.3. 사망
90세가 되던 해에 자연사했다.
후임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아들 프리드리히 3세였으나 98일 만에 후두암으로 죽고[31], 혈기왕성한 29살의 장손 빌헬름 2세가 뒤를 잇는다.
3. 평가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막강한 힘을 실어주어 그가 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 결과 프로이센 왕국은 전 독일을 통일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19세기 민족주의 시기의 대표적인 대사건으로 손꼽히는 독일 통일의 중심에 있던 이 황제가 정작 민족주의와는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 소독일주의란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왔다기보다는 첫째, 오스트리아의 독일 지역 간섭에 대한 굴욕감과 둘째, 독일 통일 달성으로 인한 역사적인 명예 및 군사적인 위업에 대한 열망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한 점들이 시대의 요구와 잘 맞아떨어져서 본인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기게 된 셈.비스마르크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뒷방 늙은이로 놀고나 있던 것도 아니었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만큼 항상 수행한 전선의 동향을 체크했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는 직접 전선에 개입하기도 했다. 이후 군부와 정부 사이의 의견을 조율하여 하나로 일치시키기도 했고, 비스마르크의 문화 투쟁에 아니다 싶은 건 제한을 두기도 했으며 외교에 있어서도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다수의 행동과 의견들은 결과적으로 비스마르크보다 그의 시각이 옳았음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기도 했다. 애초에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을 알아보고 전권을 맡긴다는 것 자체도 일반적인 군주들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비록 본인은 반동적이고 보수적인 인물이었던지라 비스마르크의 의회 협력에는 많은 불만과 불안을 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유언장에 남긴 "헌법에 맹세하지 마라"는 말은 지키지 않았으며 끝끝내 의회나 헌법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말년에는 마치 현대의 모범적인 입헌 군주인양 언론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국민 통합의 심볼로 그 역할을 다 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국가에 무엇이 이득이 되고 해가 되는지 비교적 잘 판단할 줄 알았고, 그러한 판단력 덕분에 독일은 프랑크 왕국 이후 천 년만에 통일을 이룩해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도 40여년의 동서독 분단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하나의 국가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32]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빌헬름 1세 (Wilhelm I) | <colbgcolor=#fff3e4,#331c00>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III) | <colbgcolor=#ffffe4,#323300>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iedrich Wilhelm II) | |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 (Prinz August Wilhelm) |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루이제 여공작 (Luise von Brunswick-Wolfenbüttel) | |||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레데리케 루이제 (Frederike Luise von Hessen-Darmstadt) | |||
헤센다름슈타트의 루트비히 9세 (Ludwig IX von Hesse-Darmstadt) | |||
츠바이브뤼켄의 팔라티네 카롤리네 (Palatine Caroline von Zweibrücken)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Luise von Mecklenburg-Strelitz)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카를 2세 (Karl II von Mecklenburg-Strelitz) | |||
메클렌부르크의 카를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Karl Ludwig Friedrich von Mecklenburg) | |||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Elisabeth Albertine von Saxe-Hildburghausen) | |||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레데리케 (Frederike von Hesse-Darmstadt) | |||
헤센다름슈타트의 게오르크 빌헬름 (Georg Wilhelm von Hesse-Darmstadt) | |||
라이닝겐닥스부르크팔켄부르크의 마리아 루이제 알베르틴 (Maria Louise Albertine von Leiningen-Dagsburg-Falkenburg)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프리드리히 3세 (Kaiser Friedrich III.) | 1831년 10월 18일 | 1888년 6월 15일 |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슬하 4남 4녀[33] |
1녀 | 바덴의 대공비 루이제 (Großherzogin Luise von Baden) | 1838년 12월 3일 | 1923년 4월 23일 | 바덴 대공국 대공 프리드리히 1세 슬하 2남 1녀[34] |
5. 대중매체에서
독일의 다큐멘터리 영화 Die Reichsgründung에서 비스마르크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배우가 미하엘 멘들로 다운폴에서 헬무트 바이틀링 역으로 유명한지라, 독일국을 건국한 이가 처절한 몰골로 멸망을 선언하는 매우 씁쓸한 배우 개그가 성립되어 버렸다.6. 여담
- 평생을 군인정신으로 살아온 군국주의자였기에 자유주의자, 아나키스트들에게 암살 위협을 여러 번 받기도 했다. 1878년에는 2번이나 암살 시도를 당했으며 특히 6월 2일 카를 노빌링의 암살 기도로 인해 크게 다치기도 했다. 이 때 81세의 고령이었음에도 기적적으로 무사히 회복하였고 다행히 3년 뒤의 외조카처럼 암살당하지는 않았다.[35]
- 프리메이슨의 회원이였다.
- 33세 때 14살 연하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36]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37] 이 무렵에는 초혼이라면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결혼이 이토록 늦은 건 자신의 7촌 고모뻘[38]이자 8촌[39]인 폴란드 귀족 출신엘리자 라자비우(1803~1834)과 결혼하고 싶어했는데 신분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반대하여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폴란드는 빌헬름이 태어나기 전인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로 망해서 이미 나라가 없어진 상태이기는 한데 프로이센은 다름 아닌 그 분할의 당사자이자 그 분할된 영토를 차지한 수혜자인데... 물론 실질적인 이유는 아무리 엘리자가 귀족이라도 엘리자의 가문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족(통치 가문)이 아니라 평범한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독일계, 러시아계의 귀천상혼은 통치 가문 - 일반 귀족 - 평민으로 급이 나뉘어있다. 아무리 망국이거나 다소 불편한 관계에 있는 집안이어도 좀 신분이 더 높은 귀족이거나 왕족이었다면 당대 기준으로도 혼사를 받아줬을 것이다. 결국에는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긴 했지만 1824년 둘 사이에서 쌍둥이 남매를 두었다는 말이 있다.[40]
- 첫째 여동생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는 사이가 꽤 좋았는지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중에는 아내 아우구스타에 대한 불평을 적은 편지도 있다고 한다.(...) 애초에 상술하듯 원해서 한 연애결혼도 아니었고 부왕의 요구대로 괜찮은 신분의 아우구스타와 사랑 없는 결혼을 했기에 신혼 때부터 삐걱거렸다. 때문에 이혼까지 고려했던 적 있지만 자녀들인 프리드리히 3세와 루이제가 강렬하게 반대해 그냥 살았다. 먼 친척이기도 한 조지 1세의 사례처럼 이혼해도 당장에는 재위나 자녀들의 계승 같은 데 큰 문제는 없지만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이혼하면 큰 사회적 파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 손주들 중에서 장손 빌헬름 2세, 둘째 샤를로테, 셋째 하인리히 왕자는 예뻐했지만 뒤에 태어난 세 손녀들[41]은 찬밥 취급했다.[42] 이 손녀들은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외가인 영국 왕실과 더 가까웠다.
- 장손 빌헬름 2세가 아들만 줄줄이 낳아서[43] 빌헬름 2세의 4남인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프로이센이 태어나는 것까지 보았다. 5남인 오스카어 폰 프로이센은 1888년생이지만 7월생이어서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3세 사후에 태어났다. 아우구스타 황후는 오스카어가 태어나는 것까지 보고 갔으며, 빌헬름 2세의 6남인 요아힘 폰 프로이센과 막내인 빅토리아 루이제는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3세, 아우구스타 사후에 태어났다.
-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일본 제국과 비교하면 빌헬름 1세는 메이지 덴노처럼 상징적인 군주,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오쿠보 도시미치나 이토 히로부미처럼 통일 및 근대화의 주역이라고 볼 수 있다.
- 현재 호엔촐레른 가문의 직계인 빌헬름 1세의 남계 자손들은 빌헬름 2세의 자손들로만 이어진다. 빌헬름 1세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고, 아들 프리드리히 3세는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지만 차남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의 가계는 비록 아들 셋을 낳았지만 손자대에서 끊어졌고, 삼남 지기스문트와 사남 발데마르는 요절했다.[46] 반면 장손인 빌헬름 1세는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고, 장증손인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 슬하에 4남 2녀, 다음 후계자인 루이스 페르디난트가 4남 3녀를 두었고, 현재 당주인 게오르크가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직계인 당주들이 다른 왕가의 당주들이나 현 왕가의 왕자들보다 아들을 더 많이 두었다.
- 무려 90살까지 장수했다. 그것도 91세 생일을 13일 앞두고 사망했으며 형제자매 중에서 가장 장수했으며[47] 이는 독일의 남성 군주 가운데 전근대의 공국, 대공국, 자치령 등 군소국 군주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 산 것이었다.[48] 또한 즉위 당시 63살이라는 고령의 나이로 즉위했는데도 재위기간은 상당히 긴 편이다. 1861년 63살의 나이로 프로이센 국왕으로 즉위해서 1871년 독일 황제로 즉위했을 때는 10년이 지난 73살의 나이였으며, 독일 황제로 즉위하고도 17년이나 더 재위해서 무려 90살까지 장수한 것이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수명이 매우 연장된 현대에도 이렇게 90살까지 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장수한 셈이다.
- 4대가 한 사진에 담겨있는 모습. 빌헬름 1세가 안고 있는 갓난아기가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빌헬름 폰 프로이센으로 빌헬름 1세의 첫 증손자다. 참고로 저렇게 4대가 나란히 찍은 사진은 사돈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비슷하게 찍었다.
- 여담으로 빌헬름 1세부터 현 당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까지 호엔촐레른 가문의 당주들은 번갈아면서 장수, 단명했다. 빌헬름 1세(본인)는 90세까지 장수, 아들 프리드리히 3세는 57세에 후두암으로 사망, 손자 빌헬름 2세는 82세까지 장수, 증손자 빌헬름 폰 프로이센 독일 황태자는 69세에 심장마비로 사망, 현손자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는 86세까지 장수, 6대손 루이 페르디난트 주니어는 군 훈련 도중 사고로 33세에 요절, 7대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는 현재 당주 현재 나이 47세.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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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 Generalleutnant / Vizeadmiral | ||
육군 중장 | - | |
해군 중장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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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소장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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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독일 제국군의 상급대장과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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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대 독일 황제 중 가장 장수하였다. 독일뿐만이 아니라 유럽사를 통틀어 가장 장수한 군주 중 하나였다. 현재는 엘리자베스 2세가 기록을 경신하였다. 다만 왕위에 오를 당시 63세라는 고령으로 즉위했기에(독일 황제로서는 73세.) 사돈 빅토리아 여왕이나 루이 14세, 강희제보다도 더 오래 살았음에도 그들에 비해 훨씬 적은 기간 동안 재위했다.[2]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법령에 따라 루터파와 칼뱅파가 혼합된 종교로, 루터파에 가까운 개신교의 일종이다.[3] 장남, 증손자와 같은 키이다.[4] 스페인은 그간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에서 갈라져나온 보르본 왕조(시조 펠리페 5세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였는데, 공위기를 거친 후 프로이센 왕실인 호엔촐레른 가문의 슈바벤계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5] 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독일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바이에른 이하 소국들은 제외.[6] 이 당시 보수세력은 경제적 자유주의(Laissez-faire)와 오히려 반대 입장이다 토지 귀족들은 고관세 국가 개입주의다. 당시 이들에게 입헌 국민주권 민족주의 자유주의 등은 불순 사상이었다.[7] 사실 징병 기간도 문제지만 예비군 지휘를 현역 장교에게 맡기는 문제가 더 컸다. 예비군들에게 반동 정치 성향을 강요할 우려가 있다하여서... 군 병력 증강은 오래부터 제기된 문제로 인구가 1815년보다 많이 늘어서 편제를 늘려야 된다는 데는 부르주아들도 공감은 하고 있었다.[8] 퇴위 카드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주장이 다르다. 진짜로 최후의 카드였다고 보는 쪽도 있고, 단지 압력 수단으로써 국회와 협상을 할 생각도 있었다고 보는 쪽도 있다.[9]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이런 독단성은 이후 반대파와 대중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데 한몫 했다.[10] 덴마크를 향한 애국이 아니라 독립국을 형성하려는 차원에서의 애국심을 얘기하는 것이다.[11] 빌헬름 1세가 특이한 게 아니라 이 시기 대부분의 군주들은 민족주의자들과 상극이었다. 그나마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였던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도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프랑스에 사보이아와 니차를 할양한 것 때문에 민족주의자들과 갈등이 있었다.[12] 단,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조금씩 상이하긴 한데, 빈 침공은 비스마르크의 회고록에서만 나오는 내용이라 완전 신뢰가 어렵다는 주장도 있고, 빌헬름 1세 본인도 비현실성을 알면서도 단순히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서 저런 무리한 제안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왜냐하면 군인 출신으로써 전쟁을 직접 진두지휘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빈정이 좀 상해있었다는 것이다.[13] 아내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에게 보낸 편지에 이 지역을 포기했다가는 왕위를 잃을 수도 있다고 써놨었다.[14] 실질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재와 더불어 본인이 민중의 추대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5]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하기 시작하고 사치를 부리는 등 재정적으로 건전한 게 이상한 수준이긴 했다.[16] 당시 돈으로 약 600~700만 마르크.[17] 1848년 혁명 당시 대공이었던 아버지 레오폴트가 프로이센에 도움을 요청해 빌헬름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6개월 동안 바덴에 주둔한 적이 있는데, 이때 빌헬름과 인연을 트게 되었다. 그 후 1856년 빌헬름의 딸인 루이제 공주와 결혼했다.[18] 특히 바덴 대공국은 엠스 전보 사건이 터진 이후 처음부터 프랑스와의 전쟁에 있어 병력 파견 의사를 비추었고 북독일연방에 가입 의사를 보내왔을 만큼 남독일 국가들 중에서는 친프로이센적이었다. 이런 태도의 이유에는 바덴 대공이 프로이센 왕가와 가족관계상 얽혔던 것 뿐만 아니라, 1848년 프로이센이 바덴에 들이닥친 혁명을 진압해주었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19] Deutschland는 독일 민족의 땅(또는 국가), 즉 당시 북독일 연방에 속한 많은 나라를 모두 포괄한 개념이다.[20] 독일인 황제 자리는 프로이센 국왕이 세습하지만, 프로이센과 다른 제국 구성 국가들의 법률적 위치는 제국 내에서 동일했다. 황제, 황후, 황태자, 황태자비는 있지만 나머지 프로이센 왕실 구성원은 프로이센 왕자/왕녀(Prinz(essin) von Preußen)라는 작위를 받았지 독일 황자/황녀(Prinz(essin) von Deutsches)는 아니었다.[21] 영어로 해석할 시 Emperor of the Germans[22] 영어로 해석할 시 Emperor of the Germany[23] 영어로 해석할 시 German Emperor[24] 참고로 비스마르크의 키는 193cm로 엄청난 거구였다. 빌헬름 1세 역시 키 180cm로 장신에 속한다. 단지 비스마르크가 너무 커서 작아 보일 뿐이다.[25] 좌측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독일 제국의 빌헬름 1세,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2세. 빌헬름 1세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고모부인 동시에 알렉산드르 2세의 외삼촌이었다. 조카들 만나 기분 좋아 보인다[26] 빌헬름 1세의 여동생인 샤를로테가 니콜라이 1세의 황후이다.[27] 아스카니아 가문은 프로이센 왕국의 근본인 브란덴부르크를 개척한 가문이다. 브란덴부르크가 선제후로 공인되기 전 브란덴부르크 가계의 대가 끊겼고, 작센에서도 선제후로 공인받은 지 3대 5명 만에 대가 끊겨서 작센 선제후도 지기스문트가 베틴 가문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안할트 하나만 남았다.[28] 19세기 후반 이후 민족주의 광풍이 불면서 오스트리아는 이미 여러 차례 해체 위기를 겪었다.[29] 그러나 '평화'라는 목적으로 보면 비스마르크가 틀린 결정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당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역설적이게도 빌헬름 1세 말대로 제 앞가림을 하기도 바쁘기 때문에 호전적이기는커녕,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했지만 러시아 제국은 군사력과 외교를 제외한 내치에서는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악화되어있던 상황에서도 계속 전쟁이나 무력 충돌을 일삼아서 국력을 스스로 깎아먹었다. 따라서 독일제국 입장에서는 러시아와 동맹까지 맺느라 영국과 충돌하는 거까지 각오할 바에는 중립이 나았는데 이 중립을 지키는 가교 역할을 하기에 적합한 인접 국가는 오스트리아 정도였고 아무리 과대평가 되었다지만 당시에는 분명 무시못할 국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국경을 많이 맞닿고 역사적 공통점도 많은 오스트리아와 나쁘게 지내는 게 더 문제였다. 북유럽도 있지만 덴마크는 오스트리아보다도 약소국이었으며 노르웨이까지 지배하던 스웨덴은 과거 포메른을 노렸던데다 국력이 더 강했던 시절에도 러시아에게 털렸던 선례로 인해 그닥 믿음직한 동맹국은 아니었다. 따라서 인접국 중에서는 프랑스와는 철천지원수가 이미 된 상태이고 러시아와는 동맹을 하면 평화가 깨질 위험이 커지므로 동맹국 자체로는 이해관계가 부딪치지 않고 평화를 깨뜨릴 염려가 없는 오스트리아가 최선이었다. 당장 사라예보 사건만 해도 1914년에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우연의 우연이 누적되어 일어난거라 비스마르크 이상의 수준인 사람이라도 사라예보 사건이 벌어질지 + 그것이 세계대전으로까지 이어질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민족주의가 발흥되었다지만 그 과정에서 하필 오스만 제국령이었다가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보스니아에서, 하필 민족주의에 대한 방도책을 가지고 있던 온건파 황위 후계자가, 하필 독립국인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해서 전쟁이 벌어지리란 건 현대 기준으로도 우연이 많이 생기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당시에도 전쟁을 예상했던 사람은 많았지만 완전한 강대국이자 열강이었던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사이에서 시작하는 걸 예상하지, 강대국 중 약체에 속했던 오스트리아와 발칸 반도의 독립국 사이에서 시작하고 확장되는 걸 예상하기는 못했다.[30] 실제로도 비스마르크는 워낙 독단적인 성향이 강해서 빌헬름 1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31] 아버지가 워낙 오래 살아서 그렇지, 사망 당시 56살이었으니 요절은 아니며 손자들까지 보고 갔다.[32] 1차대전 패전 직후에 독일 제국 구성국이었던 바이에른은 나머지 구성국들과 결별하고 같은 독일어권이면서 동시에 같은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와 합쳐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적 있었다. 대표적으로 고트프리트 페더가 있었는데, 히틀러가 나치당에 입당하면서 페더의 주장에 반박했고 주류에서 밀려났다. 또한 잠깐 반짝였다 사라졌지만 실제로도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 작센 소비에트 공화국처럼 공산주의 사상이 지역 분리주의와 맞물려 독립하려던 경우도 있었다.[33] 빌헬름 2세, 작센마이닝겐 공작 부인 샤를로테, 하인리히 왕자,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비 빅토리아, 그리스의 소피아 왕비, 헤센 방백비 마르가레테 등.[34] 바덴 대공국 대공 프리드리히 2세, 스웨덴의 빅토리아 왕비 등[35] 다만 빌헬름 1세의 암살 기도는 총이라서 피할 수 있었던 반면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은 범인마저도 자폭을 각오하고 달려든 자폭 폭탄테러였기에 피할 수 없었다.[36] 파벨 1세의 외손녀(파벨 1세의 3녀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딸)이기도 하다.[37] 역대 프로이센 국왕 중에서 (첫) 배우자와의 나이 차이가 가장 많다.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는 마지막 부인과 28살 차이였지만 이건 3번째 결혼이라...참고로 아들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황후는 9살 차이였고, 손자 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는 1살(연상연하 커플) 차이.[38] 고조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7남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1730~1813)의 외손녀다.[39] 고조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5녀 조피 도로테아(1719~1765)의 외외증손녀다. 조피 도로테아의 딸 엘리자베트 루이제(1738~1820)가 상술한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의 부인인데 그 말인 즉 외삼촌과 외조카딸이 서로 결혼한 것이다.[40] 쌍둥이 중 딸 아그네스가 먼저 태어났으며 아들 아달베르트는 1882년 58세로 사망, 아그네스는 1904년 80세로 사망.[41]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42] 이들 외에도 프리드리히의 3남 지기스문트와 4남 발데마르가 있었지만 이들은 요절했다.[43] 슬하 6남 1녀.[44] 즉, 대한민국의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처럼.[45] 대선-제후가 아니라 대-선제후(= 황제를 선출하는 제후)로 끊어야 하므로 選帝侯라고 표기한다.[46] 그 외 첫째 손녀인 샤를로테의 외동딸도 자녀가 없어서 단절, 둘째 손녀 빅토리아는 자녀 없이 사망했다.[47] 빌헬름 1세가 서거한 이후에도 살아있는 형제자매는 셋째 여동생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비 알렉산드리네(향년 89세)가 유일했으며, 나이로 보면 빌헬름 1세가 더 오래 살았다.[48] 필리프 에른스트(1663년 ~ 1759년)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호엔로헤발덴부르크실링스퓌르스트' 제후가 96세까지 산 경우가 유일한 예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