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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70년에 북독일 연방과 프랑스 제2제국 사이에서 일어난 외교 사건. 이 사건의 여파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1900년대와 그 이후 세계사의 향방을 결정지은 사건 또는 세계사가 근대에서 현대로 나뉜 계기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런 분기점은 제국주의 전성기의 평화와 번영을 뜻하는 벨 에포크의 시작 시점하고도 어느 정도 겹치는데 벨 에포크의 시발점을 그 조작으로 말미암아 터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직후부터 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사건 이전부터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국민감정은 악화되어 있었다. 프랑스는 세력이 커져가는 프로이센에 위협을 느꼈고 룩셈부르크 합병을 프로이센이 방해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프로이센도 프랑스의 룩셈부르크 합병 야욕에 분노했고 남독일 지방에 간섭하는 프랑스를 통일의 장애물로 여기던 상황이었다. 때문에 엠스 전보 사건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표면적인 원인일 뿐이라고 보기도 한다.
전보를 매개체로 전쟁의 도화선이 된 점은 약 40년 뒤에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촉발시킨 치머만 전보 사건과 비슷하다.
2. 사건 배경
1870년 초 스페인의 왕위 계승 문제로 프로이센 왕국과 프랑스 제2제국 간의 갈등이 촉발됐다. 1868년 이사벨 2세가 혁명으로 실각한 이후 스페인 왕위가 쭉 공석이었는데 스페인 측에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먼 친척이자 프로이센 왕실의 방계 가문인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1] 가문의 레오폴트 공[2]에게 이를 계승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 것.레오폴트 공의 초상화.
레오폴트 공이 제안을 수락하자 프랑스는 즉각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보르본 왕조가 이어지던 스페인 왕위가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으로 교체되면, 프랑스 입장에서는 앞뒤로 적에게 둘러싸이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3] 특히 프랑스는 당시 요로결석으로 고생하던 나폴레옹 3세 대신 스페인 출신 황후 외제니 드 몽티조(Eugénie de Montijo)의 주도 하[4]에 전쟁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결사반대를 천명했다.
한편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조차 레오폴트 공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반대했는데 여기에도 이유는 있었다. 우선 혁명으로 여왕을 쫓아낸 '폭도'들이 무엄하게도 신이 내려줘야 할 왕위를 마음대로 갖다 바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는 점.[5] 거기에 아무 연고도 없고 내전까지 벌어진 외국에 왕 노릇 하러 갔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니 더더욱 반대하게 된 것이다. 조금만 앞서 봐도 나폴레옹 3세의 부추김에 멕시코의 황제로 등극했다가, 반란에 휘말려 처형당한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동생 막시밀리안의 사례가 있었다.[6]
3. 엠스 회담
결국 1870년 7월 11일 레오폴트는 스페인 왕위 수락을 철회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정도의 외교적 승리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고 결국 쐐기를 박기 위해 욕심을 부렸다.1870년 7월 13일 프랑스 외무대신인 그라몽 공작 아제노르(Antoine Alfred Agénor, 1819 ~ 1890)의 지시를 받아 주프로이센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 백작 뱅상(Vincent, comte Benedetti, 1817 ~ 1900)이 라인란트팔츠(Rheinland-Pfaltz)주의 작은 마을 바트 엠스(Bad Ems)[7]에서 휴양 중이었던 빌헬름 1세에게 비공식 접견을 요청했다. 외무대신이 내린 지시 내용은 '(이번뿐만 아니라) 향후에도 호엔촐레른 가의 일원이 절대 스페인 왕위에 오르지 않는다고 보장해 달라'는 프랑스의 요구 사항을 빌헬름 1세에게 전달하는 것.[8]
회담 당시 사진. 가운데 2명 중 흰 수염을 기른 사람(왼쪽)이 빌헬름 1세, 흰색 모자를 쓰고 그를 돌아보며 얘기를 나누는 사람(오른쪽)이 베네데티 백작 대사.
사실 이날 방문은 빌헬름 1세 입장에서 꽤 불쾌할 만한 상황이었는데 대사가 사전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아침 산책 중인 빌헬름 1세를 불러 세운 것이었다. 당시가 아닌 현대의 외교 의전 기준으로도 대단히 무례하게 만들어진 이 즉석 회담에서 빌헬름 1세는 그래도 프랑스의 요구를 최대한 정중하고 우호적으로 거절했으며,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쿨하게 헤어졌다. 대사를 보낸 뒤 빌헬름 1세는 '프랑스측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의사를 재확인하는 내용의 서신을 대사에게 추가로 전달했고, 비서인 하인리히 아베켄(Heinrich Abeken, 1809 ~ 1872)을 통해 베를린의 비스마르크에게 당일 대사와 있었던 일의 전말을 전보로 전달했다.
4. 비스마르크의 전보 수정
당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거꾸러뜨리고 프로이센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데에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전보를 받아든 비스마르크는, 이걸 이용해 자국과 프랑스의 국민 감정을 자극하기로 하고, 헬무트 폰 몰트케 등과 상의하여 전보 내용을 수정했다.원래 비서가 작성한 전보 내용은 아래와 같다.
국왕 폐하께서 제게 이렇게 써 주셨습니다.
"베네데티 백작이 산책로에서 짐을 가로막더니 상당히 성가신 태도로 '짐은 호엔촐레른 공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해 다시는 동의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본국에 전보로 보내도록 윤허해 달라고 요구했소. 그런 식의 약속은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만큼, 짐은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소. 물론 짐은 그에게 '짐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고, 짐보다 당신이 파리나 마드리드를 통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우리 정부가 그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틀림없이 알 것'이라고 말했소."
(장관 중 한 명의 조언을 받으신) 국왕 폐하는 상기 요구 사항에 대해 더 이상 베네데티 백작을 만나시지 않겠다 하시고, 이 문제에 대해 백작이 이미 파리로부터 전달받은 것과 같은 내용을 폐하께서 (레오폴트 공으로부터) 확인받으셨으니 대사에게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보좌관을 통해 전달하도록 명하셨습니다. 폐하는 프랑스 황제에게 이번 베네데티 백작의 요청과 그 거절 사실에 대해 양국 대사와 언론을 통해 의견을 교환해도 좋다고 제안하셨습니다.
즉 빌헬름 1세는 프랑스의 강경한 반발에 대해 '애초에 나나 우리 정부가 관여한 일이 아니니 잘 모르겠다.'며 둘러대는 한편 '그러니 보장도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며 우회적으로 거절 의사를 밝히면서도 대화 창구는 열어 두겠다는 비교적 온건한 회답을 한 것이다. "베네데티 백작이 산책로에서 짐을 가로막더니 상당히 성가신 태도로 '짐은 호엔촐레른 공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해 다시는 동의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본국에 전보로 보내도록 윤허해 달라고 요구했소. 그런 식의 약속은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만큼, 짐은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소. 물론 짐은 그에게 '짐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고, 짐보다 당신이 파리나 마드리드를 통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우리 정부가 그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틀림없이 알 것'이라고 말했소."
(장관 중 한 명의 조언을 받으신) 국왕 폐하는 상기 요구 사항에 대해 더 이상 베네데티 백작을 만나시지 않겠다 하시고, 이 문제에 대해 백작이 이미 파리로부터 전달받은 것과 같은 내용을 폐하께서 (레오폴트 공으로부터) 확인받으셨으니 대사에게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보좌관을 통해 전달하도록 명하셨습니다. 폐하는 프랑스 황제에게 이번 베네데티 백작의 요청과 그 거절 사실에 대해 양국 대사와 언론을 통해 의견을 교환해도 좋다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손을 거친 뒤 이 전보는 다음과 같이 더욱 날카로운 뉘앙스로 바뀌었다.
호엔촐레른 후작의 왕위 계승 포기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지자, 엠스의 프랑스 대사가 '국왕 폐하(빌헬름 1세)는 호엔촐레른 왕가가 앞으로 스페인 왕위에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것을 약조했다'는 전보(telegram)를 보낼 수 있도록 승인해 달라고 국왕 폐하에게 요구했다. 폐하는 그로 인해 대사의 접견을 거부했으며, 보좌관을 통해 더 이상 대사와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빌헬름 1세가 한 말은 죄다 빠지고 오직 대사와 만나지 않겠다고 한 내용만이 남았다. 즉 대사의 무례한 요구에 분노한 국왕이 접견을 거부했다는 뉘앙스가 되어 버렸다.[10] 결국 이 전보는 비스마르크가 수정한 대로 언론에 배포되었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자국 언론사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언론과 제3국 영국의 언론사를 통해 배포했다. 당시 갈등의 당사국이 아니라 중립국이었던 영국을 통해 사건을 알리면서 정보의 신뢰성을 높인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용의주도함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부분.
5. 프랑스 통신사의 2차 수정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인데 이 수정된 전보의 내용을 받은 프랑스 통신사 아바(Havas)는 번역 과정에서 두 가지 결정적인 오역을 터뜨려 불에 기름을 부어 버렸다. 이 오역은 대다수 프랑스 언론에 그대로 실렸다.- 대사의 요구를 질문(il a exigé)이라고 오역.
- 보좌관(adjutant)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실어 버린 것. 문제는 독일어에서는 이 단어가 꽤 고위급의 보좌관이라는 뜻을 가진 데 비해 프랑스어에서는 같은 뜻도 있지만 부사관이란 뜻도 있다는 것이었다. 즉 실제로는 비서실장 내지 전속부관쯤 되는 고위급 보좌관이 메모를 전달했을 테지만 프랑스 측에서는 그냥 하급 관리가 왔다는 식으로 알려진 것이다. 자신들의 나라가 독일보다 상전이라고 여겨 왔는데 아무리 때와 장소가 무례했더라도 대국인 자신들의 대표에게 일개 행정관을 보내 퇴짜 놨다는것은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덕분에 프랑스에서는 사건의 전모가 '그저 질문을 하러 간 우리 대사를 빌헬름 1세가 문전박대한 것은 물론, 일부러 '부사관 나부랭이' 에게 회신을 들려보내 모욕을 줬다'는 식으로 알려졌다. 결정적으로 이 신문 보도가 나간 것은 사건 다음날인 7월 14일로, 하필이면 프랑스의 국경일인 바스티유 기념일이었다. 한참 애국심이 들끓을 타이밍에 이러한 문맥 양념은 철저히 의도적이었고 수년간 갈등을 빚어 온 프로이센에 대해 빨리 선전포고를 하라는 주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엠스 전보와 이후의 사건을 듣고도 전혀 선전 포고할 생각이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유럽 정세와 정계에서 취득한 정치 감각을 통해 프로이센과의 전면전은 위험하다는 것도 1860년대 후반부터 혹시 모를 실전에 대비해 보고받은 장부상 머릿수만 많고 실력은 떨어지는 프랑스군의 처참한 실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민 감정은 나폴레옹 3세 혼자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6. 결과
프랑스 정부와 민간은 프로이센의 언론 플레이에 말 그대로 뒤집어졌고 곳곳에서 항의 집회가 열리면서 전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나폴레옹 3세는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해 침묵을 지켰다간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다간 아무 짝에 쓸모없는 황제 따위는 쫓겨날 터라 결과를 예상하고도 전쟁을 선택했다.독일 역시 국민적 민족 감정이 들고 일어났는데 이미 시대적 사명이였던 독일 통일 문제에 수십 년간 이래라저래라 참견질하는 프랑스를 꺾지 않고는 통일이 어렵다는 현실적 문제와 나폴레옹 시기 해방 전쟁의 향수가 살아나면서 군부와 왕실 정치권이 아닌 부르주아 언론에서조차 "파리로~"를 외치고 대학생들의 자원 입대 열풍이 불었다.[11] 결국 양국의 여론이 최악으로 치달은 끝에 결국 사건 엿새 만인 7월 19일에 프랑스의 선전 포고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른바 보불전쟁)이 발발했다. 양국은 이미 수년 전부터 전쟁 준비에 열심이었고 국민감정은 여러 사건 끝에 최악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전쟁은 터졌을 것이다. 즉, 엠스 전보 사건은 원래는 터지지 않았을 전쟁을 터지게 만든 근원이라기보다는 결국 터질 전쟁을 터지게 만든 방아쇠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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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가문은 프랑켄계로 루터교회 위주의 개신교를 믿었으나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은 슈바벤계로 가톨릭을 믿었다.[2] Leopold Stephan Karl Anton Gustav Eduard Tassilo Fürst von Hohenzollern(1835~1905).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은 1848년 혁명 당시 영지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국이 혁명으로 전복 될 우려에 처하자 같은 가문의 친척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영지를 양도했다. 그래도 호엔촐레른 가문의 일원이기에 유럽에선 통치가문의 왕족으로 대우받았다. 프린스 참조. 여담으로 레오폴트 공은 훗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루마니아 왕국 초대 국왕 카롤 1세의 형이자 2대 국왕 페르디난드 1세의 아버지이다. 아들이 루마니아 왕위를 계승할 때 루마니아 정교회로 개종한다.[3] 프랑스는 루이 14세 시절 펠리페 5세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는 데 반대했던 잉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합스부르크 제국과 전쟁을 치러 가면서까지 스페인 보르본 왕조를 지키려고 했으며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스페인 상호 간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당시 확보했던 식민지 일부와 스페인의 이탈리아 영토까지 할양하면서까지 스페인 보르본 왕조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스페인의 왕조가 호엔촐레른으로 바뀌는 일은 프랑스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것.[4] 외제니 황후는 자기 언니처럼 스페인 귀족이기 때문에 졸지에 호엔촐레른 가문의 신하가 되는 꼴이기도 하다.[5] 빌헬름 1세는 왕태제 시절에도 독일에서 1848년 혁명 당시 강경 진압을 주장하다가 살해당하기 전에 영국으로 도주한 전적이 있을 정도로 보수적인 왕권 신수설론자였다.[6] 이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 아마데오가 추대되었으나 제대로 뭘 해 보지도 못하고 불안정한 정국에 질려 왕위를 반납하고 고향 토리노로 돌아갔다.[7] 17세기 부터 유명했던 온천 휴양지. 리하르트 바그너와 같은 유명 작곡가는 물론이고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니콜라이 1세와 알렉산드르 2세도 좋아하던 휴양지라고. 독일어 바트(Bad)는 영어의 '바스(Bath)'에 대응하는 뜻으로, 욕조나 목욕탕 혹은 온천이란 뜻이다.[8] 전후 그라몽은 이 전보 사건의 책임을 모두 베네데티 대사에게 뒤집어씌웠고 사건 이듬해 대사는 '프로이센에서의 임무(Ma Mission en Prusse)라는 책을 내 이를 반박했다.[9] 갈리아는 로마 제국 시대 프랑스 지방을 부르던 말이고 늙은 황소는 당연히 나폴레옹 3세다.[10] 훗날 그는 상황이 자기 뜻대로 움직였다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11] 이런 광신적인 분위기는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린으로~!"는 당시를 배경으로 한 에밀 졸라의 소설에도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