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8 19:30:00

명재상

1. 개요2. 현실의 명재상
2.1. 한국2.2. 동북아시아2.3. 동남아시아2.4. 남아시아2.5. 중동, 아프리카2.6. 유럽
3. 가공의 명재상

1. 개요

전근대 왕정국가에서 군주를 보좌하고 국정을 통할하던 최고 행정 관료인 재상들 중 특별한 업적을 쌓은 이들을 일컫는다.[1] 또한 현대 국가에서 뛰어난 치적을 남긴 수상 또는 총리에 대해서 수사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2. 현실의 명재상

전설상의 인물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2.1. 한국

2.2. 동북아시아

2.3. 동남아시아

2.4. 남아시아

2.5. 중동, 아프리카

2.6. 유럽

사실 입헌군주제의 시초인 지역이니만큼 지금도 몇몇 나라는 수상들이 일종의 재상통치를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3. 가공의 명재상



[1] 고려나 조선에서는 재상의 개념을 확장하여 2품 이상 관료를 칭하기도 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재상은 수상 또는 이에 버금가는 관료를 의미한다. 진나라로 치면 우승상, 좌승상 등 승상, 조선으로 치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정승이 이에 해당한다.[2] 백제/인물에도 나오지만 기록 자체가 상대적으로 적으니 쓸만한 인물도 적을 수밖에 없다. 이는 삼국시대 전반에 걸친 문제기도 하지만, 백제는 (더 심각한 가야와 함께) 더 그런 편이다.[3] 문하시랑평장사, 판서경유수사 등을 역임한 관리이자 문신. 현종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제2차 여요전쟁지채문과 함께 목숨을 걸고 현종을 끝까지 호종했다. 전쟁 이후 그의 치세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중신이기도 하다.[4] 甘盤. 상나라 왕 소을(小乙)은 재위 6년에 아들 무정(武丁)을 하(河)에 살게 하고 감반(甘盤)에게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후 무정이 상나라 고종(高宗)으로 즉위하고 부열(傅說)과 함께 감반을 중용하여 중흥을 이루었으니 이를 '무정중흥'(武丁中興) 또는 '무정성세'(武丁盛世)라고 한다.[5] 傅說. 원래 노역장에서 길 닦던 죄수였으나, 상왕 무정에서 본 인물과 같다고 해 대화한 후 인재라 등용해 함께 상나라를 다스렸다.[6] 강태공이란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7] 애초에 성왕의 숙부라 한동안은 본인이 섭정도 했다.[8] 평원군은 장평대전에서 대패하는 계기를 제공해서 애매하다.[9] 법가. 위문후의 변법정치를 주도했다.[10] 송양공의 서형.[11] 미병지맹을 주도했다.[12] 말년에 조고와 손을 잡고 말많은 2세를 세우는 등 문제도 있었지만, 전국시대 도량법을 통일하고 각종 제도를 신설하는 등 공도 많았다.[13] 중국사에서 명재상하면 한손가락 안에 꼽히는 네임드다.[14] 엄밀히 말하면 순욱은 위나라의 신하였던적이 없으며 공식 직함 또한 '한나라'의 상서령이었다. 애초에 순욱은 물론 조조가 살아있었을때만 하더라도 위나라는 건국되지 않았으며 조조 사후 220년에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여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하였다. 촉한을 제외하면 상서령이 명실상부 재상급으로 격상하는 것은 남북조시대 이후이다.[15] 주경칙의 수고조론에서 언급했다.[16] 당태종을 보좌한 재상으로, 이 두 사람을 방두(房杜)라고 불렀다.[17] 당현종을 보좌하여 개원성세를 이룩한 명재상들로 요숭, 송경 두 사람 성을 따서 요송(姚宋)으로 불렀다.[18] 충성의 대상을 자주 바꾸었지만 민생 안정에 역할을 하였다.[19] 임호텝을 요셉과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20]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 이 멜루, 폼발 후작. 리스본 대지진 당시, 그러니까 통신망이라고는 우편제도가 전부였던 1755년에 포르투갈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다. 내진설계도 없던 시절이다. 모먼트 규모 8.5~9.0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자연재해에, 바다에서는 해일이 밀려오고, 도시는 지진으로 폭삭 내려앉았으며, 건물은 화마에 사로잡혀 있었다. 카르발류는 그야말로 지옥도가 도래한 리스본을 훌륭하게 수습해 재건하였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도 저 정도 규모의 지진이 일어나면 과연 행정부가 얼마나 잘 대처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 견주어보면 대단하다. 18세기 중반에 사망자 수습, 난민 구휼, 도시 재건의 삼박자를 깔끔하게 해낸 것.[21]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시대 스웨덴 제국의 재상. 구스타브 2세가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어린 나이에 즉위한 크리스티나 여왕을 보좌하며 섭정을 했다.[22] 즉위하기 전에 오랫동안 재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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