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6 13:13:33

을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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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91970> 관등 우태(于台)
직위 중외대부(中畏大夫)
국상(國相)
성씨 을(乙)
이름 파소(巴素)
생몰연도 ? ~ 203년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

[clearfix]

1. 개요

고구려 초기의 명재상(국상). 고국천왕이 외척인 좌가려어비류 등의 세력을 제압한 후에 그동안 외척들의 횡포로 인해 어지러워졌던 내정을 살피기 위해 등용한 인물이었다. 이후 산상왕 대까지 고구려의 최고 관직인 국상 벼슬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다.

진대법을 실행한 인물로도 유명한데, 정작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 역사서의 기록에는 그저 을파소가 선정을 베풀었다라고만 기록해놓았지 진대법을 직접 실행했다는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진대법이 시행된 시기가 을파소가 활약하던 때라 그가 시행한거 아닐까 추측하는 설들이 일반인들에겐 사실처럼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2. 생애

을파소는 고구려 사람이다. 고국천왕 때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의 무리가 모두 외척으로서 권세를 휘둘러 불의한 짓거리를 하고 다니자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히 여겼다. 왕이 노하여 그들을 잡아 목베려 하자 좌가려 등은 모반을 일으켰다. 왕이 그 일당을 잡아 죽이기도 하고 일부는 내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명령하길,

“근자에 벼슬이 총애로써 내려지고 덕없는 이가 자리에 오르니, 그 독이 백성에게로 흘러들어가고 우리 왕실은 흔들리게 되었다. 이것은 과인이 밝지 못한 탓이다. 그대들 사부에서는 각자 부족의 어질고 착한 이를 추천하라.”

고 하였다. 그러자 사부에서 모두 동부의 안류를 추천해서 왕이 국정을 맡기기 위해 그를 불렀다. 안류가 왕에게 말하길,

“하찮은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큰 정치를 다룰 수 없습니다. 서압록곡 좌물촌의 을파소라는 자가 유리왕 때 대신 을소의 후손인데, 성격이 강직하고 굳세며, 슬기와 지혜가 연못처럼 깊습니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기에 혼자 밭을 갈며 살고 있는데,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리려 하신다면 바로 이 사람이 없이는 아니되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 초빙해 중외대부에 임명하고 우태의 작위를 주었다. 왕이 말하길,

“내 감히 선왕의 자리를 이어받아 신민들의 위에 있게 되었으나 덕이 야박하고 재능이 짧아 다스림이 모자라오. 선생은 재주를 감추고 지혜를 숨겨 궁벽한 풀밭 늪지에 처한 지 오래이나, 지금 나를 저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이켜 이리 와 주니 이것은 나 혼자의 기쁨과 행복일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들의 복이올시다.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그대는 마음을 다해 주오.”

파소는 비록 나라에 몸을 바치려 하였으나, 내려진 벼슬자리가 뜻을 이루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대답하길,

“신은 둔하고 굼뜨어, 엄한 명령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대왕께서 현량한 자를 고관으로 삼아 대업을 이루시기를 바라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그 뜻을 알고 이에 국상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이때 조정의 신하들과 왕실 인척들이 파소가 새로 들어와 옛 신하들을 차별한다고 말하며 그를 흠잡았다. 왕이 하교하길,

“진실로 국상에게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일족을 멸하리라!”

라고 하였다. 파소가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길,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이 선비로서 떳떳한 일이다. 금상께서 나를 두텁게 대우하시는데 어찌 다시 숨는 것을 생각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치를 밝히며 상벌을 신중히 하니, 인민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했다. 왕이 안류를 불러 말하길,

“만약 그대의 말이 없었다면 내 파소를 능히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루어진 모든 것은 다 그대의 공이다.”

라고 하고 이에 대사자에 임명하였다.

산상왕 7년 가을 8월에 을파소가 죽으니 백성들이 대단히 슬퍼하며 곡을 했다.
삼국사기》 권 45 을파소 열전##
을파소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명왕 시기의 대신인 을소의 후손으로 혈통으로 놓고 보자면 상당히 귀한 출신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에 가문이 몰락했는지 도성 밖으로 밀려나 서압록곡(西鴨淥谷)의 좌물촌(左勿村)에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고 있었다.[1][2] 후에 고국천왕이 외척인 좌가려, 어비류 등이 횡포를 부리고 모반을 꾀하자 이를 평정한 후에 모든 부(部)에 명을 내려 나라를 이끌어 갈만한 인재천거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고구려 4부가 모두 함께 안류를 추천하였다. 하지만 안류는 을파소를 천거하며 강직하고 지혜가 있다고 평하였다.

191년 을파소는 이 말을 들은 고국천왕에 의해 초빙되어 중외대부(中畏大夫)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거기에다가 관작을 더해 우태(于台)가 되었다. 그러나 을파소는 "신은 감히 명을 받들 수 없으니 대왕께서는 현명한 사람을 뽑아 높은 벼슬을 주어 큰 뜻을 이루소서"라는 식으로 '더 높은 자리를 줘야 내 뜻대로 정치를 해 볼 만하다'는 입장을 에둘러 말했다. 이에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배짱과 기상에 감동먹었는지 대뜸 을파소를 국상으로 파격 채용하였다. 국상은 오늘날 국무총리 급의 직위로 관직 중에서도 최고위직이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돌에 박힌 돌이 빠지게 된 신하들은 고국천왕의 이러한 처사에 불만을 품고는 "웬 듣보잡을 재상 시킵니까?"이라며 을파소를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그러나 고국천왕은 "을파소 말을 안 들으면 내게 개기는 걸로 간주하고 지위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일족을 모두 멸하겠다."고 못을 박으며 을파소에 대한 전폭적 지지와 신임을 나타냈다. 게다가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에게도 공이 있다고 하면서 대사자 벼슬을 주었다. 국상이 된 을파소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고 높은 직위를 내려 준 고국천왕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선정을 펼쳤다. 이후 고국천왕이 죽은 후에도 국상을 지내다가 산상왕 7년(203) 8월에 삶을 마감했는데 이 때 만백성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전한다. 을파소가 죽은 후에 그의 뒤를 이어서 고우루가 국상이 되었다.

3. 평가

을파소가 죽었을 때 온 나라의 백성들이 슬피 통곡했다고 하니 이로 미루어보아 백성들로부터도 존경받았던 뛰어난 명재상이었다고 추측된다.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을파소 열전에서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중앙과 지방에 일이 없었다."라며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기록상으로 보면 고구려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으로 불러도 될만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을파소의 유명한 업적으로 진대법이 거론되지만[3], 사실 을파소가 직접 진대법을 시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을파소가 한창 내정을 이끌 때 진대법이 시행되어 진대법의 시행자가 을파소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이 널리 퍼져서 오늘날 마치 진대법을 직접 시행한 인물이 을파소인 것처럼 알려진 것이다. 물론 을파소가 당시에 국상을 지내며 국정을 보살피는 등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기에 진대법을 먼저 주창했느냐 여부를 떠나서, 진대법이 실행되는 과정에 일정 영향을 끼쳤을 확률은 높다. 을파소는 관직에 오르기 전 직접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문제점 역시 잘 알고 있어 이런 부분에 세심한 컨트롤이 가능했을 것이다.

4. 여담

  • 인명접미사 을파소의 -소(素)대소, 추발소, 을소, 우소 등과 같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람의 이름에 써온 말인데, 어떤 일의 전문가, 뛰어난 사람의 뜻을 가지고 있다. 흔히 사람의 이름 끝에 별다른 뜻 없이 '-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그냥 뛰어난 사람이란 뜻에서 이름을 '-소'라 붙이고는 '소이'라고 불렀다. 만약 우리말이 '소->소이->쇠'로 변한 게 맞다고 하면, 현대에는 순우리말로 '마당쇠', '돌쇠', '모르쇠'처럼 을파소이을파쇠로 불렸을 수도 있다. 뜻도 변해서 낮잡아 이르는 말일 가능성도 있다.
  • 참전계경(參佺戒經) 또는 팔리훈(八理訓)은 대종교의 계시 경전 중 하나이다. 한배검의 계시에 의해 만들어진 경전으로 환인환웅에게 전해준 세 경전 중 하나라고 대종교 측에서 믿고 있다. 정확한 작자는 미상이다. 단단 학회 측에서는 고구려의 국상 을파소의 저작이라 주장하고 있다.

[1] 고구려의 도성 내에는 대개 고관대작들과 주요 귀족들이 살았지만 바로 성문 밖만 나가도 도성 밖으로 밀려난 귀족들이 평민처럼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2] 좌물촌은 학계에서는 평북 의주군으로 비정하나, 북한 학계에서는 삭주군으로 비정하고 있다.[3] 진대법곡식이 부족해지는 에 구휼미를 풀어 가을에 약간의 이자와 함께 갚게 하는 것으로, 이는 한국사에서 기록된 최초의 환곡제도에 해당한다. 이 법은 훗날 다른 왕조로 교체될 때까지도 계속 유지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고리대로 변질되어 버리는 부작용도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