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1:16:55

대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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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제4대 군주
대소왕 | 帶素王
파일:삼국유사 동부여 본기.png
삼국유사에 실린 대소왕 기록.
<colbgcolor=#6A5445><colcolor=#fbe673> 출생 기원전 70년경 (추정)[1]
부여
사망 22년 2월 (향년 90대)
부여
능묘 미상
재위기간
(음력)
부여의 태자
? ~ 기원전 24년
제4대 군주
기원전 24년 ~ 22년 2월 추정 (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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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A5445><colcolor=#fbe673> 성씨 해(解)
대소(帶素)
부왕 금와왕
형제 갈사왕 , 추모
종제 왕(王) 낙씨(絡氏)[2]
왕호 대소왕(帶素王) }}}}}}}}}

1. 개요2. 일생
2.1. 초기 일생2.2. 고구려와의 대립2.3. 전장에서 맞은 최후2.4. 사후
3. 의문점들4. 여담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부여의 제 4대 군주.

금와왕이 낳은 7형제 중 맏아들이었으며, 훗날 금와왕의 뒤를 이어 부여의 군주가 되었다.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를 위협하였던 가장 위험한 세력 중 하나였으며, 동명성왕 때는 물론이고 그 뒤를 이은 유리명왕, 대무신왕 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3대에 걸친 고구려의 숙적이었다.[3]

2. 일생

2.1. 초기 일생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처음 등장하며, 아버지인 금와왕이 유화와 그 아들인 추모를 거두어 키울 때에 함께 어울려 놀기도 했다고 한다. 부여 동명왕 전설에 따르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해부루의 아버지이며 해부루의 아들이 금와, 금와의 아들이 대소이므로 해모수는 대소의 증조부가 된다. 또한 금와왕 재위 시절 금와가 해모수의 미망인이자 해모수의 아이를 잉태한 유화를 거두어 낳은 아들인 추모를 양육했다고 봤을 때 유화는 해모수가 노년에 거둔 첩이나 부인으로 짐작된다. 그렇게 보면 해모수의 증손자인 대소가 해모수의 아들인 추모보다 연상으로 봐도 무리는 아니며 《삼국사기》에서도 대소는 추모보다 연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6명의 동생의 존재를 감안한다면 연상인 게 확실하다.

처음에는 동명성왕과 어울려 놀았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애초부터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형제들 중에서도 주몽의 재능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점차 주몽을 시기하였으며, 훗날에 부여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이라고 여겼다. 당장에 금와부터 해부루의 친자가 아닌 업둥이이며, 해부루가 금와를 태자로 삼은 것도 그 자신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와가 대를 이은 것이고, 대소도 금와의 뒤를 이을 것이 자명한데 증조부 해모수의 아들이 태어나면 대소 자신의 입지가 매우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동국이상국집 동명왕 편에 따르면, 대소와 형제들이 사냥을 나갔는데, 대소를 비롯한 일곱 형제들이 허탕만 치고 있을 동안 추모는 수많은 사슴을 잡아왔다. 이에 대소 형제들이 추모를 시기하여 사슴을 모두 빼앗고 추모는 나무에다 묶어버리고 궁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러나 대소가 환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추모가 나무를 뿌리째 뽑아 짊어지고는 묶인 채로 걸어서 환궁하였다고 한다. 물론 허구성이 짙은 이야기지만 대소가 그만큼 추모에게 위협을 느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아버지인 금와왕에게 추모를 제거할 것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신하들과 함께 몰래 계략을 꾸며서 추모를 죽이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유화가 주몽에게 경고하자 추모는 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하고 동명성왕이 되었다. 《삼국사기》에서도 부여를 떠날 것을 명령한 이는 유화였으며 이를 반문하는 추모에게 대소와 다른 왕자들이 죽이려고 하는 것을 모르느냐는 내용이 있다. 해모수의 부인으로 살아온 세월만큼 정치적 계산이나 감각이 있었기에 아들 추모를 재빠르게 피신시킬 수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2.2. 고구려와의 대립

이후로 대소는 동명성왕 대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유리명왕 대의 기록에 부여의 군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즉위년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주몽의 아들 유리가 어머니와 함께 도망쳐온 것이 기원전 19년 4월의 일임을 생각해보면 대소왕의 즉위는 그보다 조금 이전의 일일 것이다.

집권 초기 대소는 고구려를 사실상 속국으로 취급하면서, 고구려를 침공하거나 인질 교환을 제안하는 등 허구한 날 괴롭혔다. 애초에 서기 3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부여와 고구려는 국력차가 상당히 많이 나는 편이었다.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부여는 인구가 8만 호에 달했으나, 신생 국가였던 고구려의 인구는 3만 호 정도로 그 절반에도 못 미쳤다.

기원전 6년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유리명왕에게 인질 교환을 제안하였다. 유리명왕은 부여의 강대함이 두려워서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무섭다면서 이에 응하지 않아 결국 인질 교환은 결렬되었다. 협상결렬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해 겨울에 5만 명의 병력을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내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서기 9년에는 고구려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서 "너희 선왕이 우리 부여의 신하들을 꾀어서 달아나 세운 나라가 바로 고구려니 마땅히 부여를 섬겨야 한다."고 전하였는데, 즉 고구려를 속국으로 취급하려 한 것이다. 유리명왕은 이를 따를지 고심하였는데, 이때 유리명왕의 아들인 무휼이 나서면서 우리 선왕(주몽)이 당신들의 군주(대소) 때문에 부여에서 도망쳐 나와서 고구려를 세웠는데, 무슨 말도 안되는 억지를 쓰는 겁니까? 저희들에게 잘해주셔야 저희들도 당신을 섬길 것 아닙니까라고 답하는 바람에 또다시 굴욕을 당했다.

서기 20년에는 어느 부여인이 머리가 하나이며 몸은 두 개인 붉은 까마귀를 바치면서 '까마귀는 본래 검은 것이나 몸이 붉게 되었고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두 개이니 이는 곧 두 나라가 하나가 될 징조'라고 고하자 이 까마귀를 대무신왕에게 보냈는데, 이를 본 고구려에서는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까마귀가 남방의 색인 붉은색이 된 것은 천명이 남방으로 이동했다는 뜻이고, 이 상서로운 것을 얻어서 보존치 않고 남에게 주어버렸으니 앞날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까마귀를 보낸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고 한다.

2.3. 전장에서 맞은 최후

서기 22년, 마침내 고구려대무신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부여 남쪽 지방을 공격해왔다. 이곳에서 대소왕은 직접 대병력을 이끌고 대무신왕과 맞서려고 하였는데, 마침 고구려군은 평지위에서 진영을 펼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대소왕은 이 틈을 노려서 군사를 몰아 고구려군을 공격하였으나, 너무 급하게 진군하는 바람에 진창에 빠져서 대군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의 장수 괴유가 오도 가도 못하는 부여군을 향해 돌격하여 부여 군사들을 죽이고 급기야 대소왕마저 괴유의 칼에 목이 베어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소왕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여군은 오히려 사기가 꺾이지 않았으며, 남은 부여의 병사들은 오히려 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자는 일념하에 더욱 거세게 고구려군을 공격하였다. 결국 고구려는 참패하고 말았다.[4]

전쟁에서 패배한 고구려군은 대소왕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군사와 물자를 잃은 채 돌아왔다. 대무신왕이 부여와의 전쟁 이후, 대소왕의 목을 베었다는 사실을 자축하면서도 너무 많은 군사를 잃었다며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2.4. 사후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의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다. 지황 3년 임오(서기 22)에 이르러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동부여를 정벌하고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夫婁薨 金蛙嗣位爲王 次傳位于太子帶素 至地皇三年壬午 高麗王無恤伐之 殺王帶素 國除
삼국유사》 <기이> 제1
삼국유사》에서 동부여는 대소왕을 끝으로 멸망했다고 적혀 있다.

대소왕이 전장에서 갑작스럽게 전사하는 바람에 부여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부여는 이 뒤로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내분으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패배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으로 전락하고 만다.

대소가 죽은 이후로 곧 부여의 해씨 왕족들이나 지배층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점차 쇠락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대소가 죽은 해인 서기 22년에는 대소의 아우가 따로 가족과 지지 세력을 이끌고 부여를 빠져나와 갈사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던 일까지 있었으며, 대소왕의 사촌 동생이 고구려에 투항해 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3. 의문점들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동명성왕과 유리명왕이 죽은 후 대무신왕 대에까지 살아서 전쟁을 직접 지휘한 걸 보면 제법 건강하게 오래 살았던 듯하다. 금와왕의 일곱 아들 중에서도 맏아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볼 때 대무신왕이 즉위했을 당시에는 80대나 90세 정도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동명성왕이나 유리명왕 등이 모두 40대를 전후하여 승하하는 등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지금 시대로 따져도 전투를 직접 하기에는 엄청난 고령이었다. 추모보다 연상이라면 아무리 젊게 잡아도 추모보다 나이가 많던 금와의 일곱 아들들 중 제일 연장자이니 사망 당시의 나이가 87세 이상이다.

그런데 대소왕의 수명은 길다고 감탄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좀 부자연스러운 측면도 있어서 걸러볼 필요가 있다. 일단 고대인들의 일반적인 수명보다 많이 장수한 편인데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초기 몇몇 왕들에 대한 기록은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늘여진 것이 아니냐는 합리적인 의심을 받고 있다. 그래서 정황상 대소왕 역시 후대에 의해 조작 및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그만큼 나이가 많았던 대소왕의 승하가 정말 갑작스럽게 벌어졌기에 동부여에 정치적 혼란이 생겼을 지가 의문점으로 제기된다. 현대에도 90살인 사람이라면 아직은 건강하더라도 언제든 노화나 심장마비 등 다양한 요소들로 갑작스레 죽을 수 있는 초고령인데 하물며 평균 수명이 현대보다 낮았던 고대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평화로울 때조차 급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이고 하물며 그 고령의 나이로 무려 친정을 감행했는데 죽음을 예상하지도 대비하지도 않은 것이 다소 이상할 따름. 고대에 90살이면 증손자는 물론이고 그 아래 후손까지도 충분히 볼 수 있는 나이였으니, 대소왕도 본인을 대신할 태자나 손자를 이미 후계자로 지명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고, 설령 아들이 없었어도 후계자는 당연히 친척이든 누구든 정해 놨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하다.[5] 그런데 이런 고령의 군주가 전쟁터에 나가서 죽은 것이 예상 밖의 재난인 것으로 여기는 기록이 기이할 지경.

또한 나이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대소왕이 뜻밖에 전사하였다 한들 그게 강성했던 부여가 차기 후계자 자리도 못 정하고 하루아침에 사라질 정도의 문제였는지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부여 조정이 대소왕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부터 대소왕의 자식들이나 형제들 중 누군가를 다음 왕으로 내세우며 권력 다툼에 들어갈 테니 내분으로 나라가 쪼개질지언정 다음 왕이 아예 없다는건 말이 안 된다. 내란 중 외침이라도 받아서 사이좋게 망한 것이면 몰라도,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니 갈사국이 쪼개어져 나왔다는 건 누군가는 부여의 도성에서 권력을 쥐어 왕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6]

그래서 몇 가지 추측이 있었는데 '대소'라는 어휘가 특정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그냥 부여의 군주를 뜻하는 일반명사인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이집트 군주를 '파라오', 페르시아의 군주를 '샤한샤'라고 칭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주몽의 탈출 때 그 대소와 대무신왕과 싸운 대소왕이 다른 사람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다만 대소가 죽은 후에 부여에서 빠져나와 따로 갈사국을 세웠던 대소의 아우가 금와왕의 막내 아들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대소왕이 금와왕의 아들임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거기다 대소의 막내 아우가 갈사국을 세운 뒤 자신의 손녀를 대무신왕에게 시집 보내는 등 대소의 막내 아우도 당시 고령으로 추정되며 부계 조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고구려 고씨와 백제 부여씨 중 60 이상으로 장수한 왕들이 종종 나타난 걸 감안할 때 정말로 장수 유전자 때문에 대소와 막내 아우가 오래 살았을 가능성도 배제 못 한다.

4. 여담

  • 동명성왕의 아들인 유리명왕이 아직 부여에 머물고 있었을 때에도 죽이지 않는 등 의외로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7] 다만 유리가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다는 언급을 보면 신분을 숨겼을 가능성도 있다.
  • 도절태자를 인질로 보내라 압박한 것은 사서에서 어머니가 불명인 도절의 어머니가 전한 한족(漢族) 출신인 치희라서 내놓으라고 했다는 추측도 있다. 대소왕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주몽을 자신의 동성(同姓)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게 당당하게 굴 만큼 강성했던 부여의 왕이자 해씨(解氏) 전체의 당주였던 대소왕의 입장에서 혼혈을 분가의 봉사손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종가 당주의 꼰대질(?) 비슷한 것이었다는 것. 이전에나 이후에나 대소왕은 고구려에게 각종 압박을 넣을지언정 도절을 제외하면 태자는커녕 왕자를 인질로 넘기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단순히 자신과 왕위를 두고 갈등을 빚은 주몽의 아들에게 기선제압으로 강하게 나갔을 수도 있지만 도절 개인에 대한 대소왕의 불호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 못 한다.
  • 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해모수-해부루-금와왕-대소왕의 가계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4~3세기 무렵, 북부여로 비정되는 고리국 일대에서 일부 세력이 지린시 일대로 남하하여 기원전 10세기부터 이어지던 서단산 문화를 피지배 집단으로 두고 연합하면서 동부여로 비정되는 부여가 건국되었다. 고리국으로 비정되는 백금보-한서 2기 문화권 이전까지의 서단산 문화는 지린시 일대의 성읍도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고리국의 남하로 건국된 부여는 동시기 고조선-연 전쟁으로 인해 고조선평양 일대로 밀려나며 생긴 요동과 만주의 공백을 틈타 성장하였고, 위만조선의 성립과 동시대인 기원전 3~2세기 본격적인 국가로 발돋움한다.
    서단산 문화는 대해맹 유형大海猛類型(기원전 3~기원전 2세기)을 거쳐 포자연 유형泡子沿類型(기원전 2세기~기원후 3세기)으로 이어지는데, 이 포자연 문화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와 동시대인 기원전 1세기 고조선이 건국된 압록강 일대 적석총에서 갑자기 출몰하며 기원전 1세기 부여에서 압록강으로 건너온 주몽 세력이 압록강 고조선인을 피지배층으로 둔 고구려를 건국했음이 사실로 밝혀진다.
    부여 해씨 왕조가 고리국 왕조의 분가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고리국 시조 해모수-후손 부여 시조 해부루[8]/동명왕(?)-후손 금와왕-아들 대소왕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 사이에 적게 잡아도 수세대, 많이 잡으면 수십 세대는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부여는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 이미 고리국을 역흡수하였기 때문에 고구려 고씨는 시조 주몽을 고리국(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아들로 포장하였으나 시대 배경부터 수백 년의 차이가 나며 그 이전에 고고학적으로 주몽은 순수한 부여 출신이지 고리국의 흔적은 전혀 없다. 따라서 주몽은 고리국 왕조 출신이 아니며, 부여 시조 동명왕의 신화를 그대로 베낀 걸 고려하면 동명왕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9]
  • 주몽을 부여 시조의 후손으로 가정했을 경우 주몽은 부여 왕위와 거리가 먼 방계 종친이 되기 때문에 왕자 시절 대소왕이 주몽의 왕위 계승을 우려해 위협한 끝에 주몽이 도망쳤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10] 3세기까지 강성한 국력을 누리며 고구려를 각종 방식으로 쪼아대던 것에 악감정을 가진 고구려가 부여를 폄훼한다고 그렇게 썼을 수도 있지만, 금와왕이 업둥이라는 신화대로 선왕(先王)의 친아들이 아니라 양자가 맞고 주몽이 부여를 떠난 뒤 유화부인이 죽자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금와왕이 양자가 맞을 경우 타지에 거주하던 해씨의 일파가 부여로 건너와 왕이 되었을 수도 있고,[11] 신라 3왕성이 그랬듯이 외부 혈족이 부여로 건너와 양자 내지는 서양자로 왕위를 이었다는 소리가 되는데, 유화가 당대 부여에서 태후급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몽은 방계 왕족임에도 왕위에 가까웠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왕의 직계가 모종의 이유로 단절되어 다음 왕위를 두고 주몽의 직계와 양자인 금와왕이 경쟁한 끝에 금와왕이 왕이 되었는데,[12] 그로 인해 탈해 이사금 사후 탈해의 직계가 아니라 처조카인 유리 이사금이 신라 왕이 되었듯 주몽이 금와왕 다음 왕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에 반대한 대소왕이 주몽에게 압박을 넣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13]
    태후란 말을 '선왕의 처'로 해석해서 선왕의 왕후였던 유화가 선왕 사후 해씨인 주몽의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주몽을 낳았을 수도 있다. 신화에서 유화가 해모수와 사통해 아버지에게 쫓겨나자 금와왕이 유화를 거두었고 유화가 주몽을 낳았다는 설화를 그대로 치환할 경우, 고려 경종의 4왕후 헌정왕후가 경종 사후 이복 숙부 안종과 사통해 현종을 낳았듯이 비슷한 출생 과정을 거쳤을 수도 있다는 것.[14]
    또는 유화가 금와왕의 부인이 되었다는 해석도 있기 때문에 유화가 금와왕의 부인이 되면서 해씨인 전 남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주몽이 금와왕의 의붓아들 포지션이 되어 유력 계승권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초기 고구려가 형사취수제가 있었음을 고려하면 수계혼(收繼婚)[15] 가능성도 있다. 선왕의 부인인 유화를 자기 부인으로 삼았고 유화는 선왕의 유복자인 주몽을 낳았다는 것이다. 선왕이 아니더라도 고려 성종의 1왕후 문덕왕후가 본래 홍덕원군(弘德院君)과의 사이에서 선정왕후(목종의 왕후)를 낳았지만 성종과 재혼한 것처럼 유화가 다른 해씨 왕족의 부인이었다가 남편 사후 금와왕의 부인이 되면서 전 남편의 아들이었던 주몽의 위치가 올랐을 수도 있다. 유화가 금와왕의 태후였든 부인이었든 유화와 금와왕의 관계로 인해 방계 종친이어야 했을 주몽의 서열이 올랐고, 이에 '양자'인 금와왕의 아들이었던 대소왕이 주몽을 경계했다고 볼 수 있다.[16]

5. 대중매체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소'하면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묘사되듯이 늘 주몽과 그 자손들에게 털리는(...) 무력한 이미지였지만 21세기 들어 드라마 주몽바람의 나라에서 새롭게 각색되어 등장하면서 관심을 아주 조금 더 받게 되었다.

5.1. 주몽(드라마)

파일:대소(김승수).jpg
MBC 드라마 주몽에서는 배우 김승수가 연기했다. 본작에서는 일신의 무예는 물론, 용맹과 지략 등의 모든 방면에서 능통한 그야말로 엄친아로 묘사되며, 특히 검술은 작중에서도 부여에서 적수가 없다고 정평이 나 있다. 그에 걸맞게 성격은 용감하면서도 오만하며, 금와의 첩인 유화의 아들 주몽을 몹시 천대하며 우습게 본다.

그러나 문제는 처음에 묘사되었던 나름 포스있는 모습과는 달리, 작중에서 가면 갈수록 주몽 때문에 열폭하는 일이 많아지는 바람에 다소 찌질해 보이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특히 초반부만 하더라도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주몽이 친부인 해모수를 만나면서 영웅으로 각성하자, 그 뒤로는 계속 주몽에게 털리기만 한다. 사실 대소도 나름대로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만[17], 항상 주몽에게 약간씩 밀리면서 원통해하는 듯한 묘사가 많아 더욱 불쌍해 보인다.

또한 소서노는 대소를 싫어하고, 본인도 그걸 뻔히 알면서도 추할 정도로 소서노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평가를 깎아먹는데 일조했다. 결국 소서노는 대소와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호위무사인 우태와 급하게 결혼하고, 대소는 선약이 있던 한나라 태수 양정의 딸 양설란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해 한나라의 힘을 등에 업은 것까진 좋았는데, 이는 한편으로 한나라의 내정간섭을 초래하면서 오히려 대소가 사사건건 한나라에 발목이 잡히게 되는 요인이 된다.

한때는 외가이자 부여의 귀족 사출도와 처가인 현토군의 힘을 빌어 부왕을 유폐시키고 대리청정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폭정이 심해지는 대소의 실정에 실망한 대사자 부득불이 금와왕을 다시금 지지하면서, 금와왕의 친위 쿠데타로 인해 변방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그러다 주몽이 다물군을 결성해 떠나고, 한나라에 볼모로 갔던 동생 영포가 친한파 인물이 되어 금와왕의 신임을 잃게 되자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는 식으로 후계자의 자리에 정식으로 책봉되었다. 유화부인 사후 더 이상 옥좌에 미련이 없어진 금와왕에게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금와왕이 국경 지대에서 한나라의 자객들에게 살해당하자 이에 분개하여 부득불의 충고에 따라 한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고구려와 손을 잡고 한나라군에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그렇게 서로 해피엔딩을 짓는 줄 알았으나 극 말미에서는 또다시 주몽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5.2. 바람의 나라(드라마)

파일:대소(한진희).jpg
바람의 나라 드라마에서는 배우 한진희가 연기했다. 상당히 카리스마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교활하고 노련한 노왕으로 작중 상당한 포스를 발산하며 최종 보스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특히 초반에 유리왕을 멋지게 갈구는 장면이 일품. 그러나 후반부에 상황이 급반전되고 결국은 대무신왕에게 털려서 최후를 맞는다는 점은 변하지 않지만 기록이 전하는대로 괴유 손에 최후를 맞이한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 다르게 굉장히 우아하고 기품있게 죽는다. 그리고 패배를 인정하고 부여를 무휼에게 오롯이 맡기는 점도 역사와 다르다. 실제로는 대소가 죽었다고 부여가 고구려나 주변 국가들에 바로 복속된 것은 아니나 3세기 후반 모용선비의 침공으로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걸었고, 고구려는 팽창을 하게 된다.

여담으로 송일국이 바람의 나라 드라마에서 대무신왕을 연기했는데 이전 드라마 주몽에서는 대무신왕의 할아버지인 동명성왕(주몽)을 연기했었다.

5.3. 바람의 나라

김진의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 비중있게 등장한다. 카리스마 있는 동부여의 왕인데 아들이 없어서 6명이나 되는 동생들과 그 후손들 사이에 후계자 다툼이 벌어진다. 막내동생 갈사왕의 아들을 총애하여 후계자로 삼고자했으나 다른 왕족들이 이를 시기하여 암살해버렸고 그후로는 암살된 조카가 남긴 외아들, 즉 자신에게는 조카손주인 '용'을 아끼며 후계자로 생각했다. 하지만 갈사왕은 이미 형제들과 조카들에게 아들을 잃은 뒤라 하나 밖에 없는 손자 용이 큰형 대소왕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 걸 불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다른 왕족들이 어떻게든 대소왕의 눈에 띄어 후계자가 되려고 서로 공을 세우려 경쟁할 때, 사실은 제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손자 용이 두각을 나타내는 걸 철저히 막으며 키웠다.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부여 정복에 나서자 대소왕도 군대를 이끌고 맞서는데, 대소왕의 여러 동생과 조카들이 전공을 세우려고 앞다투어 대소왕을 따라 참전했으나, 용만 할아버지의 반대어 막혀 참전하지 못한다. 대소왕은 전투에서 고구려군의 선봉장 괴유의 칼에 맞아 용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싶었다는 생각을 하며 숨진다. 대소왕의 전사 소식에 용도 할아버지를 뿌리치고 전투에 참여했다가 괴유에게 심한 부상을 입히지만, 정작 본인도 대무신왕과 싸우던 중에 아군인 부여군쪽에서 날아온 화살에 부상을 입고[18] 결국 대무신왕에게 죽는다. 결국 용을 다음 왕으로 삼으려던 대소왕이 소원을 이루어지지 않았고 부여는 몰락하게 된다.

5.4. 기타

이외에도 점프에서도 대소가 등장하였는데 배우는 원기준. 공교롭게도 원기준은 드라마 주몽에서 대소 동생 영포 역을 맡았던 배우다.

북한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 고주몽에서는 대소가 주몽을 자신의 친형제보다 아끼는 충공깽스런 모습을 보여준다.

[1] 금와왕의 자식들 중 장남이었으므로 최소한 동명성왕보다는 최소 몇년부터 최대 10년 이상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그저 추측성이기는 하나 《삼국사기》에 기술된 내용들이나 여러가지 정황상 가능성이 높다. 이에 비추어 본다면 동명성왕의 손자인 대무신왕 대까지 상당히 장수한 편이었다.[2] 대무신왕이 왕작을 제수하며 연나부에 소속시키고 낙씨성을 내림.[3] 중국 기록에만 나오는 주몽의 아들 또는 손자이자 막래의 아버지인 여율 왕이 사실일 경우 4대가 된다.[4] 다만 기본적으로 부여의 국력이 명백히 우위에 있었기에 고구려군을 물리치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보는게 옳다는 시각도 있다.[5] 물론 대소왕 나이를 생각해보면 장수왕이 그랬듯이 후계자를 정해놨는데 자기보다 먼저 늙어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6] AD 49년에 후한 광무제에게 입조한 부여 왕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갈사국으로 이탈하지 않은 부여의 후계왕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북부여와 동부여의 관계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 이 시기의 중국 측 기록에 부여라고 표현되는 세력이 정말 동일 집단인지는 아직 알 방법이 없다.[7] 실제로는 유리명왕이 한동안 금와왕의 보호 아래 있다가 대소왕이 왕위에 오르자 부여를 탈출한 것으로 추정된다.[8] 사서에서 동부여의 시조로 기록되었고, 이름인 부루가 부여의 상고한어인 빠라 또는 바라와 유사해서 부여를 의인화한 인물로도 여겨진다.[9] 이는 백제 부여씨가 주몽의 후손임에도 고구려와의 외교적인 문제로 부여의 후예를 자처했지만 고고학적으로 건국 당시 고구려 문화의 영향만이 나타나는 것으로도 반복된다. 초고왕계가 아닌 고이왕계는 주몽의 후손이 아닌 걸로 추정되지만(그래도 해부루의 후손임을 강조한 걸 보면 이쪽도 부여 해씨 분가는 맞는 듯하다) 최종적으로 주몽의 후손인 초고왕계가 왕계를 장악하면서 주몽의 후손이 백제 왕위를 멸망까지 차지했다.[10] 주몽은 기원전 1세기 사람인데 부여 건국은 기원전 4~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200~300년 단위의 차이가 난다. 이 정도면 조선 후기 철종고종(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덕안군(중종의 8남 덕흥대원군의 후손)급의 차이다.[11] 해부루의 서손 우태나 졸본부여 출신으로 추정되는 백제 대성팔족 해씨를 고려하면 기원전 1세기 부여 해씨는 부여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흩어져 거주하던 걸로 추정된다.[12] 이 경우 신라 탈해 이사금, 미추 이사금처럼 서양자 신분이었거나, 금와가 해씨라면 백제 초고왕계, 고이왕계 경쟁과 비슷했을 수도 있다.(초고왕계는 주몽의 후손이 확실하고 고이왕계도 기록이 사실일 경우 해부루의 후손으로 부계 조상이 같다.)[13] 기년 조정 문제 때문에 박씨-김씨 왕조와 석씨 왕조가 동시대에 별개에 존재했다는 가설도 있으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자'보다 '친조카'의 계승 중 누가 더 유리하냐의 문제다.[14] 주몽이 도망친 이후에도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태후의 예로 장사 지낸 걸 고려하면 안종과 헌정왕후처럼 불법적으로 사통해서 태어난 사생아가 아니라 재혼해서 생긴 유복자였을 수도 있지만, 삼국사기와 구삼국사 설화에서 일관적으로 해모수는 유화와 잠깐만 관계를 가졌다 도망쳤고 심지어 구삼국사에서는 해모수가 유화를 납치해 강제로 관계를 가지자 유화의 아버지가 책임지라 했음에도 도망친 걸 고려하면 부부관계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15] 남편을 잃은 아내가 남편의 후계자에게 재가하는 것. 당연히 친모는 금지고 계모나 서모(庶母)가 그 대상이었다. 왕소군이 대표적인 사례.[16] 고구려의 왕위가 주몽과 예씨부인의 후손에게 계속 이어지자 소서노의 후손인 부여씨가 고구려를 떠나 백제를 건국한 것과도 어느 정도 유사하다.[17] 양정과의 거래를 통해 부여의 교역 문제를 해결하고, 진보된 강철검의 제작에 성공했다. 또한 무예에서도 주몽에 비해 궁술은 밀렸으나, 검술에서는 호각지세를 보였다.[18] 즉, 용의 친척들인 부여 왕족들이 용이 고구려의 왕을 죽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왕위를 차지할까봐, 적과 싸우고 있는 용을 뒤에서 공격하는 비열한 짓을 저지른 것. 적과의 전쟁 중 벌어진 아군끼리의 막장스러운 상황에 부여 군사들이 동요했고, 용과 싸우던 대무신왕도 '너는 이 싸움에서 이겨도 너희 친척들 때문에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