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04 20:11:02

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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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여의 왕족
1.1. 개요1.2. 상세1.3. 구태와의 관계1.4. 대중 매체에서
2. 고구려의 관직

1. 부여의 왕족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구태 시조설 우태 시조설 주몽 시조설
구태 * 우태 주몽
소서노 시조설 비류국 십제 → 백제국
소서노 비류 온조
* 『수서』 에 언급 됨.
}}}}}}}}}


성씨 해(解) / 우(優)(?)
이름 우태(優台) / 태(台)(?)
생몰 미상
조부(조상) 해부루

1.1. 개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기록 중 비류 시조설에 등장하는 북부여의 왕족이다. 《삼국사기》의 비류 시조설에서만 등장한다. 고려 때 쓰인 《삼국사기》에 시조가 온조비류로 나오는 계통이 다른 전승이 남아있다. 온조 설화보다 비류 설화에서 주로 우태가 강조된다.

1.2. 상세

비류 시조설의 전승에 따르면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는 동명성왕 고주몽이 아닌 우태라고 하며, 우태는 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라고 한다. 우태는 졸본부여의 군주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으며, 일찍 죽어 소서노는 과부로 살다가 이후 주몽과 재혼했고,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친아들처럼 대했지만 비류는 이부형인 유리명왕 고유류가 태자가 되자,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동생 온조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구태 시조설을 제외한 온조 시조설을 비롯한 다른 기록들은 모두 백제 왕족은 고구려 동명성왕 고주몽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기에, 비류만 부여 왕족인 우태의 아들이고, 온조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아들이라고 보는 가설도 있다. 또는 소서노가 우태 사후, 주몽(추모)에게 재가했다는 기록에서 형사취수를 연상해 우태와 추모는 사실 형제관계였을 것이라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외에도 같은 해부루의 서손인 갈사왕과 동일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비류 시조설은 사실 제11대 비류왕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백제 건국 설화에 등장하는 해부루의 후손 우태와 그 아들인 비류의 실제 모델은 비류왕이며, 해모수의 후손 고주몽과 그 아들인 온조는 제13대 근초고왕에서 비롯되었다. 근초고왕이 나라를 강성하게 하여 왕권을 굳히게 되자 계보도를 재구성하면서 온조 시조설이 비류 시조설을 흡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백제 건국 설화의 역사적 실체는 비류왕계와 근초고왕계의 정통성 다툼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가설. 자세한 내용은 비류비류왕 참고.

백제 역사에서 '우씨'(優氏)로 보이는 인물들은 제8대 고이왕 대 내법좌평 우두(優豆), 고이왕의 동생 우수(優壽), 제11대 비류왕 대 왕의 동생이자 반란자인 우복(優福), 제25대 무령왕 대 달솔(達率) 우영(優永)[1] 등으로 주로 고이왕계가 세력이 있을 때 집중되어 있는데 이에 근거해 고이왕계는 사실 왕성이 우씨(優氏)로 온조왕계의 부여씨(扶餘氏)와는 다른 왕가였을 거라는 가설도 있다.

위와 같이 우태를 실존 인물로 보는 견해 외에도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의 관직인 우태와 동일시하여 후대에 만들어진 '관념상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우태의 출자가 부여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백제가 고구려에게 세력이 밀리던 제16대 진사왕과 제17대 아신왕 시대를 지나면서 백제 내부에서 반고구려부여 계승 의식이 확실하게 정립되었다고 본 것이다. 제21대 개로왕장수왕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과 경기도 북부 지역을 잃자 고구려와의 연계를 부정하기 위한 가상의 시조, 우태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부여와 격렬한 투쟁을 벌였던 고구려 또한 동명성왕 고주몽이 일단 부여에서 태어났다고는 해놨지만 부여의 후예라는 것은 완전히 부정하고, 일딘 부여 왕가와 친척관계이긴 해도 독자적인 계통의 천손임을 주장했다.

1.3. 구태와의 관계

중국측 사서에 기록된 백제의 구태 시조설에 대한 다른 시각도 있다. 구태와 우태는 둘다 부여의 인물이지만, 활동 시기가 다른 인물이며, 백제 측에서 자신들의 출자를 중국측에 소개할 때 자신들의 시조가 우태임을 강조하다가 중국측에서 잘못 받아 적어서 우태=구태로 인식하였고, 백제의 시조가 구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시, 연도나 활동 시기에서 다소 의심스러운 부분도 해소될 수도 있고,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1.4. 대중 매체에서

2. 고구려의 관직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의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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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관등 관명 진출 관직
1등 패자(沛者)
대로(對盧)
중외대부(中畏大夫) 국상(國相)
←좌보(左輔)·우보(右輔)
대보(大輔)
2등 주부(主簿)
3등 우태(于台)
4등 승(丞) ※ 상가(相加), 고추가(古鄒加) 등은 작위로 추정됨.
5등 사자(使者)
6등 조의(皂衣)
7등 선인(先人)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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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대로(對盧) 국상(國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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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 대사자(大使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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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등 주부(主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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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등 선인(先人)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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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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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등 소형(小兄)
11등 선인(先人)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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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관등 관명 진출 관직
1등 토졸(吐捽) / 대로(對盧) / 대인(大人) / 대대로(大對盧) 대대로(大對盧)
2등 태대형(太大兄) /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 막리지(莫離支)
3등 울절(鬱折) / 주부(主簿)
4등 태대사자(太大使者) / 대부사자(大夫使者) / 알사(謁奢) / 태상(太相) 발고추가(拔古鄒加)
5등 위두대형(位頭大兄) /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 대모달(大模達) / 막하라수지(莫何邏繡支) / 대당주(大幢主)
6등 대사자(大使者) / 대사(大奢)
7등 대형(大兄) / 힐지(纈支) 욕살(傉蕯)
처려근지(處閭近支) / 도사(道使)
말객(末客) / 말약(末若) / 군두(郡頭)
8등 발위사자(拔位使者) / 유사(儒奢)
9등 상위사자(上位使者) / 계달사(契達奢) / 을사(乙奢)
10등 소형(小兄) / 실지(失支) 국자박사(國子博士)
태학박사(太學博士)
사인(舍人)
통사(通事)
전객(典容)
당주(幢主)
11등 제형(諸兄) / 예속(翳屬) / 이소(伊紹) / 하소환(河紹還)
12등 과절(過節)
13등 불절(不節)
14등 선인(先人) / 실원(失元) / 서인(庶人) }}}}}}}}}
}}}


于台
고구려의 관직 중 하나.

서기 68년[2] 8월에 고구려로 투항한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우태라는 관직을 하사 받게 되는데 이는 우태라는 관직이 처음으로 언급된 기록이다.

서기 230년[3] 7월에 명림어수우태에서 국상이 되었다는 《삼국사기》 기사가 등장하는데, 이를 근거로 우태는 '나'(那, X나부) 내 한 집단의 장(長)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도두도 나(那) 내에 편입된 우태로 볼 수 있는데, 이전에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안치되었던 연나부(掾那部) 또는 계루부 이전의 전왕족이었던 연나부(涓奴部, 혹은 소노부(消奴部)) 내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출처]

그 외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우태직의 인물들은 132년[5] 7월에 언급되는 관나(貫那) 우태 미유(彌儒), 환나(桓那) 우태 어지류(菸支留)가 있다.[6]


[1] 이 경우는 이전 인물들의 등장시기와 간극이 크기 때문에 그냥 이름으로 추정된다.[2] 태조왕 16년.[3] 동천왕 4년.[출처] 이장웅, (2016). <百濟 始祖 仇台·沸流 傳承의 성립과 高句麗·公孫氏 관계>, 55, 5-33.[5] 태조왕 80년.[6] 을파소(乙巴素)도 우태와 관련이 조금은 있다. 191년(고국천왕 13년) 4월. 고국천왕은 을파소에게 우태 직을 제안하였으나 자신의 뜻을 이루기엔 낮은 직책이라 생각한 을파소가 이를 거절하였고, 이를 본 고국천왕국상으로 임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