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04 11:22:04

잔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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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마지막 군주
孱王 | 잔왕
<colbgcolor=#6A5445><colcolor=#fbe673> 출생 연대 미상
부여
사망 연대 미상
부여
능묘 미상
재위기간 마지막 군주
~ 494년
성씨 부여(夫餘)
왕호 잔왕(孱王)

1. 개요2. 기록

[clearfix]

1. 개요

현왕이 잡혀가고 고구려에 복속되어 북부여[1]가 된 부여의 마지막 군주. 현왕이나 부여울과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잔왕은 시호, 왕호가 아닌 그저 '나약한 왕'이라는 뜻의 일반명사이며, 본명은 미상이다. 고구려에 투항한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2. 기록

457년 부여가 북위(北魏)에 조공을 보낸 기록이 있는데 대외적으로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미 부여는 고구려로부터 독립할 힘도 없었고, 세력을 키울 수도 없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21대 문자명왕 재위 초인 서기 494년 2월에 부여왕과 그 처자식이 고구려에 항복했다고 한다. 346년 모용선비에 의해 부여가 해체 수준의 타격을 입은 뒤 부여는 명맥만 간신히 잇는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이는데, 5세기 말 동만주의 물길(勿吉)이 흥기해 고구려와 상쟁을 벌였고, 부여까지 침략을 받게 되어 부여는 안전한 고구려 내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때 부여왕은 나라를 더 이상 존속시킬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현왕이 다스리던 부여가 494년 고구려에 항복한 부여와 정확히 같은 국가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이름만 같을 뿐 서로 다른 나라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3년(서기 494) 2월, 부여왕과 처자식이 나라를 바치고 와 항복하였다.
二月, 扶餘王及妻孥 以國來降.
삼국사기제19권 <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조-
이처럼 고구려에 항복한 부여왕의 이름은 정사(正史)에 나와있지 않다. 그를 잔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종휘의 《동사》(東史)에 있는 아래 기록 때문이다.
(연나라가 현왕을 사로잡고) 127년 뒤인 제나라 명제 건무 원년(494)에 부여 잔왕(孱王)이 그 나라를 고려에 바치고 들어갔다. 부여씨가 마침내 제사가 끊기게 되었다.
後百二十七年 齊明帝建武元年 扶餘孱王以其國 折入于高麗 扶餘氏遂不祀
『수산집(修山集)』 권11 《동사》 <세가> -부여세가-
그런데 이 '잔왕'이 '연약하고 줏대 없는 왕'이라는 뜻으로 《표준국어대사전》에 등록되어 있기에 고유명사라고 보기 어렵다. 이에 잔왕은 현왕 이후의 150년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누군가 첨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까지 했다. 아마도 마지막 부여왕에게 후세인인 이종휘가 임의로 '잔왕'이라는 호칭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1] 해부루의 북부여와 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