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5:18:52

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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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개벽에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10개 부문별 위인의 선정자 및 차점자 명단이다.
<rowcolor=#ffffff> 사상 정치 군사 문학 미술
이황 이이 이순신 최치원 솔거
- 을파소 을지문덕 박지원 담징
<rowcolor=#ffffff> 종교 과학 산업 교육 사회개선
최제우 서경덕 문익점 최충 유길준
원효 정약용 흘간(屹干) - -
※ 응답수 100명 미만의 차점자는 공개하지 않음.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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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담징
曇徵
성명 담징
출생 579년
사망 631년
국적 고구려
직업 승려, 화가
1. 개요2. 생애3. 호류지 금당벽화의 화가?

1. 개요

고구려승려이자 화가.

국내의 사서에는 담징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나, 혜자 등처럼 일본서기에는 담징에 관한 기록이 기술되어 있다.

2. 생애

610년(영양왕 21년), 백제를 거쳐서 일본인 승려인 법정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당시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담징은 5경과 채색에 재주가 있었으며 종이, , 연자방아(碾磑)[1] 등의 제작방법을 일본에 전하였다고 한다. 특히 종이와 먹은 몰라도 연자방아는 당시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된 듯하다.[2]

3. 호류지 금당벽화의 화가?

일본구전에 따르면 법정과 함께 나라호류지로 가서 호류지 금당벽화를 그렸다는 카더라가 있다. 그래서 사학자 이병도가 이를 근거로 담징이 호류지 금당벽화를 그렸다고 국내에서 주장했고, 한땐 이런 설이 한국사 교과서에 실려 정설처럼 취급되기도 했다.[3] 다만 문헌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호류지가 담징이 이미 사망하고 고구려도 멸망한 후인 670년 화재로 전소되었다고 기록되어있어 현재의 호류지는 이후 재건한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벽화 역시 이후 그려졌을 가능성이 많아 오늘날에는 정설로 인정받진 못하고 있다.

1995년 집필된 글이긴 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담징을 삼국시대 일본 호류사금당벽화(사불정토도)를 그린 승려 겸 화가라고 소개하면서도, "다만 일본 학계에서는 이것이 한 사람의 수법이 아닐 뿐 아니라 요철법, 채색법, 인물의 묘사법 등이 서역화풍에 토대를 두고 당풍으로 변형된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하여 담징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7세기 후반경의 하쿠호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라고 부가 설명을 달아놨다.
[1] 말이나 소가 절구 위에 있는 돌을 끌어서 돌려 곡식을 빻도록 만든 방아.[2] 이 이전엔 종이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에도시대 일본에서 처음 주장된 이야기인데 실제로 저 구절은 스님이면서 제작에도 재능이 있다고 해석하는게 맞다는 연구도 있다.[3] 과거 한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때의 일화가 나오기도 했는데, 당시가 여수전쟁 기간이라 고향 생각에 그림을 못 그리다가 고구려가 수에 이겼다는 말을 듣고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는 식. 물론 미화가 넘치는 어린이용 위인전마냥 사료적 근거는 딱히 없어보이는 창작 스토리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