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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르 점령 Occupation de la Ruhr Ruhrbesetzung Occupation of the Ruh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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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
1923년 1월 11일 ~ 1925년 8월 25일 | |
장소 | |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국 루르 | |
원인 | |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배상금의 디폴트 선언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벨기에| ]][[틀:국기| ]][[틀:국기| ]] | [[국가 파시스트당|]] 독일국 |
지휘관 | |
레몽 푸앵카레 | 빌헬름 쿠노 빌헬름 마르크스 |
병력 | |
피해 | |
민간인 130명 사망 | |
결과 | |
국제 압력으로 인한 프랑스군의 철수 | |
영향 | |
프랑스의 금융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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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와 벨기에가 군대를 동원하여 독일의 루르 공업 지대를 점령한 사건. 점령 통치 기간은 1923년부터 1925년까지였다. 돈을 안 갚는다고 타국 영토를 침공하고 저항하는 현지인들을 처형한 이 사건은 국제사회로부터 크게 비난받고 이후 프랑스의 금융위기가 찾아오는 계기가 되었다.2. 배경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지불이 불가능할 정도로 과중한 전쟁배상금을 짊어졌는데 독일이 지불해야 할 액수는 무려 1320억 골트마르크였다.[1] 전후 엉망진창이었던 독일의 경제 상황에서 이런 거금을 갚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1922년 연말 독일은 디폴트 상태에 빠졌다.하지만 프랑스와 벨기에는 배상금을 감면해 주지 않았다.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 문제는 단순히 돈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독일을 자꾸 눈 감아 주다가는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아예 무효화하고 강대국으로 부상할 테니 이를 막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독일을 쥐어짜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완전히 통일되지도 않았던 북독일 연방[2]에게 자국 황제인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는, 유례없는 참패를 당하면서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독일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와 벨기에는 빌헬름 쿠노 독일 총리가 협상국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디폴트를 선언했다는 의심[3]이 강했다. 따라서 즉각적으로 라인란트 일대를 점령하고 독일을 압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하지만 협상국의 또 다른 일원이었던 영국은 강압적인 조약 이행에 반대하였다. 특히 영국 노동당은 프랑스가 행한 조치들이 제국주의적이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는 독일에 군사적인 제재 대신 경제 제재를 가하는 절충안을 제시했으나 영국은 이조차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이 배상금으로 지급할 예정이었던 석탄과 목재가 6개월 가까이 연체되었고,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 총리[4]는 1923년 1월 루르 지역을 점령할 것을 군대에 지시했다.
3. 전개
<rowcolor=white> 독일 시민을 폭행하는 프랑스 군인들[5] |
프랑스의 점령 통치는 민주 국가가 같은 유럽 국가에 행한 것치고는 상당히 과격했다. 2년 동안 130명 가량의 독일인들이 사보타주 혐의로 프랑스군에 처형되었다.[6] 점령 말기에는 한 프랑스군 중령이 독일인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프랑스군은 이 중령의 관을 운구하면서 조의를 표하지 않는 독일인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이런 행동은 고스란히 촬영 되어서 나중에 나치가 독일에서 반프랑스 감정을 선동하는 데 쓰였다.
이에 1차 대전 협상국의 일원이었던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의 행보를 강하게 비난하고 루르에서 철수하라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영미에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던 프랑스는 양국의 압박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더해 1924년 루르 점령의 여파로 프랑화 가치에 이상이 생기며 금융 위기까지 찾아오자 프랑스는 끝내 굴복하고 미국이 제안한 전쟁 배상금 감축안에 동의했다. 결국 1924년 도스 안이 채택된 후 프랑스와 벨기에가 철수하며 루르 점령이 끝맺어진다.
4. 여파
전쟁 배상금을 갚기 위해 돈을 찍어낸 탓에 이미 인플레이션이 시작된 상태였던 독일의 경제는 총파업 지원으로 인해 더 빠르게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로에게 받지 못하는 봉급을 정부에서 대신 지불해주기로 하였는데, 재원이 부족한 정부는 이것도 역시 돈을 찍어서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또, 점령기 초반 정부가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무력한 모습을 보이자 독일인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은 점차 커졌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1923년 11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뮌헨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다만 이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도스 안(Dawes Plan, 도스 案)으로 배상금은 내려가고, 미국의 차관을 지원받았으며, 얄마르 샤흐트의 렌텐마르크 화폐개혁을 단행한 끝에 황금의 20년대라고 불리는 호황을 누리게 된다.[7]
5. 기타
여담으로 샐리 마크라는 한 연구자가 1978년에 루르 지역 점령에 따른 프랑스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보았는데 의외로 9억 마르크 흑자였다고 한다.원래 독일 제국의 영토 일부였으나 패전 이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이 된 리투아니아의 클라이페다 지역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이 루르 점령으로 인해 철수했는데, 이로 인해 곧 리투아니아계를 주축으로 봉기가 발생하여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로 편입되었다.
[1] 1919년에 맨 처음 결정된 금액은 이것보다 훨씬 적은 226억 마르크였으나 미국에 진 전쟁 채무를 전쟁 배상금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1921년에 엄청나게 증액되었다. 이때 프랑스가 내세운 명분이 '협상국 군대의 군사적 손실도 배상하라'는 것이었다.[2] 다만 당시 북독일 연방에 속하지 않았던, 바이에른 왕국을 비롯한 소국들도 북독일 연방의 편에서 싸우기는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문서 참고.[3] 실상은 독일이 정말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프랑스와 벨기에는 이 사실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인란트를 점령하겠다는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이러한 주장을 했다.[4]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 대통령을 지내다가 1차대전이 끝나면서 총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동시에 외교부 장관을 역임하였고, 대 독일 강경파로 잘 알려져 있었다.[5] 루르 점령 말기 한 독일인에게 암살 당한 프랑스 중령의 관을 운구하던 중 모자를 벗는 조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만히 있던 독일인들을 구타하는 모습으로, 이런 행동은 고스란히 촬영되어서 훗날 나치 정권의 반프랑스 선전으로 사용되었다.[6]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알베르트 레오 슐라게터. 자유군단 소속 군인으로, 저항 조직을 이끌며 프랑스군의 열차 선로에 사보타주를 감행하다가 1923년 5월 프랑스 측에 체포당하여 처형당했다. 그의 사후 슐라게터의 이름은 나치 독일에 의하여 비행단 이름에 붙는 등 프로파간다 요소로 활용되었다.[7] 사실 이것도 전쟁 직후와 대공황시기에 비해 살 만했다는 거지 완벽히 재건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