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00:33:59

의화단

파일:의화단 기.svg
의화단의 깃발

1. 개요2. 상세3. 행적
3.1. 의화단 운동3.2. 몰락과 계승
4. 평가5. 무장6. 기타7. 여담8. 매체

1. 개요

義和團
(부청멸양: 을 도와 서양을 멸하자.)
의화단의 난 당시 의화단의 구호

청나라에서 개화를 반대하던 무술집단이자 먼나라 이웃나라를 비롯한 많은 학습만화중국사 서적에서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일본 제국에 저항한 조직' 정도로만 서술했으나 이들의 실상은 의화단 운동 항목 참고.

원래는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무술을 수련하던 권법집단이었다. 대도회(大刀會)라는 민간 결사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원래는 청 조정과 관련이 없고 오히려 중앙에서는 눈엣가시로 보았던 집단이었으나, 개항 이후에는 왕조를 받들어 외세를 물리친다는 뜻의 부청멸양(扶淸滅洋)이라는 이름 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식민제국 열강에 대항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온갖 잔혹행위와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저지른 끝에 8개국 연합군에게 진압당했다. 당초에는 전형적인 반청복명 계통의 비밀결사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지만 지도층이 청나라 황족에게 포섭되면서 친청으로 방향이 선회된 것으로 보인다. 백련교의 한 분파라는 설도 있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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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 종교적 요소가 강하게 포함되었는데 의화권을 익히면 금강불괴 도검불침의 몸이 되어 을 맞아도 문제가 없다고 선전하고 다녔다. 식민국가나 반식민국가의 반란군들이나 개화 반대파 세력들이 이런 주술적, 미신적 요소가 근대식 화기도 이기게 해준다는 믿음을 막 퍼뜨리고 다니면서 소속원들을 독려한 전적이 많다. 물론 결과는 몰살되었다.[1]

의화단은 대중 앞에서 총알을 막아내는 일종의 차력쇼 같은 걸 선보였지만 일부러 총에 총알을 안 넣고 화약만 넣거나 온갖 페이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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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통일된 조직도, 권법도 없었다. 공통점이라면 스스로를 권민(拳民)이라고 부르면서 기독교를 믿는 교민(敎民)에 대적하며 누런 베, 황포로 머리를 감싸고, 배는 붉은 색으로 가리고 양권을 하여 신령을 몸으로 부르고 큰 칼로 배를 내보여서 자르는 시늉을 한다든지, 인후로 창 끝을 버티는 차력쇼를 벌였다는 것이다. 의화단에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이 하도 많다 보니 여기에 대해서도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 말들이 많다. 의화단원들이 중국 시골에서 전해지는 무당들의 굿 하는 모습에 의거한 트랜스 상태에 빠져서 저런 일이 가능했다거나 일시적으로 신체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흥분제를 복용하고 날뛰었다는 증언도 있다. 권법을 배우면 '도창불입(刀槍不入)'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직역하면 "칼과 창이 들어가지 않는다", 즉 칼과 창, 더 나아가 무기로도 소용 없어지는 금강불괴의 몸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

민족도 한족, 만주족 등 다양했고 연령대도 10대부터 노인까지 골고루 분포되었다. 《삼국지》, 《수호전》 등에 나오는 오호대장군 같은 영웅호걸들을 신봉하였으며 의화권의 미신적 힘과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 신천지로 나아가자는 환상이 민중에게 급하게 확산되었다. 구시대 질서를 옹호하던 향촌의 신사들도 이들의 물주가 되어 주었다.

그런가 하면 청나라 말엽에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이전까지의 직업이 쓸모가 없어지자 쫓겨나서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대거 의화단에 가담하기도 했다. 한 예로 의화단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장덕성(張德成)은 원래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에서 뱃사공으로 일했으나 서양에서 들어온 증기선 때문에 운하 관련 일이 사양 산업이 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이외에도 서양에서 들어온 철도가 중국에 놓이자 이전까지 대운하에서 운송 물류 사업인 짐꾼이나 뱃사공으로 일하던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새로운 운송 수단인 철도에 밀려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의화단에 참가한 수많은 중국인들은 철도를 보는 족족 망치나 도끼로 파괴했는데 철도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았다고 여겨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의화단 참가자들이 철도가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침탈하는 도구라고 여겨 미워한 탓도 있었다. 이렇듯 서양 물건에 의해 실업자가 된 장덕성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서양인들 때문에 자신들이 생계를 잃었다고 여겨서 서양과 서양인들을 증오했고, 그래서 서양을 중국에서 몰아낸다는 의화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2]

의화단에는 부녀자들로만 구성된 집단들도 존재하였는데 비교적 나이가 어린 10대 이상 여성들의 집단인 홍등조(紅燈照), 중장년 부녀자들의 집단 남등조(藍燈照), 과부들로 구성된 흑등조(黑燈照) 또는 사과조(砂鍋照) 등이 있었다.

3. 행적

의화단의 등장은 그동안 진행된 태평천국 운동까지를 포함한 기독교 문화 및 기독교인들의 행위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선교사들이 토지를 강탈하는 행위가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상황에서 청나라 정부는 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에 의해 그런 선교사들에게 마치 관리와 유사한 권리와 지위를 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권리를 얻은 선교사들은 세력확장에 박차를 가했고 중국인들은 중국이 기독교화될 것을 두려워했으며 중국인들에게 기독교의 예배(미사)와 고해성사 문화는 "난교"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는 고아원을 영아 유괴로 오인하고 공격하는 경우도 많았고 포교는 불평등 조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허락했으나 원래부터 그렇게 기독교에 영 호의적이지 않았던 관료들의 시각이 가세했다. 여기에 백성들이 이런 중상 및 토지 약탈로 기독교인들을 소송하면 관리들은 항상 일을 시끄럽게 했다며 문초하면서도 기독교인들에 대한 오해를 푸는 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고 청나라 정부에 의해 관리의 권리를 얻은 종교인들도 있어서[3] 기독교인들을 다루기도 어려웠다. 이러다 보니 "관리들이 정당하지 못하게 기독교인들을 편들고 있다"는 오해가 더욱 퍼졌다. 이는 청 조정과 일부 지방정부, 신사들이 반서방 감정을 부추기는 데도 잘 이용되었다.

일부 무슬림들과 백련교의 잔당도 이들에 합류했다. 의화단들은 부청멸양의 기치를 내걸고 반서양 반외세 감정을 품고 봉기해 서양 문물을 공격, 파괴했다. 또한 청나라의 비호 하에 외국인들이나 기독교 친서양 현지인들에게 엄청난 규모의 살육, 약탈이나 강간을 일삼는 제노포비아적인 행각을 벌였다.[4]

3.1. 의화단 운동

의화단이 1899년반기독교 운동을 벌여 교회를 불태우면서 소란을 일으키자 청 왕조는 위안스카이를 보내 이를 진압하였으나 오히려 운동은 거세져 주변으로 파급되었으며 철도[5] 등을 파괴하면서 베이징까지 확산되었다. 위안스카이가 이들을 부추겨 자멸을 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성격이 반기독교 운동에서 '부청멸양'을 구호로 내세우는 반외세운동으로 달라졌고 청 정부가 이들과 손을 잡으면서[6]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전투에서 8개국 연합군은 톈진에서 청 정부와 의화단의 연합 군대를 개박살내 버렸다. 당연히 의화단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었지만 의화권은 연합군의 총알을 막는 데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후 8개국 연합군은 베이징으로 진격해서 이를 점령했으며 신축조약을 체결하여 청을 사실상 반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민간인 살상과 더불어 주로 청조 황실 및 귀족과 민간인 및 재산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 파괴, 방화가 자행되었다.

3.2. 몰락과 계승

결국 의화단은 1900년 8월 14일부터 개입해 베이징을 함락한 8개국 연합군과 서구 세력에 항복한 청나라 정부에 의해 진압당했고 그 중에서 러시아 제국군이 철도망 보호를 이유로 만주와 요동까지 점령하면서 그 세력이 멸살되었다.[7][8] 그러나 의화단 운동이 민중들에게 남긴 영향은 적지 않아서 교리나 정신론적인 수양법은 알음알음 백련교 신도에 의해 전해지다가 파룬궁을 비롯한 여러 민간종교, 비밀결사, 흑사회 집단들로 계승되었다.

4. 평가

당시 열강들은 물론 멸만흥한을 외치던 한족들도 부청멸양이나 외치는 이들을 한간이라고 경멸 했으며 의화단 운동 당시에는 물론 이들의 잔당도 계속 같은 한족들에게도 약탈, 방화, 학살들을 자행한 탓에 주변 시선이 좋지 않았으며 그 당시 의화단 대원들을 끝까지 쫒아가서 죽이는 한족들도 있었다. 이들의 만행은 청에 호의적이던 일부 한족들도 청에 등을 돌리게 했고, 급작스러운 해프닝에 불과했던 우창봉기가 신해혁명으로 이어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5. 무장


의화단 운동 당시의 청군 보병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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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 의화단 운동
청군보병장비
개인화기 <colbgcolor=#fecd21> 볼트액션 소총 진걸, 마우저 1871, 마우저 1871/84, 한만식 소총, 윈체스터 호치키스, 만리허 1888, 레밍턴-리, 마우저 1895
단발 소총 스나이더-엔필드, 레밍턴 롤링블럭, 벤츨 소총, 스프링필드 M1873, 마티니-헨리 소총
머스킷 태창, 엔필드 1853
권총 마우저 C96
지원화기 기관총 노던펠트
화포 홍이포
냉병기 도검 한검, 대도, 언월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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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군의 운용장비 | 파일:gun_icon__.png 근대 보병장비 }}}}}}}}}



보병장비 둘러보기
근대 (~1914) 대전기 (1914~1945) 냉전기 (1945~1991) 현대전 (1992~)



체계화되지 못한 단체 특성 상 화기보다 냉병기의 사용이 잦기는 했지만, 당시 청군이 사용한 야포, 제식 소총 및 화승총, 플린트락, 퍼커션 캡, 서양에서 들여온 각종 후장식 총기들과 권총들을 노획 및 탈취하여 사용하였다.

6. 기타

영어로는 의화단 운동을 'Boxer Rebellion', 직역하면 '권투선수의 난'이라고 부르는데 당시에 서양 선교사들이 의화단이 무술과 체조를 중요시하는 걸 보고 "권투선수(Boxer)들 같다"고 평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Rebellion, '난'이란 이름은 당시 의화단을 조장해서 서양과 맞붙은 청이 대판 깨지고 그 책임을 자신이 아닌 의화단에게 돌리기 위해 붙여 준 이름에 가까우니 종전 후 청이 이들을 토사구팽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이름으로도 보여준다. 그 때문에 백련교나 태평천국 같이 혁명적인 가치를 가진 반청 종교결사로 오인되는 경우가 있는데, 당장 중국 공산당도 그렇게 인식하여 의화단을 반봉건-반제국주의 투쟁으로 정의하고 있다. 물론 의화단 파벌 중 일부는 반청 활동으로 이어갔으나 많은 파벌이 황실 권력에 복종한 채 꼭두각시로 활동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청 황실을 타도 대상으로 삼는 것을 포기한 순간부터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부당한 목적에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최후는 정해져 있었다.

7. 여담

의열단과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8. 매체

영화 《황비홍 2》에도 백련교주가 나온다. 의화권을 익혀서 총에 맞아도 안 죽었지만 알고 보니…옷 속에 두툼한 철판을 숨겨서 총에 맞아도 안 죽었던 것. 그러나 황비홍의 발차기에 맞고 날아가 뾰족한 곳에 등이 뚫려 죽는다.

영화 《황비홍 4편》에 홍등조가 등장한다. 홍등조의 지도자 격인 황련성모(黃蓮聖母) 린헤이얼(林黑兒)이 독일 제국군의 총격을 받고 참수되어 사망하면서 단원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는 영화판의 각색으로 린하이얼은 8개국 연합군에 체포된 후 발가벗겨진 채로 이들에게 온갖 능욕을 당했고 결국 살해되었는데 더 안타까운 것은 연합군이 그녀의 시신을 포르말린에 담궈서 인체 표본으로 만들어 유럽 박물관에 전시하였고 그 시신은 영국 모 박물관에 수장된 채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과학기술로는 시신을 온전하게 포르말린으로 표본 처리를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린하이얼이 표본이 되었다는 것은 낭설이고 실제로는 연합군에 잡히지 않고 산둥성으로 복귀하여 백련성모로 호칭을 바꾸고 활동했다는 설도 나도는 등 린하이얼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성룡오웬 윌슨 주연 2003년 작 상하이 나이츠에 악의 세력으로 나온다. 다만 청나라의 옥새를 훔치는 영국 왕족을 돕는다는 등 실제와 정반대로 표현됐다.
[1] 사실 한국의 우금치 전투만 해도 개틀링과 근대식 저격소총에 그 많던 농민들이 관군일본군에게 피해 한 번 제대로 못 주고 다 작살났다. 이들은 창칼도 아닌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2]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179~182쪽/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3] 주교, 선교사[4] 이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서구 제국주의와 무관한 서구 민간인들과 가난한 중국 기독교인들이었다.[5] 외국 세력 침투의 상징[6] 특히 서태후가 광서제를 폐위하고 아이신기오로 푸쥔을 황제로 세울 것을 기도하면서 평소 반외세 감정이 강했던 아이신기오로 자이이(푸쥔의 부친)가 의화단을 부추기는 데에 일조했다. 결국 그는 의화단의 봉기가 진압된 뒤 책임을 추궁받아 아들과 함께 신장으로 귀양가게 된다.[7] 그러나 의화단의 잔당들은 러시아 제국군의 진압을 피해 대한제국의 국경을 넘어와서 약탈을 저질렀고 심지어 관군에게 진압당한 위정척사파 의병장인 유인석이 요동으로 도망가서 의화단과 손을 잡고 조선에 다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아 대한제국 백성들이 불안에 떨었다.석사학위논문, 대한제국기 진위대 증설과 군부예산 운영, 김기성, 고려대학교. 15p, 각주 60번[8] (원문) 乙未年柳寅錫, 以義兵魁首, 爲官兵所敗, 逃入遼東, 誘引韓·淸子弟, 以排外斥洋之語, 人多信從, 至是與義和團相合, 將有貽害本國之擧云, (해석) 을미년에 유인석은 의병의 수괴로 관병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도망갔는데, 의화단과 합세하여 조선에 해를 끼칠 거사가 있을 것이라 합니다.속음청사 상 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