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東學農民革命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94153e><colcolor=#ffd700> 배경 | <colbgcolor=#fff,#191919>삼정의 문란 · 동학 · 만석보 · 아편전쟁 · 청불전쟁 | |
전개 | 장성 황룡촌 전투 · 전주 화약 · 갑오사변 · 갑오개혁 · 청일전쟁 · 우금치 전투 | ||
관련 인물 | <colbgcolor=#94153e> 농민군 | 전봉준 · 김개남 · 손화중 · 최시형 · 손병희 · 김창수 | |
조선 | 고종 · 조병갑 · 이용태 · 홍계훈 | ||
기타 인물 | 이홍장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오시마 요시마사 | ||
기타 | 사발통문 · 파랑새 · 갑오군정실기 | }}}}}}}}} |
우금치 전투 牛禁峙戰鬪 | ||
시기 | ||
1894년 음력 10월 21일 ~ 11월 11일 | ||
<colbgcolor=#c29f6d> 장소 | ||
조선 충청도 공주 우금치 고개 | ||
교전 세력 | 일본 제국 조선 | 동학 농민군 |
지휘관 | 미나미 고시로 모리오 마사이치 박제순 이기동 조병완 신정희 허진 이두황 이규태 성하영 홍운섭 구상조 | 전봉준 손병희 |
병력 | 일본군 600여명 조선군 1,660여명 | 남접군 10,000명 북접군 10,000명 |
피해 | 불명 | 3,000여명 잔존 |
결과 | ||
동학 농민군의 결정적 패배, 동학 농민 혁명의 와해 |
[clearfix]
1. 개요
2. 배경
동학농민운동 1차 봉기는 동학 농민군이 선전해 전주성을 차지하기까지 했으나, 곧 전주성을 포위하고 주변 고지를 장악한 관군에게 큰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하려고 하자 조정은 급히 화의를 제시했고, 동학 농민군은 합의 하에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한성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했다. 또한 자주국 선언을 강요하고 고종의 이름을 빌어 조선의 모든 청군이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했는데, 이는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시작점이 되었다. 또한 조선을 장악하여 입맛대로 개혁시키기 위하여 경복궁에 침입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며 남산에 대포를 설치하는 등, 갑오개혁이라고 '개혁'을 빙자한 내정간섭을 일삼자, 동학 농민군은 이에 분노해 일본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전봉준은 추수가 끝나 병력과 군량을 동원하기 용이한 가을철을 기다렸고, 때가 되자 각지에 통문을 띄워 궐기를 호소하였다. 9월 4일 전봉준은 거병했고 대략 4천 명의 농민군이 전봉준을 따라 서울로 북상했다. 다만 손화중과 최경선은 일본군이 바다로 상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후방에 남았으며, 김개남 또한 49일을 채워야 한다는 참위설 때문에 전봉준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동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최시형의 북접은 전봉준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여 1차 봉기에 비협조적이었지만, 1차 봉기의 승리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북접의 동학교도들 사이에서도 봉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협력을 선언하고 손병희를 지휘관(북접 통령)으로 삼았다. 북접은 9월 18일에 기포를 결정하고 접주들에게 동원령을 전달하였으며, 10월 2일 청산대회를 개최하여 전열을 정비, 이를 전봉준에게 통보하였다.# 이들은 한성 탈환을 위해 논산에 집결한 뒤 공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충청감사 박제순은 순무영과 일본군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조정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9월 10일 장위영 영관 이두황을 죽산부사에, 경리청 영관 성하영을 안성군수에 임명하여 죽산과 안성의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그리고 9월 21일 양호순무영을 설치하고 신정희를 도순무사로, 이두황을 순무영 우선봉, 별군관 이규태를 좌선봉으로 삼았으며 전국 각지에 토포사와 소모사를 파견하였다. 9월 28일 충청감영이 구원 요청을 보내자 순무영에 명해 증원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선무작전만으로는 봉기를 진압할 수 없다 판단하여 양호선무사를 폐지하여 무력진압으로 방침을 굳혔다.
일본군은 동학의 재봉기 이후 비공식적으로 농민군 진압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정식으로 조선정부가 일본 측에 진압요청을 하기 전부터 오오토리 일본공사가 조선 정부에 농민군을 진압하라고 강요하였다. 일본군이 조선정부에게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라고 강요한 명분은 일부 동학군이 청군과 결탁하여 일본군에 대항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일 연합군이 편성되었는데 이들의 진압 작전은 철저하게 일본군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1]
3. 전개
3.1. 진압군의 편성과 남하
농민군 진압작전에 투입된 부대는 다음과 같다.- 일본군[2]
- 제19대대: 미나미 고시로 소좌 지휘. 일본군의 주력부대.
- 제18대대 1중대
- 제10연대 4중대
- 제6연대 4중대, 7중대 일부, 8중대 일부
- 도합 9개 중대 1,900여 명.
- 조선군
이때 일본 제국 육군은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과 자체 개발한 무라타 소총을 썼고 관군 역시 레밍턴 롤링블럭[8]과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 등을 썼다.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일본 연합군은 관군 경군 병력이 주력이었으며 일본군은 후비대대라는 특성상 중화기 보유량이 전무했기에 전투에 동원된 회선포와 기관포, 야포는 모두 관군이 가져온 것이었다. 전투 지휘를 주도한 지휘관도 처음에는 충청감사 박제순이 맡았지만 일본군이 증원온 뒤부터는 일본 육군 후비 보병 중대와 동행한 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육군 보병소좌가 맡았다.
삼례에 주둔하던 전봉준의 남접 동학군(호남 창의군)이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동학군과 논산(놀뫼)에 결집하는 사이 미나미 소좌가 지휘하던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한성을 출발하여 충청 감영이 있는 공주를 향해 남진하고, 조선군의 우선봉 이두황의 병력은 죽산과 음성을 거쳐 보은을 향해 남하 했으며 좌선봉 이규태의 병력은 안성을 거쳐 천안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3.2. 서전
삼례와 보은에 집결한 농민군 충청도의 중심지이자 서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공주를 향해 진군했다. 두 부대는 논산에서 합류하여 10월 16일에 논산대회를 개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선출하였고 손병희, 김개남, 손화중 등 여러 농민군 지도자들은 전봉준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들은 노성을 거쳐 공주로부터 30리 정도 떨어진 경천에 주둔하였고, 부여와 논산 방면으로 진격하여 공주를 협공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공략에 앞서 전봉준은 스스로를 양호창의군 영수(兩湖倡義軍領袖)로 칭하며 박제순에게 봉기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글을 보냈다.전봉준의 부대와 함께 다른 부대도 행동을 개시했다. 남원에 머물던 김개남은 10월 14일 농민군 9천 명을 이끌고 독자적으로 청주성을 공략했으며, 김복용은 농민군 3천과 함께 충청 목천의 세성산에서 석성과 토성을 쌓아 남하하는 일본군과 관군을 저지하려고 했고 박덕칠, 박인호 부대는 7천 명의 농민군과 함께 충청 홍주와 예산에서 해안가 평야지대를 따라 남하하는 관군과 일본군을 저지하려고 했다. 최한규는 충청 유구에서 3천 병력으로 공주성의 포위를 시도했으며 김인배는 농민군 1만과 함께 순천과 여수에서 적군의 해안가 상륙을 저지하고, 손화중과 최경선은 7천 농민군과 함께 광주와 나주에서 농민군의 후방을 맡았다.
농민군이 봉기하자 관군과 일본군은 진압에 착수했다. 죽산부사 이두황(李斗璜)과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나서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시작했고, 9월 14일 경리청 대관 백낙완(白樂浣)이 지휘하는 경군이 공주로 출발하여 10월 6일에 공주에 도착했다. 뒤이어 9월 20일 일본군 용산수비대 중 스즈키 아키라(鈴木彰) 소위가 지휘하는 1개 소대와 이두황이 지휘하는 4개 소대가 서울을 출발했고, 스즈키 소대는 10월 8일 공주에 도착했다. 일본 공사는 일본에 1개 대대를 추가 파병할 것을 요청했고, 일본은 이에 응하여 19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10월 15일 용산에서 부대를 셋으로 나눠 공주로 향했다. 10월 19일 안성군수 겸 경리청 부령관 홍운섭(洪運燮)과 서산군수 성하영이[9] 지휘하는 경리청군이 공주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세 길로 진군시켜 농민군을 전라도로 몰아넣으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위영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던 이두황이 세성산을 점령한 김복용 부대와 맞부딛쳤다. 이두황은 공주에서 보내는 급보를 무시하고 세성산성을 함락하여 승기를 다지기 위해 전투를 결정했다. 10월 21일 농민군 3천여명은 험한 산세에 의지하여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17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주했으며 김복용은 체포 후 참수당했다. 이두황은 며칠 동안 세성산 인근의 농민군을 진압하다가 10월 27일에 공주에 도착했지만 오자마자 예산과 태안 일대가 위급하다는 보고를 받고 공주를 떠났다.
이후 아카마쓰 소위가 지휘하는 일본군 서로분진대 지대 하나가 10월 24일 승전곡에서 농민군 1만 5천여명과 접전하였다. 농민군의 세력이 예상외로 거세자 일본군 지대는 홍주로 퇴각한 뒤 지원군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홍주목사 겸 호연초토사 이승우(李勝宇)가 지휘하는 관군과 일본군 2천여명이 농민군 3만여명과 대적했다. 10월 28일부터 29일까지 이어진 홍주성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패했고 해미로 패주했지만 여기서도 일본군, 관군, 민보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두 전투의 여파로 동학농민군은 위축된 반면, 관군과 일본군은 공주로 향하는 농민군 주력에 모든 힘을 퍼부을 수 있었다.
3.3. 1차 전투
10월 21일 전봉준의 남접군 1만과 손병희의 북접군 1만이 논산을 출발하여 노성(魯城)과 경천(敬川)에 군영을 설치하고 군을 3개의 부대로 나누었다. 1대는 이인(利仁), 2대는 널티(板峙)와 효포(孝浦), 3대는 한다리(大橋)를 거쳐 공주를 협공하는 작전을 세웠으며 1, 2대는 전봉준이, 3대는 손병희가 지휘하였다. 이때 공주 일대는 일본군 1개 중대와 경군 800명, 지방군 일부를 합쳐 1,200여명이 지키고 있었다. 이두황과 이승우는 이인과 효포에 진을 쳤고, 우금치와 천왕산에는 일본군이 지키고 있었다.10월 22일 제1대가 이인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곧바로 박제순의 명을 받은 관군에 의해 밀려났다. 성하영이 지휘하는 경리청군 1개 소대, 공주감영 참모관 구완희(具完喜)가 지휘하는 감영군 3개 분대, 스즈키 아키라 소위가 지휘하는 일본군 1개 소대가 10월 23일 세 방향에서 이인을 공격했고 농민군은 취병산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농민군 일부가 금강을 넘어 공주감영을 공격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박제순의 명으로 이인에서 싸우던 부대들이 일제히 공주로 북귀하면서 그날 밤 다시 농민군이 이인을 접수했다.
이인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전봉준은 경천에서 널티-효포-능치-공주로 이어지는 길로 공격에 나섰다. 효포에는 홍운섭이 관군 2개 소대와 함께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는 손병희 부대를 공격하겠다고 10월 23일 밤에 금강을 넘어 북상하면서 효포 일대가 텅 비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8시경 농민군의 접근을 알리는 봉화가 피어오르자 성하영과 백낙완이 이끄는 관군이 효포 뒤 고개나루를 점거하여 농민군과 하루 동안 교전했지만 결국 후퇴했고 농민군이 효포를 접수했다. 여기에 손병희의 부대 역시 10월 24일 홍운섭, 후원 참령관 구상조(具相祖)의 부대와 접전을 벌였고 여전히 전투력을 유지하면서 공주를 포위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10월 24일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 100여명과 선봉장 이규태(李圭泰)가 지휘하는 관군이 공주감영에 속속 집결하면서 관군의 전력이 대폭 증강되었다. 효포를 점령한 농민군은 10월 25일 6시를 기하여 능치로 공격을 가했는데,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능치, 능암산, 월성산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하지만 일본군 병력 일부가 농민군의 측후방을 공격하자 후방의 위협을 느낀 농민군은 오후 1시경에 시야산으로 철수했고 그날 밤에 성하영과 백낙완이 급습하자 경천으로 철수하였다.
3.4. 2차 전투
1차 전투 이후 10월 26일 ~ 10월 29일을 거쳐 일본군 19대대 병력 500명이 공주에 집결했으며, 이규태가 지휘하는 경군도 10월 24일 공주에 도착하면서 공주의 관군-일본군 병력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방어지대를 2개로 편성하여 1방어지대는 이인과 널티를 잇는 선으로 설정했고, 구상조 부대를 1진으로 널티에, 성하영 부대를 2진으로 이인에 배치하였다. 2방어지대는 일본군이 주축으로 관군과 혼합된 3진을 공주감영 주변 고지들에 배치하였다.농민군은 10일간 병력을 보충하고 재정비한 끝에 2만 명에 달하는 군세를 갖추었다. 이들은 2개 제대로 나누어 1대는 전봉준이, 2대는 손병희가 지휘하여 동시에 공주를 협공하기로 했다. 1대가 이인에 있는 성하영 부대를 괴멸시킨 다음 공주 방면으로 진격하고, 2대는 널티에 있는 구상조 부대를 격멸하고 능치를 경유하여 공주를 공격한다는 작전이었다.
11월 8일 오후 전봉준의 제1대가 이인을 공격하였다. 전봉준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1진은 관군을 정면에서 공격하고, 2진은 배후로 돌아가 관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협공하도록 했다. 성하영은 밤이 되자 농민군에 완전 포위되었지만, 때마침 비가 내리자 농민군이 보유한 화승총과 대포가 무용지물이 되었고 그 틈을 타 포위망을 뚫고 공주감영으로 퇴각했다. 같은 날 구상조 부대 또한 널티를 포기하고 능치로 퇴각하였다. 이로써 농민군은 다시 한 번 공주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11월 8일 저녁무렵 관군과 일본군은 병력의 재배치를 서둘렀다. 우금치의 우측에 이두황의 부대를 배치했고, 좌측에는 이규태의 부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우금치 최고봉인 견준봉에는 일본 육군 200명을 배치했다. 그리고 전날 이인 전투에서 패한 성하영 부대를 이두황의 부대와 견준봉의 일본 육군 부대 사이에 배치했고, 이범호의 정예 교도 중대 350명을 이규태의 부대에 배치하여 전력을 증강했다.
11월 9일 동학농민군은 마침내 공주 주변 15km를 완전히 포위하였으며, 산 마다 깃발을 꽂아 군세를 과시하였다. 10시를 기해 전봉준의 부대는 우금치를 향해 이인가도와 오실 방면으로 공격을 가했고 일부 부대는 두리봉을 돌아 새재 방면으로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관군-일본군은 각각 1개 분대씩 차출하여 오실 북쪽에 있는 산에 배치하여 공격에 대응했다.
10시 40분 경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견준봉 전방 500m까지 진격했으며, 200여명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150m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는 예비대로 있던 3소대를 투입하여 방어력을 보강하고, 산등성이 뒤에 숨어있다가 농민군이 근접하면 곧바로 일제사격을 퍼붓고 숨었다가 다시 일제사격을 퍼붓는 전술로 농민군의 공세를 격파했다. 정오쯤 되어 동학 농민군의 주력은 방어선 공격에 거의 투입되었고 이에 맞서 관군의 개틀링 기관총과 크루프제 야포가 불을 뿜었다. 막강한 화력에 농민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동학 농민군은 50회에 가까운 공세를 퍼부었지만 관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쓸려나갈 뿐이었다. 결국 동학 농민군은 공세종말점에 다다라 더 이상 공세를 취할 수 없게 되었다.
하술하듯 관군과 일본군은 먼 거리에서 사격을 하는데도 동학 농민군에게 연달아 타격을 주는 데 성공했다. 이는 무기부터가 동학 농민군의 화승총보다 장거리 사격과 연속 사격이 가능한 최신식 소총들인 데다, 기존 밀집 대형과 달리 산개 대형과 엎드리는 자세/앉은 자세를 이용해 상대의 사격으로 받는 피해를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오후 1시가 되어 농민군의 공세가 점점 한계에 다다르자 견준봉의 관군 50여명이 내려가 농민군 좌측면을 공격하였다. 양측에서 공격하자 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한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사격을 피해 500m 밖에 있는 언덕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관군의 추격은 끈질겼고 관군의 포격과 총격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결국 패색이 짙어진 농민군은 도주하였고 일본군과 경리청군 50여명이 날이 저물 때까지 추격했다.
한편 손병희가 지휘하는 2대는 널티를 돌파하여 11월 8일 능치에서 관군과 대치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사격전, 포격전으로 대응하던 중 11월 11일 노획한 농민군의 옷과 수건으로 위장한 관군이 기습하자 놀란 농민군이 흩어지면서 패배하고 말았다.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전봉준은 1만여명에 달했던 농민군이 공주에서 두 차례 패배 이후 3천여명으로 줄어들었고, 또 두 차례 싸우니[10] 500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농민군이 11월 11일 오후 노성, 논산 방면으로 후퇴하면서 우금치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다. '전투'라고 불러주긴 하지만 농민군 측에서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해도 될 정도로 압도적인 패배였다. 비슷한 시기 김개남도 청주성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농민군의 한성 진격은 좌절되었다.
4. 결말
전투에서 승리한 관군-일본군은 우금치에 남아 있는 동학 농민군을 모두 패주시키면서 공주의 농민군을 제거하고 농민군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농민군은 연산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지도부가 빠져나갈 틈을 벌 수 있었고 전봉준은 노성으로 퇴각하여 재기를 노린다. 하지만 추격하는 진압군에 농민군은 논산에서 패배하여 전라도로 밀려났고 다시 병력을 모아 원평에서 결전을 시도했지만 또 패배하고 말았다.결국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 전봉준 장군의 주력 부대가 패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와해되고 만다. 이후 전봉준은 자신 휘하에 남아있던 농민군을 해산하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하여 순창 피노리에 피신해 있던 도중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인해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가 피노리 주민이 투척한 몽둥이에 다리를 맞고 관군에게 붙잡혔고, 이듬해 3월에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11]
남접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김개남은 청주성 전투 이후 전봉준과 합류했다가 전주성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태인으로 도망쳤다가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그해 12월에 전라감사 이도재의 독단으로 참수당했다.[12] 그리고 또 다른 지도자인 손화중 역시 관군에게 붙잡혀 전봉준, 최경선, 성두환, 김덕명과 같은 날에 교수형을 당했다. 이들 외의 농민군 생존자들은 1895년까지 관군과 일본군에 저항하다가 하나둘 죽어가거나 체포되어 중형을 받거나 처형되었고, 북접의 최시형과 손병희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최시형은 1898년 사형당했고, 손병희는 북접을 물려받았지만 탄압을 피해 1901년 일본으로 떠났다. 동학농민운동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5. 동학농민군의 패전 원인
5.1. 전략 목표
농민군의 전략적 목표는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한성을 탈환하고 외세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또한 시기적으로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급히 모은 병력에 대해 식량을 충분히 지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속전속결로 한성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공주는 충청감사가 위치한 도시로 공창을 비롯한 기관이 있던 곳이라 점령에 성공할 시 공주에 있는 식량 확보 및 동학 농민군의 영향력을 충청권에 미치게 할 수 있었고, 호남권과 한성을 잇는 교통의 교두보였던 관계로 전략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할 곳이었다.이러한 사실을 관군과 일본군이 모를 리 없기에 당연히 공주 우금치에 병력을 배치시켜 농민군을 대비했다. 금강을 넘어 한성에 진군해야 하는 농민군 또한 이를 알면서도 공주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공주를 우회해서 한성을 공격하는 방안은 보병이 주력인 농민군 특성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5.2. 화력
관군·일본군에 비해 농민군은 화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관군 본대에 배치된 크루프 야포, 개틀링 기관총에 더해 개인화기로 스나이더-엔필드와 무라타 소총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일본군과 달리 농민군은 죽창이나 창, 농기구에 관청을 털어 얻은 조총과 구식 대포를 주력으로 사용했고, 소수만이 회룡총(레밍턴 롤링블럭)을 비롯한 신식 무기로 무장했을 뿐이었다.[13]농민군이 든 조총의 사정거리는 겨우 100~400m에 불과했고, 재래식 냉병기는 사거리가 없다시피 한 근접무기였다. 그래서 고전적인 밀집대형으로 적을 밀어붙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지만 관군은 이러한 밀집대형을 제대로 카운터 칠 수 있는 개틀링 기관총을 다량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농민군도 2차 봉기 초반에 전주성을 털어 얻은 회룡총과 개틀링 기관총, 크루프제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 숫자는 매우 적어 관군의 화력을 당해내지 못했다.[14]
관군·일본군의 총기류들은 사정거리가 훨씬 길어 원거리에서 동학 농민군을 가볍게 쏠 수 있었다. 볼트액션식 소총이었던 무라타 소총과 스나이더 소총의 사정거리가 최대 1.8㎞. 이외 평균적인 소총의 사정거리가 0.8-1.4㎞ 정도였으니, 관군과 일본군이 평균적인 실력만 갖추어도 농민군을 명중시킬 수 있었다.[15]
또한 후장식/볼트액션 소총류는 무기 특성상 전열 내의 군인들 간격을 어느 정도 벌린 채로 엎드려서 사격할 수 있었는데, 조총은 밀집대형으로 서서 쏴야 하는 구조라서 농민군은 자신들은 맞기 쉬우면서 상대를 맞히기는 어려운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전장식인 조총은 아무리 빨리 쏴도 1분당 겨우 2회를 쏠 수 있어서, 1분당 압도적 물량공세를 시전 가능한 개틀링이나 그보단 못해도 짧은 시간 안에 상대적으로 연사가 수월한 후장식/볼트액션 소총 저격을 당하지 못했으며, 이것조차 없는 농민군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게다가 그들이 보유했던 개틀링은 동학 농민군과 관군의 최초 접전이었던 1차 봉기 초반과 달리[16] 아주 잘 쓰였기에 밀집대형으로 몰려오는 동학 농민군들을 쉽게 표적으로 삼아 전멸시켰다. 동학군 1차 봉기 때는 관군이 전술적 오판으로 패배하고 신식 무기인 개틀링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지만, 신식 무기에 대한 지식이 없고 추가적인 보급이 불가능한 농민군이 개틀링을 정확히 알고 이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동학군은 기껏 탈취한 개틀링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고, 그 결과 우금치 전투에서 개틀링을 향해 밀집대형으로 돌진했다가 결국 움직이는 과녁 신세가 되었다. 우금치에서 맹렬한 총격을 뚫고 조총의 사정거리 안쪽까지 다가선 농민군은 겨우 200여명에 불과했고, 우금치 정상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람은 겨우 몇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저항조차 못하고 멀리서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동학농민군이 보유한 무기 상황을 생각해보면 개틀링 대처법을 알았다 한들 실천할 수가 없었다. 수십 년 뒤에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기관총 때문에 발생한 참호전 양상을 파훼하지 못해서 신무기인 탱크, 항공기의 등장과 미군의 쇼미더머니 물량 대공세가 이어지기 전까지 교착상태에 빠졌다. 당시에 기관총으로 구축한 방어선은 가히 무적에 가까웠다. 20세기 유럽의 식민제국들도 감히 하지 못한 것을 19세기 농민봉기군들이 해낼 수 없다.
무기들의 화력과 사정거리도 문제였지만 조선 관군과 일본군의 무기보다 동학 농민군의 무기들, 특히 조총이나 화승총 등이 날씨를 제법 타는 것도 문제였다. 불을 붙인 다음에 쏘는 구식 총들의 구조상 날씨가 습하거나 하면 불이 잘 안 붙어 무용지물이 된다. 그런데 우금치 전투 당시 기상은 -0.1도에서 6도까지 오갔으며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 화승총을 쓰기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추운 기상은 농민군의 사기를 떨어뜨렸으며, 바람마저 북풍이 불어 남쪽에서 공격하는 농민군의 화살이나 투창 같은 비화약성 원거리 무기의 사거리마저 줄어들었다. 반면 관군과 일본군이 보유한 단발식 소총류는 그냥 탄환만 갈아끼우면 되므로 날씨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단적으로 동학농민군은 이인 전투에서 포위섬멸할 수 있었던 성하영 부대를 비 때문에 화기를 못 써서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런 사정들 덕분에 신식 무기로 무장한 조선 관군과 일본군 : 구식 무기로 무장한 동학 농민군 = 250 : 1, 혹은 500 : 1 이라는 말도 안 되는 화력 격차로 동학 농민군이 패배하고 말았다.
5.3. 전술
농민군 지도부는 좁은 우금치 계곡에 농민군 주력을 밀집대형으로 몰아 넣었다. 당연히 이런 밀집대형은 개틀링 기관포의 좋은 사냥감이 되었고, 농민군은 개틀링 기관총의 화력에 피하지도 못하고 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을 마흔 - 쉰 번이나 되풀이하여 무의미한 소모를 늘려 종국에는 공세를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차라리 이런 상황이라면 당장 우금치를 포기하고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의 베트민이나 베트콩,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시절 모잠비크와 앙골라, 기니비사우[17]처럼 장기적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 맞섰다면 최소 밀렸을지는 언정 생존자라도 더 늘릴 수 있었겠지만, 농민군 지도부가 이를 택하지 않고 저런 밀집대형 전술을 고집한 이유가 있었다. 만약 게릴라 전술을 쓰려면 민심에 기반하여 펼쳐야 하지만 전주화약 이후 얼치기 동학도들이 늘어나 동학의 이름으로 약탈이나 행패를 많이 부려서 3남 민심도 1차봉기마냥 동학에게 호의적이진 않았고, 당대 기록에도 동학군들이 민간인들에게 끼친 피해가 심했다는 내용이 많다.
- 지형의 불리함: 당시 고지에 해당하는 고갯마루는 이미 관군과 일본군이 점거한 상태였다. 동학농민군은 1km에 달하는 오르막길을 아무런 엄폐물 없이 내달려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즉 지리적 고지를 못 얻은 시점부터 이미 전술상으로 불리했다. 이후 관군과 일본군이 아직 점령하지 않았던 능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마저도 40~50차례에 걸친 축차투입 축차소모로 큰 전술적 패착을 둔 뒤라 별 의미가 없었다.
우금치는 소쿠리나 통발 모양에 가까운 지형이다. 동남쪽만 열리고 양쪽이 다 막힌 형태에 동서 폭이 800 m, 남북 폭이 1,200 m이다. 이렇게 양 측면은 막치고 앞뒤만 트였는데, 그 상황에서 앞뒤 기준으로 가장 먼 거리가 1,200m 정도 되는 지형 안에서라면 입출구 언저리에만 있어도 충분히 소총의 사정거리에 들어간다. 당시 농민군은 그 1,200 m보다 더 안쪽에 들어와 그 계곡 안에 밀집대형을 이뤄 돌격했는데 오판이었다. 그렇게 4-50번씩이나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제파공격을 반복하면서 인력은 인력대로 낭비하고, 안 그래도 숫자 외엔 믿을 게 별로 없는 전력을 효과적으로 쓰지 못했다. 이러다보니 안 그래도 밀집대형을 상대하기에 유리한 개틀링을 보유한 관군·일본군 입장에서 농민군을 상대하기에 더욱 유리해졌다. - 전술 지식 부재: 농민군은 지도부를 포함한 절대다수가 전문 군인 출신이 아니었다. 특히 신식 무기가 이미 보급된 시점에서 이를 배운 뒤 나온 전문 군인이 아니라 당연히 개틀링이나 신식 소총류의 자세한 정보나 대처법을 몰랐다. 그러다보니 밀집대형으로 화력을 집중해서 정면돌파하는 구식전술만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군 입장에선 분산될수록 화력이 떨어지는 무기로 무장했으니 구식 전술로 치자면 밀어붙이는게 더 유리했지만, 언덕에 설치한 관군과 일본군의 기관총 앞에서는 과녁에 불과했다. 또한 개틀링의 고화력에 대비해 우금치 전투 고갯길 좌우의 경사로 등의 개틀링 화력의 사각지대를 찾고 이를 택해 몰래 이동한다는 전술도 쓰지 않았다.
전봉준은 고지에서 장태라는 이동식 엄폐물을 굴려 관군의 개틀링을 무력화하여 승리를 거둔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황룡촌 전투는 저지에 있는 경군 300명을 상대로 5천 농민군이 물량 공세를 펼친 전투로, 머릿수를 압도하는 개틀링이 무력화되자 관군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1차 봉기 때에는 이렇게 신식 무기만 쥐었을 뿐 조직력과 훈련도가 떨어지는 관군을 상대로 농민군이 이기는 구도가 전주성 함락 때까지 이어졌고, 이 때문에 구식 무기로 무장한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운은 상대가 정신차리고 제대로 붙는다면 순식간에 깨질 수밖에 없었다. 전주성 함락 이후 홍계훈의 경군이 완산에 진을 치고 신식 무기를 제대로 사용하자 농민군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농민군은 몇 번이나 완산을 오르며 경군을 공격했지만 개틀링건 앞에서 무력할 뿐이었고 붕괴될 위기에 놓였다. 만약 고종이 어리석게도 청군 파병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경군만으로도 농민군을 충분히 진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의 파병 요청 때문에 조정도 전주 화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농민군의 마지막 행운이었다.
아무리 병법에 무식한 피지배층 출신들이 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동학 농민군이긴 하나 자신들은 숫자도 많은데다 관군보다가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한 곳에서 싸우기 때문에 꽤나 유리한 입장이란 것을 자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는데도 패배했다는 사실은 동학 농민군 수뇌부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할 사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얻은 승리에만 만족한 것도 모자라서 그것들을 제대로 분석조차 하지 않은채 관군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만 불태우기만 했다. 물론 동학 농민군이 그 사실을 깨달아도 그들이 노획한 신무기조차 제대로 못 쓰고 있는 마당에 이 문제를 극복할 역량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사치인데다 전주성을 내준 이후 청일 양국의 개입이라는 초대형 사건이 터져서 어찌하지 못했던것도 있다.
상술했듯이 전봉준으로 대표되는 농민군 지도부가 군대 지휘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던 와중에, 1차 봉기 때 상대적으로 허술하기 그지 없었던 관군과의 접전에서 밀집대형 공격으로 이겨서 신식 무기들과 개틀링 등을 노획한 경험이 있다보니 지도부는 이를 쉽게 승리의 전략으로 믿어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즉 이 시점에서 동학군 지도부는 한 번 승리했던 전법을 다시금 시도하는, 초보적인 지휘관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게다가 상대는 이전의 관군이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농민군에겐 불리한 신식 무기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도 제대로 숙지한 관군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런 전술이 초기 접전에서부터 손해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지도부가 전략 철회 시도조차 하지 않고 우금치에서 정면돌격을 벌인 이유가 있었다.상술했듯이 전봉준으로 대표되는 농민군 지도부가 군대 지휘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던 와중에, 1차 봉기 때 상대적으로 허술하기 그지 없었던 관군과의 접전에서 밀집대형 공격으로 이겨서 신식 무기들과 개틀링 등을 노획한 경험이 있다보니 지도부는 이를 쉽게 승리의 전략으로 믿어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즉 이 시점에서 동학군 지도부는 한 번 승리했던 전법을 다시금 시도하는, 초보적인 지휘관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게다가 상대는 이전의 관군이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농민군에겐 불리한 신식 무기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도 제대로 숙지한 관군이었다.
- 농민군의 상황도 악화되어서 이대로 물러났다간 사기도 잃고 와해되니 성급하고 무모하게나마 우금치 돌파를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농민군 측의 수적 우세 때문에 피해가 매우 미미한 관군과 일본군 내에서도 봄~여름이었다면 저 농민군을 상대하는게 어느 정도 힘들었다고 언급한 것이 기록으로 남을 정도였지만, 문제는 우금치 전투가 벌어진 시기는 겨울이었다. 그러다보니 추수 문제를 농민들이 신경쓸 이유는 없었으나 부실한 화력 + 정규군인 적측에 비해 부실하고 미비한 보급 체계와 지원 속에서 추위와 습기(눈)이라는 문제를 함께 끌어안은 채로 농민들이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는 농민군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 우금치만 돌파하는 데 성공하면 전략적 요충지인 공주에 닿을 수 있었기에 지도부는 다음을 기약하는 대신 무모하게나마 정면돌파를 감행해서라도 공주를 손에 넣으려고 욕심을 부렸다.[18]
- 농민 봉기군 특성상 동학군은 지휘체계가 통일되지 못하고 훈련도도 낮아 일사불란한 전투를 벌이기 힘들었다. 따라서 특정 구역에 병력을 집중시켜 관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거나, 일부 부대가 관군과 교전하는 사이 주력부대로 방어선 틈새를 돌파하는 작전을 쓰기 어려웠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구한말 시기에 일어난 의병들의 경우 우금치 전투처럼 화력에 밀려 속절없이 패한 경우도 있지만, 지형을 잘 살려 게릴라전, 유격전 등의 전략을 택한 경우에는 뛰어난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전해산, 심남일, 신돌석 등이 이런 전술을 잘 구사하여 명성을 떨쳤지만 결국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리적 불리함과 일제의 적극적인 토벌 공세에 밀려 몰락하기에 이른다.
5.4. 부족한 결속력과 군기
농민 봉기군이 대개 그렇지만 동학 농민군도 조직력이 좋지 못했다. 전봉준이 총대장이었지만 동학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대가 아니였다. 단적으로 김개남은 전봉준보다 먼저 기포하려고 했고 기포 이후에도 전봉준에게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가 진압군에게 각개격파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2차 봉기 당시 농민군 중에서는 이렇게 독자 행동하는 부대가 많았고, 각 지방에 있는 동학의 우두머리들은 전봉준의 명령도 듣지 않았다. 전봉준 본인도 동학 농민군에 대해 오합지졸이라며 다루기 어렵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농민군의 본산인 전라도도 이럴진대 다른 지역의 농민군의 상황은 말할 필요도 없다.마찬가지로 농민군의 군기도 엄정하지 못하였다. 김개남 휘하 지도자인 남응남은 패배할 게 뻔하다는 이유로 김개남의 소집령에 응하지 않았고, 9월 16일 청풍에서 농민군이 자기들을 속였다며 동학 접주를 관아에 넘기는 일이 벌어졌으며, 공주로 북상할 때도 매일 수백 명이 추위와 배고픔에 못이겨 탈주했을 정도로 농민군의 군기는 형편없었다. 우금치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어서 1차 우금치에서 패배했을 때는 겨우 3천 명만 남아 있었고 연산과 논산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겨우 500명 밖에 없었다.
농민군의 숫자가 항상 수천에서 수만에 달했음에도 수백에서 2천을 넘지 못하는 진압군에게 패배한 이유도 이것이다. 압도적인 화력 차이도 있었지만 낮은 군기와 조직력으로 전투에서 직접 관군과 대적하는 농민군은 기껏해야 수백에 불과했으며 부대 간의 유기적인 협조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패색이 짙어지면 전투 대신 탈주를 선택하는 자들이 많았다.
또한 전봉준과 농민군의 목표도 농민군의 결속력을 뒤흔들었다. 당초 전봉준은 폐정개혁을 추진하면서 반봉건을 내세웠으나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급진적인 개혁을 자제하고 관찰사 김학진과 협력하여 관민상화(官民相和)에 입각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관청, 유림과 부유층들을 적으로 돌려 일본과 싸우기 전에 내분을 일으켜 항일대오를 흐트러뜨리기 않기 위해서였다. 우금치 전투 직전 박제순에게 보낸 글과 노성에서 백성과 관군을 대상으로 내건 격문 등을 보면 전봉준은 일관되게 일본의 침략을 부각하며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단결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농민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농, 천민, 유랑민과 일부 농민군 지도자들은 반외세보다 자기들과 가까운 계급적 모순의 해결에 더 관심이 많았고, 평소에 품어온 양반과 지주에 대한 증오심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출하였다. 그 결과 양반과 천민을 아우르는 거국적인 항일대오는 무너지고 농민군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5.5. 참고자료
전투 분석 1전투 분석 2
전투 분석 3[20]
전투 분석 4[21]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려 ‘주술의 힘’까지도 빌렸던, 시사저널
6. 연표
날짜는 전부 음력이다.- 9월
- 9월 4일: 동학 농민군 거병
- 9월 14일: 전봉준, 전주성 공격 후 삼례로 진격
- 9월 20일: 전봉준, 여산 점령
- 9월 30일: 김복용, 세성산 점령
- 10월
- 10월 6일: 경리청 백낙완 부대 공주 도착
- 10월 8일: 일본군 스즈키 소대 공주 도착
- 10월 12일: 남접군 논산 도착
- 10월 15일: 일본군 19대대 공주로 남하 시작
- 10월 16일: 논산대회 개최. 남북접 연합부대 결성, 전봉준 총대장 선출. 노성 점령
- 10월 19일: 경리청 홍운섭, 성하영 부대 공주 도착
- 10월 22일~23일: 1차 이인 전투
- 10월 24일: 효포 전투, 선봉군 이규태 부대, 일본군 모리오 부대 공주 집결
- 10월 25일: 1차 능치 전투, 농민군 경천으로 퇴각
- 10월 29일: 일본군 19대대 공주 집결 완료
- 11월
- 11월 8일: 2차 이인 전투. 널티 전투
- 11월 8일 ~ 11일: 2차 능치 전투
- 11월 9일: 우금치 전투
- 11월 11일: 농민군, 논산으로 퇴각
- 11월 13일: 청주성 전투
- 11월 14일: 연산 전투
- 11월 15일: 논산 전투
- 11월 25일: 원평 전투
- 11월 27일: 태인 전투. 동학 농민 운동 와해.
7. 참고 문헌
네이버 지식 백과김유석. "戰鬪의 構成要素側面에서 본 二次 東學農民戰役의 敗因分析." 忠南大學校 平和安保大學院, 2006. 대전
8. 여담
실제 우금치 사진.
우금티 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투 당시의 근대 국어는 현대 국어와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이 있어 구개음화가 널리 사용되지 못하였는데[22] 이 때문에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우금티로 불렸다가 현대 들어 구개음화가 정착되면서 구개음화를 적용해 우금치라고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녹두꽃에서는 당시 발음을 반영하여 '우금티'로 표기하였다. 현재에도 우금치에 있는 터널 이름은 우금티터널이다.
1991년 영화 개벽에서 영상화 되었는데 압도적인 일본군의 화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결국 패배한다.
1994년에 KBS1에서 방송된 동학동민운동 100주념 기념 다큐멘터리 극장에서 이 전투가 등장한다. 나중에 이 장면은 후일 KBS2에서 2002년에 방영한 명성황후 102회에서 동학농민운동 장면이 나올때 이때 나온 전투씬과 함께 재편집되어 방영됐다.
2년뒤인 1996년에는 KBS1 TV에서 방송된 신봉승 원작의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 97회에서 방송되었는데 고증오류가 많은것으로 추정되는 장면이 많이 보여졌다. 또한 이 장면의 일부를 자사의 프로그램인 역사스페셜에서 쓰기도 하였다.
2019년 7월 5일 방영된 녹두꽃 21회 (2회연속 편성으로는 41회~42회에 해당)에서 오래간만에 재연되었다. 극적 허용인지 고증 오류인지 관군의 역할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고 일본군이 야포와 개틀링건을 운용하는 등의[23] 역사왜곡이라 할 만한 모습으로 나왔다.[24]
[1] 청일전쟁·러일전쟁-한반도에서 벌어진 국제전을 바라보는 한국학계의 시각. 서영희 # 5쪽[2] 모두 후비(後備) 보병부대이다. 후비는 지금으로 따지면 예비군과 민방위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병역이다.[3] 한양의 궁궐과 국왕을 지키는 부대.[4] 일본군에게 훈련받고 일본군 지휘계통 아래 있었다.[5] 한양을 지키는 부대.[6] 북한산성을 지키는 부대.[7] 10월 27일 공주에 도착한 부대 기준. 장위영 850명, 경리청 560명, 통위영 250명. 공주에 오지 않은 교도중대는 350여명이었으며, 감영군과 민보군의 숫자는 불명이다.[8] 전쟁 중 기기창이 파기되고, 일본군에게 노획되는 걸 방지하고자 적지 않았던 탄약을 폐기했던 탓에 운용이 어려워져 전쟁 직전 도입을 시작했으며, 일본군에게서 청군의 노획물자를 인계받을 수 있었던 Gew71도 적지않게 운용되었다.[9] 안성군수는 9월 30일 홍운섭으로 바뀌었고 성하영은 10월 11일 서산군수를 겸하게 되었다.[10] 이 두 번의 싸움은 연산과 논산 전투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11] 전봉준의 교수형은 갑오개혁으로 참수형이 금지된 조선에서의 교수형 최초 집행 사례가 되었다. 비록 이전에도 교수형은 존재했었으나 그 대상은 주로 여성이 대상이었다.[12] 이미 갑오개혁으로 참수형을 금지했고 토벌대를 파견한 일본 측이 그를 죽이지 말고 압송할 것을 주장했으며, 거기에 사형을 집행하려면 임금 및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했는데 이를 어긴 것. 이로 인해 일본과의 외교 분쟁이 일어났다.#[13] 관군측 기록엔 농민군도 방어전에선 노획한 개틀링 기관총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우금치 전투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개틀링 기관총은 무겁기 때문에 공격에는 적합하지 않는 무기체계이기 때문이다.[14] 롤링 블럭 소총만이 아닌 전장식 엔필드 소총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조총만 가진 게 아니고 어느 정도의 신식 무기를 장비한 농민군이지만 그럼에도 관군과 일본군에게 화력에서 크게 밀려버린건 역시 농민군의 신식 병기에 대한 숙련도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엔필드 소총이라 해도 스나이더-엔필드가 아닌 패턴 1853 엔필드 전장식 소총이지만 그럼에도 사거리에서 압도적일 정도로 밀리는 총이 아니다. 실제로도 일본에서 세이난 전쟁 당시에 사쓰마 반란군은 전장식 엔필드 소총으로도 정부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는데 그 이유는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신식 총기에 대한 이해도가 보신 전쟁 등을 통해서 굉장히 높았기 때문이다.[15] 대중매체에서는 돌격을 할때 처음부터 달려가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그렇게 하면 도착할때쯤 지쳐서 아무것도 못하고 죽게 된다. 그래서 지근거리에 도달할때 까지는 속보로 걸어가기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을수 밖에 없다.[16] 사실 1차 봉기의 중후반으로 넘어가면 전주성 전투 당시 성문 인근 감제 고지에 크루프제 속사포와 함께 배치하고 망루를 설치하여 관측하다가, 이걸 제거하려고 출성한 동학 농민군을 개틀링의 화력 지원과 함께 레버액션식 소총을 장비한 채 산병전을 벌여 녹이는 식으로 활용했다.[17] 그래도 여기는 남아공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군의 공세에 밀려 패전 직전까지 갔던 모잠비크, 앙골라와는 달리 포르투갈을 상대로 일으킨 독립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어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다.[18] 그 당시 동학 농민군의 입장상 우금치를 건너뛰고 다른 루트를 확보해 우회전술을 선택하며 장기전을 노리기도 힘들었다.[19] 현대 군대도 미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장병의 종교활동을 장려함으로써 전투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20] 주로 전술보다는 무기에 초점이 맞춰진 분석글이다.[21] 동학 농민군이 실패한 배경 중 외부적 배경 뿐만이 아니라 동학 조직 내부적 배경도 모두 설명하고 있는 분석글이다.[22] 문경새재의 '산불됴심' 표지판도 같은 맥락[23] 사실 대부분의 역사해석에서 구한말의 혼란에서 빚어진 한국인(조선인) VS 한국인(조선인)의 구도를 대부분 두루뭉술 넘어가려는 경향이 강하다. 묘사해도 적당한 정치공작 선에서 넘어가고 유혈사태에 대해서는 잘 짚지 않는 편. 갑신정변, 을미사변 역시 조선인 가담자(조선군 훈련대)들이 있었으나 이들에 대해서는 생략하거나, 그냥 시점의 무게를 일본 등의 외세에 행위에 무게를 둔다. '우리 민족끼리는 어려운 상황에도 똘똘 뭉쳐서 외세와 저항했다.'라는 민족주의적 시야가 녹아있는 역사해석에 저런 구한말의 조선인들 간의 갈등은 크게 방향성이 맞지 않기 때문.[24] 사실 교과서나 공무원 시험/한국사 검정능력 시험도 일본군을 부각시키니(중화기나 근대 무기 무장 등의 서술은 덤) 딱히 다를 바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