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09:17:44

북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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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춘대성

북한산성
대한민국의 세계유산 잠정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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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62호
<colbgcolor=#315288><colcolor=#fff> 북한산성
北漢山城 | Bukhansanseong Fortress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 외
서울특별시 은평구·성북구·강북구·도봉구 일원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면적 515,224.9㎡
건축시기 삼국시대~조선시대
지정일 1968년 12월 5일
소유 고양시
관리 고양시
1. 개요2. 역사3. 내부시설4. 가는 길5. 외부 링크6. 사적 제162호

[clearfix]

1. 개요

북한산 백운대, 보현봉, 문수봉, 나월봉, 의상봉, 원효봉 등을 연결하여 쌓은 산성. 성곽의 길이 12.7km이며 성곽 내부 면적은 6.2㎢ 정도로, 여의도 4.5㎢ (136만평) 보다 크다.

이렇게 크기 때문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우이동, 종로구 구기동, 성북구 정릉동에 걸쳐있으며, 남쪽과 동쪽 성벽이 경기도와 서울을 나누는 기점이 된다. 분명 성은 고양시와 서울시에 걸쳐있는데 안내판 사업도 그렇고 두 지자체간 협의되어 진행된 사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심지어 주도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이는 북한산수도권에서 유일한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정도의 명승이며 고양시 소재라고 볼 수 있으나 주된 진입로가 서울에 위치하고, 탐방객도 600만을 넘겨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인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성곽과 시설물에 대한 서울시 제작 안내문에는 소재지 소개에 고양시가 쏙 빠져있었다. 지금은 서로 협력관계라는데, 사실 말로만 그렇다. 여전히 고양시와 서울시는 서로 으르렁대면서 북한산성의 개발권을 두고 티격태격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고양시와 서울시 경계선에 있는 북한산성 부분은 서로 복원을 안 해서 구멍이(...) 뚫렸다.

또한 탕춘대성이 북한산성 비봉과 서울성곽 (서울 한양도성) 창의문을 연결한다. 상명대학교세검정터 바로 앞에 있는 홍지문과 오간수문[1]이 그 일부이다.

2. 역사

백제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을 때 개루왕이 한수 북변에 성을 쌓은 것과[2]근초고왕평양성을 공격한 뒤 한강 이북으로 도성을 옮기고 이후 비류왕 때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개로왕도림의 꼬임에 넘어가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위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3] 이후 신라진흥왕 때에 북한산성에서 고구려와 피튀기는 전쟁을 벌였다고 되어있고, 북한산 순수비가 가까운 비봉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현 위치에 당시에도 성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북한산 지역에 삼국시대 성터가 확인되지 않은 점과 2016년 삼국시대 축조된 아차산성 발굴에서 '북한산성' 관련 기와가 나와서 삼국시대의 북한산성은 아차산성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곳에서 고구려 장군 뇌음신과 말갈 장군 생해(生偕) 연합군이 신라 북한산성을 공격한 북한산성 전투가 일어났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현종천추태후에 의해 승려가 되어 지금 진관사인 신혈사에 유폐됐다는 기록과 왕건의 재궁(관)을 제3차 여요전쟁 때 향림사로 피신시켰다는 등 북한산에 대한 기록은 있으나[4] 북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최영 장군이 중흥산성에 주둔했다 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문종밀덕후답게 한양주변 요충지와 도성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현 위치에 산성을 쌓자고 말했지만, 백성만 고생한다는 신료들의 만료로 무산되었으며, 이후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이덕형을 보내서 북한산을 정찰하게 하는데, 이덕형은 산세가 험하고 방어에 좋고, 고려 때 주둔한 흔적이 있으니 우리도 여기에 성을 쌓자고 보고한다. 하지만 이는 전후 재정 부족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결국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도성과 바로 연결되는 배후 산성이 절실함을 느끼고 무려 40여 년간 논의한 끝에 숙종 37년(1711년)에 축성을 끝냈다. 성벽을 쌓은 데에는 단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5]

성을 쌓은 숙종, 영조, 사도세자, 정조가 왔다갔다고 하며 사도세자는 여기에 온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사도세자 문서로. 정조는 왕이 돼서는 와보지 않았으며 이후 손자인 효명세자중흥사를 왕실 원찰로 삼고 중창하고 후원했다는 기록도 있다.[6] 고종 때는 엄귀비가 찾아와 지금 무량사 자리에 산신각을 짓고 백일기도를 해 영친왕을 얻고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무량사에는 엄귀비가 모셨다는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남아있다.

그 외에도 각종 문집에 북한산에서 놀고 갔다는 기록이 수두룩하며 이중에는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도 있다.

1968년 사적 제162호로 지정됐다.

2022년 12월 한양도성, 탕춘대성과 함께《조선 수도성곽과 방어산성》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

3. 내부시설

북문, 대동문, 대서문, 대성문, 중성문에는 초루가 설치되었고,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봉암문, 용암봉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과 수문이 설치되었다. 성곽에는 성문 이외에 시단봉 위에 동장대, 나한봉 동북에 남장대, 중성문 서북에 북장대 등 3장대[7]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8]을 건립하였다. 또한 주둔부대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인 유영지 3개소,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창 3개소, 성곽 관리와 방어를 분담한 승병들이 주둔할 승영사찰[9] 등을 설치하였다.

이후 유사시 도성민들이 전부 들어가 항전할 때 필요식량을 대략 계산한 결과, 무려 곡식 10만 석[10]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이에 그 많은 곡식을 산성 내에 쌓기는 힘들다고 산 아래에 창고를 지금의 평창동에다 평창이란 이름으로 만들고 5만석을 여기에 비치하게 된다. [11]

성벽은 평지와 산지 등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여 쌓았는데, 고축(高築)· 반축(半築)·반반축(半半築)으로 축성하였으며, 여장(女檣)만 쌓은 곳도 있고 봉우리 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은 곳도 있다. 하지만 여장을 쌓을 시점에 이르러 겨울이 다가와 여장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진다. 여장을 깬돌로 쌓으면서 진흙으로 그 빈틈을 속채움하고 바깥에는 석회를 발랐다. 문제는 이러면 겨울이 지나면 수축과 팽창 덕분에 무너진다는 것... 덕분에 오늘날에 이르러 원 모습이 남아있는 건 없으며, 정조 때도 순조 때도 걸핏하면 "관리가 허술하다" "수리해야 한다" 등등 이야기가 나와 결국 순조 때 행궁을 포함해서 대대적으로 개보수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문제가 있는데 서울시 복원구간은 서울 한양도성 여장을 베껴 만들어 성내에서 성 바깥이 안 보이는 등, 원형과 여장기능을 상실했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게다가 현황 파악도 매우 어려운데 지형이 다소 변화했기 때문이다. 일부 성벽 잔존구간은 접근조차 힘든 절벽 위에 있으며 분명 뒤편으로 나 있었을 순찰로가 침식되어 사라지고 성벽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덕분에 능선을 따라가는 등산로가 잔존구간 위로 지나가게 되어 훼손이 더 심해지고 있으며 비봉능선에서 북한산으로 이르는 문수봉 구간은 심지어 성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고의로 파괴되어 있다. 또한 성벽을 지키는 병력이 주둔할 성랑지는 등산객들 휴식 및 식사장소로 걸핏하면 이용되어 초석 위치가 바뀌고 지표에 남은 와전류가 훼손되는 현실이다.

성곽시설 중 암문 중에 시체를 내보내기 위한 시구문이 있는 점, 성문 여장이 평여장[12]인 점, 포루를 설치하지 않는 점,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이중성으로 축성한 점 등은 동 시기 산성과 구별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축성 이후 조선시대에는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았고[13], 임금 행차가 몇 번 있었으나 행궁에서 유숙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때에 6.25 전쟁김신조 사건으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정문은 대성문이었으나 지형상 문제로 숙종은 대서문으로 행차했으며 영조는 대성문으로 내시 등에 업혀서[14] 들어왔다. 거기에 영조는 나갈 때 당시 소남문이었던 대남문으로 나가버렸다. 임금이 지나간 문을 암문으로 둘 순 없어 문을 크게 만들고 문루를 올려 대남문이 되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이미 반파되어 있던 북문 누각부재를 옮겨서 만들자는 의논이 실록에 남아있다.

3.1. 북한산성 행궁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북한산성 행궁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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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는 길

북한산이 워낙 커 올라가는 길도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남한산성처럼 내부로 버스가 다닌다거나, 차량을 끌고갈 수 있는건 아니기에 성을 둘러보려면 어느정도 고생은 감수해야한다. 정상인 백운대를 가게 되면 항상 위문과 백운대로 연결된 성벽일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구간 성벽이 가장 두껍다. 제대로된 성벽을 둘러보고 싶으면 대동문, 대서문과 같은 각종 성문을 검색해서 가도록 하자.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704번(주말 한정 8772번), 34번원흥역~지축역 구간의 077번 타면 은평뉴타운을 지나 삼천사, 흥국사, 백화사, 북한산성입구, 송추로 갈 수 있는데 전부 북한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목이다.

수도권 지하철 4호선 길음역에서 7211번, 수유역에서 120번, 우이신설선 북한산우이역에서 도보나 택시를 타고, 평창동, 구기동에서 163번, 7211번, 길음역에서 110번 버스를 타고 정릉으로도 올라갈 수 있다.

또한, 수유역에서 1165번이나 강북01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칼바위능선을 거쳐 갈 수 있다.

5. 외부 링크

6. 사적 제162호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우물터·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1]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흥인지문 사이에 있는 그 오간수문이 아니다.[2] 39년 재위 중 유일한 치적이다...[3] 아차산이었다는 주장도 큰 힘을 얻고 있다. 여긴 한강 이남 백제성들과 가까우니까.[4] 사실 저 두사건을 제외하면 남는 기록은 거의 대부분 "삼각산에 왕이 행차했다." "삼각산이 무너졌다." 이다.[5] 이 당시 청에서 해구의 준동이 있으니 대비하란 언질을 바탕으로 급하게 쌓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산성을 쌓은 이유는 병자호란 문서로. 하지만 숙종 당대에도 "남한산성보다 한양과의 거리가 더 멀어서 유기적이지 못하다.", "한양 날아갈 정도면 북한산성이고 뭐고 무슨 소용이냐?"는 식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6] 효명세자 이름으로 불사를 했다고 한다. 매우 의외인데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의 왕세자가 이름만 걸었다고 해도 불사를 후원한 것이다. 이 시기쯤 되면 억불에 대한 자세도 약간 바뀌긴 한다. 영조도 후사를 못보니까 신하들이 불사하라고 했다.[7] 동장대만 복원 됐고 나머지는 그냥 푯말만 꽂혀 있다.[8] 1915년 대홍수로 박살났다. 당시 성공회에 임차해주었는데 내전 하나 남기고 다 떠내려가서 관리인까지 사망했다는 당시 기록이 있다. 터는 발굴 중이라는 푯말과 함께 출입이 금지되었다.[9] 사찰 11개 소, 암자 2개 소.[10] 현대 단위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지 계산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곡식 한 석을 180.39 리터 용량이라 함은 에도시대 일본 기준이고,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이 기준을 받아들였다. 조선에서는 기준 용량을 소곡(小斛)과 대곡(大斛)으로 나누었다. 세종대왕 때 교정된 영조척(營造尺)이 30.8cm라는 설에 따라 환산할 경우, 소곡이 약 85.9리터, 대곡이 114.53리터 정도다. 이에 따르면 소곡으로 10만석은 859만리터, 대곡으로는 114만 5300리터가 된다. 또한 벼 180리터를 도정하면 쌀 144kg이라는 기준에 따라 계산해보면 소곡 10만석은 6872톤, 대곡 10만석은 9122.4톤이 된다. 결국 대략 7-8천톤 정도가 된다.[11] 게다가 평창동에는 이미 선혜청 평창이 있었다. 즉 큰 창고만 두개가 생긴 것, 한강과 제법 거리가 있는 이곳에 창고가 두 개나 들어선 이유는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북한산 사이에 있어 유사시 방어가 용이하고 창의문으로 미곡 출입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한강에선 홍제천을 따라 들어오기 편하고 도성 혼잡을 피할 수 있기도 하다.[12] 돌을 여러 개 쓰지 않고 한 개로 다듬어서 만듦[13] 이 점은 수원화성과 동일하다.[14] 물론 어가를 타고 오다가 올라올 수 없는 구간부터 업혀서 올라왔다. 이러나 저러나 내시들이 무관만큼 튼튼한 것을 보여준 셈이다.